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국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어느 시대 유명한 장수나 지도자인 것으로 알았는데 현장에 가서 설명을 들으니 삼국시대 부족국가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역사를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어떻게 학교에서도 전혀 가르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고 매스컴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사람의 안목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시야가 좁은지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았다.
조문국이라는 나라는 경상북도 의성군에 위치한 군장국가로 동쪽으로는 주왕산, 서쪽으로는 낙동강, 남쪽으로는 팔공산, 북쪽으로는 안동까지 자리를 잡았던 나라로 의성읍을 중심으로 터를 잡았던 작은 나라를 유지하다가 신라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유적은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서부 지역과 동남쪽의 쌍계천 유역, 북부 미천 유역의 크게 세 군데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고인돌도 이 세 하천 유역 구릉에 주로 집중되어 있으며 주변에 무려 320여 기 이상의 고분이 함께 분포한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이 초기 국사 형성기의 대표적인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조문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금성면 일대의 고분군이 있다. 의성 지역에 많은 고분군이 있으나 금성면 일대의 고분들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규모가 월등히 크며 탑리리에 있는 고분은 봉분의 직경이 20m가 넘는 것이 16기나 되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동서 41m, 남북 30m, 높이 8m에 이르는 대형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이 중심 고분이라 할 수 있겠다. 탑리 고분에서는 공작새 모양 3개의 입식을 가진 금동관도 발굴되어 이곳이 의성 지역 지배층들의 분묘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금성면 탑리에는 조문국의 왕인 경덕왕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는가 하면 그 주변 무덤에서 나온 금동관은 신라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주목받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조문국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금성면 탑리리, 학미리 일대를 중심으로 성립하였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삼한 소국의 수장은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이며 이들은 국읍에 존재하여 읍락을 통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신분 구조는 주수, 천군, 민, 하호, 노비 등의 계층으로 분화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조문국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2세기 말 사로국은 조문국을 정벌하면서 낙동강 상류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구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내용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의성에는 양반들의 마을이 많은데 그중에서 남쪽의 산운마을은 수정 계곡 아래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산운(山雲)이라 하였으며 대감 마을로 불리는 전통적인 반촌으로 400년 이상 이어온 영천 이씨 집성촌이다. 조선 선조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 이광준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루었으며 이후 광해군 때 승지를 지낸 경정 이민성, 헌종 때 형조판서 이희발 등이 태어난 곳이다. 그중에 19세기 초에 소우 이가발이 지었다는 명품고택 ‘소우당’은 국가민속문화재237호로 전체 약 2000편이나 되는 정원에 한반도형의 연못까지 갖춘 멋진 가옥으로 민박을 한다니 한 번 이용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외 유형 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학록 정사와 400년 수령의 회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사촌마을은 1392년 입향한 김자첨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풍수상의 명당으로 마을 뒷산에 문필봉이 있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있어 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 자리를 잡은 경북 유형문화재 제169호인 만취당은 조선 중종 때 만취당 김사원이 건립한 것으로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의성을 대포하는 사찰 고운사는 그 지역에서는 이름이 난 사찰이다. 원래는 高雲寺라는 한자를 썼는데 고운 최치원이 머물면서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립한 후 사찰 이름을 최치원의 호를 딴 외로울 고를 써서 孤雲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운사의 일주문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10대 일주문에 든다고 하며 그 외에도 가운루와 천왕문, 연수전, 석조여래좌상 등이 유명하다.
다음으로 고운사에서 조금 돌아 나가는 길가에 세련되고 멋진 한옥으로 지은 최치원 박물관이 눈길을 끌었다. 마침 전국에서 모아 놓은 최치원 영정 전시회를 하고 있어서 사진을 찍으며 관심 있게 살펴보노라니 박물관 책임을 맡고 있으며 해설사로 봉사를 하는 분이 사무실로 오라고 하여 갔더니 최치원 영정 화보를 한 권 주어서 소중한 자료를 얻었고 앞으로 자료가 필요할 때 협조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돌아왔다.
최치원은 경주 최씨 시조로 나에게는 30대조 할아버지가 된다. 최치원은 알다시피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살에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빈공과에 장원을 하여 율수현의 현위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고 20살 즈음에 소금장수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황소를 질책하는 글 토황소격문을 써서 황소가 읽다가 놀라서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명문을 지어 난을 평정하게 되었는데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28세에 귀국하여 기울어가는 신라를 구하기 위해서 시무책을 올렸으나 진성여왕은 귀족들의 반대로 6두품의 신분의 벽에 부딪혀 최치원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에는 태산군 태수가 되어 외직으로 돌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인물로 최치원 박물관은 관의 지원으로 짓고 고운사에서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저녁 행사는 제1부로 SBS 김지연 아나운서의 사회로 역사학을 전공한 최태성 씨가 강연을 한 후 2부로 제갈인철의 사회로 진행한 작은 음악회에서 테너 황남석의 ‘향수’ 외 조다빈의 ‘그중에 너를 만나’와 이재안의 ‘고맙소’를 들으며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기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다음 날 마지막 순서로 만취당 뜰에서의 인문학 낭독회는 의성마늘이라는 시제로 4행시를 발표하였는데 아쉽게도 순위에 들지는 못하였지만 이 가을의 인문학 여행은 ‘백두대간 인문학 캠프’ 의성편으로 멋지게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