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강화도와 관련한 삼별초 항쟁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시기를 건너뛰어 근세 조선시대의 교동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교동도의 역사
교동도의 역사는 이미 고대 때부터 시작된 듯합니다.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마한의 국가 중 하나인 소석삭국이 교동도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열국시대(삼국시대) 때 원래 교동도의 지명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대운도(戴雲島) 또는 고림(高林),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불렸으나, 고구려가 강화도를 차지한 후로는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북국시대에 남국 신라가 강화도를 차지하고 나서 경덕왕 대에 교동현으로 개칭했습니다. 이렇게 개칭된 이 지명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지요. 고려시대에는 교동도가 수도 개경과 가까워, 국제교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한강과 임진강 하구가 만나는 지점을 내려다보며 제어하는[감제(瞰制)] 요충지여서 항상 정예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지요.
이러한 교동도는 고려시대 제1수도인 개경과 가까워 감시가 용이한 점 때문에 국왕과 왕족의 유배지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앞의 글에서 언급한 석릉의 주인 고려 희종의 경우도 교동도에 귀양 왔던 바가 있지요. 결국 고려 희종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서거했습니다. 참고로 정사는 불상을 모시고 불도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집이지요.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고려시대부터 그러했듯이 조선의 경우도 교동도가 수도인 한양과 가까워 강화도와 함께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되었지요. 대표적으로 연산군, 광해군이 있으며 연산군은 아예 여기서 죽었습니다. 고려와 비슷하게 교동도는 조선시대에도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되어 경기수영 예하 함선과 병력이 항시 주둔하고 있었지요.
② 유배지로서의 교동도
보통 근세시대에 조선이 택한 형벌은 태, 장, 도, 유, 사의 5형으로 구분합니다. 태(笞)는 싸리 회초리, 장(杖)은 큰 가시나무 막대기로 볼기를 치는 형이지요. 도(徒)는 장형과 징역을 겸하고 유(流)는 장형과 함께 원악지로 쫓는 형벌입니다. 여기서 원악지(遠惡地)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살기가 어려운 곳을 말하지요.
마지막으로 사(死)는 사형입니다. 여기에는 말하기도 끔찍하지만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 목을 베어버리는 참형이 있지요. 이 다섯 형은 전통적인 중국 대명률에 따른 형벌입니다. 대명률(大明律)은 중국 명나라의 형법전(刑法典)이지요. 형법전은 무엇이 범죄이고, 그 범죄에 어떠한 형벌을 지울 것인지 규정한 법률을 적어 둔 법전을 말합니다.
조선의 다섯 가지 형벌 가운데 교동도와 연관성을 찾아본다면 당연히 유형(流刑)입니다. 교동도가 여러 인물들의 유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강화도는 주로 유학의 주류에서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비주류가 된 이들의 고민이 심어져 있는 곳입니다. 반면 교동도는 전적으로 왕족, 심지어는 쫓겨난 국왕들의 유배지가 된 곳이지요.
유배지로서 교동도에 오게 된 인물로는 앞에서 말했던 고려 희종이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형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된 후 교동도에서 죽음을 맞이했지요. 이후에는 임해군과 광해군이 교동도로 유배를 오게 되었습니다. 임해군은 당연히 왕족으로써 왔지만 광해군은 ‘폐주’로서 오게 되었지요.
임해군은 광해왕(현직시절)의 형으로 광해왕에 의해 교동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형 임해군을 교동도로 유배 보낸 광해왕 자신도 이른바 인조반정 후에는 이곳 교동으로 유배를 왔습니다. 이때는 이미 ‘광해군’이 된 상태였지요. 인조의 형제이자 광해왕의 조카뻘인 능창군도 광해왕에 의해 이곳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③ 폐주가 되어 교동도에 온 연산군과 광해군
조선왕계를 살펴보면 사후에 묘호를 받지 못한 국왕이 두 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 인물들이지요. 20세기 때 이 두 임금에 대한 평가는 ‘태어나서는 안 될 폭군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서는 이 두 임금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다양해졌지요. 이들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말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을 ‘단선적으로’ 폭군이라 말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대체적인 평가는 이들이 ‘암군’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들이 선조나 인조급의 암군으로 평가받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선조의 경우는 인성은 그만두더라도 정치 기술적인 면에서는 나름 능력을 인정받기는 하지만요.
그야 어떻든 이 두 임금은 강화도, 교동도와의 인연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먼저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군 교동면에 유배되었지요. 연산군은 이곳에 유배된 지 2달 만에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흔적을 정확하게 찾기가 쉽지 않지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봉소리 신골에 있는 호두포 대숲, 고구리의 연산골이 대표 후보지입니다.
광해왕이었던 광해군도 비슷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붙잡힌 광해군은 곧장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해 부인,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었지요. 여기서 ‘두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한 인생(정확하게는 말년)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이 때로 흥미를 끌기도 합니다. 사람에 따라 30대 젊은 나이로 교동도에서 숨을 거둔 연산군을 더 불행한 왕으로 보기도 하지요.
혹은 예순여섯 천수를 누리기는 했으나 굴욕을 많이 맛보아야 했던 광해군이 훨씬 불행한 인생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참고로 광해군 유배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270번지라고 하지요.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광해군은 교동도와 강화도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중에서도 강화도 정포(井浦)에서 오래 살았지요.
지금의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일대였던 정포는 당시 수군 기지인 정포진영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그 기지 내의 한 집에서 위리안치되었던 모양이고요. 광해군이 교동도에서 제주도로 귀양살이하는 곳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 그를 태운 배는 사방이 휘장이 쳐져 있어 행선지를 알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의 강화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