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정경태옹 별세
조선일보 입력 2003.12.31. 16:52
석암 정경태
중요무형문화재 가사(歌詞) 예능보유자인
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87)씨가
31일 오전 4시50분 서울 자양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정씨는
조선 선비의 기개와 풍류가 흐르는 ‘백구사(白鷗詞)’ 등 12가사를 잇고,
시조(時調)를 생활노래로 보급해 국악의 생활화에 기여했다.
시조의 악보인 선율보를 만들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시조가락과 창법을
그의 아호를 딴 ‘석암제’로 통일했다.
정씨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부안농고·전주고 교사, 우석대 교수를 지냈다.
한시와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보’ 등 책을 내고
시문집도 다섯 권 발표했다.
대한시우회와
대한정악회의 창립, 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보관 문화훈장(97년),
방일영국악상(2001년)을 수상했다.
유족으로 동식(바둑 프로기사)씨 등 6남2녀.
빈소는 국립의료원,
발인 1월 2일 오전 7시.
석암 정경태 시조비 제막식
정 경 태
백초(百草)를 심은 뜰에 솔 대 먼저 옮긴 것은
창송(蒼松)은 군자절(君子節)이요
녹죽(綠竹)은 열사조(烈士操)로다
아마도 세한불변용(歲寒不變容)은 너뿐인가 하노라.
시조와 국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석암 정경태 선생의 시조비 제막식이
지난 31일 오전 부안호 문학동산에서
선생의 뜻을 기리는 많은 시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타계 3주년을 맞아
제자들과 정악을 보존하고자 하는 예인들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시조비를 세웠다.
시조비에는 선생의 대표작 ‘백초(百草)를 심은 뜰에’라는 시조가 새겨있어
선생의 고고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석암 선생은
주산면 사산리(뉘역매)에서 태어나
16세에 시조에 입문 정가창에 헌성했고
시문, 서예, 천문, 사상의학과 동양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선생은 후학 배출과
‘조선창악보’, ‘국악보’, ‘가곡선율선보’ 등
여러 권의 정악연구서를 발간하고
‘석암제’ 시조를 창안 시조 통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전주국악원 창설,
대한시우회 창립,
전국시조가사가곡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시조와 국악 발전에 공헌했다.
솔~대~먼저~옮긴 뜻은~~
제5회 부안예술제의 석암제 문화대상
제1회 전국남녀 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가
지난 31일 예술회관 공연장에서 열려
전국 각지에서 참여한 29명이 시조 부르기 경연을 벌였다.
장원을 차지한 정재선 씨가 본선에서
석암 정경태 선생의 시조 ‘백초(百草)를 심은 뜰에’를 읊고 있다.
시조비 제막식을 마친 시조인들은
제1회 전국남녀 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에 참가해 경연을 벌였다.
서울 부산 광주 등 각지에서 경창대회에 참가한 29명의 시조인들은
예선을 거쳐 ‘백초를 심은 뜰에’와
엮음지름시조 1곡으로 본선을 치렀다.
정재선(고창) 씨가 첫 대회 장원을 차지했고
최우수상은 하 현(익산) 씨,
우수상은 김규환(부안) 씨,
준우수상은 김정님, 나호은, 문흥운, 박형순, 양동규,
유계순, 이영숙, 이은자 씨가 받았다.
국악 방송. 2016년 4월의 국악인
석암(石菴)정경태(鄭坰兌)
생몰연대1916~2003
출생지전북 부안
전문분야가사.시조
인물정보
1975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석암 정경태는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에서
1916년 2월 7일 3백석의 지주 정종운의 3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사랑채에 독서당을 차려놓고
일가와 행세하는 집 아이들 교육에 힘쓰시던 아버지는
주산에 보통학교가 생기자 곧 신학문쪽으로 공부를 돌리게 하였지만
사랑방에 출입하는 문장가와 풍류객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7세에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8세에 주산 보통학교에 입학,
9세에 나이봉 훈장에게 서예와 한문을,
12∼14세에 유학자 정도경으로부터 시문을 사사받고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그때 이미 정경태는
한시 250수와 50여 편의 작문을 지어 지니고 있었다.
며칠이면 다 외어버릴 책을 수개월 동안 하는 학교 공부에 회의를 느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본격적인 서당공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15살이 되자
한 10리쯤 떨어진 이웃 마을인 돌무산의 진씨 집에 장가들어
재행(再行)을 가서 시회에 나가 장원을 하자
10살 위의 동서 김한술이 문장에는 졌지만
시조는 내가 잘할걸 하며 하객들 앞에서 부른 그 한 가락 시조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형용할 수 없는 소리에 감동되어 신방에서까지 외어 읊었다 한다.
열 살 위의 동서 김한술씨는
시조창과 인연을 맺게 한 첫 번째 스승이다.
신혼 초부터 시조에 재미를 부친 정경태는
레코드판을 닥치는 대로 모아 따라 부르고
시조하는 선생이 어디에 왔다는 소식을 듣기가 바쁘게
찾아가 뵙고 며칠이라도 가르침을 받거나
아예 집으로 모셔다 융숭한 대접을 베풀며 가르침을 청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 길로 한마을의 오성현으로부터 시조를 배우기 시작하고
고흥의 김춘경을 모셔다 더 배웠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도삼·오윤명으로부터는
상사별곡·처사가 등의 가사와 가곡을 배우고
하규일의 8가사와 가곡 남녀창 음반을 구입하여 혼자서 익혔다.
18세 되던 해에는
장성 백양사에서 지방의 명가 임재희로부터 가사를 사사하고,
2년 후에는 정읍에 살던 대금의 명인 죽민 전계문으로부터
가곡 여창을 사사하여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23세 되던 39년에는
방송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마침내
당대의 선가 두봉 이병성을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때 정경태는 두봉으로부터
너무 진도가 빠르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로
두봉의 예능을 빠르게 전수받았다.
곧 시와 율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박헌봉과 어울렸고, 시조3장을 방송하기도 하였다.
두봉선생에게 12가사와 가곡을 모두 익히고
부안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2년 후에 그 시골로 내려 와 72일 동안을 머무르면서
가사와 가곡을 다시 배워주고 그 후 3년 동안을 더욱 정진하였다.
또한 정경태는 어린시절부터 서화를 익힌데다
의재(毅齋) 허백련과 이당 김은호로부터 필법과 사군자를 배워
이 방면에도 출중한 솜씨를 가졌으며
장기와 바둑에도 뛰어나며 술서를 탐독,
음양학에도 재주를 보여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한편 가사·가곡·시조 등
모든 정가에 일가를 이룬 정경태는
1944년부터는 배우는 단계에서 가르치는 단계로 넘어와 있었다.
이때 송창섭, 김소란, 박향란, 김옥희에게는 가곡 여창을,
유종구, 고민순에게는 남창을 전수시켰다.
이리향제 줄풍류의 예능보유자 강낙승도
이 무렵부터 그에게 12가사와 가곡남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듬해에는
그 동안 꾸준히 채보해 온 가락을 정리하여
<조선창악보>를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전라북도 학무과에 초빙되어
도내 초중학교를 돌며 한글에 대하여 순회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안농고의 국어교사로 발탁되고
이듬해인 1948년에는 전주명륜대학의 전임강사로 초빙되었으며
6·25후인 1951년에는 김제고교로 옮겼다가
53년에 전주고교 교사로 전임하였다.
전주고교 교사시절에는 특별활동반으로 국악반을 만들어
교사와 학생들에게 시조를 보급하고,
전주국악원 창립의 산파역을 맡는 한편
단소·대금·북가락·범패 등의 채보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스스로 춤·거문고·단소 등도 계속 배웠다.
그리고 1955년에는
10여 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채보하고 정리하여 온 국악보를 간행해 냈다.
이 악보는 18종의 악기연주법을 비롯하여
가사·가곡·시조는 물론 판소리·민요·단가·가야금병창 등에 이르기까지
국악의 주요분야를 총망라하고 있어 선구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주고교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친 정경태는
풍류객으로 시조와 가사를 부르며 전국을 순유하여
‘정삿갓’이란 별명을 얻었다.
정경태는 이때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시조의 가락을 통일하였다.
경제·내포제·완제·영제·반영제·원제 등으로각기 다른 가락을,
가사와 가곡을 배운 것을 밑거름으로,
반영제를 바탕으로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니
전국의 시조인들이 이를 석암제라 부르고 있다.
김천에서 대전으로 거처를 옮긴 정경태는
`1961년 대한시우회를 결성,
1963년 대한시우회를 창설하였다.
정경태는
전국에 지부와 지회를 조직하고
전국에 시조·가사·가곡을 보급, 국민개창운동을 벌이는 한편
매년 전국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를 열고 있다.
1975년 7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자
그 해 11월에는 국립극장에서 가사·가곡발표회를 가졌으며
이후 가사와 시조, 후학지도와 보급운동에 전념해 왔으며
1979년에는 국악계 원로들로 대한정악회를 창설, 회장직을 맡아
국악의 올바른 뿌리와 줄기를 찾아
그것을 계승 보급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왔다.
그의 저작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가사보>를 비롯하여
<시조보>·
<가곡보>·
<조선창악보>·
<아악보>·
<국악보>·
<가악보>·
<증보주해시조보>·
<시호록>·
<금립시집직역본>·
<고금천문학>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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