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책을 접한 것은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인가 학교에서 문학 선생님이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숙제과목에 포함된 책 중에서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 기억은 정말 러시아 문학은 그 이름만큼이나 이질감과 그 나라 크기만큼이나 장황하고 읽어갈 수록 뒷 페이지가 얼마나 남았나를 살피고, 결국 당시의 소련이란 나라 이름 만큼 미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연방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의 분위기 마냥 그 차가움이 이전의 어린 시절보단 덜 한 것으로 느껴졌다.(물론, 그간 세월이 한 세대(30년)를 흐른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사실 당시의 나이를 감안하면 러시아 문학의 이질감을 떠나서도 책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무리였을 것으로 본다. 지금 다시 읽어도 그 표현의 웅장함과 작가의 이 글을 쓸 당시의 작가의 인생의 연륜을 감안한 삶 가운데의 각 종 이슈의 무게를 생각하면 지금도 도무지 작가의 말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고사하고 왜 그렇게 까지 에둘러 표현하여 그것이 그의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사전달이 파악 되기 힘든 부분이 상당히 있다.
다분히, 그는 그의 하고 싶었던 사회주의적 발언으로 사형선고와 10년에 가까운 형무소 생활과 시베리아 유배 군생활로 인한 더욱더 민감하고도 생생하게 기독론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왜 사회주의 이론이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 꽃을 피웠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없어 보여도 오랜 세월동안 군주제와 귀족들의 세도 정치에 각 각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의 면적과 역사 만큼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사상의 내적 축적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꽃피웠던 서유럽과 미국과 달리 더 기본적인 삶의 의식주와 평등에 좀 더 촛점을 맞춘 이념의 보편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정말로, 서유럽과 미국 작가들의 자유사상의 옹호와 낭만을 노래하는것과 달리 좀 더 실제적인 의식주와 인간본연의 탐욕과 당시의 아시아 문화완 완연히 다른 부모와 형제들과의 미묘하고도 적나라한 경쟁과 양보없는 싸움은 이해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 같다.
오로지 돈과 여자와 퀘락만을 쫓는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그로 인한 파생된 두명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세명의 남자 아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 역할을 맡게된 드미트리,이반,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들이다. 이 들의 극명하게 다른 성격은 러시아의 넓디 넓은 대륙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의 품성을 대표한다. 미챠(드리트리 카라마죠프), 거칠고 직선적이며 다분히 아버지 표도르의 성격을 많이 닮아 있는 그는 사랑에서도 한 여자(그루센카)를 사이엔 둔 아버지 표도르와 연적관계이고 이로 인해 그 마져도 유산문제 정리를 위해 고향 마을로 들어온 그, 어려서 거의 모든 면에서 방치되다 시피 하인의 손에 큰 이력 만큼이나 묘한 대립각을 키워 가고 급기야는 친부살인이라는 누명까지 쓰기에 이른다.
여기에, 대단히 이성적이며 많은 부분에서 당시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들이며,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형인 미챠(드미트리 카라마조프)와 달리 표면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던 이반과 수도원에서 수도사의 길을 걷고자 하는 막내 아들 알료샤(알렉세이 카라마조프)의 각 가족 구성원과의 중재와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수도원을 나가 가정을 지킬 것을 유언한 조시마장로(수도원의 장로이자 알료샤의멘토)말로 그가 가정에 가세하면서 이로 인해 위태한 가정의 형태로 가족의 얼개를 꾸려 가게 된다.
이들은 가정에 거의무관심한 아버지, 표도르와 각 유산과 각 각의 이해 관계로 인해 어느 한 순간 마을로 돌아온 세 형제간의 이성에 대한 사랑과 경쟁, 돈과 이념과 숭고한 사랑을 각 케릭터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표현하고 묘사한다.
큰 아들 미챠는 아버지와 유산과 여자문제로 연적관계로 돌변하여 공공연히 아버지를 살해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당연히 더 돌려 받아야 한다는 유산을 받게 되면 그가 아버지와 연적관계를 맺고 있는 그루센카와의 애정도피를 계획하고 있으며, 이 걸 알고 있는 아버지 표도르는 결코, 이 문제에서 아들에게 크루센카를 양보하거나 보낼 의사가 전혀 없음을 피력한다.
여기에 미묘하게도 이복형인 미챠와 약혼관계를 맺고 있던 카첸카(카체리나 이바노비치)를 사랑하게 된 이반의 이성적이면서도 사랑에 있어선 쟁취를 하고자 하며 그러기 위해서도 미챠가 크루센카와 애정도피를 하기를 바라는 맘이 있으며, 이 모든 걸 알게되어 가슴이 아프지만 담담하게 어느 형제와 가족 구성원에게 꼭 필요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조언과 기도를 아끼지 않는 막내 알료샤의 관여는 본인의 의사완 달리 조시마 장로의 가족에게로의 불쌍사를 막을 유일한 대안으로 그를 가정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그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어린 나이에도 다른 구성원들에게 삶의 방향과 의미를 되세기게 하며, 비록 배다른 큰 형과 또 비록 한배 형제이긴 하지만 결코 같이 커오지 않았던 둘째 형과의 미묘한 연대가 지속 된다.
결국, 끝은 표도르의 사생아이자 하인으로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주방을 맡게된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를 살인함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살인의 책임은 평소에 친부 살인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미챠의 살인으로 공판은 끝이나며, 그는 20년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의 유배를 떠날 것을 선고 받고, 실제적인 표도르를 살인한 스메르쟈코프는 자살로 그 삶을 마감한다. 이와 동시에 스메르쟈코프에게 친부에 대한 적대감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그의 표도르에 대한 적대감에 대한 동조와 사상적인 살인에 동인을 '모든것이 용인된다'라는 말로 지극히 공산주의적인 우호적인 연대를 통한 적을 제거하는 전형적인 전술로 스메르쟈코프를 통한 무의식적인 용인으로 그 살인이 일어나는 그날 스메르쟈코프와의 만남에서 집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스메르쟈코프의 요구에 응함과 그로 인한 스메로쟈코프의 살인에 대한 평소 사상의 멘토로 삶던 이반의 용인을 살인을 추인받은 것으로 착각한 스메르쟈코프의 표면적인 상전이자 어째거나 친부살인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이반은 비록 그가 직접적인 살인에 가담을 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무정하고 무책임하고 경멸하는 아버지인 표도르의 제거와 미챠의 애정도피로 인하여 집적적이진 않지만 형의 약혼녀인 카첸카의 차지를 원하고 있다. 가장 정의와 인본을 주장하지만 실제적으론 가장 냉혈한의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 것 이다. 그는 이것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후일 섬망증이라는 정신병으로 인해 서서히 자신을 파멸해 가기에 이르며, 환상으로 악마와의 대화를 시작하게 되며, 결국은 악마로 부터 너도 같은 것을 바란 것이며 조금도 큰 형의 직선적인 잘못에 못지 않는 죄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에 공판장에 결코 그럴수 없다는 자존감을 가지고 스메르쟈코프로 부터 받은 3천루블의 돈을 가지고 표도르의 살인은 스메르쟈코프와 자신이 한 것이란 주장을 함으로 최소한의 친부살해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그는 뒤에 알료사의 표한에 따르면 살인형의 누명을 쓰고 유배를 가는 형과 삶이 얼마남지 않은 죽어가는 형이란 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초에 그가 마음에 담았으며, 간접적으로 공모하게 된 살인에 책임으로 섬망증이란 정신분열로 죽어간다.
미챠는 어떤가 그는 술과 방탕으로 이미 표도르가 그 친모의 유산을 가로챈 것에 대한 댓가로 3천 루블의 2~3차례의 돈을 받아 탕진하고 실제적인 유산이 탕진한 돈에 비해 많다는 것을 알게된 연유로 그 아비인 표도르를 찾아 단판을 짖고 받아내려고 찾은 고향에서 또 그 아비가 연정을 품고 있던 그루센카에게 마음을 빼았겨 약혼관계에 있던 카첸카를 배신하고 애정도피를 벌일려고 하였던 그의 직선적이고 무절제하고 방탕한 대표적인 문제와 죄를 비록 부친살인은 아니였어도 작가는 20년의 유배형을 당해도 싸다라는 평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공판중에 미챠의 " 나는 하인 그레고리의 피에 대해선 비록 그가 죽진 않았지만 우발적이나마 놋공이로 쳐서 반 죽게 한 죄에 대해선 책임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여자 문제와 신성한 약혼의 파기에 대해서 유죄이다"라는 말로 고백한다. 작가도 당시 시대적으로 만연한 방탕의 문제에 대해서 유죄임을 분명히 하며 적지 않은 죄의 책임이 있음을 그가 비록 살인에대해선 누명이지만 방탕과 무절제에 대해선 20년의 시베리아 유배형을 당연화 하기로 하며, 한편으론 작가 자신이 공산주의 이론의 공포로 인한 사형선고의 억울함을 글을 통해 비꼬는 면도 있다고 볼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무절제와 방탕에 대해선 유죄이되 사상의 표현에 대해선 무죄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반의 그가 썼다는 대심문관의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당시에 대심문관으로 표현된 죽음뒤에 아무것도 없으며, 예수님이 거부했던 사탄의 세번의 유혹을 이긴 뒤에 다시 찾아 온 것은 결국은 빵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라는 비기독론적인 사상이라도 예수님의 화해와 용서의 키스를 받는 장면에서 표현된 당시의 러시아정교의 사상에 정면으로 도전을 한 내용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요. 이반의 주장은 결국, 도스도예프스키의 사상을 은연중에 그의 사상을 정말로 장황하고 무슨 말을 정확히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 같은 대화로 교묘하게 당시 서서히 꽃피워 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
끝으로, 두 여인 미챠의 약혼자이자, 실제적으론 이반과의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있으되 도덕적으로 이를 용납하고 사회의 이목과 더 나아가 약혼자인 미챠의 자신에 대한 배반을 자존심 상하여 인정하려 하지 않는 카첸카는 미챠와의 연인관계임과 그에대한 사랑보단 오히려 의리와 도덕률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신을 표현한다. 결국, 그녀는 사랑도 도덕적 인정도 받지 못하게 된다. 왜냐면 그나마 사랑을 떠나 공판시에 끝까지 입을 다물고자 했던, 미챠의 살인이 있기 전날의 술에 취해 아버지 표도르의 살인에 대한 계획을 끄적인 글을 이반과 같이 보고 이것은 결국, 그가 살인자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결정적인 단서로 배심원단에게 제공함으로써 복수아닌 복수를 마지막 순간에 해냄으로(?) 그녀는 의리도 도덕성도 사랑도 얻지를 못한다. 그녀는 자존심상 미챠의 그녀를 버리고 그녀가 경멸해 마지않는 상인의 첩으로 있던 그루센카와의 애정도피를 인정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에 집착을 함으로 그의 동생 이반의 그녀에 대한 사랑을 느끼면서도 이 집착에서 벗어나지못하고 있으며, 이반도 이로 인한 정신착란을 얻게 됨으로써 결국, 그녀는 사랑도 세상의 윤리도 지키지 못한 어리석은 여성으로 변해 버리게 된다.
여기에 한 명의 중요한 여인인 그루센카도 비록 그녀가 미챠의 사랑을 알고 받아 들여 애정도피에 찬성을 하고 떠나려 했으되, 그녀 또한 처음부터 맘에 없던 늙은이 표도르와 아들의 미챠의 자신을 사이에 둔 경쟁을 두 사람을 파멸로 이르게 할 상태로 발전하도록 방조하며, 이를 의도한 그녀의 심리를 묘하게 유죄화한다. 즉, 그녀의 본질적인 흔히, 지금 말하는 양다리 걸치기는 진정으로 사랑도 아니면서, 여성 특유의 남성의 욕망을 충분히 일으킬 매력의 상징임을 자랑하며 즐기는 본능이자 죄성을 지적하며 이 또한 유죄임을 알린다. 그녀 또한 결국,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 미챠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해서 사랑도 놓치게 됐으며, 그녀가 이전에 사랑을 했던 폴란드로 떠나게 된 연인의 사랑도 결국, 그녀의 돈을 바란 재회에 불과 했음을 알게 함으로써 본능적인 여성의 죄성은 본능적인 남성의 죄성에 다시 희생되는 악순환을 낳게 된다는 것과 그마져도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 순간에 그의 유배로 원천적으로 다 잃게 됨으로 철저하게 첫사랑에 배신을 당한 복수로 인하여 진정한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유죄임을 입증한다.
끝으로, 이 책의 저자가 이 길에 희망을 걸어둔 캐릭터인 알료샤(알렉세이 카라마죠프)가 있다. 알료샤는 천성적으로 세상의 물질과 이성에 대한 유혹보단 정신의 고매함과 모든 것보다도 안식과 평안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리 하여 형제들과 주변의 모든 그들의 관계자이자 연인들에게 상담자로써의 메신저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며, 문제의 실마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보며 좋은 결과와 실망보단 오해를 풀며 서로간의 증오를 이해로 연결하려는 중재자와 해결자로써의 역할을 끝까지 해나가며, 그루센카의 일을 맡았던 스네기로프 퇴임대위에 대한 그 친형 미챠의 모욕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그 일을 지켜본 스네기로프대위의 아들 일루세비치의 아픔을 치유해 주고자 했던 그의 노력을 통해, 또한 그의 친구들과 그를 무시하고 그의 환경을 경멸했던 아이들과의 화해를 주도 하고 , 병으로 죽게된 일루세비치의 죽음을 통해서 오히려 아픔이 화해와 죽음이 슬픔이 아닌 또다른 희망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결국, 저자 자신의 실제의 삶에서 잃게 된 아이 알료샤라는 이름을 이 작품에 포함시킴으로 이 이름에 희망을 걸고, 아이들에게 희망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 작가의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알료샤가 일루세비치의 주검과 그의 관을 아이들과 같이 교회에 안치하러 가면서, 그가 이 지역을 떠날 것과 떠난 후에 20년이란 시간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고 했을때 결코 서로를 아끼고 아팠던 기억마져도 사랑하기를 아이들과 같이 약속하고 부탁을 하는 장면으로 이 거대한 작품의 대단원을 마감하는 것으로 봐서 작가는 결국, 세상의 많은 군상들이 있으며 오랜 세월을 통해서 남성과 여성의 모든 죄성과 특히, 무절제와 시기와 복수는 결국, 유죄로 끝나게 됨을 더하여 사상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함을 강변하고 아이들이 치유와 사랑의 희망이 됨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끝으로 이 서평은 어디까지나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나 자신의 독후감을 서평으로 갈음하고자 한 나의 생각임을 밝힌다. !!
* p.s * 중,고딩때 선생님들은 도대체 이런 대작을 어린나이의 우리들에게 무슨 독후감을 바라고 쓰라고 하셨던 걸까? 아무리 책이 나이에 상관없이 보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치정과 연적관계와 도대체 수많은 무정과 비정과 살인에 이르는 삶의 단편을 어떻게 해석하고 보라는 거였을까?
좌우간, 선생님들 나이에 맞는 책과 교육을 부~탁~해요!!(이덕화feel로~)
그리고, 정말 긴 이 작품처럼 두서 없고 정신없이 쓰게 됐네요! 넓은 양해로! 대작에 대한 두서없는 촌평을 관용해 주시길 바라며~~ 남양주에서 송샌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