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에 올라
권 용 태
삼국시대가 막바지를 향하다 숨고르기를 할 즈음,
대가야에서 경주로, 다시 경치좋은 충주를 찾아 연주를 이어가던 우륵의 성정은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충주를 지나 양수리로 이어지는 한강의 긴 여정을 그대로 닮아 갔을 것이다.
숨길 따라 흐르는 사람의 핏줄기나 바람골 따라 흐르는 강줄기나 한 가지니 왜 안그랬겠나.
탄금대 푸른 절벽에 오르면 속리산 소식을 가져와 합수 하는 달천강이 보이는데 널직해진 그 몸을 주변 들녘으로 전개하는 큰 물길을 보며 가야금의 명장 우륵은 무엇으로 그에 응수했을까?
이 대하 드라마에는
달래강과 어울리는 흥겨움이 있다
검룡소 흘러내리는
흑룡의 춤사위도 보인다
저 바람 속에는
아우라지 청춘의 통곡소리도 있겠지
나그네 그리움이 사무친들
산을 껴안고 도는 강의 선율만 할까
싸리골 지는 올동백 서러움만 할까
과연
횡성강 가 황소의 눈망울을
그의 필설은 다 옮길 수나 있을까
한강을 탄주하는 님의 손놀림인 듯
절벽을 치는 물결을 보며
나그네는 다만
그 니의 속가슴만 짐작 할 뿐.
잠시 잠깐 들른 나에게 충주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한강이 이 땅의 허리를 그으며 동에서 서로 흐르는 동안 수많은 물줄기를 합치며 여러 도시를 지나왔기에 탄금대 마당에 모여서는 지금까지 가져온 모든 것들을 소통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삼국시대부터 이 지역을 선점하기 위한 각축전이 치열했기에 백제가 400여년, 고구려가 150여년, 종국에는 신라가 차지하고 만 땅이다.
지금도 당시의 사실을 전하는 적성비, 중원고구려비가 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놀라운 건 중원고구려 비를 전시한 박물관인데, 원래 백제 땅인 이곳 사람들 입장에선 침략의 상징일 수밖에 없는데도 고구려 비와 그 유산들이 지금은 이 고장의 긍지와 자랑으로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분의 모형 전시관에 그려진 벽화에 대한 설명은 알기 쉬우면서도 정교했다. 그 만큼 정성을 다 했겠지.
악기를 연주하며 나는 선인, 산능선을 넘나들며 호랑이를 사냥하는 기마 수렵도, 현대적 패션으로 유명한 무용도...
고구려의 강인한 기상과 예술성, 풍류까지도 완전히 자기네들 것으로 소화하고 있잖은가.
또 하나는 중앙탑인데 원래 명칭은 탑평리 7층석탑이었단다.
3층탑이 대부분인 통일신라의 유일한 7층탑이니,
고려시대에 와서야 중국 영향으로 자유로워진 다층탑이 일찍이 신라시대 충주에 먼저 세워진 건 이 또한 재빠른 개방성을 얘기해 주는 거겠지.
이 원초적인 가운데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해탈과 무아지경의 집이어야 할 불탑을 여봐라라는 듯 상징물로 세운 건 유감이지만 큰 스님들 동의 하에 시행했을 터이니 부족한 공부를 좀 더 해야지.
바꿔 생각하면 그 또한 교리와 종파적 시비를 넘어선 대승적 경지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처럼 사방으로 열린 자연과 그 속에 자란 능동적인 인문의식은 충주에 주어진 천혜조건이겠지만 북방 고구려의 침략이라는 국가적 우환마저 대륙문화의 수용과 계승으로 호환시키는 안목과 우륵이라는 이방인을 자신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상징인물로 키워 놓은 열린 마음 또한 구경하는 이들의 보폭을 더욱 넓혀주고 있다.
첫댓글 권용태 사무국장님의 큰 문장에 머물다 갑니다.
역사 전공이셨던 터라 옛이야기가 술술 자유롭습니다.
토속적 문화를 바탕에 깐 선 굵은 필력이 매력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멋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