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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자료실 스크랩 아라가야(阿羅伽耶)의 역사 및 의의 그리고 왜(倭)와의 관계
김영광 추천 0 조회 56 13.08.25 06:1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이 모든 내용은 필자가 분자인류학논단의 카페에 이미 포스팅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인용하거나 스크랩할 때는 반드시 출처를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지난번에 대가야의 이진아시왕에 대해 포스팅한 바가 있었는데.. 가야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이해가 타국에 비해 턱없이 적은데다, 여러 국가로 구성된 제국(諸國)이라, 각각에 대한 정보를 다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의 임나일본부 등의 일본의 정치적 발언 등이 이어져 오던 바라, 이 지역의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실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최근 발굴되는 여러 고분들, '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유물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번엔 미약하나마 잘 알려지지 않은 가야제국 중 하나인 아라가야에 대해 미약하나마 서술해 보겠다.

 

 

 

가야의 영역도

 

아라가야경남 함안지역으로 비정되는 변한의 안야국(安邪國)이 발전하여 만들어진 나라로서 가야 후기에는 안라국(安羅國)이라고도 하였다. 안야국 때는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더불어 변한을 대표했던 강력한 정치 집단이었던 아라가야는 안라국 시기인 가야 후기에도 백제, 신라, 왜와의 외교를 주도했던 그런 나라였다.

 

아라가야의 국명은 기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삼국유사' 5가야조에 나오는 아라가야(阿羅伽耶) 및 아야가야(阿耶伽耶)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아나가야(阿那加耶), '삼국사기 열전'에는 아라국(阿羅國), '삼국지'에는 안야국(安邪國), '광개토왕비문'과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 '양직공도' 백제국사전 도경조에는 전라(前羅)로 기록되어 있다. 지역명으로 남은 것이 경주 남산신성비의 아량촌(阿良村)과 '일본서기'에 보이는 아라라성(阿羅羅城) 등이 있다 한다. 짐작하겠지만, '가야'라는 명칭은 아마 신라말, 고려초의 불교와 관계된 호칭일 가능성이 많다. 그전엔 역시 '가라'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많다. 3세기때 자료인 '삼국지'와 5세기초의 '광개토왕비문', 6세기 초의 '양직공도', 8세기 자료인 '일본서기' 등을 조합해보면, 아마 이 나라를 지칭하는 당시 용어는 아마 '안야'나 '안라'였을 것이다. 양직공도에 나오는 전라(前羅)도 '앞라'의 음차일 가능성이 많아 역시 '안라'를 지칭하는 말이라 하겠다.

 

잘 알다시피, 가야 초기엔 김해지역의 김수로왕이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가락국'이, 후기엔 이진아시왕이 건국한 것으로 알려진 고령의 '대가야'가 맹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아라가야의 위치는? 두 시기 모두 2인자에 그쳤다고 생각된다. '2인자'라는 의미는 맹주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1등에 못지않은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봐야겠다. 필자는 이 아라가야가 한반도 정남쪽 해안의 중심 세력으로 생각한다(더 북쪽은 대가야, 동남쪽은 가락). 어차피 기록을 가지려면, 마지막에 웃는 자여야 하므로, 이 아라가야도 결국은 패망하였으므로 뚜렷한 기록을 가지지 못했다. 가야제국 중 유이한 기록을 가진 '대가야'나 '가락국'은 나라 자체도 1인자의 위치를 차지한 강한 나라이기도 했지만, 이후 패망후 신라에 투항하는 과정이 매우 원활했다. 가락국 같은 경우는 그 왕족이 신라의 진골의 반열에 오르고, 김유신 같은 영달한 이가 후손으로 나와 결국 김해 김씨의 창달을 도모하는 바람에 그 역사가 화려하게 윤색되어(?) 길이 남게 되었고, 대가야 같은 경우도 항복한 뒤 주욱 영향력이 없다가 신라말 해인사가 창건되면서 승려들에 의해 지역의 큰 나라였던 대가야의 역사가 종교적으로 윤색(?)되어 역시 존재할 수가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라가야는 애석하게도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껏 발굴한 유적들이 낙동강을 따라 시행되는 바람에 김해지역과 고령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서기에서 계속 언급도 되거니와 광개토왕비문에도 언급이 되는 등의 비중을 갖고 있고, 1990년대 이후 이 지역의 발굴(예)함안 말이산고분군)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지닌 나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이 아라가야의 발전은 다른 가야제국과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 삼한(여기선 변한이겠다)의 토착민 또는 고조선의 멸망으로 초래된 유민의 남하안야국이 성립되었다고 보아진다. 기원전 1세기말에 목관묘가 등장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즈음에 안야국이 성립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주류 하플로는 당연히 O2b1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물론, 일부의 해안세력인 D2, C1 및 O2b1에 밀린 O2b*, P201, N 등도 소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고조선 유민이 많았다면, O2b*도 다소 많았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어쨌든, 이 안야국은 김해지역의 구야국과 더불어 변한 12국 중에서 잘 나가던 나라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이 안야국이 급성장한 계기는 유명한 '포상팔국전쟁'이다. 여기서 아라가야는 포상팔국의 도전을 이겨내고 인근 해안가로 그 영역을 크게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함안 칠원이나 창원 진동 등의 넓은 영역을 모두 포함하였던 것 같고, 이 시점부터 남해안을 통한 주변 국가와의 교역(물론 중국도 들어가겠지만,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바로 '왜'라고 생각된다)도 활발하게 된다. 이렇게 놀랍도록 급성장한 계기는 다른 가야제국과 마찬가지로 북방에서 이주한 세력(C3로 추정한다)들에 의해 지배층의 교체가 있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들이 기존의 안야국에서 아라가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포상팔국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을 제공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여기서, '왜'를 구성한 주체가 누구냐에 대한 의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의 근간을 이루는 야요이인(초기의 O2b*가 아닌 후기의 O2b1위주를 의미한다)이란, 초기엔 이진아시왕으로 대표되는 대가야의 고천원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 사람들의 일본 진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엔 김수로왕으로 대표되는 가락국이 철기문화를 중심으로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대가야인들의 일본 진출은 막히고 가락국 출신들이 또한 상당수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아라가야가 한반도 남부해안을 장악하면서 이들도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대다수O2b1일 것이고, 지배층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 C3 역시 규슈 지방에는 많은 분포를 보이리라 필자 개인적으로는 추측한다.

 

또한, 서기 400년의 광개토왕의 정벌도 아라가야가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광개토왕비문'에 보면 3차례나 등장하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은 아라가야가 동아시아의 질서를 결정하는 이 중요한 전쟁에 직접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전쟁으로 김해의 가락국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망조에 들어가게 되는데 비해 아라가야는 이 전쟁에서 고구려, 신라와 협력함으로써 오히려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바로 5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의 '말이산고분군'의 웅장함과 '화염문투창토기'라는 화려한 토기가 이런 아라가야의 성장을 상징한다고 보여진다. 이 당시 아라가야의 최고지배자는 ''을 지칭하였으며, 그 밑에 여러 '차한기', '하한기'를 두어 지배층도 두꺼워지는 정치적 발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안라인수병                                        창원박물관의 화염문투창토기

 

 

6세기에 접어들면, 아라가야는 더 강해져 백제와 신라가 본격적으로 한반도 남부로 진출하려는 것을 방어하는 주축의 역할을 한 것 같다. 이미 마한지역을 완전히 접수한 백제가 더 욕심을 내어 경남 하동 지역으로 진출하려 하는 것을 아라가야 주도의 '고당(高堂)회의'를 열어 백제의 진출을 저지하려 하였고, 아라가야에 머물던 '왜'의 사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아라가야는 다른 가야제국과 백제 성왕 주도의 사비회의에 참석하여 백제로부터 가야의 독립 보장과 신라의 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요구하는 등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백제와 신라가 노골적인 진출야욕을 보이는데 배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은 아라가야도 독자성을 상실하고 백제의 노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간의 동맹이 깨어지자 554년 관산성전투에 이들이 백제에 용병으로 동원되어 전력을 다해 신라와 싸웠으나 패퇴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고 결국은 신라에 병합되는 수순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 서기 560년경 신라에 흡수되고 말고, 후기의 맹주로 군림하던 대가야마저 관산성전투의 몰락을 견디지 못하고 562년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모든 가야제국은 신라의 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이 아라가야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국주'라 불리는 왕이 있었고, 그 밑에 국사와 관련된 주요회의에 참석하는 '대인'이라는 지배계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백제 등에 못지 않게 고대국가로 진입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라가야는 한반도 남부해안을 중심으로 영역을 꾸준히 넓히고 있었고, 교역을 통한 경제적 번영이나 정치적 발전이 이루어지며 아까 말한 고구려, 신라, 백제에 못지 않은 고대국가로 성장이 가능하였겠지만, 율령이나 불교 수용에 미온적이었고 주변 강대국의 간섭이 이어지며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에 머문 것이 아닌가... 안타깝게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사실 하나 언급하겠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에서 그동안 집요하게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의 근거로 전가의 보도처럼 말하던, 우리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단어이다. 이 임나일본부란 사실 왜에서 가야로 파견한 사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임나(任那)' & '일본(日本)' & "부(府)"로 분석이 되는데, '임나'란 가야지역을 뜻하는 말이고, '일본'이란 단어는 7세기 이후에 나오는 말이라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6세기 중엽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말이다. ''는 '일본서기'의 여러 필사본과 주석서를 살펴보면 '일본부'는 '야먀토의 미코토모치(倭의 御事持)'로 읽혀진다. 즉, ''는 '미토코모치'를 한자로 표현한데 불과하다. 이 미코토미치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러 지방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오는 '사신'이었다. 따라서 일본부는 '왜의 사신'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란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에 불과한 말이다!!! 또한, '일본서기' 흠명기 15년(서기 554년) 12월조에 '재안라제왜신(在安羅諸倭臣)' 즉 아라가야에 있었던 여러 왜신들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부가 아라가야에 머물던 왜의 사신집단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왜의 사신으로 활약했던 사람으로 이쿠하노오미(的臣), 키비노오미(吉備臣), 카와치노아타히(河內直) 등이 있다. 이런 왜의 사신들의 존재로 볼때, 왜와 아라가야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고, 대단히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아라가야에 대한 역사에 대해 대강 알아보았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가설은,

 

첫째, 아라가야변한의 토착세력을 기반으로 안야국이란 나라를 세우며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주력하플로를 저는 O2b1으로 추정한다. 이후 고조선 유민을 상당수 받아들였을 수 있으며, 또 다른 북방세력(C3계열로 추정)에 의해 아라가야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들의 성장엔 포상팔국전쟁의 승리로 인한 해양으로의 진출, 많은 땅의 확보로 인한 경제적, 정치적인 발전 및 이후 왜와의 쉬운 교류를 통한 외교적인 발전 등이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아라가야의 현재 영역인 한반도 남단 해안 지역의 주요 하플로로 C3+O2b1인 점 역시 당시의 이들의 구성을 짐작케 해준다(물론 그 이후의 이동이라는 변수도 있겠다).

 

둘째, ''의 정체는 이미 일본으로 ?긴 D2, C1의 기반 위에 한반도의 토착민이었던 예맥계의 O2b*의 일부가 한계의 O2b1의 성장, 진출로 인해 초기야요이인으로 일본으로 진출하고, 이후 이진아시왕으로 대표되는 대가야계의 O2b1이, 그다음으로 초기가야제국의 맹주로 성장한 가락국의 O2b1>C3(김수로왕의 중심혈통일 수 있음)가 일본으로 진출하고, 그 다음으로 아라가야인의 O2b1>C3가 일본으로 진출하여 후기야요이인들을 이루지 않았나,,, 야마토정권은 아마 대가야계의 O2b1이 신라계의 초기야요이인인 O2b*를 누르고 이진아시왕을 그 시조로 하여 수립한 것으로 보이고, 이후 가락국인과 아라가야인들(O2b1주축에 C3세력까지)을 영입하면서 세력을 키우고(왕권을 내주진 않은 것 같음), 후에 백제계의 M117, M134의 일본 이주로 인한 왕권교체(고분시대)가 있었지 않나 추정해 본다. 그리고 이후 O2b1과 공존한 D2가 막부시대를 맞아 사무라이계급으로 성장하여 현재의 일본의 하플로 구조를 만들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지금까지 제시된 역사적 사실과 견해와 제 가설로 내세운 추측들이 다 맞다고 보진 않는다. 우리가 실제 이런 나라가 있었는지 역사에서 잘 배우지 못했지도 못했고, 일본의 역사적 왜곡이 있었고, 최근에 어느 정도의 제한된 유물이 나오고 있기에 아직까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라가야의 의미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더 강력하고,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 가야, 그리고 사람들 (남재우 저,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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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11.30 23:43

    첫댓글 아라가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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