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랫줄에 걸린 이야기
김 영 희
불과 한 시간 남짓 널어둔 수건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과 바람으로 벌써 거의 다 말라서 부는 바람에 춤추고 있다.
첫 번째 살구색 수건은 가장 최근에 받은 것으로 집 앞 큰길가 너머에 새로 개원한 노인요양원에서 이 시골 마을 이십여 채 되는 동네 집집이 보내온 것이다. 그때는 엄마가 함께 계셨고 다른 곳의 주간 보호 센터에 다니고 계실 때였기에 수건을 받고도 마음이 찜찜했었다. 연세가 많은 친정엄마를 공기 좋은 곳에서 살게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나 역시 도시에서 태어나 시골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꼭 한번 잔디밭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살던 도시에서 가까운 농촌으로 귀촌하였다.
두 번째 흔들리고 있는 반은 흰색 나머지 바탕은 옅은 노란색으로 친구의 전화번호가 아직 선명하게 찍혀있는 가게 개업 기념 수건이다. 벌써 여러 해 동안 그와의 소식이 끊어졌는데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좋아하는 막걸리 한잔하고 거나해지면 노래를 부르며 사람 좋은 허허로운 웃음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는지…….
세 번째 걸린 저 빛바랜 분홍빛 수건이 어쩌다가 우리 집으로 왔는지 기억나지를 않는다. 가끔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마을회관에서 운영하던 사우나에 갈 때마다 꼭 저걸 들고 간다. 이 지역 초등학교 동창회 체육대회 기념 수건이기 때문이다. 집성촌인 이곳으로 이사 오니 마을 대부분이 친인척 관계이기에 타지에서 들어와 정착해서 살기에는 텃세 아닌 텃세가 심한 편이었다. 작은 수건 하나에 인쇄된 동창회 기념 그 글귀가 나에게 작은 힘이 될 것 같아. 혹시나 내가 이 지역 토박이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가지고 간다.
마지막으로 걸려 별로 바람에 나부끼지 않는 밝은 회색의 수건은 벌써 이십 년 전 내가 몸담고 있던 영어학습지 회사의 창립 30주년 기념 수건이다. 결혼하고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내 나이 서른아홉에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고 합격해 영어 학습지 교사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교사로서 경험도 없고 결혼하고 구미에서 처음 시작한 사회생활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적성에 잘 맞고 수입도 점점 늘어나고 보람이었던 직업이었다. 아마도 지금껏 내 생애에 있어 가장 잘나가던 때 받았던 수건이었던 것 같아 볼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문득 마당에 널어둔 수건들을 보며 수건 하나하나에 이토록 많은 사연이 숨어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어디 수건뿐이겠는가? 집 안 구석구석 자리 잡은 살림살이들도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나이가 늘어날수록 집안 살림살이도 하나. 둘씩 자꾸 늘어난다. 딸이 타지에서 대학을 다닐 때 공부했던 교재며 자취 생활 살림살이, 아들이 중고등학교 때 썼던 물건들로 아이들은 독립해 떠난 그 자리를 아이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채우고 있다. 남겨둔 그 물건들을 보며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있다.
그런 물건뿐이 아니다. 휴대 전화기에 지금은 연락을 거의 안 하고 지내는 예전 직장 동료들과 취미 생활 중에 알게 된 소소한 인연들로 만났던 사람들의 전화번호들도 삭제 못 하고 있다. 가끔씩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며 그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혼자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지금은 딱히 필요 없는데 그냥 놓아두는 물건들처럼 여전히 전화번호를 남겨두고 있다. 그것들에게도 빨랫줄에 널린 수건처럼 이야기들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널어둔 수건의 추억이 바람에 춤추고 있다. 나는 그 춤사위를 보며 함께 했던 시간 속에 행복했었던 소중한 기억들이 함께 춤춘다. 남아 있는 물건에서, 사진에서, 수건에서 아주 가끔씩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종종 떠나게 되는 요즈음이다.
내가 나이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