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16:22~31
나의 마지막은 어떻게!
요즘 크고 작은 사건으로 절친 혹은 내가 아는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내 삶을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오늘 본문 삿16:31절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고 기록됐다.
이어서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했다.”
즉 삼손의 마지막은 가족장으로 끝냈다. 적어도 나라 장, 지역 장까지는 치러야 될 위치였다.
하기야
가룟인 유다의 장례는 시신을 찾아갔다는 말까지도 생략했고, 아합은 그의 죽었던 자리에 흘린 피를 개가 와서 핥아 먹었다(왕상22:38)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비록 왕이요, 사사였음에도 하나님께서 아합이나 삼손의 죽음마저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손의 죽음을 놓고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 평소에 두 눈을 뜨고 블레셋 지방인 딤나 아스글론 가사 등을 돌아다니며 사사로서 사용할 힘을 개인적인 일에 쓰더니 죽을 때는 두 눈을 뽑히고 보지 못한 채 죽게 됐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눈 뜨고 다닐 때 우리는 볼 것을 보아야 하고, 가야할 데를 가야 된다.
실례)
바울을 보자. 그는 볼 것을 보고, 갈 데를 갔다. 육신의 눈으로는 소아시아를 바라보고 가려고 했으나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영안이 열리고 난 후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로 갔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고 간수장을 만나서 빌립보 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러므로 삼손처럼 육신의 눈만 뜨고 은사를 악용하여 사용하다가 두 눈 뽑히고 비참히 죽는 모습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바울처럼 영안을 열려 더 넓은 하나님의 세계를 구령의 세계를 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한다.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의 시각, 영적인 안목을 갖는데 있다.
사사가 되고 목사 장로가 되는 게 목적이 아닌 그 된 중직의 직분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각으로 영혼을 살리고, 주님의 집을 섬기는 것이다.
두 번째,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더니 결국 자신도 참혹하게 죽었다.
물론 하나님이 징계의 도구로 그를 사용하여 블레셋을 치게 하신 것은 맞다. 블레셋은 블레셋 나름으로 악과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쓰임 받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그 사람의 흘린 피 값을 그냥 두고 넘어가지 않는다.
다윗이 그 대표다.
헤브론에서 칠년 육 개월 동안 보내게 하신 것은 평화통일을 이루기까지 이스보셋과 그의 잔류들을 제거하는 과정이긴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들어난 표면적인 이유이다. 진짜 이유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죽인 그의 칼과 마음을 정화시키는데 있었다.
그래야 통일 왕국을 하나님의 시각인 헤세드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왕이 되어서도 너무 많은 전쟁으로 살상을 했기에 하나님은 그가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도 강렬했지만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상2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신앙이란 무엇인가?
천국 가는 지표이기도 하지만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지침이다. 결국 바른 가치관이 삶을 평화롭게 핸들링 한다.
다윗의 가치관은 의의 잣대로 접근하는 가치관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속성인 「헤세드」란 은혜의 심정을 놓치고, 한쪽의 가치관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다.
삼손 역시 이러한 자기만의 사고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다 보니 결국 자신 역시 처참하게 죽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만 사용된 것이다.
한 가지, 삼손의 죽음을 두고, 발견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은 “그가 마지막 회개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기드온과 비교해서 다른 면이다.
기드온은 악한 상황으로 치닫다 죽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에봇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음란하게 섬기게 만들었고, 자기 권위를 드러내는데 사용했다.
아들 아비멜렉은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결국 야욕을 배우고 형제들 칠십 명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라고 선포하는 교만의 극치까지 달리게 된다.
그래서 이름 없는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죽는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게 되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살았을 때 어떻게 사느냐?” 가 결국 죽을 때를 가름하게 하는 것을 보여준다.
삼손은 비록 사사의 사명을 악용하고 살았지만 죽을 때는 “회개하고 죽었다.”
그렇다.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 있다.
중직을 감당하다 보면 보이지 않게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끝에 징계도 받을 수 있고, 시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의 마무리만큼은 아름다워야 되지 않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데 심판이란 낱말이 「크리노」에서 왔는데 “심의한다. 언도한다.”는 말이다.
나를 심의할 때, “넌 마지막만큼은 회개하고 내 뜻에 초점을 맞추고 왔구나!” 소리만큼은 들어야 될 것 같다.
마무리
누구나 인생을 산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심판대로 향하는 마무리 단계이다. ‘나는 어떤 마무리를 할까?’ ‘내 남은 10년의 삶, 20년의 삶, 그 이상의 삶은 결국 어떻게 마무리 할까?’
삼손을 교훈 삼아 칭찬과 상급을 염두 한 마무리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한다.
마25:21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계2:7 “이긴 그에게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계2:26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한다.
기도하자.
1) 심판대 앞에서 칭찬받는 마무리를 목적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 오늘 주어진 시간을 살리는데 쓰임 받는 예수님의 심장으로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