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인생은 여행이다.
신외숙
「네가 어둠 속을 걸어 갈 때도 나는 늘 너와 함께 했단다」
9호선 전철로 환승하기 위해 논현역 입구에서 버스를 내렸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당장 내 얼굴을 내리 덮쳤다. 거리는 젊은 연인들이 다 차지하고 신종 플루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넘쳐 나고 있었다. 밝고 힘찬 발걸음들이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어둠을 도심 밖으로 내쫓고 있었다.
언젠가 이 거리를 걷던 생각이 난다. 뉴욕에서 살다 왔다던 이승우란 남자와 이 거리를 걸었었다. 그는 유명한 소설가와 이름이 똑같았는데 생김새는 전혀 딴판이었다. 작달만한 키에 매서운 눈매가 흡사 뒷골목 깡패를 연상케했다. 뉴욕에서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팔뚝이 굵고 목 근처에 생채기가 있어 전직을 의심케 하는 남자였다.
그의 누이가 논현역에서 두 블록인가 떨어진 역삼동 입구에서 침구장사를 하던 기억이 난다. 꽤 넓은 평수에 여직원까지 두고서 각종 고급 침구를 팔았는데 얼굴과 몸매가 꽤 미모였다. 그녀는 40대 초반으로 장사 수완이 좋았다. 여직원이 있었음에도 자기가 직접 나서 물건을 팔았다.
여직원은 손님 접대를 위해 커피를 내오거나 물건을 포장하는 정도였다. 그녀는 고가의 물건을 순식간에 팔아치우고는 생각난 듯이 내 곁에 다가왔다. 매서운 눈초리로 내 표정을 살피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애가 그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느라 돈 모아 놓은 게 별로 없어, 총각은 그저 하루 빨리 결혼해야 돈을 모아, 혼자 있으면 씀씀이가 헤퍼서 안 돼. 장가 가서 자식 낳고 살아야지 정신 차려서 돈도 모으고 그러는 거야? 아가씬 나이도 있고 하니 돈 좀 모아 놓은 것 있지?”
나는 잠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린가?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지금껏 뼈아픈 고생을 해왔는데.
“돈은 살면서 벌면 되는 거야, 요즘은 다 맞벌이 추세잖아, 여자도 벌어야 남편한테 큰소리치고 살 수 있어, 나 좀 봐 내가 버니까 얼마나 편한지 몰라, 남편한테 구차하게 손 안 내밀어도 되고.”
그때 그는 뒷짐을 지고서 창 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누이가 자기의 속셈을 좀 더 시원하게 말해주길 바라면서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둠이 몰려오면서 오색찬란한 강남의 밤 문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도로 건너편 고층 빌딩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완전 봉으로 안 그의 누이가 내 예금통장 내역을 검사하려는 듯 눈빛을 교활하게 굴리자 울컥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 사람들한테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나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며 말했다.
“저, 모아 놓은 돈 별로 없거든요, 그동안 직장생활해서 모은 돈 엄마 병원비로다 들어 갔거든요.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럼 전 이만…….”
순간, 나는 그 두 남매의 실망하는 눈빛을 보았다. 한몫 단단히 챙기려 했는데 너무 속을 내보였나.
나이 삼십 중반을 넘어서자 들어오는 혼처마다 막가파식이었다. 오죽하면 여북하랴. 내 조건이 시원찮으니까 최악의 조건을 가진 남자들만 나타났다. 학력이 지나치게 낮거나 외모에 문제가 있거나 빈털터리거나 자신의 모자란 두뇌를 아내가 대신 채워주길 바라는 온달족들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노처녀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목돈을 노리는 좀비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결혼에 몸달아 하는 노처녀를 꾀어 몸과 마음을 빼앗은 뒤 자식부터 낳게 한 다음 다시 일자리로 내몰 생각이었다. 하나같이 야비하고 치사한 인간 기생충 같은 놈들이었다.
그 주제에 여자 보는 눈은 높아 입만 열면 인물 타령을 외워대는 것이었다. 얼굴 예뻐야 한다. 몸매 섹시해야 한다. 남편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직장은 평생 다닐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제 주제는 모르고 여자 하나 잘 만나서 팔자를 고쳐 보겠다는 생각으로 잔뜩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아! 어쩌면 나는 그런 비운의 남자들만 만났을까.
오랜 병고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는 엄마는 죽기 전 사위를 보는 게 소원이었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효녀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엄마에게 사윗감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그렇더라도 아무 남자나 고를 순 없었다.
사윗감으로 생각하는 엄마의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씨도둑은 못하는 법이다. 집안 내력을 봐야 한다. 몸 건강하고 정신 똑바로 박히고 구루마를 끌고라도 제 처자식은 벌어 먹일 만큼 생활력도 강해야 한다. 거기에다 인물도 좋으면 금상첨화고.”
딸 못난 건 생각 못하고 엄마는 입만 열면 사윗감의 조건을 외워댔다. 그러다 병원에서 최후 통첩이 떨어진 것이다.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그러자 갑자기 내 몸과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누가 효녀 아니랄까봐 거의 일주일 간으로 맞선 시장에 나섰고 가물가물 정신을 잃어가는 엄마의 귓가에 대고 사윗감의 면면을 보고 했다.
엄마, 제발 살아나서 사윗감 선도 보고 외손자 볼 때까지 오래 오래 살아.
나는 피울음을 토해가며 절규했지만 엄마는 마지막 숨고르기를 할 뿐이었다. 그때 옆집에 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에 다닌다는 구역장 아줌마가 찾아왔다. 목사를 대동하고서. 마지막 구원에 대한 확신과 영생 복락을 위한 축복 기도를 하고는 찬송가를 힘차게 불렀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우리 인생은 잠시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영원무구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 분만이 우리의 살길이 되십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 분의 인도하심 따라 사십시오,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한분 뿐입니다.”
목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를 내뱉고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나는 정신이 멍해서 움쭉달쭉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무언가에 단단히 붙잡힌 채 손을 놓고 있었다. 외로움과 무력감이 몰려오면서 나는 혼곤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나는 직장에 가 사표를 내고 집안에 들어앉았다.
매일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목사의 기도를 흉내 내며 말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대, 소경 바디메오도 눈 뜨게 하셨고 문둥병자도 깨끗게 하셨대,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시기 위함이래, 그러니까 엄마도 단단히 믿어야 해 알았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진심으로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말한 것뿐이니까.
“엄마 정신 차려, 사위도 보고 외손주도 봐야 할 것 아냐?”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애쓸 것 없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 내 한몸 간수하고 살기도 힘든 게 인생사란다. 악연으로 만나 마음고생하며 사느니 차라리 혼자 맘 편하게 사는 것도 괜찮다.”
순간 마음속에서 무거운 돌덩어리가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집 나갔던 아버지도 이복 언니 오빠도 찾아왔다. 장례 절차를 의논하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배려로 매장을 주장하는가 하면 추세를 따르자며 화장을 고집하는 축도 있었다.
공통적인 사실은 누구도 죽는 당사자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최소의 비용으로 간단하게 죽음의 예식을 치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전혀 죽음과 상관없는 걸로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언젠가는 죽음의 통과의식을 치를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뼈아프게 느낄 것이다. 나이 육십을 넘긴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엄마는 명줄을 놓고 말았다. 한 많은 인생이었다. 젊을 때 실수로 낳은 자식으로 인해 빼도 박도 못하고 살아온 분한 넘치는 고단한 인생이었다.
오직 피붙이인 나 하나 바라보고 살다 소원인 사윗감 한번 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정신줄 놓고 있는 내게 죽음에 대한 통과의식은 고문과 같았다. 웬 절차는 그리도 복잡한지 사는 것보다 죽는 과정이 더 복잡해 보였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데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걱정이고 야단이었다.
죽음의 복잡한 형식이 지나가고 시신이 마지막 처리 과정을 거쳐 공중에 흩어지고 나서 모두 뿔뿔이 헤어졌다. 슬픔도 미련도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 몫을 해야 할 테니까.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나는 새로운 직장에 취직했다. 충무로 근처에 있는 출판사였다.
어린이 도서를 출판하는 그곳은 인쇄소가 몰려 있는 한복판에 있었다. 어린이 그림책 동화책 교육 도서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순간적으로 동심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어린이 지능 발달을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가 동원된 책자를 놓고 저자의 두뇌를 칭찬하기도 했다. 가끔씩 동화작가들이 방문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들은 몸만 어른이지 마음은 어린아이와 똑같았다.
툭하면 “동심천국!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야만 들어갈 수가 있다”고 외쳤다. 그러면 나는 말했다.
“폭력이 가장 심한 곳이 초등학교라는 데요?”
“그게 다 잘못된 미디어 문화가 만들어 낸 부작용이라구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걸 그대로 보고 따라 하니까요.”
“악동이란 말도 있잖아요, 원래 인간 본성이 악하잖아요,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주먹질하고 싸우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교육 철학이 필요한 게 아니겠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어른들에 비해 훨씬 순수하고 천사 쪽에 가깝답니다.”
“그야 그렇겠죠.”
그 직장을 6개월쯤 다니다 다른 곳으로 옮겼다. 월급을 자주 미루고 부도 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새로 옮긴 직장은 난곡에 있는 식품 공장이었다. 식당에 각종 식자재와 패스트 푸드를 납품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심각한 인생 공부를 했다. 공장은 대개 24시간 풀가동 됐다.
군만두 어묵 떡볶이 칼국수 등을 직접 만들어 납품하는데 직원은 물론 주인 내외도 가담해 일을 했다. 사장의 부인인 경남이 엄마는 30대 후반으로 가사일과 공장 일을 겸하는 철인이었다. 충청도 두메산골 태생인 그녀는 선한 눈매에 너그러운 마음씨가 보기 드문 인심의 소유자였다.
시골서 여고를 나왔다는 그녀는 시집오기 전부터 심한 노동에 시달렸다고 한다. 농사짓는 아버지가 딸을 잠시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부려 먹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엌일 밭일은 물론 가마니 짜고 새끼 꼬는 일까지 했다. 졸업하고 나서 직장에 취직했는데 그만 거래처 남자와 눈 맞아 결혼하고 말았다.
남자는 거래처에서 일하는 공장 근로자였다. 성실한 것 하나 빼고는 볼 것 없는 무일푼의 남자였다. 그를 만나 온갖 고생 다해가며 살림을 일구었다. 남편의 소원은 식품 공장을 차리는 것이었다. 그는 아내에게도 버거운 짐을 지웠는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 됐든 시키는 것이었다.
경남이 엄마는 아기를 낳고도 중노동에 시달렸다. 남편이 공장을 차리자마자 큰집에 있던 시부모가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공장 일을 도와준다는 핑계였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노예 부리듯 하면서 잔소리를 끊임없이 늘어놨다. 경남이 엄마는 어묵 재료를 만들어 기름에 튀기고 떡볶이 떡 포장하고 만두 속 만들어 찌는 일들을 직접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직원들 식사 준비도 손수했다. 10명이 넘는 대 식구 식사분을 한시간도 안 돼 척척 차려냈다. 물론 맛은 별로였다. 빨리 준비하느라 정성이 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커다란 고무다라에다 배추를 잔뜩 썰어놓고 김치를 담그는 날엔 시누이 몫까지 했다. 시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유별났기 때문이다.
12시간이 넘는 육체적 중노동에 까다로운 시부모 뒷수발까지, 하나 뿐인 외아들마저 돌볼 시간이 없는데도 손아래 시누이에게 김치까지 담아주는 참으로 너그럽고 온화한 성품의 여자였다. 그녀는 공장 식구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잔소리 한번 하는 법이 없었다.
늘 너그러운 미소로 직원들을 보살폈고 시부모에게도 정성을 다했다. 그녀가 불평 불만이나 악한 말 하는 것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 어쩌면 저런 상황 속에서도 착한 심성을 지닐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그곳 직원들의 평균 학력은 국졸이었다. 하루종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단순노동이라 따로 학력이 필요치 않았다. 불꽃 튀는 경쟁심리나 긴박감 넘치는 모험심리도 필요치 않았고 그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남을 시샘하거나 미워할 필요도 없었다.
고아출신인 한 남자 직원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집을 전전하다 만두 만드는 기술을 익혀 그 곳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남자는 중퇴한 후 음식점 주방보조로 들어갔다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쫓겨났다고 한다. 그후부터 중국집에 들어가 철가방을 들었는데 나중에는 오토바이 탄 직원이 들어오는 바람에 또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고 한다.
그는 그때 처음 받은 보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창피해 하거나 슬퍼하는 기색도 없었다. 중국 교포 아내를 맞은 그는 다음 달이 산달이라며 몹시 들떠 있었다. 이제야 어머니께 손주를 안겨 드리게 되었다며 연신 기뻐했다. 그들 모두는 예의나 매너 따위는 거추장스러워 했고 단순 무식하다 보니 계산되지 않은 언사를 마구 날려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삶의 질이라든가 가치관 같은 것은 그들에겐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저 기분 좋게 일하고 하루해를 넘기고, 먹고, 마시고, 욕구를 해소하는 것만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기계처럼 움직이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사였다. 그들에게 정치니 경제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은 정신적 사치에 속했다.
6시에 퇴근해 지하공장을 빠져 나오면 신림천 교각이 보였다. 물도 흐르지 않는 그 다리를 건너면 서울대 입구 사거리가 나타나는데 각종 의류상가와 카페, 노래방, 순대타운 등이 즐비했다. 그곳에서는 3개월간을 근무했다. 내 움직임이 느린데다 직원들이 나를 두고 야료를 부리는 바람에 더이상 있을 수 없게 된 때문이었다.
그곳을 그만두고 나서 나는 한달간 백수생활을 했다. 나이가 많아 나를 채용해 줄 곳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지방으로 진출할까도 여러번 생각했다. 나이와 외모를 까다롭게 따지는 서비스 직종에서 밀렸고 간단한 PC조작 외에는 별다른 기술이 없어 전문직종에는 취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달 후, 나는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취직이 되었다. 돈암동에 있는 미술학원이었다. 예고와 미대진학을 앞둔 학생들이 소묘와 수채화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몰려왔다. 강사진은 최고 명문미대 출신이었고 아이들은 모두 부잣집 자제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학원비와 물감 붓 스켓치북 등 미술용품을 판매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는 일이 단순해 월급도 최저 수준이었지만 백수를 면한 것만으로도 감사해 참고 다녔다. 오후에 출근했으므로 시간이 많아 낮에는 주로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했다. 심심하면 미아리나 성신여대 쪽으로 진출했는데 거기에서도 많은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삶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듯 살아가는 방법도 천차만별이었다.
남의 영혼을 엿보고 미래를 불안을 노려 돈을 갈취하는 점집이 있는가 하면 평생을 노점으로 보내면서 한스런 인생을 사는 노인도 있었다. 돈 많은 부모덕으로 상처나 두려움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여자도 보았다. 그런가 하면 늘 남의 뒤를 캐고 다니며 상처주고 해코지 하는 인간말종도 있었다.
대중예술 한답시고 가족에게 폐 끼치고 쾌락과 중독에 빠져 사는 사람도 보았다. 사람들은 제각각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갔다. 삶의 천태만상을 보면서 나는 무시로 영감력을 떠올렸다.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워낙 손재주가 따라주지 않아 포기했다.
글로 쓰자니 지식이 너무 짧았고 그렇다고 가만있자니 속이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또다시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학원 건물에 불이 난 것이다. 그때 방송에도 나왔는데 다행이 피해자는 없었다, 하지만 불에 검게 그을은 건물과 소문 때문에 미술학원은 한동안 열 수가 없었다.
내가 쫓겨나게 된 건 건물에 불이 나서가 아니었다. 미아리 점집에 다녀온 원장이 다짜고짜로 나가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학원에 다닌 지 5개월째 접어들 때였다. 이후에 내가 들어간 직장은 청계천에 있는 의류 매장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을지로 쪽으로 난 고층빌딩에 난 의류 도매 시장이었다.
가끔씩 일본 관광객들도 왔는데 나는 그때마다 서툰 일본어를 구사해 많은 이익을 남기고 팔았다. 새벽에 장사하느라 몹시 피곤했지만 월급이 많아 다닐만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몸에 이상증세가 발생했다. 목이 답답해지면서 가래가 끓기 시작했다.
옷감의 화학염료에서 나오는 분진이 공기 중에 날아다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상인들은 3일이 멀다하고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몸에 저항력을 키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부터 돼지고기는 입에 대지도 냄새도 맡기 싫어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일 년이 가까워 오자 몸에서 구체적인 증상이 나타났다. 기침이 나고 툭하면 피곤이 몰려와 자리에 눕는 것이다. 처음에는 새벽장사 하느라 피곤이 누적돼 나타나는 증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병원 의사의 말은 달랐다. 폐에 분진이 잔뜩 쌓여 나타나는 현상으로 위험수위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다.
생각 끝에 나는 그곳을 그만두고 말았다. 처음으로 내 의사로 직장을 그만 둔 것이다. 백수가 된 나는 당분간 두문불출하고 몸조리에만 신경썼다.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현실은 참으로 비참했다. 외로움과 슬픔으로 우울증 환자가 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왜 가족구성원이 되어 사는지 결혼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때 나는 인생 최대 절망을 느꼈다. 부지불식간에 외로움이 몰려오면서 나는 또다시 취직을 결정했다. 집에서 가까운 전자 대리점에 취직이 된 것이다. 정식 직원이 아닌 임시직원이었지만 성실히 일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과의 정을 느꼈다.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고 기도와 물질로 도와주는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다소 까다로운 사람을 만나도 친절과 정성으로 대하는 주인 내외는 바로 내 엄마를 신(神) 앞으로 인도한 구역장이었다.
그들에게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녹이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싸우려고 목숨 걸고 달려드는 사람도 구역장 말 한마디면 스스로 뒤로 물러나면서 웃었다. 손해 입히고 해코지 하는 사람들에게도 악담 한번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세한탄 하며 매달리는 사람들에게도 결코 외면하는 법이 없었다.
“좋은 사람 만나 살다 보면 과거의 상처도 원한도 눈 녹듯이 사라지는 법이란다.”
어느날 부부는 내게 그런 말도 했다. 정말 그럴까.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와 줄까.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심정으로 나는 갈급해 했다. 엄마만 살아 있었어도 괜찮을 텐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매장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용산에 있는 전자랜드에서 일하는 남자였다.
작년에 사업에 실패했다가 친지의 도움으로 간신히 재기에 성공한 그는 작달만한 키에 선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할 때마다 과일 봉지나 군것질 거리를 내밀었다. 이게 다 사람 사는 정 아니냐며 주인 내외와 친분 있게 지냈다. 얼마 전에는 주인 내외의 소개로 교회에 나간다고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적었는데 여적 미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동안(童顔)이었다. 실패를 많이 한 그는 모아 놓은 재산은 없지만 사람 하나는 진국이라며 주인 내외는 은근히 내 의사를 물었다.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한 내가 봐도 그는 성실하고 착했다.
어느날 그는 재산과 학벌만 노리는 여자들에게 신물이 났다며 내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해왔다. 이미 짐작하고 준비하고 있던 터라 나는 순순히 그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인생은 여행과 같아요, 그쵸?”
“네?”
그는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긍정의 뜻으로 알고 좋아했다. 그의 나이 36세 내 나이 38세 때였다. 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나로선. 아님 행운이었을까.
결혼이 내겐 모험이자 여행의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그 지긋지긋한 직장생활로부터 해방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내가 결혼 전제 조건으로 맞벌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내 나이 38세에 이르는 동안 나는 무수히 많은 직장을 거쳤다.
여고를 졸업한 20대 초반부터 개인 사무실 경리, 백화점 알바, 건설회사 임시직원, 대형 음식점 주방 보조, 사진관과 구두 제화점 점원, 심지어 대형 사우나와 찜질방을 겸하는 곳에서 창구 여직원까지 했다. 한때는 영화관이나 국립극장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나이와 외모가 미달되는 바람에 포기한 적도 있었다.
전문직종이 아닌 단순직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학력이 낮은 때문도 있었지만 내 머리가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밀하지 못한 내 두뇌가 상황판단에 둔감한 데다 복잡한 일을 처리 하기에는 능력 부족이었다. 그러니까 내겐 단순노동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눈치코치 없고 소견까지 좁아 대인관계에 영 젬병이었다. 그래도 나는 직장을 자주 옮길망정 그저 앉아서 시간을 까먹거나 놀고먹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자주 직장을 옮기는 동안 많은 인생 경험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직종에서 일할 때마다 사람 보는 안목과 더불어 색다른 경험이 하나씩 추가되는 것이었다.
인생은 복잡미묘 해도 다양한 재미거리가 있었다. 여행 갈 때마다 느껴지는 생경함과 드라마 같은 현실이 무궁무진하게 산재해 있었다. 세상은 악인과 선인이 모여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는 세트장 같았다.
남편과 나는 그 세트장 위에 이제 막 올라선 것이다. 이전에는 혼자 세트장을 누비고 다녔기에 외롭고 다소 공포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이젠 두 사람이 뭉쳐 다니니 덜 심심하고 덜 외로웠다. 결혼한 지 일년 만에 나는 아들을 낳았다. 신기하게 아기는 나와 남편을 반반씩 닮았다.
그러나 커갈수록 시가(媤家) 쪽을 더 많이 닮아 잘생겼다는 소리도 제법 들었다. 더구나 아이는 시가에서 유일한 독자였다. 시아주버니는 사내 조카를 보게 돼 기쁘다며 특별 선물로 아이를 위해 교육보험을 들어주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때마다 참견을 하며 시어른 행세를 했다.
남편의 사업은 겨우 겨우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불황 타령을 하며 상가에 비어가는 점포가 늘어난다며 울상을 지었다. 아이가 막 유치원 다닐 무렵 나는 할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직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앞으로 들어가게 될 아이의 교육비를 벌기 위함이었다.
시아주버니는 조카의 교육을 위해서는 제수씨가 집안을 지켜야 한다고 참견을 하고 나섰지만 그게 어디 나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는가. 다 자기 조카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 특별한 기술 없는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선택하는 것이 장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사도 다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무작정 뛰어 들었다가 낭패 본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던가. 나는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옷장사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워낙 중국산이 대세인지라 얼마 안 가 실패하고 말았다. 다음엔 조그만 분식점을 열었는데 고생만 죽어라 하고 6개월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다음은 백화점 음식점에서 알바를 했고 힘들어 그만 둔 뒤로는 아이 교육에만 매달렸다. 그 사이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 신세대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닦달을 해도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어하는 눈치였다. 못 배운 내 설움과 집안의 독자라는 구실을 내세워 별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아이는 공부를 싫어했다.
어릴 때 내 모습과 꼭 같았다.
나를 닮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걱정하고 걱정하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자 남편은 실망한 말투로 말했다.
“우리 집안에 저런 아이는 없었었는데…….”
남편과 내가 뛰던 세트장에 아이가 올라온 다음부터 훨씬 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삶이 힘들고 분주해질수록 나는 어떤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실패와 성공, 손해와 이익, 현재와 미래라는 공식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면서 생겨난 증상이었다.
팍팍하고 건조한 심성으로 바뀌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어느날 내 의식 속에 ‘삶은 여행이다’란 공식 대신 ‘삶은 전쟁이다’란 공식이 자리 잡은 것을 보았다. 그렇구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승패의식에 사로잡혔던 거구나.
무능력이라는 한계를 절감한 나는 어느 날, 아이의 인생을 절대자에게 의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봐야 소용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학원도 특수 과외도 다 끊고 나자 아이는 날아갈 듯이 즐거워했다. 매일 밤이 맞도록 나가 뛰어 놀았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말하기도 했다. 햇볕에 얼굴과 팔 다리가 까맣게 그을어 아프리카 토인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놀 수 있을 때 마음껏 뛰어 놀아라.
욕심을 다 내려놓자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공휴일이면 가족 모두 인근에 있는 산으로 놀러갔다. 낙엽을 밟고 정상으로 올라서자 산 아래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들어찬 집들과 건물 사이로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인생의 단면이 각각의 모양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 아래 세트장 에 인생의 군락이 생노병사 희노애락의 형태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엄숙한 삶의 논리를 가지고서 저마다의 성과를 자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수많은 직업을 가지고 경제 논리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산 정상만 올라와도 마음이 탁 트이고 살 것 같아요.”
“그러게나 말야, 이렇게 산 정상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니까 산다는 게 참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게나 말예요 사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긴데 서로 물고 찢고 싸우고…….”
“생각해 보면 다 일장춘몽인 걸, 왜 그때는 그렇게 아등바등 거렸는지, 다 지나고나면 허무한 것을.”
“산다는 건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잘 될 때가 있으면 안 될 때가 있고 일할 때가 있고 쉴 때가 있는 것처럼.”
“그보다는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일의 결국은 절대자의 몫인 거야.”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는 말이 참 마음에 들어요, 끝까지 완주해야 할 숙제와 같은, 실패나 역경이 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말이 참 실감 나요.”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도 당신 만나기 전 컴퓨터 대리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만 말아 먹었지 뭐야, 조립식인가 뭔가가 생겨나는 바람에, 그래서 한때 엄청 고비를 겪었지만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었는지 다시 일어서게 되더군.”
“전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직장을 다녔어요, 낮은 직종으로부터 시작해서 별별 걸 다해 봤어요, 처음엔 약간 슬펐는데 나중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다양한 경험과 이력이 붙으면서 나중엔 자신감까지 생기더라구요.”
“그것 참 긍정적인 사고군.”
“인생은 여행과 같아요,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내맡겨 보는 어쩌면 그건 모험과도 같지만 삶에 대한 새로운 재미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프로포즈 했을 때 인생은 여행과 같다고 한 거군.”
남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운동기구 앞에서 나란히 운동 하던 중년부부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40대 초반으로 얼굴과 몸매가 꽤 미모였다. 남자는 작달만한 키에 배가 잔뜩 나와 꼭 작은 하마 같았다. 게다가 얼굴에 얽은 자국에다 인상까지 험해 한눈에 보기에도 언밸런스 쌍이었다.
“여보 지난날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영화 한편을 보고 난 느낌이야,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난 정말 험난한 인생길을 살았지, 마치 막가파식으로.”
남자가 아내의 팔을 자기 어깨 위에 두르며 말했다.
“인생을 굳이 승패로 가르자면 진실이 승리한다고 봐요, 거짓은 결국 힘을 잃고 그 정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퇴장하니까요.”
“어! 당신 제법 철학적인 데가 있는데.”
“내가 당신을 왜 선택한 줄 아세요? 진실 때문이었어요.”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당신을 만나기 이전까지 난 극심한 피해의식에 싸여 살았어요, 아무도 내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저 간단하게 속이려 들고 쓰기 편한 살림도구나 몸에 걸치는 액세서리 정도로 알고서는…….”
“그게 다 당신이 미인에다 재능까지 겸비했기 때문이지, 남자들은 다 욕심꾸러기 거든.”
남편과 나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두 사람은 부부가 틀림없었다. 또 언밸런스이긴 하지만 사이도 좋아 보였다.
“여보, 우리 결혼하기 전에 본 영화 ‘바람의 파이터’라고 생각나세요?”
“응 일본 가라데의 명수 최배달.”
“네, 저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요, 그가 남긴 마지막 대사 당신 기억해요?”
“그걸 어떻게 기억해? 벌써 다 잊었지.”
“전 생각나요, 난 싸우는 게 두렵다, 시합에 나가기 전 난 몸을 씻고 또 씻는다. 왜냐하면 싸우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내 마지막 모습이 더러워서 되겠는가. 싸우다 병신이 될까봐 두렵고 폐인이 되어 평생 자리에 누워 살게 될까 봐 그래서 더 두렵다. 사실 난 싸우고 싶지 않다. 그러함에도 난 매번 새로운 강적을 찾아 떠난다. 마치 운명처럼.“
나도 언젠가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직장을 강제로 쫒겨 나 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찾아간 극장에서였다. 그때 머리칼을 앞으로 길게 늘어뜨린 최배달이란 무도인이 황소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일본 무도인들을 무릎 꿀렸다. 그는 적들에게 협공을 당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면서도 항상 당당했다.
매번 혼자서 맨손으로 싸우는 그에게 일본 사무라이들은 단체로 칼을 들고 덤볐다. 싸우지 않기 위해 숨어든 그를 치사한 누명까지 씌우며 싸움을 걸었다. 그는 겉보기에 영웅이었지만 속은 겁많은 겁보였다. 마치 나처럼.
나는 겉보기에 씩씩한 여장부 같았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나약한 소심증 환자였다. 삶이라는 무게를 견디다 못해 매번 쓰러지고 마는 무능한 겁보였다. 만일 신(神)이 내게 손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파멸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가장 약할 때 강함으로 역사했고 가난하고 무능할 때 힘을 부어 주었다.
죽음의 벼랑 끝에 매달려 신음할 때 내 신음소리를 듣고 달려와 주었고 외로울 때 평강을 슬플 때 기쁨을 주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언제나 내 곁에함께 있어 주었다.
악마는 항상 실패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나를 공격했다. 나는 평화 협정을 원했지만 악마는 먼저 공격의 화살을 퍼부어 댔다. 삶은 맞닥뜨려야 할 거대한 벽이었다. 마치 허들 경기처럼 매번 장벽이 되어 나타났지만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매번 뛰어 넘게 했다. 뛰어 넘고 나면 새로운 현실이 드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삶을 리허설 하는 것처럼 살았다. 심각한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리허설 중에도 진실은 있었다. 인생은 신(神)이 내려준 시간 여행이었다. 세월을 타고 다니면서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이 세상에서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생각해 보면 아픔도 시련도 많았지만 각색 경험으로 재미있는 인생길이었다.
여행하듯 많은 직장을 전전한 것도 행운이었다. 청계천 도매시장에서 잠시 새벽장사를 하느라 건강에 차질이 생긴 것 말고는 병고(病苦)로 자리에 눕지 않은 것도 신의 은총이었다.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굶주린 적도 없었고 화려한 로맨스는 없었지만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룬 것도 복이었다.
스산한 가을 바람에 낙엽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갈색과 샛빨강 샛노랑이 수북이 발밑에 깔리면서 세월이란 단어를 자꾸 연상케 했다. 산을 오가는 사람마다 세월 참! 하며 알 수 없는 탄성을 질러댔다. 또한 대자연을 화려한 색채로 연출해 낸 신을 향해 연신 찬탄해 마지 않았다.
세월은 가끔 후회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하지만 책임의식을 일깨우기도 한다. 낙엽이 쌓인 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면서 말했다.
“난 우리 아들을 누구보다 씩씩하고 강하게 키우고 싶어요.”
“물론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때였다. 누군가 내 곁을 지나며 내 얼굴을 흘끔 바라봤다. 그러더니 쏜살같이 내리막을 달려가는 것이었다. 뒷 모습이 좀 전의 운동기구 앞에서 대화하던 남자같았다. 그런데 그의 옆 모습이 어딘지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처녀 때 직장생활 할 때 만난 사람인가. 아님 남편이 하는 사업장 거래처 사람인가.
의문도 잠시 여자가 남편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같이 가요, 승우씨 승우씨.”
승우? 나는 기억 속의 파노라마를 점검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찬바람이 목을 휘감고 지나갔다.
“엇 추워.”
남편이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눈이 오려는지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습기가 몰려왔다. 순간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엄마, 빨리 와 나 배고파 죽겠단 말야.”
“응 알았어 아들 엄마 곧 갈게.”
매일 함께 산에 오르던 아들이었는데 시험 때라 집에서 공부하라 했더니 그새를 못 참아 야단이 난 것이다. 놀기에 지친 것일까. 아님 실컷 놀고 나니 공부가 그리워진 것일까. 아들은 요즘 따라 책을 들여다보면서 효자 노릇을 했다. 남편과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 시장에 들러 찬 거리를 샀다.
아이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어묵 돈가스 만들 재료도 샀다. 묵직한 보따리를 들고현관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 맞아 그 사람 이승우.”
“뭐? 이승우 그 사람이 누군데?”
남편의 눈빛이 의심으로 가득 차면서 다그치듯 물었다.
“그 작자가 누군데? 혹시 당신 옛 애인?”
“애인은 무슨? 좀 전에 우리 산에 갔을 때 운동기구 앞에 있던 그 부부 말예요.”
“그런데?”
“아 아니에요.”
내가 멈칫거리자 남편이 말했다.
“왜 말을 하다 말고 그래 마저 하지, 왜 그 부부 잘 알아?”
“알긴 요, 그냥 옛날에…….”
“엄마 나 배고파 떡볶이 해줘.”
아들이 팔에 매달리면서 말했다.
“알았어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들 해주려고 떡볶이 사 왔어.”
“정말?”
“어이구 저 녀석은 늘 제 엄마밖에 모르지.”
방안에 들어서자 TV에서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청년 실업층이 날로 늘어 별별 희한한 단어가 다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펭귄족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 연로한 부모에게 얹혀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가 하면 날로 줄어드는 일자리로 인해 취업전쟁이란 말도 등장했다.
따라서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 아닌 취업준비소로 변해가고 있었다. 가령 대학 유치에 나설 때마다 취업 75% 85% 하는 식으로 홍보하는 것이었다. 캠퍼스에서 인문학이 사라지고 취업 잘 되는 과를 골라 지원하는 것도 추세였다. 나는 프라이팬에 떡볶이를 끓이며 말했다.
“우리 아들 이담에 뭐 되고 싶어?”
“나는 고속버스 운전사.”
“뭐? 고속버스 운전사라니? 왜?”
“응, 고속버스 타고 막 신나게 운전하면서 여기 저기 여행하고 싶으니까.”
“뭐어?”
남편과 나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인생은 여행과 같은 것이니까, 그래도 말이다 일단 공부는 열심히 하고 나서 고속버스 운전사가 되던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던가 해야지.”
“음 나는 고속버스 운전사도 되고 비행기 조종사도 돼서 미국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 그럴 거야, 그러면 여행은 공짜로 할 수 있잖아.”
“그렇지 공짜로.”
나는 아이의 기막힌 발상에 그저 입만 딱 벌릴 뿐이었다. 드디어 떡볶이가 완성돼 식탁 위에 올려지자 아이가 다시 말했다.
“엄마 나 미국 갈 때도 이 떡볶이 싸줘 알았지.”
“그래 알았으니까 떡볶이 먹고 나서 공부나 열심히 해.”
“또 공부 타령하시네.”
아이는 입을 삐죽이더니 포크로 떡볶이를 낼름 집어먹었다. 그 모양을 보더니 남편은 혼잣말로 말했다.
“그 엄마에 그 아들이지, 여행 좋아하는 거 보면.”
TV에서 만화 영화가 시작된 모양이다. 남편과 아이가 자리에서 퉁기듯 일어나 TV 앞으로 다가갔다. 어린이 로봇 전쟁 영화가 한참 실감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최첨단 과학 무기가 불을 내뿜으며 신나는 음악과 함께 악과 선의 대결이 종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소형 인생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의 입에서 아! 하고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꽈광! 하고 악이 종말을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리가 어둠을 이기고 승리하는 소리였다. 바람의 파이터에서 최배달이 사무라이를 이기고 승리한 것처럼.
그때 내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네가 어둠 속을 걸어 갈 때도 나는 늘 너와 함께 했단다」
돌아서는데 또다시 내 안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노라」
끝
첫댓글 즐거운 여행 고맙지요.
우리 인생의 길은 어쩌면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