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프랑스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의 말이다. 식탁에 묻은 손자국, 옷에서 나온 작은 실밥, 어디선가 묻어온듯한 먼지는 누구나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극히 사소한 흔적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촉수(觸手)를 가진 수사관들에겐 결정적인 단서일 수가 있다.
13년전 청주에서 발생한 연쇄강간사건이 그랬다. 일명 '발발이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사건은 주로 원룸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2년간 30여명에게 성폭행을 저질렀지만 증거를 안남겨 범인은 오리무중이었다. 수사관은 피해여성들을 상대로 범인의 DNA를 하나하나 채취하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대전의 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웬 남자가 혀를 잘린채 응급실에 왔다는 것이다. 곧바로 쫓아가 이남자의 DNA를 대조해보니 바로 '발발이'였다. 또다른 여성을 성폭행하려는 순간 그 여성이 혀를 깨물어버린 것이다. 만약 과학수사관들이 범행의 현장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내 범인의 DNA를 확보하지 않았다면 '발발이 사건'의 수많은 범행을 입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신참 형사로 수사에 참여했던 신강일 경사(47)은 이제 '과학수사의 달인'이라고 불릴만큼 이 분야 전문가다. 그는 작년 6월 남미 과테말라를 방문해 선진과학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으며 제 65주년 과학수사의 날 기념행사에서 과학수사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현장감식, 최면수사, 강력범죄등 3개 분야에서 전문수사관 인증을 받은 첫번째 수사관이기도 하다. 인터뷰에 앞서 감식하는 장면을 사진 찍을때 사진기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그의 꼼꼼하고 섬세한 성품이 드러났다. 과학수사관으로는 체질인듯 했다.
<첨단장비를 활용해 지문감식을 하고 있는 신강일 수사관>
-과학수사관이 적성에 맞는듯 하다. 경찰에 입문할때 처음부터 과학수사 파트를 지망했나.
"수사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과학수사관을 원한것은 아니었다. 당시엔 과학수사대는 비인기부서였다. 대테러부대에 근무하다가 1999년 내가 자원해서 청주상당서의 유일한 감식요원으로 배치받았다. 이후 5년간 강력반에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14년간 과학수사관으로 일했다"
-국내최고의 과학수사관으로 꼽힌다. 대체 과학수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나.
"난 '과학수사란 인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어떤 사건이든 범인은 반드시 있다. 다만 범인을 잡는 과정에서 수사팀의 강압이 있을 수 있고 심리적인 압박으로 허위진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과학수사는 이럴때 필요하다. 현장감식과 유전정보 분석등 다양한 과학수사기법으로 누명을 쓴 용의자에겐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고 진범을 입증해 피해자 가족들의 한과 씻을수 없는 상처를 치유해주기 때문이다"
<과학수사에서 획기적인 방법이 미국 FBI가 만든 DNA 검색시스템(CODIS)이다.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DNA상 특정 표지 13개를 분석하는 방법으로 용의자 가운데 범인을 추려낸다. 1951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구조를 규명하면서 유전정보를 이용해 개인식별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크고 작은 증거물을 토대로 추리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용의자를 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은 1987년 최초로 DNA 감정 결과를 증거로 인정했으며 국내에서는 1992년 의정부 여중생 성폭행사건에서 최초로 DNA 감정 결과를 활용했다>
-당신은 작년에 남미 과테말라에 파견돼 현지 경찰과 과학수사관들에게 선진화된 국내 과학수사 기법을 전수했는데,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수준은 어느정도인가.
"대다수 남미국가들이 그렇듯 과테말라는 치안이 불안하다. 우리나라 인구의 25% 밖에 안되지만 우리나라가 평균 23시간마다 살인사건이 발생할때 그 나라는 하루 15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때문에 과학수사 도입이 시급한 나라이기도 하다. 2주라는 짧은기간이었지만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지문감식, 족윤적, 화재감식등 첨단수사기법을 전수했다. 무엇보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경찰수사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연구원과 검찰수사관들도 진지한 자세로 공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뉴욕, 마이애미, 라스베가스를 배경으로 과학수사극의 진수를 보여주는 미드(미국드라마) CSI와 크리미널마인드는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게도 인기가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공감이 되는가.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경찰관들도 그 드라마를 본뒤 실제로 드라마처럼 범인을 잡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당연히 가능하다. 각 나라마다 과학수사분야에선 장단점이 있지만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못지않다. 미국은 주(州)경찰이지만 대한민국은 국가경찰이다. 인력, 교육, 장비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나름 경쟁력있다. 다만 영국과 호주는 과학수사관들은 석박사 출신의 전문성있는 사람들을 채용하지만 미국은 고졸, 대졸, 석박사등 천차만별인 것으로 알고 있다"
-과학수사를 소재로한 미드를 시청하다 보면 아주 미세한 증거만 갖고도 범인을 잡는 과정이 리얼하게 나온다. 실제로도 그런가.
"나도 유심히 보았지만 드라마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현실과 다른점은 드라마에선 지문을 채취해 컴퓨터로 확인하면 용의자 얼굴과 프로필이 딱 뜬다. 이는 중간단계가 생략된 것으로 시청자가 보면 저렇게 쉽게 범인을 잡을 수 있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실제론 지문채취에도 수십가지의 기법이 있고 1명의 전문가가 아니라 많은 수사관들의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한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미드에서 나오는 첨단 수사장비는 우리도 보유하고 있다"
-경찰에 국과수가 있다면 검찰엔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가 있다. 양 기관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국과수가 부검등 법의학분야를 주로 담당하는 반면 NDFC는 컴퓨터, 휴대전화등 디지털 범죄증거 분석분야에 정평이 있다. 또 국과수는 경찰수사 단계의 지원을 맡고있지만 NDFC는 검찰 기소단계에서 법정증거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국과수 기능의 87%를 경찰이 활용해 주로 경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듯 하지만 최근엔 검찰과 상호 협력 보완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국과수는 '프랑스의 셜록 홈즈'라고 불린 에드몽 로카르가 세계최초로 프랑스 리옹대에 세운 법과학 감정소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는 작은 증거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수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고 미세한 먼지와 흙, 금속파편등을 감정해 범행형장에 범인과 피해자가 신체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과학수사가 발전하면 할수록 범인들도 지능적으로 증거를 인멸하는 사례가 많은것으로 들었다. 실제로 과학수사에 한계를 보이는 사건도 있을텐데..
"범인이 범행을 저지르면 증거를 안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수사 기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증거를 찾아 수사하면서 용의자를 하나하나 압축해 범인을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가설을 세워서 퍼줄을 맞추듯 정확하게 꿰어맞추는 것이다"
-그래도 미제사건은 여전히 있다.
"증거만 확보하면 시간이 걸려도 범인을 잡을수는 있다. 물론 미제사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전 얘기다. 근래엔 미제사건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과학수사를 하면서 10년전과 비교할때 사건의 유형도 많이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는데 최근엔 주로 어떤 사건이 많은가
"10년전에는 범인들이 주로 밤이슬맞아가면서 절도나 성폭행을 했다. 특히 예전 원룸문화가 확산됐을때는 혼자사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요즘은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면서 주로 낮에 절도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편이다. 또 도시가 커지고 신규인구가 유입되면서 범죄도 늘고 흉악한 사건이 발생하는 특징도 보이고 있다"
과학수사관은 험한 직업이다. 직업상 살인과 사고의 현장을 볼때는 차라리 냉정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비극적인 살해동기와 사고로 인한 한 가정의 파탄을 곁에서 지켜볼땐 정신적으로 힘들수 밖에 없다. 신 경사를 포함한 충북지방청 과학수사대원들은 요즘 한달가까이 청주 여고생 실종사건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지원온 핸들러(탐지견 훈련사)와 수색탐지견들이 청주 변두리 야산을 수색하고 있으며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들은 여학생의 실종 전 행적을 토대로 이동경로를 조사하고 있다. 현장에서 뛰는 과학수사관들도 여학생의 부모만큼 애타는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미제사건은 없다"는 신경사의 말이 조만간 마음에 와닿길 기대한다.
/JBN 파워인터뷰 ^ 네이버 블로그<박상준 인사이트>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