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는 아름답다. 문명에 찌든 우리들에게 원시는 항상 무한한영감과 상상력을 제공한다. 1970년 12월 25일, 동국대학교의 불교미술사학자인 문명대교수는 울산지역의 불적(佛跡)조사를 진행하던 중, ‘삼국유사’의 기록에 원효대사가 공부했다고 하는 반고사(磻高寺) 유적지를 찾고 있었다. 옥개석과 탑신만 뒹굴고 있는 강변 논두렁의 폐허를 찾았을 때, 안내를 맡았던 집청정(集淸亭)의 최노인이 강 건너 바위절벽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마애불일 것이라고 생각되어 달려갔을 때 한 장의 거석이 이끼와빗물로 덮여있었는데 자세히 헤쳐보니 이상한 기하학적 문양과고졸한 명문이 20여 줄이나 천여년의 침묵을 깨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전율과 경이의 순간, 이것이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암각화를 발견하게 되는 최초의 계기였다.
이곳을 천전리(川前里) 서석암각화(書石岩刻畵)라고 부른다. 사실 이곳의 최초의 발견자는 문명대교수가 아닌, 법흥왕의 친동생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었다. 때는 525년, 그는 사랑하는애인 어사추녀랑(於史鄒女郞)과 함께 이곳으로 놀러왔다가 그곳을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짓고 명문을 남겼던 것이다. 그 후사부지갈문왕은 형 법흥왕의 딸, 그러니까 여조카와 결혼하여 아들 심맥부지(深麥夫知)를 낳았다. 이 심맥부지가 바로 신라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진흥왕이란 인물이다. 사부지갈문왕은 이곳에놀러온지 12년 후에 죽었다. 사부지갈문왕이 죽은 2년 후, 그의부인은 애달프게 그리운 남편의 젊은 시절 로맨스가 서린 이곳에아들을 데리고 와서 추모의 제식을 올린다. 7세의 어린 아들은그 해 겨울 왕위에 올랐다.
명문이 정확하게 해석될 수 있는 한도내에서는 더 이상의 사실을말하기 어려우나 왕권계승을 둘러싼 매우 복잡한 로맨스가 얽혀있는 것 같다. 사부지갈문왕의 부인이 왕위에 오를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온 시점은 바로 법흥왕이 서거하기 직전이었다. 이곳은 국가중대사를 앞둔 그들에게 있어서 어떤 성스러운 제식의 장소였을 것이다.
문명대교수는 다음 해 겨울, 그러니까 1971년 12월 25일 다시 이곳 서석(書石)을 찾았을 때, 그 계곡으로부터 2㎞ 정도의 하류지점에 동네사람들이 ‘그림바위’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암각화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유적으로서는 가장 사실성이 뛰어나고 이 땅의 고대인의 삶에 관하여 가장 밀집된 정보를 제공하는 대곡리(大谷里) 반구대(盤龜臺)의 암각화의 발견이다. 6m 폭에 3m 높이의 바위절벽은 움푹 파여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신성한 서기가 맴돌고, 그러기에 또비바람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어로, 수렵, 농경의 시대적변천상이 겹쳐있는 300여 점의 도상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이다.시베리아·몽골 지역에 유사한 암각화가 분포되어 있지만 반구대야말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암각화로서는 가장 밀집된 형태이며 또 완정한 형태로 보존되어 내려온 것이다. 인류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는 세계문화유산인 것이다.
경주의 찬란한 불교문화유적의 총화보다도 이 한 폭의 바위그림이 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역사시대의 개화를 가능케한 이 땅의 뿌리, 그리고 진실한 이 땅의 삶의 모습을 이 그림은 가식없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암각화주변에는 공룡발자국의 화석이 흩어져 있어 1억만년전 백악기전기의 ‘쥐라기공원’의 모습을 리얼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이야말로 인간의 기억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내려왔던 이땅의 뿌리, 아마도 환웅이 하강한 태백산 신단수의 위치를 우리는 관념적으로 묘향산이나 백두산에 설정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울산지역에 비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해금강의 기암절벽을 무색케만드는 울기등대 앞 대왕암의 장관으로부터 시작되는 태화강의용틀임은 바로 이곳 아홉구비 구랑(九浪)의 대곡천(大谷川)에 이르러 용머리의 생명력을 분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명대교수님의 반구대 암각화 발견소식을 들었던 31년전당시 매우 신비로운 충격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곳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로맨틱한 동경이 내 의식의 저변에 늘 깔려있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울산은 나의 삶의 세계에 있어서너무도 머나먼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 외유(外遊)의 장정에올랐고 태고의 신비에 대한 간절한 동경은 일상의 굴레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전에 반구대를 사랑하는 시민연대(반사연)라는 모임에서 나에게 에쓰오에쓰 전문이 왔다. 반구대의 마멸과 훼손이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극심한 상태에 있으며, 더구나 울산시청에서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구랑의 굽이치는 계곡에 자연스럽게조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길을 자동차의 교행이 안된다는 명분으로도폭 8m짜리의 거대도로로 개조하고, 그곳 깊숙한 지점에 대형버스 80대가 주차할 거대주차장을 만들고 교각 등을 보수하여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손쉽게 드나들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계획을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 강행하려 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세계암각화의 비교진열을 통하여 반구대암각화의 세계사적 의의를 체험케하고 선사인의 고래잡이를 소개하는 선사문화전시관을 그곳에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진입도로확포장사업에 45억, 원시문화산책로 설치에 43억, 선사문화전시관 건립에 73억원의 국비·지방비 예산을 확보해 놓은 터인지라오로지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홀로 가보았던 강원도 두메산골의 아름다웠던 오죽헌, 신사임당의 고운 바느질 숨결조차 느낄 수 있었던 그 살랑이던 오죽의 광경이 너무도 무자비한 대형주차장속에 파묻혀 버리고 만 참담한 모습에 통한의 눈물을 떨군 기억이 있다. 그리고그러한 통한의 눈물은 개발독재 시대때부터 줄곧 이어진 모든성역사업지, 관광자원개발지에 뿌려져야만 했다. 왜 이다지도 우리는 우리의 국토에 몽매한 짓을 하고 있는가? 과연 누구를 위한일이며 무엇을 위한 일일까?
지난 9일 새벽 첫비행기로 나는 울산에 도착하였다. 나의 생애에있어서 처음 가보는 설레이는 초행길이었다. 반사연회장 이재호선생의 안내로 곧바로 나는 태화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는 대곡천반구대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나는 국도변에 차를 세우고 시청관광과에서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하는 2.33㎞의 길을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대도시의 소음과 공해로부터 차단된 원시의 아름다움이 간직된 아담한 계곡의 꾸불꾸불한 길이 계속되었다. 비경이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선생이 귀양살이했던 이곳을 기념하여숙종년간에 세워졌다는 반구서원(盤龜書院)을 지나 반구대 암각화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너무 불행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이는 신라의 영성을 재현하려는것이며 민족재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백년대계의 보고를마련하는 것이니….”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씨가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이 연설문을 낭독한 것이 1962년 2월이었다.그리고 식수와 공업용수를 조달키 위하여 태화강 상류에 사연(泗淵)댐을 조성한 것이 1965년, 문명대교수가 암각화를 발견한 것은 1971년이었다. 이미 암각화가 사연호에 수장된 후였다.
그러니까 반구대 암각화는 겨울 갈수기 3·4개월을 제외하고는내내 물속에 잠기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3천여년 이상의 풍화작용에 의하여 표면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고 박리의 위험이 심한상태에서, 8·9개월 물속에 잠기었다 또 3·4개월 대기에 노출되는 현상이 매년 반복되면서 결빙과 해빙에 의한 마멸과 박리현상이 가속화 되고 있는 것이다. 암석이 물에 잠기면 높은 수압으로물이 암석틈 사이로 침투하여 틈을 넓게 하고 또 물이 빠지면 압력감소와 탈수현상으로 인하여 암석에 금이 가고 강도가 약해지는 것이다. 1970년대 황수영·문명대가 제작한 탁본과 현재의 암각화면을 비교하여 보면 암석의 파손이탈, 마멸현상이 이미 너무도 끔찍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유적으로서 알타미라동굴벽화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니는이 위대한 세계문화유산이 30여년동안 이런 방식으로 방치되어온 상태에서 관광자원화를 위하여 관광도로부터 내겠다고 수백억원의 예산집행만을 서두르려는 관계자들의 인식체계에 대하여 나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반구대 암각화를 울산의 문화적 심벌로 내세워 울산시민의 프라이드를 고양시키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려는 선의는 충분히 료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관광자원화의 모든 계획은 하루하루 끔찍하게 마멸되고 파손되어 가고 있는 암각화의 보존대책이 완벽하게 수립된 이후에 논의되어야 할 사항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도로를 내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는 전혀 부차적인 사항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울산시청에서도 이런 문제에 관하여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단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는 각기 국보 285호와 147호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보존대책이중앙정부와 국비의 문제에 귀속되어 있고 그 결정이 쉽사리 내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방행정자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관광자원화계획만을 독자적으로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 보존대책에 관한 사안으로서 1) 암각화주변으로 차수벽을 만드는 것 2)유로(流路)를 변경하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3) 댐수위를 낮추는 것의 세가지가 제기되었으나 내가 보기에 이어느 대책도 미봉책에 불과하여 암각화보존의 현실성이 없다.그만큼 암각화는 현재 매우 취약한 석질의 상태에 놓여있으며 매우 얕은 음각으로 조각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정도의 대책으로는 습기, 산성비, 오염, 결빙 등 급속히 진행되는 자연훼손상태를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내가 판단컨대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두가지 밖에 있을 수 없다. 그 하나는 사연댐을 없애버리고 그지역을 자연적 흐름의 상태로 회복시키고 보존책을 마련하는 것이지만, 울산광역시의 급수체계를 생각할 때 과연 그것이 어느정도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나는 판단키 어렵다. 사연댐 위로 또다시 거대한 대곡댐이 건설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대곡댐만의 활용으로 소기의 급수대책이 이루어질 수 있거나 다른 방식의공업용수활용방안이 수립될 수 있다고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집트 나일강의 아부심벨 신전의 상황처럼 반구대 유적 그 자체를 옮기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이 암석의 온전한 절단·분리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암면을 떼어내어 보존하고 오히려 그 원래의 자리에는 모조품을 세우는 것이다. 내가 생각키에는 후자의 방법이 기술적으로 반구대 암각화를파손시키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다고만 한다면, 가장 현실적이며항구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반구대 암각화는자연상태에 노출된 상태에서는 수년내로 곧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자리 그 모습을 고집하면 너무도 좋겠지만 그 모든 방식은 이제 사치스러운 공염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절박하다.
만약 보존대책이 암각화 그 자체를 이전·복원시키는 것이라면관광자원개발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담론이 되고 말 것이다.분리시킨 암각을 보존하는 전시관을 어디에 세우느냐에 따라 그의미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피카소의 ‘게르니카’ 한점이 맨해튼의 모마(MOMA, 현대미술관)를 그토록 빛내었듯이, 이 암각화야말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시내한복판의 위대한 박물관의 소장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시는 원시 그대로 자연적 기의 흐름은 흐름 그대로! 인위적 손길을 줄이면 줄일수록 위대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 청계의 맑은 물을 복원하려고 하고 있는 판에 우리나라에서가장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지방도시 울산, 그리고 서울을 능가하는 문화도시 울산이 개발논리의 관광을 서두른다는 것은 너무도 참담한 우치의 소행이다. 개발은 새발! 이제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이 유기체적 삶의 보전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판에 또다시 씁쓸한 입맛을 안겨줄 뿐인 기계적 물질문명의 겉치레 우행을 삼가하고 21세기 한국의 싱싱한 동맥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울산의 위대한 미래를 위하여 가슴을 열고 머리를 좀 말랑말랑하게 돌리면어떨까? 울산 강호제현들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