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 九萬 선조님 시 “正節公” 公居晋州大鳳山下宅後 有一大岩上有一小岩 形如 鳳鳥 江南道士見之曰 姜氏之盛有此岩故也其後 휘 “洪” 平章事賜紫金魚袋坡 平府院君公 兄弟十一人皆列卿相 閤門祗侯 李之元 忌其勢重 潜使人 擊破鳳岩中 白石大如瓢者四又以 鐵槌碎之皆血也 後數年遭賊臣 拓後京(拓발覆姓有之非拓발也) 之讒公及弟皆杖流而卒 一家被禍者 二十余人且改 大鳳山 爲飛鳳山 鳳池改釜池 自是姜氏大衰云
위의 원문과 같이 우리 선조들께서는 대봉산 아래에서 세세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오면서 고려 중기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국내에서 학자를 비롯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유명인사(有名人士)가 거의 강씨들이었다.
이때는 귀족정치(貴族政治)로 귀족 세력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그들 내부에 있어서 상호 항쟁을 조성하며 문벌이라는 것에 정치적인 출세나 경제적인 부(富)를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되어
고려의 사회상이 귀족 간에 상호 항쟁이 벌어지는 것은 기정의 사실로 인천(仁川)이씨(仁州이씨와 같음)인 이자겸이란 자가 그 세력이 절정기였을 때 그 여식(女息)을 예종(16대 1105-1122)의 비(妃)로 들리고 그 소생인 인종(17대 1109-1146)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왕친 등의 전례(前例)에 따라 인종에게도 이자겸의 여식을 들여서 중복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권세를 독차지하여
실권을 가짐으로 교활(狡猾)하기가 이를 데 없는 현실과 야망 속에서 이자겸의 아들 합문지후(閤門祗侯) 이지원(李之元)이 도모하기를 강씨들이 득세하는 연유를 알아보니 진주의 대봉산 위에 두 개의 대암이 있고 대암 위에 작은 바위 하나가 포개어 얹혀 있는데 이 바위를 그곳에서 봉암이라 부르고 있다. 그 바위가 너무도 똑같이 봉황을 닮았다. 강남도사가 지나다가 그 돌을 보고 가로되 강씨의 흥왕(興旺)이 이 돌 때문이라 하였다.
우리 세속(世俗)에 “봉새”란 성인(聖人)이 세상에 출현(出現)하면 그에 응(應)해서 봉새가 나타난다는 유례(類例)가 없는 서상조(瑞祥鳥)로서 이 새는 오동나무에 깃들어 살면서 죽실(竹實)을 먹고 예천수(醴泉水)를 마시고 사는 새로 깃털(羽毛)는 오색(五色)으로 영롱(玲瓏)하여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그 목소리는 다섯가지 음색(五音)에 하늘에 날아오르면 뭇 잡새들이 따라 날으는 조류의 영도조(領導鳥)로 수놈은 “봉(鳳)새” 암놈은 “황(凰)새”라 하는데(註: 中國의 說文에 이르기를 「鳳神鳥也 天老曰 鳳之像也 麐前廘後 蛇頭魚尾 龍文龜背 燕頷鷄喙 五色備擧 出於 東方君子之國 翶翔四海之外 過崑崙 飮砥柱 濯羽弱水 莫宿風宂 見則 天下之大安寧 從鳥凡聲」 하였으니
그 바위가 봉새를 닮았으니 필시 강문(姜門)에서 집권자(皇帝)가 나타날 것이 분명하며 인종에게 참소하기를 상서공 강홍(姜洪) 형제 및 일족 무리들이 야심을 품고 있으니 속히 조치하지 않으면 화를 당한다고 한즉 인종(仁宗)이 놀라 하시며 어떻게 이들의 세력을 꺾을 수 있겠느냐에
척준경(拓俊京: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출세한 무인으로 이자겸의 군사적 배경이 된 자임)의 말이 강공과 그 도당을 내치시고 강홍의 거주지 진주에 따른 지명을 고치소서 함으로 인종은 이 말을 듣고 옳다고 여겨 이지원과 척준경에게 명하여 강홍의 형제 및 일족 20여 명을 제거(除去)하고 몰래 밀사를 보내
대봉산에 우뚝 자리하고 있는 봉암을 밤중에 깨뜨리니 그 속에서 백색의 차돌 4개가 나왔으며 모두 크기가 큰 표주막 하였는데 철추(鐵椎)로 깨뜨리니 모두 붉은 피로 쏟았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하여 대봉을 날려버렸다 하고 대봉산을 비봉산이라 개명시켰다. 위의 주(註)에서 이른바 동방국(고려)에서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으로 날아왔다는 것과 일맥상통 혹은 일치된다 하겠다.
봉암 서쪽 예천수가 샘솟는 봉지(鳳池)를 봉의 알을 삶아 인재(人材)가 못나게 한다며 못물을 끓인다 하여 부지(釜池)라 하였다고 전래(傳來)되어 있다.
경상남도 도지인 교남지(嶠南誌) 또는 진주 목읍지(牧邑誌)의 고적조(古蹟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가히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것이다.
1126년 고려 17대 인종 4년에 외척으로 세도가였던 인천이씨 이자겸이 왕위를 넘보며 “十八子”가 왕이 된다는 참설(讖說)을 믿고 인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인종에게 방지한 행동과 인종을 살해하려고까지 하였으나 그의 일당인 척준경에 의해 거사가 실패되고 인종 5년 1127년에 귀양을 가게 되니 하늘을 찌를듯하던 인천이씨의 세력은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척준경 일파들도 반역에 연루되어 제거됨으로 정치적 압력이 누그러지고 조용할 때 살아남은 우리 조상들이 탄식하며 어떻게 하면 지난날과 같은 성황을 이룰수가 없을까 하고 탄식할 때 도승이 지나다가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날으는 봉은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드시오.
함으로 도승의 말대로 강씨 집안에서 날아가 버린 봉황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3,000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그 가운데 고분(古墳)으로 추정되는 곳의 정상(頂上)을 움푹 파고 봉알자리를 만들어 4개의 알 돌을 모아 봉란대(鳳卵臺)라 명명(命名)하였다. 그리고 비봉산의 지맥 봉래산 하(下)에 자손의 교육을 위하여 서재를 마련 재호를 봉강재(鳳降齋: 봉이 내려오라는 의미)라 하였으며
유지재산으로 대봉산 전역(봉래산 뒤까지)의 임야 외 샘이골 수십 두락의 토지와 봉강재의 기지를 소유하였던 바 한국말에 관서재라 칭하였다가 한일 합방 후 봉란대 부지 200여 평만 남기고 유지재산 전체가 국유화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유적(遺跡)이 봉란대이다. 옛 봉곡촌인 지금의 상봉동동 911-11번지에는 봉이 알을 품고 있는 보금자리가 있으며 그 가장자리에 알의 형상의 있으니 봉황이 이곳으로 날아와 알을 품어 주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주위에는 대나무와 오동나무를 심어 봉황이 살아가는 환경으로 서쪽 들판에는 오동나무와 죽림을 조성하여 오죽전(梧竹田)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복개되어 볼 수 없으나 라불천(청천강) 야수 수문을 건설하면서 “오죽전수문”이라 한 것과 봉곡동 서편 도로에 오동나무와 대나무로 조성한 “오죽광장” 남쪽 남강변에 길게 조성되어 있는 청청한 죽림, 도시 환경의 운치를 자아내는 이 모두가 봉황과 관련된 진주의 지나온 역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전해오는 많은 재호나 여러 지명에 특히 “봉” 자를 연호하는 이유는 분명한 것이다. 움푹 파인 보금자리는 아무리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 신기함을 보면 알을 품는 보금자리가 물에 젖게 해서는 안 될 의미일 것이다.
봉란대가 있는 토지 소유주는 진주강씨종친회이다. 따라서 관리도 세세손손 진주강씨종친회에서 하고 있다. 이곳에는 1921년에 진주강씨의 동방시조이신 강이식(以式) 장군 유허비를 세웠다.
명(銘)에 이르기를 “晉山華冑 菁川靈源 千派一本 萬枝同根 忠孝之家 道義之門 世守敦睦 永垂後昆”이라 하였다.
문화란 특히 인간의 내적 정신 활동의 소산인데 10세기 전 진주 흥망의 역사를 봉란대에서 찾아볼 수 있고 천 년 동안 유적을 보존한 이곳이 문화재 가치로 어떻게 더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간 수차에 걸쳐 행정당국에 지방문화재로 인정을 촉구하였으나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진주의 진산은 이름하여 대봉산이다.
진주는 대봉산의 정기를 받고 있다. 광활한 의미에서 비봉산을 대봉산으로 부르게 하고 봉암의 형상도 세워 천년전 진주에서의 인재 출현과 번영도 진주를 사랑하는 시민이면 상기해 볼 일이다.
오늘도 봉란대는 만고(萬古)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임은 틀림없다.
문화적 가치관도 새롭게 정립해 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화지지(史禍之知) 봉란대를 영수보존(永守保存)하는데 심혈(心血)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관련문헌
진주강씨 연원록(淵源錄) 봉란대의 유래
이기백(李基白) 저 국사신론
진주시의 내고향 전통문화재편
경상남도 도지 교남지(嶠南誌)
경상남도 진주목읍지(牧邑誌) 고적조(古蹟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