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는 ‘(우리 영토는)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조선의 고을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
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勾當官)과 만호(萬戶)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 이뤄졌다. 1419년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만7000명의 대군을 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코 도주를 태수로 봉했다. 그래서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신유한의 ‘해유록(海游錄)’은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일본의 대마도 편입은 19세기 후반
19세기 후반 일본 메이지 정부는 대마도를 일본에 편입시켰다. 1868년 대마번(藩)이 메이지 정부에 올린 봉답서를 보면 대마번이 조선의 번속국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에 대해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어 수 백 년 간 굴욕을 받았으니 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지금의 서계부터 조선이 주조해 준 도서 대신에 일본 조정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도장을 사용하여…”
이와 관련, 전북대 하우봉(河宇鳳) 교수(사학)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처럼 조선후기의 대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의 “대마도는 우리 땅” 선언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1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해 현해탄에 거센
파도를 불러일으킨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의 요시다 내각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맥아더 장군에게 이 대통령의
요구를 막아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이후 공식 문서나 외교채널을 통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각국의 외교사절을 만날 때마다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이 대통령은 바다에도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구역을 설정해 이를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붙잡도록 했다.
재일조선인 거류민단 대마도본부 이신연(李新演) 단장은 “이 대통령의 선언이 나왔을 때 대마도에 살던 일본 주민들은
‘한국이 독립을 해서 미국의 힘을 업고 대마도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제 곧 일본사람들은 쫓겨나게 생겼다’며 크게 불안해했다”고
회고했다. 이즈하라의 슈센지에 있는 항일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독도문제보다도 입증할 자료 많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증거보다는 대마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훨씬 풍부하다. 또한 독도에 대한 일본인의 역사적 인식보다도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역사적 인식이 훨씬 깊다.
하 교수는 “섬을 비워놓는 ‘공도(空島)정책’ 탓에 조선이 대마도를 영토적으로 복속시킬 기회를 놓쳤다”며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근거보다 한국의 대마도영유권 주장근거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 있는 고려문. 대마도 번주가
살던 사지키바라성의 제3문으로서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위한 영빈문으로 사용했다
========================================================================================================================
《“‘총각’이 한국말이라고요?” “아니 ‘지게’도
한국말이에요?” ‘쓰총’(쓰시마 총각) ‘삿총’(삿포로 총각)이란
줄임말을 쓰는 쓰시마의 택시 운전사에게 ‘총각’이 한국말이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란다. 한국의 지게 역시
쓰시마에서도 ‘지게’로 불린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선 이런 말을 들을 수 없다.
쓰시마에서만 통용되는
한국산 단어는 지금도 300개가 넘는다.》
● 일제시대 한국인 2만여명 살아
섬 전체의 92%가 척박한 산악지형이고 농토는 3%도 안 되는 대마도의 생존과 성쇠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의 교류에
크게 좌우돼 왔다. 대마도향토연구회 회장인 나가토메 히사에는 “한반도와 대마도의 관계는 밝았던
시대와 어두웠던 시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좋았던 시기로 기원전 3세기∼2세기의 500년과 조선 초기를
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대마도는 인구가 9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인구가 해마다 줄어 지금은 4만여명에 불과하다. 한국인도 일제강점기에는 2만여명이나 살았지만 지금은 60명에 지나지
않는다.
1999년 부산∼대마도간 정기여객선이 취항한 이후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엔 1만5300명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았다. 파고가 높아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뜨지 않으면 대마도의 주요 호텔과
음식점들이 텅 비기도
한다.
● 한복입고 참가하는 ‘아리랑 마쯔리’
조선시대 때도 대마도엔 주기적으로 ‘조선 붐’이 일었다. 관료 학자 통역관 악대 등 5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 행렬이 지나갈 때면 대마도는 후끈 달아올랐다.
대마도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족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웬만한 절이나 관공서에는 ‘조선통신사가 묵었던 곳’이라는 대리석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매년 8월 첫째 일요일에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연하는 ‘아리랑 마쯔리’가 열리기도 한다.
이때 대마도 주민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통신사 행렬에 참가한다. 주로 부산 동래구청장이나 구의회의장이 초청돼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타던 가마에 탄다. 그 호위는 대마도에 진주해 있는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의 대장이 맡는다.
● 조선왕실의 관직임명장인 ‘고신’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유물 중 조선왕실의 관직 임명장인 고신(告身·고쿠신)이 특히 흥미를 끌었다. 대마도가 조선에 정치적으로 예속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로 이를 받은 사람들은 수직왜인(受職倭人)으로 불렸다.
그래서 그런지 취재팀에 특별히 전시장 내부 촬영을 허락한 자료관 직원은 왠지 고신에 대해서만 “박물관 소유의 물건이 아니다”며 촬영에 난색을 표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국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취재팀이 고신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그 직원은 거북한 표정으로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하려 들었다. “왜구에 꼭
일본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과 중국 출신도 많았다. 고신은 한국 출신 왜구로서 조선왕조의 스파이 역할을 하다가 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라고.
● 대마도의 원주인은 백제계 유민?
리아스식 해안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한 아사우(淺海)만은 요즘 한일 양국의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낚시터이지만 오랜 기간 왜구의 소굴이었던 천혜의 요새다. 조선 태종 때 이종무 장군도 아사우만 일대에 한 달간 머물며 왜구를 소탕했다.
이 일대에는 667년에 백제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백제식 산성인 ‘가나다노기’(金田城)가 있다. 백제와의 인연은 13세기 중엽까지 대마도를 지배했던 ‘아비류’(阿比留)씨 가문의 혈통에서도 더듬어볼 수 있다. ‘아비류’는 ‘아사달’ ‘아직기’ ‘아사녀’ ‘비류백제’ 등과 어원이 같은 백제 계통의 성씨인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 다시 거세게 이는 대마도의 한국 붐
대마도에 다시 한국 바람이 거세다. 3월 시로 승격한 대마도엔 산을 깎고 온천과 골프장 등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의지가 섬 곳곳에서 느껴진다.
대마도가 속해 있는 나가사키(長崎)현은 정부에 ‘대마도 특구’ 법안을 제출했다. 이 안에는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에 한해서는 비자 면제, 섬내 토지이용 및 취득 규제 완화, 한국어 교육 확대 등의 정책이 포함돼 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한국인 단체관광객과 학생은 비자를 면제해주고 있다. 또한 대마도고교 국제교류과 학생들은 졸업학점(25학점) 중 한국어 5학점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도록 돼 있다.
● 주민증만 내보이면 땅도 살 수 있어
취재 도중 미쓰(美津)지역에서 ‘대마도에 별장을’이라는 흥미로운 벽보를 발견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마도의 토지와 건물을 한국의 모든 분들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토지와 건물의 판매 가격은 2000만원부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벽보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어 “한국 사람인데 대마도의 농가주택을 구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인 부동산업자는 “한국의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살 수 있고 등기도 가능하며 가격은 평당 20만∼30만원대”라고 대답했다.
대마도 시청의 우치다 히로시(內田洋) 총무기획부장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면서 “50km 떨어진 부산엔 400만∼500만명이 살고 있는데 150km 떨어진 후쿠오카의 인구는 200만명에 불과하다. 눈앞에 좋은 시장이 있는데 왜 한국과 교류하지 않겠는가”라고 덧붙였다.
● 교류 활성화로 대마도와 연을 잇자
일본이 실효적으로 대마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장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그보다는 교류 활성화로 대마도를 한국의 경제권과 문화권에 편입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6년째 여행 가이드를 해 온 홍관영씨의 생각도 같다. 그는 “대마도가 일본 땅이 된 이유는 척박한 땅이라고 해서 한국이 방치해왔기 때문”이라며 “영토 분쟁보다는 경제와 문화 교류를 통해 한국과 대마도의 연을 이어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대마도의 한국관련 유적 및 행사 | |
조선통신사 행렬도 | 4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의 화려한 행렬을 담은 길이 16.58m짜리 두루마리 그림. 이즈하라 대마역사민속자료관 보관. |
아리랑 마쯔리 | 매년 8월 첫째 토-일요일에 개최되는 대마도 최대의 축제. 조선통신사의 행렬 재현. 노젓기 대회, 불꽃놀이 등 다양한 행사. |
바이린지(梅林寺) |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이 전파됐던 연고지에 건립됐다고 전해지는 고찰. 1436년 조선에 예속된 후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하는 선박에 대해 문인(도항증명서)을 발급해주는 사무를 보던 곳. |
가나다(金田)성터 | 일본 최고(最古)의 성터. 높이 2∼5m의 성벽이 5.4km에 걸쳐 남아 있는 백제식 산성. 667년 백제유민이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알려짐. |
신라사신 순국비 | 왜에 볼모로 잡혀 있던 신라의 왕자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은 잡혀 처형당했던 신라 사신 박제상을 기리는 순국비. 1988년 한국과 대마도의 학자와 유지가 힘을 모아 건립. |
코즈나(小綱)의 고려불 | 칸온지(觀音寺)에 본존불로 안치돼 있다. 불상 속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1330년 주조돼 고려 부석사에 봉납한다고 쓰여 있으나, 어떤 경로로 대마도에 유입됐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
=======================================================================================================================
2010 이즈하라항마쓰리 쓰시마아리랑축제 프로그램
축제안내의 아리랑축제 게시판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부산~대마도 비행기로 26분 더 가까워진 이웃나라 백사장 모래는 부드러웠다-부산일보(2010.7.1)
[일상탈출] '비행기 타고' 대마도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는 방법은 뱃길뿐이다. 굳이
하늘길을 통해 일본 본토를 경유한 뒤, 일본 본토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하늘길로 대마도로 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본보 2008년 6월 19일자 30면 기사 중) 2년 전 기자가 썼던 기사의 일부다. 진실은 변하기 마련. 이제 더
이상 이 기사 내용은 진실이 아니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에 하늘길이 열렸다. 뱃멀미가 힘드신 분들, 올 여름에는 비행기 타고
대마도로 가서 해수욕을 즐겨보는 거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대마도는 마치 때묻지 않은 아이처럼 순수하다.
한 아이가 대마도 미쓰시마마치해수욕장의 푸른 바다를 향해 백사장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다.>
▶ 출근길보다 빠른 대마도 하늘길
코
리아익스프레스에어는 지난 5월부터 부산~대마도 하늘길 운항을 시작했다. 하늘길을 책임지는 주인공은 소형 여객기
비치크래프트(Beechcraft) 1900D. 길이와 날개 너비가 각각 17.6m인 쌍발터보프롭기로 기장과 부기장을 제외하고
18명이 탑승할 수 있다. 국내 항공사들이 국내선 노선용으로 운항하고 있는 B737 기종(120인승)의 길이가 28m이니 약
절반 크기.
기내는 소형 여객기임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될 만큼 천장이 높다. 좌석은 중간에 너비
50㎝가량의 통로를 두고 좌·우로 한 좌석씩 배열돼 있다. 앞뒤 좌석 폭은 일반 항공기의 이코노미클래스보다는 넓고
비즈니스석보다는 좁은 편이다. 양쪽으로 아홉 개의 좌석이 있으니 모두 18좌석. 그중 두 좌석은 항공승무원의 좌석이므로, 결국
승객 정원은 16명인 셈이다. 두서너 좌석이 나란히 붙어있는 기존 비행기에 비해 옆 사람을 신경써야 할 필요가 없어 더욱
편안하다.
김해공항에선 코리아익스프레스에어와 업무 협약을 맺은 아시아나항공 직원이 탑승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대신
처리해줘서 편리하다. 그 외에도 왠지 VIP 대접을 받는 느낌. 게이트에서 비행기까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콩나물 시루에 갇힌
것처럼 고생할 필요도 없고,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입국하면서 30분에서 1시간, 혹은 그 이상씩 줄을 서야 할 필요도 없다.
"
테이크 오프(take off)." 쌍발터보프로펠러가 회전하는 소리와 엔진 가동음이 들리더니 비행기가 활주로를 따라 천천히
이륙한다. 아무래도 동체가 가벼운 만큼 진중한 느낌은 없다. 고속 주행하는 스포츠카를 탄 기분이랄까.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불편하지 않다. 이착륙 시 다소 기체가 흔들리는 것 외에는 하늘에 떠있는 내내 일반 비행기와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약간의
'스릴'을 기대했던 기자로서는 다소 김 빠지는 시간이었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안녕하십니까? 이
비행기는 김해공항을 출발해…, 어쩌구 저쩌구…, 비행시간은 26분이며…, 다시 어쩌구 저쩌구…." 비행기를 타 보신 분들,
기장의 안내방송은 흘려듣기 예사. 그런데 '26분'이라는 비행시간에 깜짝 놀란다. 이건 기자의 집에서 지하철로 회사까지 출근하는
시간보다 짧다. 어느새 본격적인 활공에 들어갔다. 기체 진동은 크지 않은 편이었다. 음료 서비스도 마련되어 있다. 이 정도면
여느 여객기 못지않다. 단, 서둘러 마시는 편이 좋다. 조만간 바로 비행기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사진은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대마도.>
▶ 즐길거리 다양한 대마도
30
분도 채 걸리지 않는 시간 만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마치 부산 근교로 나온 느낌. 그러나 대마도도 엄연한 외국이다. 이제부터
즐기는 일만 남았다. 대마도 관광은 한국과 관련된 역사기행과 낚시 투어, 그리고 등산이 주를 이룬다. 거기에 여름이 되면
해수욕이 추가된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마도에는 해변마다 크고 작은 해수욕장이 들어서 있다. 이 중 히타카쓰
항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인 미우다해수욕장이 가장 유명하다. 일본 100선(選) 해수욕장으로 뽑힐 정도로 작지만 아름다운
해안. 대마도에선 보기 힘든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 해변으로, 해변 위로 펼쳐지는 에메랄드 바다빛은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수심이 얕을뿐더러 캠프장과 주차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외 미쓰시마마치해수욕장과 오우라해수욕장도 미우다해수욕장 못지 않게
아름다고 호젓하다.
한국 역사와 관련된 유적은 대부분 대마도 섬 남단의 가장 번화한 동네인 이즈하라마치 시내에
모여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백제 승려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슈젠지(修善寺)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사찰이다.
을사늑약을 반대해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선생은 그 이름보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는 당신의
말로 더 유명하다. 선생은 1906년 일제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마도로 끌려온 뒤, 단발령을 거부하며 단식을 하다
순국했다.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슈젠지.>
이
즈하라마치 중심부에 위치한 쓰시마교류센터 뒤편 작은 비탈길 위로 고려문이 서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문. 고려문에서 길 맞은편으로 보이는 비석이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비를 찍고, 그 옆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 들르는 것도
잊지 말자.
<고려문.>
그
외에도 고종의 딸 덕혜옹주와 대마도주 아들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덕혜옹주결혼기념비, 풍랑으로 표류된 조선인 어부를 위한
표류민집단수용소가 있던 자리인 표민옥적(瓢民屋跡), 춘향전을 번역해 일본에 알렸던 지한파 소설가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挑水)의
생가 등 뚜벅이가 되어 이즈하라마치 골목골목을 거니노라면 마치 우리나라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산행은 주로
이즈하라마치를 둘러싸고 있는 아리아케(558m). 이즈하라 북쪽의 미쓰시마마치에 자리한 시라다케(519m)를 주로 오른다. 두
산 모두 정상에 오르면 섬과 바다가 천태만상의 형상을 이루는 아소만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각각의 산을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4시간 미만이며, 두 산을 이어 오르는 종주코스를 선택할 경우 6시간 정도가 걸린다.
<아리아케를 오르다 보이는 이즈하라마치 전경.>
그
러나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는 이유 중 절반 이상은 '손맛'을 보기 위해서다. 낚시꾼들 사이에 대마도는 '어칠수삼(魚七水三)'의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장마철로 접어든 요즘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마도까지 건너왔다가 내리는 비만 바라보다 돌아가는 '열혈'
낚시꾼들이 수두룩. 7월 중순으로 넘어서면 참돔, 돌돔, 긴꼬리벵에돔 낚시가 다시 피크 시즌을 맞는다.
글·사진=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일부 사진=대마도 부산사무소·대마도항공투어 제공 / 취재협조=대마도항공투어
대마도 여행 TIP
동
경 129도, 북위 34도에 위치한 일본 규슈 최북단 국경의 섬인 대마도. 일본 본토로부터 132㎞나 떨어져 있는데 비해
부산에서는 불과 49.5㎞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면적은 709㎢로 거제도의 약 1.5배이며, 제주도의 절반에는 미치지
못한다.
주민은 약 3만 5천여 명. 주로 임업과 어업,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최근 한국인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관광산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공항을 비롯해 두 곳의 국제여객터미널 어느 곳에도 환전소가 없다. 그렇다고 한국 화폐가
통용되는 것도 아닌 데다 신용카드 사용도 쉽지 않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출국 전 충분히 환전하는 것이 좋다. 굳이 급하다면
이즈하라 시내의 주하치 은행에서 환전, 혹은 현금서비스 가능.
대마도 가는길
부산~대마도행 비행기는 주 4회(월, 수, 금, 일요일 하루 1회씩) 부산 김해공항에서 출발한다.
부
산~대마도 하늘길의 미덕은 가격에 있다. 왕복 항공료가 15만4천원. 거기에 공항 이용료, 유류할증료 등 3만5천원이 추가로
포함된다. 모두 합하면 18만9천원. 현재 바닷길이 부두 이용료 포함해 왕복 16만원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나름 '착한'
가격이다. 다만 오는 16일부터 성수기에 들어서면서 일정 기간 동안 가격이 올라간다. 준성수기인 16~28일, 8월 7~15일
동안은 왕복 항공료가 19만원, 성수기인 29일~8월 6일까지는 21만원이다.
비행기삯을 포함한 여행상품을
이용해도 좋겠다. 숙박은 물론 조식과 대마도 내 교통편 등을 제공한다. 1박2일 등산 상품이 1인당 29만9천원(준성수기
33만5천원, 성수기 35만5천원), 2박3일 바캉스 상품이 1인당 44만9천원(준성수기 48만5천원, 성수기 50만5천원)이다.
비행기 및 여행상품 예약은 대마도항공투어에서 대행하며, 홈페이지(airdaemado.co.kr) 혹은 전화(051-747-1787)로 신청하면 된다. 김종열 기자
<사진은 비행기 내부 모습.>
<사진은 비행기 외부 모습.>
출처 : http://www.tsushima-busan.or.kr/
관광지 :
1.이즈하라마치
1-1 쓰쓰자키는 쓰시마 최남단에 위치한 곶(갑)으로,대한혀협에서 쓰시마해협으로 돌아들어 오는 곳에 돌출되어 있다. 거친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과 암초들 그리고 바다 저편의 새 하얀 등대가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쓰시마난류를 타고 북상하는 선박들에게는 항해 위치를 파악하기에 용이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쓰시마 난류의 분기점으로 해류가 빨라 쓰시마의 최북단과 더불어 항해하기 어려운 난코스이기도 하다. 1909년 항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곶의 앞바다에 등대를 건설하였으며 현재의 20m높이의 등대는 1987년 새롭게 세워졌다. 해류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어종이 풍부하고 성게, 소라, 전복뿐만 아니라 가을에는 방어도 많이 잡힌다.
1-2
- 가미자카(上見坂)공원 : 표고 385m의 전망대로, 일본을 대표하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이 눈 아래에 펼쳐지며, 멀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이 보이는 국경의 섬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는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1-3
- 다테라야마(龍良山) |
|
|
1-5
- 이시야네(石屋根,돌 지붕) |
|
1-6 - 武家저택
|
|
1-7
-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
|
1-8 - 반쇼인(万松院)
|
1-9 - 현립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
|
1-10 - 아리아케(有明)
|
|
1-11
- 최익현순국비(슈젠지,修善寺) |
|
1-12 - 아유모도시 자연공원(鮎?し自然公園,은어가 돌아오는 자연공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