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클래식] [핫피플] ‘연습생 신화’ 장학영, “준비를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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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80만원을 받는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했다. 사실 연습생으로 프로팀에 들어간 과정조차도 순탄치 않았다. 그는 성실하고 묵묵하게 훈련하며 때를 기다렸다. 땀은 배신하지 않았다. 연습생 생활 반년 만에 1군에 합류해 데뷔전을 치렀고, 그로부터 또 1년 반이 지나서는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K리그를 대표하는 왼쪽풀백, ‘연습생 신화’라 불리는 장학영의 이야기다.
▲ 공식훈련을 앞두고 부산 클럽하우스에서 인터뷰에 응한 장학영 (사진- K리그 명예기자 박승훈)
▲ 경기대 재학 시절 장학영의 경기모습. 성남과 흡사한 노란색 유니폼이 눈에 띈다. (출처- 장학영 미니홈피)
▲ 우여곡절 끝에 성남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장학영 (출처- 장학영 미니홈피)
▲ 장학영의 왼쪽풀백으로서의 가능성을 선견지명 한 성남 안익수 감독 (출처- 성남 홈페이지) 두 번째는 2군 리그 출전이었다. 1군 경기가 없어 2군 리그 홈경기를 관전하러 당시 성남의 故 차경복 감독이 방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장학영이 왼쪽수비수로 출전한 모습을 지켜본 차 감독은 전반종료 후 안익수 코치에게 “저기 33번 누군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33번은 장학영이 성남에서 달고 있던 등번호였는데, 다시 말해 차경복 감독은 장학영이 연습생으로 들어온 지 7개월 동안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 것이다. 장학영은 그 경기에서 차경복 감독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고, 차 감독은 안익수 코치에게 “33번 저 선수 1군에 한 번 올려보게”라는 말을 전했다. 장학영의 프로무대 데뷔가 확정되는 순간이자, 반 년 만에 연습생으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시점이었다. 그는 프로 데뷔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장학영은 “2004년 7월 14일 수원과의 홈경기에서 후반 교체 출전했다”며 “그 때는 왼쪽풀백이 아닌 측면 미드필더로 배치돼 경기에 뛰었다. 첫 경기다 보니 실수를 하더라도 뒤에 수비수가 커버할 수 있는 자리로 감독님이 배려하신 것 같다”고 그 날 경기를 떠올렸다. 장학영은 첫 경기 당시 심정에 대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플레이에 여유가 전혀 없어서 논스톱으로 공을 처리하기 급급했다. 내가 어떻게 경기를 펼쳤는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긴장되던 순간을 전했다. 프로의 세계는 녹록치 않았다. 정식계약을 통해 1군에 등록됐지만, 연습생 출신 장학영에게 팬들은 한동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장학영은 그 때를 떠올리며 “‘결국엔 내 팬이 되도록 만들겠다’라는 마음뿐이었다”고 표현했다. 이어서 장학영은 “실제로 저를 제일 싫어한다고 말하던 성남의 한 열성팬이, 시간이 흘러 나중엔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장학영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분은 저의 성남 송별회 때도 와주셨다. 굉장히 뿌듯했고, 스스로 ‘성공했네’라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시련을 실력으로 딛고 일어선 장학영이었다. 프로선수로서 점차 입지를 굳혀간 장학영은 2006년 리그우승과 베스트11 선정이라는 겹경사를 누리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장학영 본인도 “2006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컨디션이 무척 좋았고, 리그우승도 경험했다. 또한 K리그에서의 활약으로 국가대표에도 뽑히게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장학영은 성남시절 1번의 우승과 2번의 준우승(2007년, 2009년)에 기여했다. 2006년과 2007년 2년 연속으로 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했다. (출처- 장학영 미니홈피) 하지만 장학영의 2006년은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안겨준 해이기도 하다. 그에게 프로선수로서의 삶을 열어준 차경복 감독이 시즌 중반 투병 끝에 별세했기 때문이다. 장학영은 故 차경복 감독을 회상하며 “차 감독님이 돌아가신 후 한동안 몸과 마음 모두 가라앉았다. 경기 시작할 때 하늘을 쳐다보며 감독님을 떠올렸는데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 지금도 감독님 생각이 많이 난다”는 말로 은사를 그리워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학영은 K리그에서의 활약을 기반으로 2006년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前 한국대표팀 감독인 아드보카트의 눈도장을 받은 장학영은 월드컵을 앞두고 최종엔트리 합류를 위한 열띤 경쟁을 펼쳤다. 국가대표 선발 당시 심경에 대해 장학영은 “이전까지 대표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정말 국가대표가 된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크게 좋아하기 보다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며 “하지만 국가대표는 모든 선수들의 꿈인 만큼, 내가 해온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표현했다. 2006년 1월 UAE전에서 A매치 신고식을 치른 장학영은 이후 핀란드, 그리스와의 경기 등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치며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며 진한 아쉬움을 남겼고, 이후엔 국가대표와 인연이 없었다. A매치 출전기록이 5경기에 멈춰있는 지금, 다시 국가대표가 되고 싶지는 않을까. 장학영은 “국가대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2006년에 외국인감독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앞으로는 소속팀에 더욱 집중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2010시즌 중반, 장학영은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복무를 시작하며 잠시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장학영은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임대신분으로 아마추어 팀인 서울유나이티드 행을 택했다. 그는 팀의 사정상 다시 중앙미드필더에서 뛰며 대체복무 일과시간 이후 훈련과 경기출전을 병행했다. ▲ 장학영은 서울유나이티드에서도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컨디션을 유지했다 (출처- 서울유나이티드 홈페이지) 장학영은 서울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2년 연속 서울특별시장기 우승을 차지하며 팀에 크게 공헌했다. 2번의 FA컵 대회에도 모습을 드러냈고, 2011년에는 플레잉코치 겸 주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팀이고 임대신분이기는 했지만, 그 순간들은 분명 그에게 값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장학영은 “서울유나이티드에 있는 동안 축구를 정말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됐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초심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였다”는 말로 2년간의 임대생활을 요약했다. 하지만 2년 뒤 그가 돌아온 곳은 성남이 아닌 부산이었다. 프로생활을 시작한 팀이자 오랜 기간 뛰며 많은 영광을 누렸던 성남을 떠나 부산으로 이적한 것이다. 장학영은 그 당시 미니홈피에 ‘노란 유니폼, 이젠 입을 수 없는 건가’라는 글을 게재하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사실 처음에는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안익수 감독님이 계신 부산에서 다시 프로선수로 적응하는 게 수월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은사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다수의 K리그 팬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안익수 감독의 훈련은 고된 것으로 유명하다. 생활면에서도 규율이 엄격한 편이다. 이러한 안 감독의 지도방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선수들에게 장학영은 멘토 역할을 자청했다. “신인급 선수들에게 편하고 자유로운 훈련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해주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1-2년 후에는 대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안익수 감독님의 훈련과 지도방식을 잘 알고 있기에 해줄 수 있는 말들이었고, 운동과 생활면에서 힘든 부분이 있지만 분명 최고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어느새 팀의 정신적지주로 성장한 장학영이었다. 그러나 재회한 안익수 감독과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2013시즌, 수원삼성의 수장이었던 윤성효 감독이 부산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부임했고 안 감독은 성남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장학영은 윤성효 감독에 대해 “안익수 감독님과는 차이가 있으시다. 비교적 자율적인 환경과 분위기에서 생활하고 있다”며 차이를 설명했다. 장학영은 8월 17일을 기준으로 올 시즌 K리그 클래식 23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부동의 왼쪽풀백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제는 고참 선수가 된 그에게 체력적인 문제는 없을까. 장학영은 “사실 체력 부담이 많이 있다. 얼마 전에는 이유 없이 무릎이 아프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근력이 떨어지다 보니 무리를 해서 그런 것 같다. 웨이트를 좀 더 해야겠다고 느꼈다”며 현실적인 의견을 밝혔다. 또한 “골 욕심보다는 전 경기에 출장하는 게 올 시즌 목표”라며 체력관리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장학영은 부산에서 친한 동료선수로 동갑내기인 이정호와 박용호를 꼽았다. 그는 “이정호와 박용호는 선배로서 젊은 선수들에게 전체적인 조언을 해주는 편이다. 선수들 모두 착한데, 아직 다 친해지진 못했다. 젊은 선수 중에선 장난을 잘 치는 김익현과 친하다”며 선수들을 소개했다. ▲ 장학영은 부산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출처- 부산 홈페이지) ‘준비를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장학영이 좌우명처럼 삼고 있는 말이다. 그는 실패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늘 준비를 해왔다. 연습생부터 각고의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현재 2군 혹은 연습생 선수들에게 그가 하고픈 말들이 있을 것이다. 장학영은 “변함없이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의 그 마음, 초심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실력이 늘다보면 안주하고 자만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그러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길 바란다”는 말을 건넸다. 또한 “‘연습생 신화’라는 말이 기분 좋다. 그 평가가 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다른 선수들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그가 얼마나 준비하고 노력하는 선수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장학영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가족이다. 그는 “아내와 두 딸의 존재가 큰 힘이 된다”며 “경기력이 나빠지면 가족까지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돼서 책임감을 갖고 더 열심히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장학영은 마지막으로 “부산 뿐 아니라 다른 팀 팬에게도 장학영의 존재를 알리고 싶다. 좋은 선수로 인식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K리그 팬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장학영은 왼쪽풀백 위치에서 뛰며 주로 왼발을 쓰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오른발잡이다. 장학영 본인도 “내가 오른발잡이였다는 것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자연스럽게 왼발을 사용하고 있다”며 노력 끝에 충분히 적응되었음을 밝혔다. 바로 이것이 장학영이 성실하고 꾸준하게 노력한 결과물이다. 노력에 노력이 더해져 ‘K리그 레전드’에 장학영의 이름이 새겨지길 기대해본다. K리그 명예기자 김남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