나폴리 환상
박연숙
2023년 4월 25일 새벽에 로마를 떠나 아침 9시경 나폴리에 도착했다. 12년 전에 설렘을 한가득 안고 방문한 이후 두 번째의 나폴리 여행이다. 처음의 환상에 대한 실망 때문에 조금 무덤덤한 마음이다. 나폴리의 산타루치아항은 세계 3대 미항이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큰 기대를 하고 왔었다. 수백 대의 하얀 요트가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며 정박해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만, 항구 자체는 수려하다고 할만 한 풍광이 아니다. 실망이었다.
“뭘 보고 미항이라고 할까? 미항의 기준이 뭐지?”
가이드의 설명은 나폴리 항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아야 타원형 모양의 아름다운 해안선이 눈에 들어오고, 미항임을 깨닫게 된단다. 어쨌든 내 머릿속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폴리는 마약과 범죄를 떠올리게 하는 마피아의 본산이고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의 악명이 떠오른다. 해변의 좁은 길을 따라 난 오밀조밀하게 늘어 서 있는 예쁜 가게들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가이드는 우범지역이라 위험하니 빨리 나가야 한다고 우리 일행을 재촉했다. 약간 겁도 나서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내로 들어와서 그 유명한 나폴리 피자를 먹었다. 토마토와 모짜렐라치즈, 바질을 토핑으로 올린 마르게리타 피자였다. 화덕에 구워주는 따끈따끈한 피자는 토핑이 소박해도 정말 맛이 있었다. 현지인은 라지 사이즈를 1인 1 피자씩 먹는다. 그들의 먹성이 참 놀라웠다. 다른 곳도 여러 군데 보았지만, 첫 번째 나폴리와의 만남은 이 정도가 강렬한 기억이었다.
이번에는 나폴리 중심가를 버스로 구경했다. 이번 가이드 역시 나폴리가 위험 지역임을 강조하며 내려서 볼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쪽으로 유도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낙후된 도시, 쓰레기의 천국, 나폴리 사람을 교양 없는 사람의 대명사쯤으로 악평했다. 차도나 인도 할 것 없이 길거리는 정말 페트병이나 술병이 널려있고 휴지가 풀풀 날아다닌다. 그런데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집집마다 파란 깃발이 두세 개씩 게양되어 있고 앞집, 옆집, 심지어 길 건너 집까지 파란색의 기다란 줄로 거미줄같이 가로 세로로 집을 엮어 놓았다. 가이드가 먼저 이 기이한 풍경을 설명해 주었다. 축구선수 김민재가 소속된 나폴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33년 만에 우승했다고 한다. 김민재는 2023년 시즌 최우수 수비수로 뽑히고 우승의 신화를 일군 주역이 되었다. 이탈리아는 축구 시합이 있을 때는 지역별로 완전히 나누어져 전쟁하듯이 광란한다고 한다. 파랑은 나폴리의 상징색이다. 33년 만의 우승에 축제 분위기로 온 시가지에 파란 줄이 걸리고 먹고 마시고 즐겼다고 한다. 아마도 길거리의 쓰레기는 축제의 산물이 아닌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축구 경기를 보기는 하지만 큰 관심이 없는 나는 그들의 축구 사랑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시간에 쫓긴 가이드는 얼른 소렌토로 이동해야 한다며 버스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 했다. 누오보성도 차 안에서 보았고 여러 명소를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이 후딱후딱 책을 넘기는 것처럼 대충대충 설명하며 차에서 해결했다. 나폴리의 옛 지명은 네아폴리스, 지금의 New Police인데 바뀌어서 나폴리가 되었다고 한다. 나폴리는 웅장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옛 유적도 별로 없다. 이름은 새로운 도시인데 우중충하다. 나지막한 아파트는 낡았고 페인트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시멘트가 떨어져 나가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집도 더러 있지만 탈색된 색감도 그런대로 아름답고 낭만과 운치가 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천정이 노출되고 마감이 되지 않은 짓다가 그만둔 같은 그런 느낌이다. 우리나라는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허물고 부순다. 고난과 가난의 역사를 새것으로 포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남겨서 보존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봉골레 스파게티와 피자로 점심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열심히 돌돌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혀의 즐거움으로 기운을 얻고 소렌토로 출발했다. 처음 여행 때는 기차를 타고 갔었다. 조각상 같은 멋진 남자와 인형같이 예쁜 여자를 구경하며 즐겁게 갔다. 학생들이 질문을 했지만, 지금처럼 번역 앱이 없어서 겨우 코리아에서 왔다는 대답만 한 게 생각이 난다.
나폴리를 벗어나 10 여분을 달려 항구와 시가지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차했다. 거기서 여인의 반달눈썹 같은 해안선이 펼쳐져 있는 산타루치아항을 보았다. 강렬한 남부의 태양 빛에 물결이 반짝거린다. 해안선을 따라 밀려갔다 밀려오며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눈이 부시다. 왜 미항인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한 도시를 겨우 반나절 조금 더 보고 어찌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점만 찍었을 뿐이다. 속살은 보지 못하고 수박 껍질만 핥다 왔다. 그래도 나는 두 번째 방문이라 해안이나 시내의 겉모습은 대충 본 것 같다. 처음 갔을 때도 이제 두 번은 오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다시 왔다. 나폴리의 환상은 깨어졌지만 언젠가는 속속들이 들쳐 보고 싶은 '다시 갈지도'의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박연숙
시내에 나갈 일이 생겼다. 출근 시간을 피해서 지상철을 탔다. 좌석이 많이 비어 있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일반석에 앉았다. 노약자석에 앉기는 나보다 연세가 드신 어른이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 많아서 죄송하다. 나 자신도 아직은 경로석이 어색해서 스스로 노약자임을 부정하며 자리가 비어 있어도 선뜻 앉지 않는다. 지상철이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마음이 조금 복잡하다. 65세 이상은 공짜로 탄다고 지공거사라 부른다. 자리가 많을 때는 일반석에 앉아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두 개 비어 있을 때 앉으려면 하루 종일 바쁘게 사느라 몸도 마음도 지치고 피곤한 젊은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자리를 양보하는 예의 바른 젊은이가 더 많지만 아주 가끔 '노인네가 차비도 내지 않으면서 왜 내 자리를 노리지. 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기분이 정말 싫어서 복잡한 시간에는 좌석 쪽으로 가지 않고 출입문 반대쪽이나 차간 연결 통로에 서서 간다. 또 웬만하면 좌석버스를 탄다. 이런 나를 남편은 유별나다고 한다.
오늘날 경제 대국의 마중물과 밑거름 역할을 한 65세 이상의 노인이 지하철 공짜로 타는 대접 정도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으니 당당하게 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틀리는 말은 아니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문이 열리기 무섭게 자리 선점을 위해 앞사람을 비집고 뛰어드는 노인들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앉아있는 학생 앞에 바짝 붙어 서서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양보하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는 이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소수의 젊은이는 고분고분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휙 한 번 쳐다보곤 무시하고 휴대폰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자리를 양보하면 당연하다는 듯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앉는 어른답지 않은 어른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임신부 배려석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남자가 앉으면 보기가 민망하고 여자가 앉으면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면 되지만 아직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다. 임산부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놓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는 것은 나의 융통성 없는 생각일까?
그런데 살다 보면 정말 간절하게 앉고 싶은 날도 있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시술을 하는 날이다. 3호선을 타고 가다가 1호선으로 환승을 해서 세 정거장을 지나면 내리자마자 바로 병원이다. 자차를 이용하자니 주차장이 없고 택시를 타기에는 너무 장거리이다. 버스 노선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지상철과 지하철을 이용한다. 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통증으로 식은땀이 나고 입이 바짝 마른다. 참고 서 있다가 환승역에서는 자리가 많이 비기에 얼른 한 자리 차지하고 앉는다. 나이들면 마음과 다르게 몸이 따라주지 않음을 절실히 느끼며 서서 가는 것이 힘든 분도 있다는 걸 이해한다.
며칠 전 안과에 가려고 지상철을 이용했다. 카드를 찍는데
“어르신, 건강하세요.”
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랐다. 감사함은 간 곳 없고 자존심이 상했다. 안 그래도 미안한데 공짜 손님이라고 온 동네에 광고하는 걸까? 며칠 후에 무임승차 족을 잡기 위한 시도라고 신문 기사에서 읽었다. 노인들의 부정적 여론으로 곧 철회했단다. 이건 덕담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일이다. 한때 대구는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을 65세에서 70세로 올리고 대신 시내버스까지 공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시장의 말로 시끄러웠다. 벌써 혜택을 받는 많은 이들에겐 화가 나는 정책이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내년에 베이비부머의 상징인 58년생 개띠가 65세에 들어서면서 1000만 실버 시대가 된다고 한다.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년층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늙어가고 나라가 늙어간다. 젊은 세대에겐 노인 부양으로 늘어나는 세금이 큰 부담이고 노인 역시 늘어난 수명으로 노후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형편이 어려운 분은 지금처럼 65세 이상에 혜택을 드리고 웬만하면 100세 시대에 70세로 조정을 해서 떳떳하게 차비를 내고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앉아서 가고 싶다. 그리고 70세가 되면 온전하게 지상철, 지하철, 시내버스 모두의 혜택을 누리면 좋겠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나는 오늘도 노약자석과 일반석의 경계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서성거린다.
첫댓글 노인이 되면 당당하셔야 합니다. 나이든 것이 무슨 잘못도 아닌데... 젊음이 지나면 늙음이 옵니다. 늘 건강히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