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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절두산 성지
1. 양화진은어떤곳이었나
양화진은 한강도, 노량도, 삼랑도와 함께 한강의 주요 나루로서 이곳을 건너면 양천-부평을 거쳐 인천으로 이어지는 길과 양천-김포를 경유하여 강화로 통하는 길이 이어진다. 특히 양화진은 서울에서 강화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 피난로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조선 시대 내내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조선 정부는 초기부터 나루 관리를 담당하는 도승을 두고 진선을 배치하여 나루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만전을 기하려 하였다.
▶통행의 길목
한강의 5대 나루로서 정비된 양화진은 단지 강을 건네주는 나루였을 뿐 아니라 루였을타고 강화, 배천 등지로 갈 수 있는 교통의 기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중종 때의 사례를 보면, 양화진에서는 배 한 척에 행인 1백여 명이 승선하고 나루를 건너기도 하였다. 황해도 지방으로 가려는 일부 사람들은 걸어서 가는 불편을 피하려고 양화진에서 루였을타고 떠나기도 하였고, 황해도 쪽에서 서울로 진입하려는 사람들도 배편으로 거슬러 와서 이곳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조선 후기 간선 도로 제9로의 노선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노선 상선에 일찍부터 양천, 김포, 강화, 부평, 인천 고양, 양주, 한양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발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각 지역의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분주하게 오갔다. 더구나 이곳은 결절지(結節地)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대륙에서 남으로 진출하고자 하면 압록강, 대동강을 건너 개성을 지나 장단, 파주였을거쳐 일이 방면, 또에 벽제 방면으로 나누어져 이곳에 이 북에서몽고의 침입이 그러했고 후금의 침입이 그러했다. 한편 남에서도 북으로 진출하고자 하면 부산, 목포 쪽에서 각기 대구, 전주를 지나 대전쪽으로 향하는 경우에는 천안, 수원을 지나 이곳을 통해 북진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으니 임진왜란 때 왜군이 그러하였다. 이렇듯 양화진은 통행의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검문소이며 운송 기지
양화진은 검문소로서도 그 역할이 막중하였다. 특히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변란이 자주 일어났으므로 위정자들은 반역자나 범죄자 등 위험 인물을 단속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는데, 나루를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는 이런 우범자들도 끼여 있었다. 법을 어기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그 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루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화진 인근에는 그러한 운송선을 점검하는 점검청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한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진입하려는 배들은 행주 염창항 부근에 있던 험한 여울 때문에도 양화진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염창항 부근에는 19세기에 들어 갈대가 우거지고 모래가 쌓여 큰 배가 잘 다니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양화진의 책임자는 그들 선박을 안내할 의무도 있었다.
▶뱃놀이의 명소
양화진은 한강의 여러 나루 중에서도 그 주변 경관이 특히 빼어나 뱃놀이의 명소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산악 지대에서 굽이굽이 흘러 온 한강은 송파진, 두모포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물살이 거칠었지만 용산, 마포를 지나면 유속이 완만할 뿐 아니라 수심도 깊지 않아 강물이 맑고 깨끗해서 뱃놀이나 고기잡이를 하기에 좋았다. 더욱이 북쪽 언덕에 있는 잠두봉의 소나무와 남쪽 나루터 옆에 우뚝한 선유봉은 서로 마주보며 절경을 이루고 있어서 숱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 인근 망원동에는 세종 7년 효령대군이 별장을 마련하고 정자를 지어 풍류를 즐겼고, 성종 때는 월산대군이 자주 여기에 머물면서 문신들과 시회를 열기도 했다.
▶처형·제사·진휼 하던 곳
양화진은 때때로 특별한 장소로도 활용되어 처형장 또는 제향의 장소, 흉년 때 백성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누어주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 왕조의 위정자들은 죄인의 잘못을 널리 알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할 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을 처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장터가 처형 장소로 자주 활용되었는데, 칠패 난전이 있던 남대문 밖 염천교, 경강상인의 근거지였던 용산의 새남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장날에 사람들이 잔뜩 모인 가운데 죄인의 목을 잘라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양화진 역시 그러한 의미에서 처형장이 되었다. 나루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으며 배를 기다리느라고 머무는 사람들이 많아 항상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명종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 일파가 크게 숙청되었는데, 그 우두머리 윤임을 양화진에서 효수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영조 때는 금주법을 어긴 죄인이 노량진 나루터에서 효수된 바 있다. 근대에 이르러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일본, 중국 등지로 망명하다가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를 양화진에서 다시 효수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앞서 병인박해 때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잠두봉 아래에서 처형되는 바람에 지명까지 절두산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병선의 훈련장
양화진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곳이 병선의 훈련장이었다는 점이다.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해양을 어떻게 방어할지에 대해 고심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해서 조운을 못하게 되자 국가 재정이 위태로워졌을 뿐 아니라 민심이 흉흉해지고 정세가 몹시 불안해지는 바람에 결국 고려 왕조가 쇠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 정권을 잡은 조선 왕조로서는 왜구를 조속하게 진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에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초부터 수군을 정비새로 병선을 증강시키는 데 힘썼다. 이러한 태조의 정책은 태종, 세종, 문종에 그대로 이어져 일정하게 수군이 정비되고, 상당수의 병선이 건조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의 수군은 5만여 명에 이르렀고, 병선은 8백여 척이나 되었다.
▶군사 진영이 되다
사람들이 오가는 통행의 길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나루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차츰 군사 기지로서 주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중인 선조 30년(1597년) 9월에 대사성 김우옹은 한양은 넓고 커서 방어하기가 곤란하므로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고 여러 나루를 방어의 거점으로 해서 일본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조선에 다시 침입한 왜군이 전투에서 패하여 물러나는 바람에 이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2. 양화진 개시장(開市場)으로주목받다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난 뒤 1876년 2월, 조선은 일본과 병자수호조약, 흔히 강화도조약이라고 불리는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하였다. 개항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전통 사회 전반에 여러 가지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그 이전과는 달리 외국인들 주로 상인이나 선교사들이 국내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양화진은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던 곳이었다. 양화진은 이미 병인박해(1866년) 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곳이었고,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때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서 개항 이후에도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양화진은 인천에서 배로 서울에 들어오는 경인 수운의 종점으로서, 인천의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개시장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인천으로부터 100리가 되는 지역 안에 서울 도성이 포함되므로 일본은 자기 나라 상인들이 도성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세력을 서울까지 뻗치기 위해 도성의 초입에 있는 양화진을 개시장으로 설치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직후인 10월, 톈진에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에도 제4조에 한성과 양화진에서 개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청나라와 맺은 조약에서 양화진을 개시할 수 있다고 규정한 이후 조선은 서구 열강들과 맺은 조약문에도 “한양의 경성과 양화진 또는 그 부근의 편리한 다른 장소”를 개시장으로 개방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영국·독일(1883년)·이탈리아·러시아(1884년)·프랑스(1886년)·오스트리아(1892년)·벨기에(1901년)·덴마크(1902년)에 이르기까지 조약 제4조에는 개시장의 하나로 반드시 양화진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일본은 양화진보다 마포 쪽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외교 통상을 담당하고 있던 묄렌도르프의 지적을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일본이 조사한 결과 마포가 양화진보다 개시장으로 더 나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마포는 거주지를 찾기가 다소 어려울 뿐, 포구에 크고 작은 배들이 많고 도로도 양화진보다 넓으며 번창한 시가를 이루고 있었다. 개시장으로 양화진을 포기할 생각을 하자 일본은 개시장의 대상지로 마포와 더불어 용산을 떠올렸으며, 즉시 이 두 지역에 대한 조사와 측량을 진행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은 양화진·마포·용산 가운데 개시장을 설치하는 문제를 주한 외교 사절들과 협의하였다.
1884년 6월 4일 일본·미국·영국·청나라 대표들이 조선 정부의 대표와 함께 양화진·마포·용산을 직접 답사한 결과 용산을 개시장으로 결정하였고, 정부에서도 10월 6일 그렇게 확정지었다. 이로써 양화진에 개시장을 설치하는 문제는 일단락되었는데, 용산이 양화진보다 도성에 가까워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상업 활동을 하는 데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일은 조선에서 개시장을 설치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열강을 내세워 그들의 주장을 관철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외국과 체결된 조약에서 관행적으로 “한양의 경성과 양화진 또는 그 부근의 편리한 다른 장소”를 개시장으로 개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곤 하였다.
3. 양화나루 잠두봉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서울 楊花나루와 蠶頭峰 遺蹟)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에 있는 사적 제399호로 지정된 양화나루와 잠두봉 일원을 말한다. 한강의 이 지역의 교량으로는 서북쪽에 길이가 약 1.2km인 양화대교, 동남쪽에 역시 약 1.2km 짜리 당산철교가 서로 약 400m 간격으로 놓여있다.
양화나루 또는 양화진(楊花津)은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잠두봉
절두산 천주교 성지(切頭山天主敎聖地) 또는 잠두봉(蠶頭峰)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일대의 한강변에 있는 천주교 순교 사적지이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 곳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楊花津)까지 올라왔다가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이 양화나루 옆의 봉우리인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여 1만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19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다.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최양업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또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4. 신자들을 양화진에서 처형하다 (절두산)
병인양요로 박해가 심해졌던 1866년 10월 23일(음력 9월 15일)부터는 천주교 신자들을 새남터나 서소문 밖이 아니라 절두산에서 주로 처형하였다.
10월 23일에는 이의송(여정, 프란치스코)·이붕익(천조, 베드로)·이의송의 처 김이쁜(마리아)·감한여(베드로)·최경원(야고보), 10월 25일(음력 9월 17일)에는 김중은(베드로)과 박영래, 11월 11일(음력 10월 5일)에는 김진구(재구, 순칠, 안드레아)·최수(서방, 베드로)·김인길(요셉)·김진(베드로), 11월 16일(음력 10월 10일)에는 강명흠(베드로)·황기원(안드레아)·이기주(바오로)·김진의 처 김큰아기(마리아), 11월 20일(음력 10월 14일)에는 이용래(아우구스티노)·원후정·박성운(바오로), 11월 24일(음력 10월 18일)에는 성연순(전순)·원윤철(사도 요한 또는 베드로)이 각각 절두산에서 효수형을 당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박내호(사도 요한)와 유 바오로(또는 마오로)도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하였고, 1867년 음력 8월 2일에는 강 요한과 조 타대오가 이름을 모르는 5명과 함께 절두산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절두산에서 처형이 이루어지고 있던 동안에는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 신자들의 처형이 행해지지 않았다. 당시 참수를 받은 신자들은 모두 절두산에서 처형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1866년 10월 23일부터 신자들의 처형지를 갑자기 절두산으로 옮긴 것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맞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9월에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10월에 다시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제로도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함대의 침략을 도왔고,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최선일·최인서· 심순녀 등 3명의 신자들이 물길 안내인으로 고용되어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거슬러 오는 것을 도왔다. 그뿐 아니라 장치선, 송운오, 이성의, 이성집, 박복여, 김계소 등의 신자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몰래 프랑스 함대로 찾아가 천주교 박해 상황과 조선의 군사들이 전등사로 대거 집결한다는 군사 정보를 알려 주기도 하였다.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심문하면서 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 함대가 침략해 올 수 있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묻고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프랑스 함대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원군을 비롯한 당국자들이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기면서 포고한 글에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절두산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일은 병인박해 기간 내내 계속되지 않았다. 1867년 음력 8월 2일 이후의 기록에서는 절두산에서 참수당한 신자들의 예를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아울러 1868년 윤 4월 7(음력)일부터는 다시 서소문 밖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은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병인양요로박해가 심해지다 절두산
이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10월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감영이나 진영이 있는 곳에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포졸들이 배교자를 앞세워 각처의 교우촌을 약탈하거나 유린하였다. 이처럼 박해가 확대된 데에는 서양 선박이 조선에 들어온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첫번째 사건은 1866년 4월과 8월에 유대계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하려다가 좌절된 일이었다. 특히 오페르트는 두 번째로 들어왔을 때 아산만 상륙이 좌절되자 강화도까지 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6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 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한 적이 있었고, 9월 2일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감사 박규수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불타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9월 12일자로 예문관 제학 신석희가 지은 <병인 척사 윤음>을 조야에 반포하였다. 세 번째 사건은 바로 프랑스 함대가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범한 ‘병인양요’였다.
이 중에서도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직접 조선 해안을 위협하고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사건으로, 위정자에게 서양 세력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천주교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에 앞서 중국으로 피신한 리델 신부는 그곳에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조선에서 선교사가 학살된 소식을 전하여 보복을 결심하도록 하였다.
로즈는 조선에 원정하기 위해 9월 18일 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최인서·심순여 등 세 명의 조선 신자를 안내인으로 삼아 세 척의 군함으로 체푸를 출발하였으며, 9월 26일에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갔다가 체푸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병인양요인데, 이때에는 조선의 상황을 정찰하려고 돌아본 것이었다. 제2차 병인양요는 10월 11일 로즈가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10월 14일에 강화도 갑곶진을 거쳐 이튿날 강화읍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프랑스 병사들은 강화도에 있던 은괴와 많은 서적·물품들을 빼앗아갔으며, 로즈는 선교사를 처벌한 사람들을 문책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10월 26일과 11월 9일에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벌인 싸움에서 조선군에게 패하고 11월 21일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더 극심해졌다. 조정에서는 우선 11월 21일에 천주교 신자들을 남김없이 찾아내도록 전국에 명하였으며,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앞으로는 천주교 신자를 잡으면 먼저 처형한 후에 보고하라는 선참후계의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6. 순교자들의 믿음 절두산 순교자 약전
기록으로 확인되는 절두산 처형자 29명 가운데 5명은 이름조차 밝혀져 있지 않고, 최경원과 박영래는 이름만 겨우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이는 모두 22명이다. 이 22명 가운데 최수·김인길·김진·원후정·성연순은 심문 과정에서 배교하였다.
즉, 최수는 1856년에 천주교를 학습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배교하였다고 진술하였고, 김인길은 1865년 음력 12월에 세례를 받은 이래 계속 학습하다가 1866년 음력 2월 병인박해 때 체포될 것을 겁내 배교하였다고 밝혔으며, 김진도 천주교를 배운 지 3년이 못되어 배교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원후정도 천주교를 식충에 비유하여 배교하였으며, 성연순도 천주교에 대해 여러 해 동안 익숙하게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눈으로 책을 보지도 않았으며, 입으로 강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19명은 용덕을 발휘하여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하였다.
1). 김한여 베드로: 김한여는 서울 양사동(낙산)에서 살았고, 비단짜는 일로 유명하여 궁궐에 드나들며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기해박해(1839) 때 체포된 그는,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배교하고 석방된 후 오랫동안 신앙과 멀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신앙을 되찾으려는 생각이 있었고, 그 결과 회개하고 주교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았다. 이후 김한여는 사람들을 가르쳐 입교시키거나, 자신의 집에 공소를 예비하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발생했고, 김한여도 1866년 9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신문 중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자백했으며, 그로 인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사형 집행을 위해 양화진으로 끌려갔는데, 가는 도중 목이 말라 술 한 잔을 청하였다. 이에 호송하던 포교가 “죽으면 다시는 술을 못 먹겠다.”고 하자, “천당에 가서 천일주를 먹을 것이다.”라며 기쁜 낯으로 형장으로 가, 1866년 9월 15일 최경원(야고보)와 함께 대략 60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2). 이의송 프란치스코: 이의송(혹 이여정)은 황해도 신천의 양반으로, 여정은 그의 자(字)이다. 그는 의안대군(태조의 8자)의 후손이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신천에서 종기 의원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사망하면서 몇 년 후 과부 김 마리아를 후처로 얻었고, 이후 배천[白川]으로 이사하였다가 1857년에 다시 서울로 옮겨 차동에 거주하였다.
상경한 지 2년 후인 1859년, 이의송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을 만나 천주교를 배우게 되었고, 1862년에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부인과 자식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베르뇌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후 이의송은 책자와 묵주, 십자패 등을 사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자주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신자들이 성사를 받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교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특히 이덕보(李德甫, 마태오)와 함께 황해도 지역을 순회하며 12개 이상의 고을에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얼마 동안 형의 집에서 살았던 이의송은, 병인박해가 심해지면서 1866년 9월 8일 가족을 데리고 시흥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사돈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형을 신문하여 이의송의 거처를 알아냈고, 결국 이의송은 부인 김 마리아, 아들 이붕익(李鵬翼, 즉 이천조 베드로)과 함께 봉천에서 체포되었다.
우포도청으로 끌려온 이의송은 신문 중에 ‘오랫동안 천주교를 힘써 공부했기 때문에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아내와 아들에게도 ‘정신을 수습하여 실수하지 말라’며 여러 번 당부하였다. 그 결과 이의송은 그의 처자와 함께 1866년 9월 16일 양화진에서 46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3). 김중은: 서울 낙산 근처에서 살며 상의원 소속의 비단을 짜던 장인인 능라장의 우두머리로 생활한 김중은은 18세 때 부친에게 배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하고 풀려났으나 1863년 음력 4월부터 다시 교회로 돌아와 베르뇌 주교에게 고해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으나 이번에는 혹독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교우들을 고발하지 않았으며, 비록 매를 맞아 죽더라도 절대로 배교할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 결과 그는 1866년 음력 9월 17일 효수형을 받아 5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4). 김진구: 서울 성 안쪽의 남대문 앞에 살며 선혜청 사령을 지낸 김진구는 1846년 음력 9월에 훈장 정의배의 주선으로 페레올 주교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교리를 배워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49년 음력 3월에 견진성사를 받았으며, 베르뇌 주교가 머물고 있는 홍봉주 집에서 매년 한 차례 고해성사를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자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으며, 이미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외에는 고발할 선교사가 없다고 진술하였고, 천주교는 여러 해 동안 힘써 공부해 왔기 때문에 배교할 수 없으니 속히 죽기를 원할 뿐이라고 대답한 뒤 1866년 음력 10월 5일 효수형을 받아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5). 김큰아기: 김진의 처인 김큰아기는 평양에 사는 유성률 집에서 천주교를 배우다가 1863년에 남편을 따라 상경하여 청석동에서 살며 천주교를 학습하여 1864년 음력 9월 최형 집에서 베르뇌 주교에게 마리아라는 세레명으로 세례를 받은 뒤 계속 힘써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김진과 함께 안주로 내려갔다가 남편이 붙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자수하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는 자신이 구하는 것이 없고, 또한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함께 죽임을 당해 한결같이 천주의 가르침에 따라 천당에 가고 싶으며,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진술한 뒤 1866년 음력 10월 11일 효수형을 받아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6). 강명흠: 서천 황석두 집에서 서양 의학서를 빌려다 본 것을 계기로 하여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강명흠은 뒤에 신창현 북면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즉, 1862년 12월 이덕경의 지도로 교리를 배워 다블뤼 주교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이덕경의 주선으로 서양 신부의 복사 일을 맡아 보면서 매년 은 10냥을 받았고, 1865년 봄에는 이덕경의 집에서 브르트니에르 신부와 칼레 신부를 만나기도 하였다. 병인박해로 1866년 2월에 붙잡혀 홍주와 공주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도 처음에는 배교하였으나 두 번째 심문을 받을 때는 자신이 세례를 받은 사실과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한 사실 등을 순순히 자백하였으며, 더 이상 천주교를 배척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1866년 음력 10월 11일 효수형을 받아 5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7). 이기주 바오로: 이기주는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다가 1862년에 조학영(趙學英)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1851년경에 정의배(丁義培, 마르코)에게 천주교를 배운 뒤 대세(代洗)와 세례명을 받았으며, 얼마 뒤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이기주는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1866년 10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신문 중에 “15년 동안 믿어왔기 때문에, 죽더라도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 결과 1866년 10월 10일 강명흠(姜命欽, 베드로) ․ 황기원(黃基元, 안드레아) 등과 함께 28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8). 황기원: 황석두의 조카인 황기원은 20세 후에 서천 산막동에 있는 황석두 집에서 교리를 배워 서울 남문 안 홍봉주 집에 머물고 있는 베르뇌 주교에게서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여러 해 동안 그의 집에 머물고 있는 페롱 신부의 복사 일을 하였으며, 다블뤼 주교와 프티니콜라·죠안노·랑드르 등 여러 신부들을 두루 만나보았다. 1866년 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페롱 신부를 피신시킨 뒤 가족들을 데리고 일을 마무리하다가 체포되어 홍주를 거쳐 공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부친도 붙잡혀 왔다. 그가 배교하면 부친과 함께 석방하겠다는 관장의 말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말았다. 그는 배교하고 풀려난 것을 날마다 절절하게 뉘우치면서 다시 체포되면 남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하곤 하다가 1866년 음력 10월에 다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처음에는 배교한 뒤 다시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극구 부인하였으나 두 번째 심문 때는 그가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자백하였다. 그 결과 그는 1866년 음력 10월 10일 효수형을 받아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9). 이용래 아우구스티노: 이용래는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황석두(黃錫斗, 루카)의 조카사위이다. 그는 1859년경 황석두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이어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860년에는 아내 황 마리아와 함께 홍산 부덕리(富德里)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훈장 노릇을 하며 여러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6년 9월에 체포되었다.
홍산관으로 끌려간 이용래는 얼마 뒤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 살려는 마음에서 천주교를 학습하지 않았다고 변명하였으나, 두 번째 신문에서는 “배교하지 않고 죽는 것이 이치상 당연하다.”고 하면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다. 그 결과 이용래는 1866년 10월 14일, 45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10). 박성운: 서울 남문 밖 전생서 앞에서 살며 짐꾼으로 일을 해 생활한 박성운은 박순집의 조카로 죽은 뒤에 천당에 간다는 설을 조부로부터 듣고 귀가 솔깃하여 천주교를 배워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를 믿은 지 8, 9년이 된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음력 10월 11일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천주교를 믿은 사실을 자백하고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고 말한 뒤 음력 1866년 10월 14일 효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1). 원윤철 사도요한: 원윤철은 원동지라고도 불리며, 고종의 유모였던 박 마르타의 시아버지이다. 그는 1862년에 자암에 사는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며,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원윤철은 많은 신자들과 교류했고, 또 주교의 명령대로 자신의 첩을 내보내는 등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발생하여 9명의 성직자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에 교우들은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배를 보냈는데, 원윤철도 이 일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베르뇌 주교를 장사지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체포된 원윤철은 1866년 10월 15일에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았다. 신문 중에 그는 “상종한 교우로 아현의 최인서(崔仁瑞, 요한)와 연동(蓮洞)의 박원장(朴元長, 요한)”만 언급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발설하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3일 후인 1866년 10월 18일 “천주교를 믿었고, 서양인들과 통섭(通涉)했다”는 죄목으로 양화진에서 81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12). 박내호사도요한: 박래호(래호는 字)는 황해도 신천의 향족(鄕族)이며, 문장과 글 솜씨가 뛰어났다. 그러나 가산이 넉넉하지 못했던 그는, 다른 사람의 과거를 보아 주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1860년에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면서부터는 과문(科文)을 그만두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여, 아내와 딸, 누이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박래호는 1862년에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듬해 첫 고해성사를 받은 뒤로는 외교인에 대한 선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신천에서 박해가 발생하자, 그는 잠시 송화로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신천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두 차례 베르뇌 주교를 모셨는데, 주교가 신천을 방문한 1865년 1~2월 사이에 그는 신천 회장으로 임명된 듯하다.
1866년 1월 서울에서 성사를 받고 돌아 온 박래호는,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서흥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처자를 데리고 상경하여 교우 집에 기숙하며 짚신을 팔아 생활하였다. 그러나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되면서, 박래호는 공덕리에 집을 얻어 숨어 지냈는데, 9월에 벼슬살이하는 비신자 친척이 고발하면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박래호는 9월 초 신발을 팔러갔다가 길에서 체포되었고, 포도청으로 끌려간 후 1866년 10월경 40여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순교하였다.
13). 유 바오로: 유 마오로는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웠으나 처음에는 적절하고 올바르게 실천하지 못하였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는, 산골짜기로 이사하여 교우들과 함께 살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마오로는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 살면서 박해를 맞이했다. 그는 박해로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에 박해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마오로는 포도대장의 신문에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당당히 밝혔으며, 그 결과 46세의 나이로 양화진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장남 유 안드레아(배론 신학교의 신학생)는 1868년에, 둘째 유 요셉은 1879년에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14). 강 요한; 충청도 신창 어촌 사람인 강 요한은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워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자녀들을 잘 교육하여 훌륭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고 동네 교우들도 잘 인도하자 다블뤼 주교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해마다 신부를 영접하여 교우들의 영적인 생활을 도왔고, 병인박해 때 리델·페롱·칼레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는 부인과 16세 난 아들이 있었는데, 부인은 친척에게 맡기고 아들은 머슴으로 들여보내면서까지 신부를 구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1867년에 그의 이름이 탄로되어 신창에서 체포되었는데, 지니고 있던 신부의 편지가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가족과 이별하면서 자신은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라고 밝히고, 만일 그들도 나중에 잡히면 천주를 위해 순교하라고 당부하였다. 처자에게 밝힌 대로 그는 1867년 8월 2일 68세의 나이로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15). 조타대오: 충청도 신창 남방재 사람인 조타대오는 선대부터 천주교를 배워 착실히 믿었다. 이러한 집안 내력으로 그도 일찍부터 교리를 배워 타대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교우들이 다 그를 칭찬할 정도로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7년에 신창에서 강 요한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끌려가면서 서로 사랑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격려하였다. 서로 격려한 대로 그는 1867년 8월 2일 65세의 나이로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뒤에 포교가 교우들을 체포하면서 “너도 조타대오와 같이 하여라”고 하였다고 한다.
16). 김이뿐 마리아: 김 마리아는 황해도 서흥 사람으로 과부가 된 후, 신천의 종기 의원이었던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의 후처로 들어갔다. 그녀는 마음이 순량하여 부부 금실이 좋았으며, 자식들을 사랑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갔다고 한다. 그 후 배천(白川)으로 이사한 김 마리아 가족은 1857년에 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차동에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1859년 남편 이의송이 정의배(丁義培, 마르코)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했고, 이어 김 마리아와 자식들도 남편에게 교리를 배운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외교인인 시아주버니의 집에서 얼마간 살던 가족은, 박해가 심해지면서 1866년 9월 8일 경기도 시흥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사돈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시아주버니를 신문하여 김 마리아 가족이 숨어있는 곳을 알아냈고, 결국 김 마리아 가족은 봉천에서 체포되었다.
우포도청에 수감된 김 마리아는 신문 중에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그 결과 남편 이의송, 아들 이붕익(李鵬翼, 베드로)과 함께 1866년 9월 16일 양화진에서 55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7). 이붕익 이천조베드로; 이붕익(혹 이천조)은 황해도 신천의 양반으로, 의안대군(태조의 8자)의 후손이다. 그는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붕익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붕익은 마음이 어질고 순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배천[白川]으로 이사하였고, 1857년에는 다시 서울로 옮겨 와 차동에 거주하였다.
상경한 지 2년 후인 1859년, 아버지 이의송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고, 1862년에는 베르뇌 주교(Berneux, 張敬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에 이붕익도 아버지에게 천주교를 배워 1862년에 형과 함께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붕익은 마음을 다해 신앙을 실천했으며, 아버지를 도와 자신의 집에서 공소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병인박해가 발생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박해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이붕익은 아버지와 서모(庶母) 김 마리아를 모시고 1866년 9월 8일 봉천(현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처남 이영택(李永宅)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교들이 그의 삼촌을 잡아 신문하면서 이들의 거처가 알려졌고, 결국 이붕익은 부모와 함께 봉천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우포도청으로 끌려온 이붕익은 매우 심한 형벌을 받았다. 이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형벌을 통해 배교시키려는 포장(捕將)의 의도였다. 그러나 이붕익은 비록 정신이 혼미해지기는 했지만, 끝내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였고, 그 결과 그의 부모와 함께 1866년 9월 16일 양화진에서 24세의 나이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7. 절두산 순교자들은 몇 명이었을까?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의 수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까지 합쳐 1만 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수천 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며, 수백 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이 그 수를 크게 늘려 잡은 데는 병인박해 기간 내내 천주교 신자들을 그곳에서 처형했다는 점과, 국왕의 재가를 기다리지 말고 체포하자마자 해당 지방관이 처형한 다음 보고하라는 ‘선참후계’에 따라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재판 없이 그곳에서 처형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알아보았듯이 병인박해 기간 내내 절두산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1866년 10월 23일부터 1867년 7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처형했을 뿐이다. 또한 선참후계 조처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이 절두산에서 마구잡이로 처형되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선참후계의 처형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 해당하는 조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로 보고하는 데 시일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를 단속하는 데 선참후계의 형식을 따르게 했지만, 도성과 인접해 있는 절두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에 선참후계의 논의가 있었고, 국왕이 이를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이런 조치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프랑스 군함이 조선을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난 10∼11월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처형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 기간에 양화진, 강화 등 서울 부근에서 최소한 6차례 이상 3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되었으나, 이때에도 매번 국왕의 윤허를 받고 처형하였다. 이와 같이 근거가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절두산에서 1만 명 또는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또한 1865년 당시 천주교 신자는 모두 2만 3천 명이었고, 병인박해로 목숨을 잃은 신자들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까지 합쳐 약 8천 명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도 그러한 주장이 크게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몇 명 정도일까.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29명을 가지고 그 근사치를 추정해볼 수는 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서 확인한 수치로 기준을 잡으면 전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310명이고,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466명이며, 절두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모두 29명이다. 이와 같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들의 비중을 무명 순교자들까지 합친 전국 순교자 수인 8천 명에 대비시켜 계산해 보면, 서울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모두 2,843명으로 추산되고, 절두산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77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까지 합친 절두산 순교자들은 177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8. 순교 장소는 어디였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장소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은 절두산 꼭대기이다.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노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하면, 절두산 꼭대기에서 칼로 신자들의 목을 쳐서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리거나 한 오랏줄에 여러 명의 교우들을 결박하여 산 채로 낭떠러지 밑 강물로 밀어 버려 죽이기도 하였고, 창호지를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려 숨 막혀 죽게 한 다음 그 시신을 강물에 던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절두산 꼭대기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웠고, 뒤에 다시 그것을 헐고 기념관과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을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옛 노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절두산 꼭대기를 신자들의 처형지로 보는 설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절두산 꼭대기는 수십 명의 관계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기에는 너무나 협소하여, 군민을 많이 모아놓고 목을 베어 뭇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기에는 합당하지가 않다. 또한 그 설은 대대로 절두산 근처 동리에서 살아온 노인들의 증언과도 전혀 다른데, 그 증언에 의하면 사형 집행 장소는 절두산 꼭대기가 아니라 양화진 바로 앞 길가의 평지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측 자료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증언한 교회측 자료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이나 《치명일기》의 어디에도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 꼭대기로 표현한 것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사형 집행 장소를 ‘양화진두’,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 등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사형 집행 장소는 후대의 옛 노인들이 증언한 불확실한 내용보다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정부측 자료 또는 병인박해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인들의 증언을 모아 놓은 교회 측 자료들을 이용하여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정부측 자료에는 한결같이 “양화진두”에서 군민을 많이 모아놓고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진두’는 ‘나루터’를 뜻하므로, 사형 집행 장소는 양화진두, 곧 양화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부측 기록은 교회측 자료에서 ‘양화진 진터’, ‘양화진 진’, ‘양화진’ 등으로 밝히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아울러 군민을 많이 모아 놓고 목을 베었고 머리를 매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던 만큼 신자들의 순교 장소는 양화 나루터의 약간 언덕진 평지로 오늘날 절두산과 꾸르실료 건물 사이의 한 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9. 절두산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
기념 성당의 제대 쪽 양 끝에 설치되어 있는 돌계단을 몇 단 내려가면 10평 남짓한 지하실이 있다. 이 지하실에는 높이 약 6척의 화강암으로 된 서양식 유해 안치소인 성해실이 있다. 이 성해실은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에 대비하여 마련한 것이다.
1968년 2월 15일 교황청 시성성은 10월 6일에 시복될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사하고 또 유해를 분배할 수 있도록 서울 절두산 기념성당으로 옮겨 모시는 일을 윤공회 주교에게 위촉했다. 이에 따라 이미 발굴된 시복 대상자들의 유해가 차례로 절두산 기념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절두산 기념성당 성해실에는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베르뇌, 다블뤼 주교의 유해, 볼리외, 도리, 브르트니에르, 오메트르, 위앵 신부의 유해, 남종산(요한), 최형(베드로), 장주기(요셉),우세영(알렉시오), 손선지(베드로)의 유해와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 허계임(막달레나)․ 이영희(막달레나), 이정희(바르바라), 최경환(프란치스코), 이호영(베드로)의 유해 등 16위의 순교복자 유해가 안치되었다.
그 뒤에 순교복자들의 유해가 추가로 발굴됨에 따라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앵베르 주교의 유해, 모방․ 샤스탕․ 김대건 신부의 유해, 김성우(안토니오)의 유해와 병인박해 순교자 브르트니에르 신부의 유해, 이명서(베드로), 한재권(요셉), 정문호(바르톨로메오), 황석두(루가)의 유해 등 10위의 순교복자 유해를 추가로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26위 순교복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절두산 기념성당의 성해실은 1984년 103위 한국 성인의 탄생에 맞추어 새로 단장되었다. 즉, 시성식이 있기 한달 전부터 성해실을 대폭 개조하여 27위 공동 묘소를 만들었다. 유해는 순교 연,월,일 순으로 배치하고, 윗줄 6처는 비워두었다. 후에 초기 순교자들이 시성되면 모시기 위해서 이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103위 성인이 시성되면서 기념관에 유해가 모셔진 26위 순교복자들도 모두 시성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시성식을 거행하기 전인 5월 3일 내한 첫 순서로 시성될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절두산 기념성당 성해실을 방문하여 순교자들의 유해에 참배하였다.
또한 1986년 여름 이원순 교수에 의해 미리내 무명 순교지 묘지에서 이윤일(요한)성인의 묘가 확인되어 1987년 1월 21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추가로 성해실에 모셔졌다. 그리고 무명 순교자 한 분의 유해도 추가로 성해실에 모셔졌다. 이 무명 순교자의 유해는 1925년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가운데 한 분이다. 명동성당 지하실에서 유해를 관리하는 도중에 이름표가 분실되어 무명 순교자로 된 것이다. 1984년 시성식 때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복자 모두가 시성되었으므로 이 무명 순교자는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절두산 성해실에는 전국에서 발굴된 성인 28위의 유해 모두가 한 자리에 모셔지게 되었다. 이들 순교 성인들은 세계 모든 가톨릭 교인들의 공적인 공경을 받게 된다. 세계 각국의 교인이나 교회가 이들 순교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쓰며, 종교적 수호자로 모시고, 천주에 대한 전구자로 모시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하여 각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어김없이 절두산 기념성당을 드리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절두산 기념성당은 한국천구교회와 교인들에게는 물론이고 국민 전체에게도 대단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절두산 기념성당에 유해가 모셔져 있는 순교성인들 가운데는 한국 교회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유해는 국내는 물론이고 이탈리아,미국,독일 등 세계 각국의 교회에서 공경하기 위해 분배해 갔다.
10. 계속되는 성지 수난
기념관과 기념 성당을 건립하고 순교 유물을 수집하는 등 절두산 성지를 조성하는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한편에서는 성지를 훼손하는 일도 잇달아 일어났다. 1969년 서울-인천 간 강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한강변으로 나 있는 절두산 성지의 출입 도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이에 교회측에서는 서울시에 제안하여 합정동에서 절두산 성지로 통할 수 있는 넓이 4m, 길이 34m 규모의 지하 도로를 건설하여 자동차 두 대가 지나다닐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이 지하 도로가 2차선 고속도로의 폭이 끝나는 지점까지만 놓여 있었기 때문에 여러 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서, 교회측에서는 또 다시 서울시의 허가를 받아 지하도 연장 공사를 시작하였다. 사실 교회에서는 이 공사에 대한 예산이 따로 서 있지 않았으나 본당 신자들의 정성어린 모금 덕분에 지하 도로 연장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공사를 하면서 지하 도로 위에 생긴 땅에는 약 350평의 주차장을 만들었고, 지하 차도에서 주차장에 이르는 약 11m의 길을 닦아 놓았다. 이렇게 하면서 강변로 진입로까지 길을 마련해 놓으니 기념관 앞이 제법 쓸모 있게 다듬어졌다.
이렇게 하는 동안 절두산 종합 개발 계획이 마련되었다. 절두산 주변의 한강 모래펄 3천여 평 가량을 매립하여 성지를 확장한다는 대사업이었다. 이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강바닥까지 수직 15m 높이로 흙을 메워나갔는데, 차바퀴가 흙 속에 빠지고 넓게 흙이 쌓여도 1년 내내 불도저를 임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나서서 인력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절두산 서편 공사를 시작할 때에는 서울대교구로부터 공사를 포기하라고 종용받기도 하였고, 자갈 채취를 하는 이들에게서 폭력에 가까운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 당시 강에는 자갈 채취선이 있었는데, 이 공사를 하게 되면 자갈 채취선의 운반로가 차단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성지 확장 공사의 책임을 도맡고 있던 구본홍 박사는 만취된 노무자들에게 붙들려 한강 깊숙이 끌려 들어갔다가 무사히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공사를 마치기까지 3년여 동안 한 사람의 사고도 없이 개발 사업을 완공할 수 있었다. 개발 사업을 마침으로써 처음 1,381평이던 절두산 성지는 4,300여 평으로 늘어났다. 두 차례에 걸쳐 매립 공사를 하고 대지를 매입한 덕분이었다. 이때의 사업으로 마련된 제방 1,247평과 제방 위 연안 2미터 폭의 보행길 365평은 규정에 따라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절두산 성지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서울시에서는 1981년 양화대교를 확장하면서 입체 교차로를 신설하여 절두산 순교 성지의 서북쪽을 차단시켰고, 지하철 2호선을 계획하면서 성지 서쪽 광장 중간을 계획 구역에 포함시켰다. 결국 1983년 12월에는 지하철 당산철교가 개통됨으로써 절두산 성지가 동서로 분할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지하철을 고가 철교로 만들면서 방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개통한 지 10년이 지나 방음벽을 설치할 때까지 교회가 입은 어려움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성지를 동서로 나누어버린 당산철교 위를 1분 30초 내외로 통행하는 전동차가 내는 굉음과 진동은 성지 참배나 미사를 비롯한 교회의 정상적인 활동을 어렵게 했고, 성지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1986년 10월 서울시가 한강 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오늘의 한국 천주교 역사를 있게 한 순교자들이 목숨을 던진 성지 바로 앞 절벽 밑 수면을 흙으로 메워 한강 둔치를 만들었다. 게다가 한강 둔치를 만들면서 진입로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성지 마당은 성지 동쪽 끝에 진입 도로가 마련될 때까지 5년 동안이나 한강을 찾는 시민들의 주차장이 되었고,절벽 밑 수면을 뭍으로 바꾸어 절두산이 갖는 의미를 영원히 반감시켜 놓았다. 그리고 1996년 말 개통을 목표로 성지 바로 앞 한강변에는 고속 고가 도로를 건설하여 성지를 밖에서도 조망할 수 있는 절두산의 가시권마저 완전히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양화나루·잠두봉을 포함한 절두산 성지 일대는 삼면이 도로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강에 면한 이름난 명승지요, 갖가지 애환이 얽힌 사적지이며, 국내외에서 연간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한국의 대표적 성지인 절두산 일대는 자동차 소음에 시달리며 분진 속에 살아야 하는 최악의 조건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한 성지에 진입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가져와 순례자가 현저하게 감소되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 당국은 절두산 일대가 종교적 성지일 뿐만 아니라, 한강 북로의 명소로서 많은 시민이 이곳을 공원처럼 찾던 실정을 감안하여, 새로이 추진하게 된 한강 종합 개발 사업에서 지상 도로이던 대건로를 지하 차도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르면 지하 차도 윗부분의 땅을 성지의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고 기념관과 수목들은 소음과 공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 지하 차도 건설은 성지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이 공사를 진행하면서 교회가 정성을 쏟아 조영한 절두산 성지의 광장은 물론 출입 도로마저 차단하였다. 그리고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수년간 그곳을 건설 시공재를 놓아두는 장소로, 건설 중장비 차량의 주차 작업 장소로 사용하였다. 이처럼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절두산 성지 일대의 교회 재산은 적지 않은 손해와 큰 불편을 겪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오랜 동안 가꾸어온 ‘성인의 광장’에 있는 제반 시설물과 잠두봉 일부는 훼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1990년에 들어 고층 아파트 건설 붐이 불면서, 한강 도로변에 고층 아파트가 마치 병풍을 펴놓듯이 줄지어 건설되는 이상 현상이 생겨났다. 이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한강변의 자연과 경관뿐만 아니라 문화재의 훼손과 파괴가 날로 심해졌으며 종종 사회적으로 시비가 벌어지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절두산 부근도 예외가 아니어서 1996년에는 마침내 절두산 성지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도 고층 아파트 건설이 추진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낡은 주택을 개량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주민과 건설업자들이 19층 가까이 되는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고층 아파트가 절두산 성지 북쪽 도로에 줄줄이 들어선다면, 절두산 성지 일원은 북변에 고층 아파트가 병풍을 둘러친 것과 같게 되어 잠두봉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와우산, 북한산의 스카이라인이 완전히 가려지고, 성지는 좁은 지역에 갇힌 외로운 고도처럼 되어 현대적 문화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었다. 즉, 잠두봉 일원 사적의 문화적 가치도 결정적 훼손을 입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교회에서는 성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유적을 훼손하게 되는 개발 사업은 교회 스스로 삼가는 한편,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정부 당국이나 민원에 의해 유적이 훼손되는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를 막자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 서울대교구잔는 결의를 다지게 일대의 현재의 형상을 더 이상 훼손하거나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 1997년 6월 17일자로, 서울특별시장에게 ‘절두산 순교 성지 일자로 지정’을 신청하였다. 절두산 성지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성지에서 100m 이내의 건물은 문화재 보호법과 건축법에 의해 고도 제한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서울대교구에서는 의 형날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명의로 문화재 행정의 최고 부서장인 문화 체육부 장관에게도 같은 취지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1. 절두산 성지 설명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객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세워진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둘렀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되었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병인년 10월 22일 부인 김이쁜 마리아와 아들 이붕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966년 10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과 순교 기념관(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건립을 시작해 이듬해 10월 봉헌식을 가졌다.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에 애달픈 사연들은 기념관이 서고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머무르면서 오늘날에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지하의 성해실. 27위의 성인과 1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7위와 1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를 모신 지하 성해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순교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 이가환 ·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광장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또 박물관 아래 광장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일행이 앉아 쉬었던 ‘오성바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흉상, 십자가의 길 등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순례자들은 부친 · 형제 · 삼촌 · 고모 · 형수 · 조카 · 장모 ·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 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공적비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가눌 길이 없다. 절두산 성지에 모셔졌던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년)의 유해 일부는 2001년 인천교구 갑곶 성지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0년 11월말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꾸르실료 회관 사이에 이춘만 조각가의 웅장한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제작 설치되었다. ‘큰칼’ 모양의 주탑과 절두(切頭)된 머리가 올려져 ‘절두탑’으로로 불리는 우측탑,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무명 순교자를 조각해 넣은 좌측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주탑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를 새겨 넣었고, 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양면에는 신문 과정에서 배교했다가 마음 고쳐먹고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조들을 표현했다. 좌측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치명자들을 위한 ‘무명 순교탑’으로 박해의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순교자로 드날리는 영예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무명 순교자로 남은 치명자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잠두봉과 절두산 사적지
성 김대건 신부상 뒤편에 박순집 베드로의 묘와 공적비, 남종삼 성인의 흉상, 은언군과 송 마리아의 묘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어떤 순교자는 죽은 뒤에도 얼굴 색이 변하지 않았고, 어느 순교자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았으며, 또 어떤 순교자가 죽은 뒤에는 한강에서부터 무지개가 떴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한 신자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를 목격한 외교인은 무서운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씨는 복음의 터전이 되었고, 복음에 대한 믿음은 다시 순교자를 탄생시킨 것이다.”(한국의 여러 ‘순교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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