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 이야기 (2)
어제(음력 10월7일)는 인동장씨 종통을 이어오신 15세 풍저창승(豊儲倉丞)공 (휘 俌) , 16세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공 (휘 孟儲) 의 묘제가 있는 날 이았다.
이날 묘제는 석원 대종손을 비롯한 병홍 종파 회장 등 후손 60여명이 참석을 하였으며, 일부 문중 어르신의 경우 앉아있다 일어 서기 조차 힘겨운 구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참석을 하셔서 헌관 까지 맡아 자손 된 소임을 다해 주시니 이 어찌 젊은 후손들에게 모범된 본보기가 되지 않았겠는가?
教育爲千秋大業(교육위천추대업),
교육은 천년 가는 큰 사업이고
賢能乃百代楷模(현능내백대해모)
도덕과 재능은 백대를 거쳐가는 본보기 이다
- 자재어 / 성엄범사 -
참으로 조상을 섬기는 지극한 마음 자세로 이보다 더 좋은 본보기가 없을 것이며, 이보다 더한 교훈 되는 가르침은 없을 것이다.
이날 원근 각처에서 모여든 후손들이 풍저창승공 묘하재인 진목정에 모인 시간이 오전 9시, 이곳에서 시도가 이루어지고 또 집사분정이 이루어 졌다.
묘소가 있는 곳은 승용차로 대구를 출발하여 중앙 고속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에서 내려 멀지않은 곳으로 풍저창승공의 묘소가 있는 곳은 유학산 ( 遊鶴山)이다.
이곳 遊鶴山은 해발 8백여 미터가 넘는 고산으로 이름 그대로 치면 놀유(遊)자에 새학(鶴)자 이니 멀지 않은 곳 낙동강을 서식처 삼아 유유자적 학이 오가며 노니는 곳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 산수화 같은 자연 경관을 생각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낭만적 이름과는 달리 동족 상잔의 아픔을 간직하고 그 아픈 상처를 품어온 산으로 임란 때는 왜놈의 한양 진격의 길목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四郊未寧靜(사교미녕정)
사방이 안정되지 않아
垂老不得安 (수노부득안 )
늙은이 편안할 수가 없네
子孫陣亡盡 (자손진망진)
자손들이 모두 전사했는데
焉用身獨完 (언용신독완)
어찌 이 몸 홀로 온전하길 바라랴
投杖出門去(투장출문거 ))
지팡이 던지고 문을 나서니
同行爲辛酸(동행위신준)
동행도 나를 보며 마음 아파 하네
- 三別三吏 中 垂老別 / 杜甫 -
또 6.25에는 해발 800여 미터의 지리적 조건에 금오산과 유학산 사이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인민군과 마주 하니
나라의 존립을 건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등뒤에 있는 팔공산과 대구 광역시를 지켜야 하는 전초기지가 되어 그 유명한 다부동 전적지의 현장이 되었던 곳이란다.
유학산은 팔공산에서 지맥의 한줄기가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을 만나 그 흐름이 멈추어 마지막 한 점을 찍었으니 그 곳이 바로 유학산인 것이다.
이 곳 유학산에 위치한 풍저창승공의 묘소는 유학산을 등지고 동으로 향하고 있으니 멀리에 마주 하는 안산이 곧 팔공산이요
그 옛날 우리 장문의 종통을 이어온 풍저창승공의 음택으로 사회적 위치나 비중에 잘 어울리는 길지를 택해 잡은 명당의 은혜로 자손 또한 번성했으니
후손된 자로 이곳을 찾아 참배를 드리는 것 만으로 금시발복이 되어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길지란다.
見祖子孫三世慶(견조자손삼세경)
조부,아들,손자를 보니 삼대의 경사요
仰仁壽貴百年期(앙인수귀백년기)
어짊,장수,귀함을 높였으니 백년의 바램이더라.
-菖窩集 -
묘하재인 진목정에서 산소 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올해 또 이렇게 많은 후손들이 참여해 묘소를 채웠으니 기쁜마음 한량 없으실 것이다.
먼저 도착한 유사와 진설을 맏으신 분이 몸을 바삐 움직여 진설이 이루어지고 영래 종인의 집럐로 예를 올렸다
초헌에는 석원 대종손이, 아헌은 인희 , 종헌은 성규, 축에는 성택, 좌우 집례는 용범. 헌동 그리고 산신위는 헌관에 춘수 축에 의식 종인이 소임 맡아 묘제를 올렸다.
픙저창승공 묘제가 끝이 나고 산소 바로 아래 위치한 풍저창승공의 6대손 되는 심곡(휘 제원) 선생의 묘제는 용규 종인의 집례로 진행이 되었으며 초헌에는 성규 주손이 아헌에는 인헌, 종헌에는 영옥 , 축에는 용태 종인이 좌.우 집사는 영호.용범 종인이 소임을 맡아 잔을 올렸다.
특히 아헌과 종헌의 소임을 맡아 잔을 올린 인헌 종인과 영옥 종인의 경우 연세가 89세와 90세로 험한 산을 올라 조상의 묘소를 찾으셨기에 조상에 대한 지극한 향념에 더해 그 정신과 체력이 타의 귀감이자 모범이 되었기에 두 분 원로 종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드린다.
그렇게 풍저창승공과 심곡 선생의 묘제가 끝이 나고 음복례를 가진 후 참석자 전원에게는 각각의 봉지가 나누어진 후 다시 진목정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예상을 뛰어 넘는 참석율에 점심이 모자라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는데
식사를 못하신분의 입장을 고려하면 다소 아쉬움이야 있겠지만 이 또한 참석울 초과로 인한 기분 좋은 해프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식후 다시 자리를 바꾸어 시제를 드리러 간 곳은 통례문통찬공의 묘소로 풍저창승공의 묘소에서 승용차로 가면 대략 20여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이곳의 묘하재는 삭제재로 그 유명한 삭제동에서 유래 하였는데 삭제동은 통례문통찬공의 아드님인 적손.신손 두분 형제가 부친상을 당하여 지극 정성으로 3년 시묘살이를 하면서 그 일화와 효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래된 이야기로 삭제동에 관한 이야기는 추후 기회흘 봐서 다시 설명을 올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코자 한다.
孝爲百行之源也(효위백행지원)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人得養生喪葬之宜(인득양생상장지의)
사람으로서 부모가 살아서는 봉양을 잘 하고 죽으면 장사를 잘 지내서
以盡事親之道然後可謂孝也
(이진사친지도연후가위효야 )
어버이 섬기는 도를 다한 뒤에 효도라 할 수 있다.
- 孝 / 李詹 -
유학산 정상을 두고 아버님 되시는 풍저창승공은 유학산의 지맥이 동으로 이어진 곳에 또 아드님 되시는 통례문 통찬공은 유학산 지맥이 서쪽으로 흘러 내린 곳에 자리 했으니 부자간에 유학산 정상을 서로 등지고 있는 셈이다.
이 곳은 역시 풍수적 명당의 기운이 왕성한 곳으로 이 곳을 찾는 그 누구나 탄복해 마지않는 대명당 이라는데 산세는 말힐 것도 없고
구미(인동)을 지나면서 유유히 남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남구미 IC 부근에서 일시 산을 만나 한번 굽이치니 동으로 물길의 흐름을 꺾어 입수가 되어 흘러 들어 오는 향국이니 이 또한 어찌 길하지 않겠는가?
이곳에는 일부 진가파 종인이 오후 자파 지암공 묘사로 빠지고 남은 인원이 잔을 드렸다.
이 곳 묘소의 배치도 상하가 아닌 앞과 뒤의 배치 구조인데 통례문통찬공의 묘소가 잎에 위치해 있고 배위인 성산이씨 묘소가 40여보 정도 뒤쪽에 위치해 있는 구조인데 역시 강신만 하고 같이 잔을 올렸다.
이런 경우 묘사를 별도로 지내거나 같이 지내는 기준이 있다고 하는데 이마도 100여보를 기준에서 그 범위를 넘으면 별도로 진설을 하고 잔을 올리게 되고
두 묘소의 거리가 100여보 이내인 경우 강신만 하고 별도의 진설 앖이 같이 잔을 드린다고 한다
통례문통찬공의 묘제는 택현 청장년회 회장의 집례로 진행 되었으며 초헌은 석원 대종손 , 아헌은 인희 옥계서원 운영위원장 , 종헌에는 기호 종파 총무, 측은 영래 옥산미래포럼 회장, 좌,우집사에는 헌동 .용범 종인 산신위는 헌관에 병구, 축은 성기 종인이 소임을 맡아 잔을 올렸다.
그렇게 풍저창승공과 통례문통찬공 그리고 심곡선생의 묘제가 마무리 되었다
難得糊塗(난득호도)
어리석게 살기 어렵다.
聰明難 糊塗難(총명난 호도난)
총명하기는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
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유총명이전입 호도갱난)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게 되기는 더욱 어렵다.
放一着 退一步 當下心安(방일착 퇴일보 당사심안)
집착을 버리고 한걸음 물러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며,
非圖後來 福報也(비도후래 복보야)
뜻하지 않고 있노라면 후에 복으로써 보답이 올 것이다.
- 鄭燮 -
입동의 길목 만추의 가을빛은 짧기만 하여 그렇게 또 하루 해가 저물어 긴 산 그림자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