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아브라함계 종교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구약성경
개신교
가톨릭
기독교(基督敎, 영어: Christianity) 또는 그리스도교, 크리스트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바탕을 둔 아브라함계 유일신교이며, 세계 인구의 1/3이 신자인 세계 최대의 종교이다.
기독교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려 이 세상에 온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예수의 행적은 신약성경 중에서도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는 많은 종파가 있는데 "정통"으로 불리는 주류 기독교회는 크게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를 포함하는 서방 기독교와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을 포함하는 동방 기독교로 나뉜다. 모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경전으로 삼고,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기준으로 삼는 보편공의회 교리를 따른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를 기준으로 보편교회로 일컫는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 등의 칼케돈파, 오리엔트 정교회로 대표되는 비칼케돈파로 분류할 수 있다.
공의회 교리에 따라서 종파마다 구원론, 교회론, 그리스도론 등과 교회 제도에 대한 해석 차이가 있다. 주류 기독교 종파들은 삼위일체론과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치다가 수난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아 죽음으로써 인류를 죄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죽음으로부터 부활했고, 후에 재림하여 하느님의 왕국을 세울 것이라 믿는다.
기독교는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 지방의 유대교 종파로 출발했다. 예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처형된 이후 열두 제자(사도)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시리아, 레반트, 유럽,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남캅카스, 이집트, 에티오피아로 뻗어나갔다. 머지않아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대인이 아니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방인)을 끌어모았고, 그 결과 유대인의 관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유대교의 성전이 무너진 뒤부터 기독교는 서서히 유대교와 갈라지기 시작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7년 죽기 전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범죄가 되지 않도록 했고, 325년에는 초기 기독교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380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바탕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역사학자인 조시무스는 로마의 쇠퇴와 패배가 그들이 전통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도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저술하여 기독교가 로마 쇠퇴의 원인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초기에 기독교는 하나의 보편교회로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에 관한 견해 차이 때문에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 이후 현재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이 속한 네스토리우스파가 분리되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는 오리엔트 정교회로 불리는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등이 분리되었다.
1054년에는 성령론과 교황 문제 등 다양한 교회 내 갈등으로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졌다. 이후 16세기 서방교회에서 종교 개혁 과정에서 신학과 교회론 논쟁을 거쳐, 서방교회는 기존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 등의 개신교회들로 분열되고, 그 후로도 시대적 경과에 따라 장로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재림교회, 구세군,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 형성되어 다양한 교파들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몰몬교, 여호와의증인 등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신흥 교파들이 존재하나, 주류 교파들에게는 대체로 이단 및 이교로 취급된다. 기독교는 (특히 고대 후기부터 중세까지) 서양 문명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5 ~ 17세기 대항해시대에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통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개요'기독'의 어원
'기독교'의 '기독'(基督)은 16세기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의 번역어로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의 중국어 음역인 '기리사독'(基利斯督)의 줄임말로 '기리사독'은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 '지리쓰두'이지만, 구개음화하기 전의 옛 발음은 '기리스도'에 가깝다. 청나라 때에 '기'가 '지'로 전반적으로 구개음화하는 변화가 있었는데, 만주족 발음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예. 시바 료타로(일본어: 司馬遼太郎)의 주장)이 있다.
그리스도교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에서 유래하였고, 신약성경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예수 그리스도는 한국어로는 '예수 구세주' 또는 '예수 구원자'의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에서 유래한 단어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공식 석상에서 기름을 머리에 붓는 행위는 중동지역에서 직위를 수임받을 때 널리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왕이나 제사장들이 기름 부음을 받은 이들이었다. 세상을 구원할 왕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어로는 '예슈아 하마시아흐'이고, 그리스어 표기는 '이에수스 크리스토스'이고 한국어로는 예수 그리스도다. 히브리어는 이미 1세기경인 예수 시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사어(死語)가 되었고,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은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다. 그리스어 '이에수스'는 히브리어 '예슈아'에 유래한 아람어 '예슈'를 그리스어식으로 표기한 이름으로 1세기 당시에 팔레스타인에서 통용된 이름이었다.
그리스어 '이에수스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예슈아 하마시아흐'를 번역한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아람어인 '예슈 므시하'의 번역이다. '크리스토스'는 므시하(메시아)에서 전래되어 그리스어로 번역한 단어이다. 예슈는 '야훼의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고 므시하는 '기름을 붓다, 바르다'의 의미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가 세워질 때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구원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세기 당시 예수는 사어가 되었던 히브리어인 예슈아라는 이름보다는 지배층의 언어인 그리스어식 '이에수스'나 평민들의 언어인 아람어식 '예슈'로 불리었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지칭하는 '히브리인들의 말' 또는 '유대인들의 말'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이다.
기독교 교회의 명칭
'기독교'(그리스도교)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Protestant)만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되나, '기독교'의 실제 의미는 주요 분파인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회 등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교단체를 두루 뜻한다.
기독교 인구
전 세계에 기독교 인구는 약 24억 명으로 추산되며, 실질적으로 세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이다. 한국에서 또한 2015년 통계청 발표에 의거 한국 기독교 인구는 19.7%이며, 1985~2018년까지의 기독교 인구의 추이는 "비디오 - 유튜브" 와 같다.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고대 기독교
고대의 기독교 전파지역
325년
600년
초기 기독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초기 기독교는 예수가 팔레스타인지역에서 활동하였다는 때와 그의 십자가 처형 이후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동서교회의 분열 이전까지의 기독교를 말한다. 초기 기독교는 베드로, 파울로스와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지만 특정한 조직이나, 교리, 건물 등이 없었고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으며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지역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었고,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를 것을 교훈하였으며 배교자 혹은 부도덕한 신자에 대해서는 경고하거나 제명해야 됨을 각 회중들에 권고하고 편지한 내용 그리고 교리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 연로자들의 회의가 소집된 일, 또한 요한에 의해 기록된 요한의 묵시록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교리 일치 여부와 역사, 행위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 등 신약 성경의 정립 과정을 보면, 이미 기원 1세기에 매우 체계화된 조직과 교리가 형성되었으며 완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외적으로는 로마제국 곳곳에서 유대인들의 박해와 64년부터 시작된 로마제국의 여러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더 체계적으로 결속해지면서 3세기경에는 로마제국을 거의 다 장악하였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
보편교회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였으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 로(
)를 그린 후 전투에 승리하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316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예수를 반신적 존재,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존재로 본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일곱 공의회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첫 일곱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중요 신학적인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교였는데, 이것은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교회신학적 배경과 교리, 교회 조직과 예식 등을 정비하였음을 보여준다.
보편교회 시기 기독교의 분화
콥트 교회, 아리우스파 및 네스토리우스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초기 일곱 번의 공의회 과정을 통해 보편교회주의(공교회주의)가 만들어짐에 따라 이들과는 다른 신학을 가져 이단으로 배척된 교파들은 분화되어 서로 독자적인 전파와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된 이후에도, 칼케돈 공의회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공인하자 단성설을 주창한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보편교회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였고, 689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자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선교를 통하여 당나라까지 기독교를 전파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서유럽 지역 기독교의 전파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동상
중세 초기 서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동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기원후 423년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고 하며, 5세기 후반에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서유럽 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보편교회로 개종하였고, 잉글랜드에는 600년 경 켈트족의 기독교 전파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보편교회의 지역교회인 로마교회는 598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였다.
820년대에서 830년대 초,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 사업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 무렵이다. 보편교회의 동로마지역 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대모라바 왕국 등의 동유럽 국가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선교를 위해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의 내용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이 문자가 키릴 문자의 기원이다.
교회의 대분열
이 부분의 본문은 교회의 대분열입니다.
보편교회 시기의 시작인 4세기, 로마제국의 천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4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고, 서로마제국이 멸망으로 자연스레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1세기까지 기독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로마,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의 5개 지역의 연합체였다. 하지만 서로마제국 지역의 왕권 강화와 7세기 이후 동로마제국에 대한 이슬람의 침략, 로마지역 교회의 독립적 활동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중심의 연합체와 로마교회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분열의 기점으로 로마제국의 교회 중심 대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대주교(대감독)와 로마 교회 대주교 간의 상호 파문 사건이 일어났다. 동서 로마 지역의 교회 대립 이후,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당시 로마교회의 제4차 십자군이 기독교 지역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로마제국 연합교회의 네 지역 교회와 로마지역교회의 완전한 단절을 낳은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1960년대 동방 정교회가 13세기 서방교회의 십자군이 교황의 명령에 따라 침략한 사건을 용서한 발표 이후, 약 40년만인 2002년 1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이 1204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정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를 점령함으로써 동방정교회와의 관계를 완전 단절시킨 것을 공식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