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시늉으로만 남겨놓은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 묘비석(1940년)’
경부선 경의선 복선공사와 맞물린 경성조차장(수색역)의 건립 내력
경의중앙선 화전역(花田驛, 2023.11.21일에 ‘한국항공대역’으로 개칭)에 내려 지하통로를 따라 항공대 운동장 방향으로 올라가면, 이곳에서 남동쪽 수백 미터 남짓한 지점에 ‘화전동공동묘지(경기도 고양특례시 덕양구 화전동 633-9번지 일대)’가 나타난다.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지난 2019년 11월에 고양시에서 3.1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성한 ‘기림의 길’이 죽 이어진다.
이 길의 끝에서 약간 휘어진 언덕길로 올라서면 이름 모를 무덤들 사이에 제법 큼직한 비석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 전면에 이르기를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비”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가 소화 15년(1940년) 3월에 세운 것이라는 표시가 남아 있다. 이를 테면, 이 비석은 일제가 수색역(水色驛) 일대에 대규모 경성조차장(1939년 5월 13일 기공)을 새로 조성할 때에 그 공사구역 안에 포함된 묘역들 가운데 기한 내에 이장(移葬)하지 못한 무연고묘지를 일괄처리하면서 만든 합장묘비인 것이다.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의 비문 풀이
(전면) 京城操車場第三工區內無緣合葬之墓 (후면) 高陽郡 舊墓地/ 恩平面 水色里 山 二一五番地 基, 山 二番地 基, 山 四番地 基, 山 一○八番地 基/ 神道面 德隱里 山 一九番地 基, 山 二一番地 基/ 株式會社 間組 水色出張所 建之/ 昭和十五年三月 日 |
(전면)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지묘 (후면) 고양군 구묘지/ 은평면 수색리 산 215번지 (몇)기, 산 2번지 (몇)기, 산 4번지 (몇)기, 산 108번지 (몇)기/ 신도면 덕은리 산 19번지 (몇)기, 산 21번지 (몇)기/ 주식회사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 이를 세움/ 소화 15년(1940년) 3월 일/ |
하지만 비석 뒷면에 용지매수 대상지 여섯 곳의 지번은 그럭저럭 표시되어 있으나 이것과는 달리 정작 몇 기의 무연고무덤이 처리된 것인지를 나타내는 자리는 아예 공란(空欄)인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묘비조차도 얼마나 형식적으로 만든 것인지가 여지없이 잘 드러난다. 그저 연고도 없는 조선인의 불쌍한 혼령을 위한 묘비를 세워주었다는 사실만 생색을 낼 따름이지 이 묘비석에는 아무런 알맹이도 담겨있지 않고, 더구나 그들의 선의와 진심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 단지 성의표시를 가장한 — 겉치레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느닷없이 경성조차장의 신설문제가 표면에 불거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조차장(操車場, Classification yard)은 화차 및 객차 등의 철도차량을 한 열차에서 분리 또는 이동시켜 행선지별로 분류하고 이를 새로운 열차편성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작업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인공적인 언덕을 만들어 열차가 중력에 의해 스스로 굴러가면서 분류위치로 이동하는 시설을 갖추는 것이 보통인데, 이러한 형태를 가리켜 ‘험프식 조차장(坂阜式 操車場; hump yard)’이라고 한다.
일찍이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날로 폭증하는 철도교통량을 감당하기 위해 평양역과 용산역에 대규모 조차장의 신설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특히 경성 쪽에서는 서빙고역(西氷庫驛) 구내 약 1만 평의 기지와 한강(漢江) 공유수면 매립예정지 약 8만 평을 확보하여 이곳에다 처리용량 2천 량(輛)에 달하는 조차장을 세우는 계획을 구체화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송력(輸送力)을 대폭 증가시켜 대륙침략을 용이하게 뒷받침하도록 새로이 경성, 평양, 대구, 부산, 원산 등 5개소에 거대한 조차장을 신설할 방침을 세우고 이 가운데 경성조차장의 건립 후보지로 경의선 수색역(京義線 水色驛)을 선정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1937년 6월이었다. 새로 짓는 경성조차장에는 일본 도쿄에 있는 타바다역(田端驛)과 이케부쿠로역(池袋驛)을 훨씬 능가하는 최신의 설비를 갖출 예정이며, 이 과정에서 경성역(京城驛)과 용산역(龍山驛)에 체류하는 객화차(客貨車)는 전부 이곳으로 집중시키는 대신에 경성과 용산 두 곳은 여객역으로 삼아 그 기능을 최대한 원활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제가 경성조차장의 설치를 서둘러야 했던 시대적 배경요인으로는 이 당시 무엇보다도 경부선 복선공사(1936년 7월 7일 착공), 경의선 복선공사(1938년 7월 착공), 중앙선 신설공사(1936년 11월 3일 착공)가 잇달아 진행중이거나 예정 상태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여기에다 압록강 제2철교 부설공사(1936년 12월 9일 기공)와 안봉선(安奉線, 만주 안동~봉천) 복선부설과 연계하여 이른바 ‘선만일여(鮮滿一如)’의 기치 아래 조선과 만주를 잇는 대동맥(大動脈)으로서 국제간선철로(國際幹線鐵路)의 위상에 걸맞은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일이 매우 긴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조선신문』 1937년 11월 25일자에 수록된 「약진선철(躍進鮮鐵)에 박차(拍車), 수색(水色)에 대조차장 건설(大操車場 建設)」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조선국철(朝鮮國鐵)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군사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일만일여(日滿一如)의 추요사명(樞要使命)을 담당하여 인사(人事)의 왕래착(往來著)이 증가하여 왔으며, 우선 금회(今回)의 일지사변(日支事變) 때문에 국철 본연의 사명 위에 일층(一層) 중대성(重大性)을 더해오는 동시에 저 12년 계획안(十二年 計劃案)의 완성기(完成期)도 3년 후에 다가오는데 다시 작년에는 의회(議會)의 협찬(協贊)을 얻어 중앙선(中央線)의 신설(新設)에 이어서 경부 경의선(京釜 京義線)의 복선공사(複線工事) 등 역시 철도국(鐵道局)도 작년 이래 글자 그대로 전종사원(全從事員)을 동원(動員)하여 어지럽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나 명년도(明年度)에 있어서는 오랫동안 동국(同局)의 현안(懸案)으로 되던 경의선 수색 부근(京義線 水色 附近)의 대조차장 건설(大操車場 建設)에 취현(取懸)하는 것으로 되었다. 즉 이 조차장 건설계획은 소화 15년도(1940년도)까지 완성하고 총공비(總工費) 7백여만 원(圓)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 예정지는 평양, 대전, 대구, 부산, 경성의 5개소이며, 이 가운데 가장 속급(速急)을 요하는 곳으로 경성 즉, 수색 부근에 2백여만 원을 던져 조차장의 건설이 명년도부터 착수될 것이다. 이 수색조차장은 경의, 경부선을 주안(主眼)으로 하여 장래는 경원선(京元線)도 필수적으로 함유(含有)하는 것인데, 완성(完成)하는 그날에는 북지 북만(北支 北滿)으로 흘러가는 대량화물(大量貨物)의 조차(操車)에 획기(劃期)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따라 1939년 5월 13일에는 경성조차장 건설을 위한 기공식이 거행되었으며, 전체 45만 평에 달하는 구역을 4공구(工區)로 나눠 진행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동아일보』 1939년 5월 7일자에 수록된 「대조차장(大操車場) 불원 완성(不遠 完成), 13일 수색역 현장(水色驛 現場)에서 기공(起工), 공사비(工事費)만 1천만 원(圓)」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철도망 확충의 중심점을 이룬 중앙지대 경성의 대조차장 건설은 긴급을 요하여 관계 철도당국은 예의 준비중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으므로 오는 13일 오후 2시부터 조차장건설 장소인 수색역 현장(水色驛 現場)에서 관계자 급 다수인사를 초청하고 성대한 기공식(起工式)을 거행, 드디어 대공사는 착수하는 계단에 들게 되었다. 이 조차장은 기관고(機關庫), 조차장역, 기타를 포함 그 기지만 45만 평, 총공비(總工費) 약 1천만 원 예산의 동양 제일의 대조차장으로 이게 완성되는 날에는 하루 5, 6천 량(輛)을 조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사는 4공구(工區)로 나누어 공사를 진행할 터이고 노반(路盤)공사의 준공은 16년(1941년) 2월경이라 한다.
이에 앞서 『조선일보』 1939년 3월 24일자에 게재된 「철도관계 대공사(鐵道關係 大工事), 최근 1개월간 낙찰 거액(落札 巨額)」 제하의 기사를 보면, “경의선 경성조차장 제3공구는 123만 원에 하자마구미(間組)”, 그리고 “경의선 수색조차장 제4공구는 93만 원에 야마모토구미(山本組)”가 각각 낙찰을 받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하자마구미는 1889년 4월에 하자마 타케마(間猛馬, 1858~1927)가 일본 후쿠오카현 모지(門司)에서 창업하여 주로 철도부설공사를 기반으로 하여 사세를 확장한 토목건축 청부업체이다.
중앙정보사(中央情報社)에서 펴낸 『대경성사진첩(大京城寫眞帖)』(1937), 18쪽에는 ‘하자마구미 조선지점(間組 朝鮮支店)’에 대해 두 장의 사진자료와 함께 다음과 같이 소개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눈에 띈다.
본사(本社)는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미나미쵸(東京市 赤坂區 靑山南町). 자본금 2백만 원(圓). 창업(創業) 명치 22년(1889년). 소화 6년(1931년) 4월에 주식 조직으로 변경했고, 사장 오타니 키요시(社長 小谷淸) 씨, 부사장 마에노 사다키(副社長 前野定喜) 씨, 조선지점장 상무취체역 쿠스메 쇼스케(楠目省介) 씨의 진용(陣容). 오사카(大阪), 시모노세키(下關), 대련(大連)에도 지점이 있다. 경성지점(京城支店)의 대표적 공사로서는 압록강 및 한강교량공사, 조선수전주식회사 및 장진강수전주식회사의 제공사(諸工事),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체신국 보험과, 경성상공장려관 등 유수(有數)한 것을 다수 남기고 있다. (한강통 11, 전화 용산 ④0440번)
이 회사의 토목건축사업은 크게 ‘철도건설 및 개량공사’, ‘수력(水力) 및 화력발전(火力發電) 공사’, ‘도로공사’, ‘교량공사’, ‘수리 염전(水利 鹽田) 기타 공사’, ‘건축공사’ 등의 영역에 두루 걸쳐 있었다. 그리고 한강철교, 제1한강교, 압록강철교, 압록강 제2철교, 금강산전철수력발전소, 조선수전(朝鮮水電) 제1 및 제2발전소, 장진강수력전기, 대정수리조합 저수지, 대아리저수지, 조선빌딩(반도호텔), 전매국 소래염전, 압록강 수풍댐 등의 축조 및 건설공사는 모두 이 업체에 의해 이뤄진 것들이다.
경성조차장의 건설 공사는 1940년 10월까지 기반조성이 완료되고 다시 해를 넘겨 1941년 가을을 목표로 하여 주요한 시설물의 공사까지 대략 마무리될 예정이었는데, 『매일신보』 1940년 2월 9일자에 수록된 「경성(京城)과 평양(平壤)의 조차장 공사진척(操車場 工事進捗)」 제하의 기사는 이 당시의 공사진척상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병참기지(兵站基地) 반도산업의 확립추진과 동아경제블럭의 강화진전에 반(伴)하여 조선중계물자수송(朝鮮中繼物資輸送)의 격증(激增)으로 철도국(鐵道局)에서는 화차선(貨車線)의 원활한 완벽을 기하고자 경성(京城) 45만 평, 300만 원, 평양(平壤) 30만 평, 207만 원의 거비(巨費)를 투(投)하여 작(昨) 14년(1939년) 조조(早早)부터 2대 조차장 건설에 착공하고 있는 바 착공 이래 순조(順調)의 공정(工程)을 계속하여 2월 1일 현재의 출래고(出來高)는 경성 7할, 평양 8할 가량의 진척을 시(示)하여 모두 금추(今秋) 10월까지에는 토공공사(土工工事)의 완성을 보게 될 예정으로 계속하여 주요 건조물(建造物) 건축에 착수하여 16년(1941년) 추(秋)까지에는 준성(竣成)코자 공(工)을 급(急)히 하고 있다. 차(此) 준공시는 월간(月間) 3천 수백 량의 조차능력(操車能力)을 발휘할 것이므로 물자수송의 조정상(調整上) 획기적 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대망(待望)된다.
이와는 별도로 경의선 복선공사의 진행에 따라 총독부 철도국에서는 경성과 평양 사이의 29개소에 달하는 정거장을 순차적으로 이전 또는 개축하는 공사를 실시할 예정이었으며, 이 목록에는 수색역(水色驛)과 일산역(一山驛)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따라 경성조차장이 건설되던 바로 그 시기에 수색역의 역사를 전면 개축하는 공사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40년 10월 3일자에 수록된 「신축(新築) 수색역(水色驛), 29일 낙성식(落成式) 성대(盛大)」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수색(水色)] 대륙(大陸)루트의 대간선(大幹線)이며 서부경성(西部京城)의 입문(入門)인 수색(水色)은 신축(新築)한 역사(驛舍)를 거(去) 5월 6일[6월 6일의 착오] 오전 2시경에 원인불명(原因不明)으로 소실(燒失)한 이래 일반승객(一般乘客)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철도업무 수행상 다대(多大)한 지장(支障)이 있었으나 아오키 역장(靑木驛長) 이하 각 역계원(各驛係員)은 힘써 인고단련(忍苦鍛鍊)하며 근무에 충실하여 개축역사(改築驛舍)는 착착 진행되어 거(去) 9월 29일 오후 1시반 군관민(軍官民) 다수 참렬하(參列下)에 성대한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경성조차장(수색역)의 전체적인 배치상황에 대한 자료가 궁금하여 찾아봤더니, 철도박물관(의왕)의 전시유물인 「수색조차장배선실시약도(水色操車場配線實施略圖; 1945년 8월 15일 현재)」가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조차장 전체의 규모에 대해 “궤도연장(軌道延長) 약 130킬로미터, 분기기 부설(分岐器 敷設) 400조(組), 교형가설(橋桁架設) 20연(連)”이라는 설명과 함께 방사선 형태로 깔린 각 선로들의 명칭과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현재 수색역과 화전역의 중간지점이자 마포 상암동과 고양 덕은동의 경계구역 언저리에는 통칭 ‘고양 덕은동 쌍굴’이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옛 경성조차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의 하나이다. 상부터널의 남쪽 입구와 하부터널 쪽 통문 옆에는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묘비석’과 마찬가지로 지난 2019년 12월에 고양시장 명의로 제작한 안내판이 각각 부착되어 있다.
이 쌍굴은 그 길이가 각각 상부터널(직선)이 100미터, 하부터널(곡선)이 200미터 남짓이고, 지하에서 선로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어 있는데, 위의 조차장 약도에도 ‘수도교차(隧道交叉; 터널교차)’라는 표시와 더불어 그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하부터널은 ‘능화신호소(陵花信號所)’를 거쳐 평양 방향(하행선)의 경의본선(京義本線)으로 합류하는 선로이며, 상부터널은 하행선 도착선로 쪽으로 연결되는 철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제의 패망을 5개월 남짓 남겨두고 있던 1945년 3월 1일은 총독부 교통국 직원집회소에서 경부선 경의선 복선공사의 준공식이 열린 날이었다. 이 가운데 경부선은 9년 가량의 긴 공사기간을 거쳐 1944년 12월 28일에 대구(大邱)와 지천(枝川, 경북 칠곡군) 사이의 최종구간에 대한 연결식(連結式)이 거행되었고, 경의선은 이보다 며칠 앞서 12월 23일에 순안(順安, 평남 평원군)에서 궤조(軌條, 레일)를 연결하는 것으로 6년이 훨씬 넘는 복선부설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 대저(大抵) 조선에 있어서의 철도(鐵道)가 조선 내 중요물자(重要物資)의 증산에 이바지하는 외(外)에 반도총후상(半島銃後上) 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대륙수송(大陸輸送)의 대동맥(大動脈)으로서 대동아건설(大東亞建設)의 추축(樞軸)인 사명을 갖고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특히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부하(負荷)한 책임은 더욱 가중하여 이의 완수여하(完遂如何)는 직접 아국(我國, 일본) 전력소장(戰力消長)에 영향하는 바 참으로 지대하다. …… 생각건대 본 공사의 완성은 대륙교통경로(大陸交通經路)에 획기적 진전을 가져오는 것으로서 국가비상(國家非常)한 요청인 전력증강(戰力增强)에 응하여 금후(今後)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요물자의 수송에 절대한 위력을 발휘하여 성전완수(聖戰完遂) 대동아건설에 기여하는 바 적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하략)
이 말은 경부 경의 양간선(兩幹線) 복선공사 준공식장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75~1953)가 설파한 고사(告辭, 기념사)의 한 토막이다. 그야말로 대륙으로 이어지는 철도망과 관련 기반시설을 신속히 확충하여 수송력의 극대화를 꾀하려는 그네들의 속내가 ‘성전완수(聖戰完遂)’, 바로 이 한 마디에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 이 글은 『민족사랑』 2024년 9월호에 게재하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각주 01)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무연고 무덤 합장묘비의 사례로는 이보다 앞서 망우리공원에 설치된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1936년 12월 건립)’와 ‘경서 노고산 천골취장비(1938년 9월 건립)’ 등이 있었다.
각주 02) 『동아일보』 1938년 5월 9일자에 수록된 「대규모(大規模)의 조차장(操車場), 금년(今年)부터 공사 착수(工事 着手), 경성 평양에 480만 원 들여, 대전 대구는 명년(明年)부터」 제하의 기사를 보면, “…… 경의선의 신촌역과 수색역의 중간 연희면 방면에 광대한 지역을 매수하여 약 3천 량(輛)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경사방사형(傾斜放射型)의 이상적 조차장을 만들어 각선으로부터 모아든 차량을 자유자재로 하도록 하는 일방 특히 방공설비를 충분히 할 터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경사방사형’ 조차장은 ‘험프식 조차장(hump yard)’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편찬한 『조선철도사십년약사(朝鮮鐵道四十年略史)』(1940), 293쪽에는 “…… 또한 본선에 있어서 배차관계의 원활을 꾀하기 위해 경성 및 평양에 함프조차장(ハンプ操車場)의 계획을 세워 평양은 소화 13년(1938년) 12월, 경성은 동(同) 14년(1939년) 1월 토공(土工)에 착수했다”라는 구절이 나오므로, 이를 통해서도 험프식 조차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각주 03) 이에 관한 내용으로는 『경성일보』 1935년 6월 19일자에 수록된 「용산(龍山)과 평양(平壤) 양역(兩驛)에 대조차장(大操車場)을 설치, 내년(來年)의 예산(豫算)에 계상(計上)했다고 철도국(鐵道局)에서 입안(立案)을 서둘러」 제하의 기사가 남아 있다.
각주 04) 서빙고조차장의 신설계획에 대해서는 『경성일보』 1935년 8월 25일자에 수록된 「이천 량(二千輛)을 수용할 수 있는 대조차장(大操車場)을 신설(新設), 서빙고 강안(西氷庫 江岸) 약(約) 8만 평(坪) 매립(埋立), 그 경비(經費)도 7백만 원(圓) 내외를 내다보는 대사업(大事業)」 제하의 기사와 『매일신보』 1935년 8월 26일자에 수록된 「서빙고 강안 부근(西氷庫 江岸 附近)에 차량수용소(車輛收容所) 신설(新設), 2천 개의 차량을 수용할 만한 대조차장(大操車場)을 철도국(鐵道局)에서 계획(計劃)」 제하의 기사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일보』 1938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한산(閑散)한 서빙고역(西氷庫驛)에 조차장 신설계획(操車場 新設計畫), 부근 일대(附近 一帶)의 실정조사(實情調査)」 제하의 기사에도 이러한 시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각주 05)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7년 6월 5일자에 수록된 「전조선(全朝鮮) 5개역에 대조차장(大操車場)을 설치, 경성조차장(京城操車場)은 수색역(水色驛)에 두고, 경룡 양역(京龍 兩驛)은 여객역(旅客驛)으로」 제하의 기사와 『경성일보』 1937년 6월 5일자에 수록된 「도쿄(東京)의 타바다(田端) 이케부쿠로(池袋)를 능가하는 조선일(朝鮮一)의 대조차장(大操車場), 경의선 수색역(京義線 水色驛)에 신설(新設)하고 경룡 양역(京龍 兩驛)은 여객역(旅客驛)으로」 제하의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각주 06) 이에 관한 내용은 『매일신보』 1939년 2월 2일자에 수록된 「경의선 복선공사(京義線 複線工事)에 따라 연선 각역(沿線 各驛)도 대개조(大改造), 철도국(鐵道局) 설계(設計)에 분망중(奔忙中)」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주 07) 이보다 앞서 『매일신보』 1940년 6월 7일자에 수록된 「수색역사(水色驛舍) 전소(全燒)」 제하의 기사를 보면, 1940년 3월에 착공하여 신축공사중이던 경의선 수색역사는 6월 6일 새벽 1시에 원인불명의 화재로 48평 규모의 건물이 전부 타버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각주 08) 이 자료는 철도청, 『철도박물관도록』 (2002), 83쪽에도 관련도판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이 약도에 기재된 활자체의 모양과 ‘소화 20년 8월 15일 현재’라고 묘사한 부분 등을 감안하면 이 자료는 일제 당시의 것이라기보다는 해방 이후에 일본 쪽에서 간행된 어느 출판물에 재가공되어 게재된 것을 가져온 듯하다. 따라서 아직은 정확한 원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각주 09) 조차장 구내의 각 선로에는 각각 용도별로 경의본선(京義本線), 용산화물본선(龍山貨物本線), 경룡삼각건설선(京龍三角建設線, 수색 의정부 간), 조선군용산창고 수색지고선(朝鮮軍龍山倉庫 水色支庫線), 경전전용선(京電專用線), 객조건설선(客操建設線), 황하선(荒荷線, 중량화물), 상행출발선(上り出發線), 하행출발선(下り出發線), 상행제일조성인상선(上り第一組成引上線), 상행제일조성선(上り第一組成線), 하행거부인상선(下り据付引上線), 하행역별인상선(下り驛別引上線), 중계인상선(中繼引上線), 기회선(機廻線), 차장차유치선(車掌車留置線), 급수선(給水線), 급탄선(給炭線), 급탄수선(給炭水線), 공사재료선(工事材料線), 보선재료선(保線材料線), 석탄차선(石炭車線), 유치선(留置線), 사고차선(事故車線), 자재과선(資材課線), 율석채집선(栗石採集線) 등의 명칭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경성조차장 구내에 잔존했던 주요 시설물로는 수색역(水色驛), 수색조차장 본부(水色操車場 本部), 소구화물중계홈(小口貨物中繼ホーム), 아스사장[アス捨場; 석탄재(ash) 버리는 곳], 전기구(電氣區), 보선분구(保線分區), 검차구(檢車區), 과선교(跨線橋, 육교), 기관구(機關區), 수차고(修車庫), 남부판부(南部坂阜, 험프), 북부판부(北部坂阜, 험프), 판부운전실(坂阜運轉室), 판부용 자가발전건설지(坂阜用 自家發電建設地), 수도(隧道, 터널) 교차점(交叉點) 등이 나타나 있으며, 외곽지역에 자리한 성산천신호소(城山川信號所), 화전신호소(花田信號所), 능화신호소(陵花信號所) 등의 존재도 함께 채록되어 있다.
각주 10) 이 가운데 ‘상부터널’은 현재 레일이 제거된 상태로 자동차 통행로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고, ‘하부터널’에는 레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반면 입구 쪽에 통행차단시설이 가로막고 있다.
각주 11) 이 내용의 출처는 『매일신보』 1945년 3월 2일자에 수록된 「비약선철(飛躍鮮鐵)의 웅자(雄姿), 대동아동맥(大東亞動脈)은 완성(完成), 작일(昨日) 경부 경의복선공사 준공식(京釜 京義複線工事 竣工式)」 제하의 기사이다.
01 고양 화전동공동묘지에 남아 있는 ‘경성조차장 제3공구내 무연합장 묘비석’의 현재 모습이다. 비석의 뒷면을 보면 1940년 3월에 하자마구미 수색출장소가 이를 건립한 사실과 용지매수의 대상지까지는 잘 표시되어 있으나 정작 몇 기의 묘지가 무연고로 처리된 것인지는 완전히 빈칸으로 남아 있다.
02 함흥경찰서와 조선군경리부가 함경남도 함주군 연포면 일대에 군사기지(군용비행장)를 건설하면서 『경성일보』 1938년 8월 3일자에 게재한 ‘분묘개장공고(墳墓改葬公告)’이다. 일제는 이처럼 대규모 군사 및 철도시설, 또는 주택단지 등을 조성할 때마다 토지수용 대상지역에 포함된 분묘의 이장을 재촉하고 그 기간 내에 처리되지 않는 무덤은 ‘무연분묘(無緣墳墓)’로 간주하여 이를 일괄 처리하는 방식을 반복하곤 했다.
03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조선철도상황 제30회(1939년 12월)』에 정리되어 있는 ‘조차장 신설 현황’이다. 여기에는 경부선 및 경의선의 복선공사와 연계하여 각 지역의 조차장 건설이 추진되는 가운데 “경성조차장이 전년도에 이어 계속하여 용지를 매수하고 토공공사가 시행중”인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04 『조선일보』 1939년 3월 24일자에는 경성조차장(수색역) 제3공구가 하자마구미(間組)에, 제4공구가 야마모토구미(山本組)에 각각 낙찰된 사실이 표시되어 있다.
05 왼쪽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 1926년 9월호에 소개된 신축 준공 당시의 하자마구미 사무소(한강통 11번지)의 정면이고, 오른쪽은 현재 남아 있는 옛 건물(한강로 2가 112-2번지)의 모습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면 2층이 증축되고, 서쪽 후면으로 덧대어 붙인 공간이 생겨난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
06 『경성일보』 1934년 12월 26일자에 게재된 토목건축 청부업체 하자마구미(間組)의 소개광고이다. 여기에는 이 회사의 설립연혁과 그간의 주요 공사 실적(철도, 발전소, 도로, 교량, 수리염전, 일반건축분야) 등의 목록이 빼곡히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한강철교, 압록강철교, 반도호텔, 수풍댐 등이 모두 하자마구미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07 옛 경성조차장의 흔적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는 수색역 일대의 전경(왼쪽)과 현재 자동차 통행로로 사용되고 있는 고양 쌍굴 상부터널의 현재 모습(오른쪽)이다.
08 『매일신보』 1945년 3월 2일자에는 경부선 및 경의선 복선공사 준공식에서 아베 총독이 설파한 고사(告辭)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만주사변을 거쳐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성전(聖戰)을 완수하고 이른바 ‘대동아건설’을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대륙수송의 대동맥으로서 조선철도가 지니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거듭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