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8회 금샘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 진성아
이미테이션
밋밋한 것보다 광기가 낫다는 생각도 한때였고 이상이니 낭만이니 하는 겉멋도 한때였다. 행복한 가정 사랑하는 아내 따위의 진부한 말이 생의 목표로 다가왔을 때, 그러니까 일반적인 삶이 최고의 삶이라고 단정 지으며 그녀와 같이 먹고 그녀와 같이 자기를 원했을 때, 나는 서른 하고도 여섯을 더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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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접고 사회 첫발을 디딘 곳은 부부가 운영하는 가방 파는 곳이었다. 지갑부터 캐리어까지 수십 종류 중 80%를 차지하는 것이 여성 핸드백이었고 그 중의 80%가 짝퉁이었다. 짝퉁이 뭐냐는 내 물음에 무늬만 비슷해도 여자들이 환장하는 거라고 사장은 말했다.
“청바지 입고는 핸드백 들지 말랬지, 클러치백은 팔찌라도 둘러야 있어 보여. 반지는 어쨌어?”
사장은 종종 점원에게 가방을 메는 다양한 포즈를 가르쳤다. 희고 가는 여직원의 손은 클러치백을 잡는 각도부터 달랐다. 장바구니 잡듯 움켜잡는 손님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평범한 가방도 수지가 들면 명품이 되는 그런 이치였다. 면접 때 사장이 나를 훑어보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님의 거울이 되어 상품의 격을 높이는 것은 나의 업무 중 하나였다.
내가 멘 남성용 구찌 크로스백이 날개 달린 듯 팔렸다. 크로스백은 엉덩이 뒤로 보내야 폼이 나고 어깨에 각을 세우면 핏이 산다. 그걸 가르쳐야 아는가? 나의 전략이, 나의 상술이 누군가의 돈과 바뀌는 일은 야릇한 쾌감을 주었다. 남자들이 자동차로 허세를 드러낸다면 명품가방은 여자들의 그것, 비싼 진품을 대신하는 이미테이션은 그들의 허한 부분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지능검사지의 다른 무늬 찾기처럼 티 나지 않게 명품을 베낀 짝퉁은 기성품보다 서너 배 비싸지만 손님들의 관심도 서너 배, 마진도 서너 배였다. 나는 6개월 만에 정직원이 되었고 2년 뒤 백화점으로 직장을 옮겼다. 짝퉁을 알려면 진짜를 알아야 했다. 명품 브랜드에 대해서 트랜드에 대해서 고객층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나의 인생루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산업디자인과를 택한 건 아버지에게 낚인 거였다. 미술대학은 못 이룬 당신의 꿈이었을 뿐, 명강의는 나에게 꿀잠이었고 캠퍼스의 낭만 같은 건 남 이야기였다. 주 화백이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대작 화가라는 꼬리표가 수인번호처럼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군데군데 물감이 묻은 멜빵바지를 입고 있던 아버지가 문득 그립다. 나뭇가지처럼 건조한 그의 손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다. 다리에 올라타면 시소를 태워주고 등에 올라타면 목을 빼내 히힝 말소리를 내던, 나밖에 모르는 아버지였지만 머리통이 커지면서 그의 좁은 어깨가 점점 시시하게 느껴졌다. 입대를 빌미로 나는 긴 휴학을 했다. 굳이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세울 거라곤 미끈한 외모, 거기에 맞는 직업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앞날을 기름지게 하는 방법임을 나는 일찌감치 깨쳐버렸다.
슬림핏의 아르마니정장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나는 나르시스가 된다. 예식을 앞둔 사내도 외제차를 끌고 온 작달막한 신사도 내가 걸친 재킷을 보고 안 사고는 못 배겼다. 백화점의 에르메스 매장에서 매니저 제의가 들어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짝퉁의 메카로 알려진 재래시장 M 상가에 <컬러>를 오픈했다. 백화점 매장의 반도 안 되는 공간이지만 인테리어에 공을 들였다. 직접 디스플레이를 하고 <컬러>만의 독특함을 살렸다. 그러니까 8년 전, 고객의 고객에 의한 고객을 위한 장사꾼이 되겠다고 나는 마음먹었다.
구찌, 뤼비똥, 샤넬, 페라가모, 프라다, 막스마라, 켈빈클라인. 무늬만 닮은 짝퉁은 가라, 겉도 속도 진짜 같은 가짜, A급의 이미테이션! 가방뿐 아니라 옷, 신발, 벨트에도 명품 로고가 박혀 있다. 마이너 주부들을 겨냥한 <컬러>에서 허접한 B급은 볼 수 없다. 상품의 질도 고객의 수준도 A급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조명으로, 액자나 화분 등의 소품으로 멋을 더했다. 상품은 고급스럽고 매장은 안락해 보였다. 내겐 주 화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200여개의 전포가 있는 M상가의 직원은 600여명, 그들의 입은 빠른 광고가 되었다. 컬러가 아니라 킬러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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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광장’은 우리들의 광장이었다. 4인방이 움직이면 어디서든 여자는 붙게 돼 있다. 롤렉스시계에 돌체벨트면 준비 완료다. 나와 광식에게 눈길이 머물다가 진우와 민수가 입을 털면 자리 뜨는 여자란 없다. 하지만 쓸 만한 여자를 만나기란 짝퉁 시장에서 진품을 찾는 일과 같다. 아예 화끈한 여자가 나았다. 핏덩이를 두고 나간 아버지의 여자 역시 그런 부류였다. 생계형 화가를 견딜 여자가 아니란 걸 나는 사진만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지키지 못한 가정의 회한인 양 넌 꼭 한번 가 보거라, 며 고향에 있는 금샘(金井) 설화를 들려주곤 했다. 마르지 않는 자연 우물, 금샘은 부부 금슬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시장통과 ‘광장’만 오가는 나의 동선으로는 그 황금빛 우물에 손을 담글 여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미적거리며 결혼을 못 하는 건 가시 무서워 장미를 마다하는 꼴이라고, 구닥다리가 된 현모양처를 기다리는 꼴이라고 녀석들은 말했지만‘광장’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한 광식은 2년 만에 이혼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민수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아작났으니 내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진우가 아직 뻗대고 있는 건 착한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착한 건 능력 없음의 다른 말인 건 이제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둘째까지 생겨서 빼도 박도 못한다고 징징대지만 그는 운이 좋은 거였다.
말한 적은 없지만 나에겐 오래전부터 그려온 그림이 하나 있었다. 희망이랄지 로망이랄지 자식을 많이 낳고 싶었다. 비혼과 일인 가족이 늘어나는 세태를 모르지 않지만 형 누나 언니 동생이 어우러진, 말하자면 패밀리다운 패밀리의 가장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일찍이 없었던 가족 외식이나 가족 여행이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결혼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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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테이션! 몇 번 말해, 짝퉁이랑 어감이 다르다고!”
짝퉁이 입에 붙은 팀장이 자신의 입을 툭 쳤다.
“야, 사장님 말은 이왕이면 고급 단어를 쓰란 거 아냐, 고객 앞에선 이미테이션, 이미!”
임 실장이 거들었다. 직원이라 해봐야 실장과 남녀팀장으로 고작 세 명이지만 고객 앞에서 모양새를 내기 위한 호칭인 만큼‘형님’따위는 집에서 찾으라고 일러두었다.
여팀장의 사표를 받고 직원을 구하는 중이었다. 구인광고를 보고 들른 희주를 보자 며칠 전 남자 셔츠를 사 간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내 턱밑에 셔츠를 대자 고개를 끄덕이며 별말 없이 계산하던 그녀였다. 희주는 보플이 일어난 회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화장기 없는 얼굴에 낮은 콧대가 순해 보였다. 나는 여럿 면접자 중에 가장 무난한, 가장 무던한, 무채색 같은 그녀를 선택했다. 매가리라곤 없어 장사하긴 글렀다는 임 실장의 반대에 그녀를 단기 알바로 채용하게 되었다.
“메인 디피는 누구 작품인 거냐? 저 셔츠에 주홍넥타이라니, 눈 없냐?”
임실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셔츠를 내렸다.
“핑크와 주홍은 한 핏줄도 아니고 남남도 아냐. 어색한 관계잖아, 서로 미안타네.”
희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큭큭 웃었다. 내가 줄무늬 셔츠로 바꿔 코디하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역시! 하며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희주는 기대 이상으로 학습효과가 빨랐다. 저번 팀장처럼 수다스럽지도 휴대폰을 자주 만지지도 않았다. 적은 보수에도 불만이 없었으며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기는 고객 관리도 야무졌고 물건의 A, B급의 차이는 물론이고 특A를 구분해서 가격을 매기는 융통성이 나를 능가했다.
“속을 모르겠다니까요. 전화를 해도 꼭 나가서 해대니.”
사장 앞에서만 웃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고집도 만만찮다며 임 실장은 험담을 찾아내곤 했다. 그의 말마따나 꿀꿀한 표정으로 할 말만 하는 스타일이지만 그녀를 신뢰하는 고객이 하나둘 생겨나고 고집이란 것도 디스플레이를 자기식대로 하려는 것인데, 일에 대한 애착으로 보였기에 문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직원으로 전환할 판국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그녀를 쓸지 말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던 그녀가 코르사주를 가슴에 단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온 어느 날부터 내 눈이 자꾸 그녀를 좇고 있는 거였다.
4인방마저 힘을 잃고 서른을 훌쩍 넘긴 나에게 금샘에 손을 담글 여자가 생긴 건가? 짝퉁 중에는 간혹 라벨이 뜯겨나간 진품이 섞여 있는데, 희주는 나에게 그런 존재로 다가왔다. 예쁜 것들은 꼴값하기 마련이고 돈 잘 버는 여자는 남자 기를 누르기 마련이고 좀 산다는 것들은 장사꾼을 무시하기 마련이다. 말 많은 여자는 질색인데다 사치심마저 없는 그녀는 아내감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걸리는 게 있다면 자연산이라며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하는‘쌍수’인데 나의 염려는 성형 축에도 안 드는 그깟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를 속이는 건 두세 개도 능히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비록 말마다 오버요 말마다 구라지만 영업을 위한 것일 뿐, 매장 밖에서의 나는 그렇지가 않다. 4인방을 비롯해 거래처를 포함한 지인들과의 관계에 신뢰를 중시한다. 일찍부터 봐 온 상인들의 잔머리나 가식은 반면교사가 되었다. 거짓도 몸에 익으면 관성이 되는 법, 진정성 없는 관계는 패대기쳐야 한다는 나름의 철칙을 고수했으니 그녀의 사소한 거짓은 등에 난 물사마귀처럼 신경이 쓰였다. 문득 사라질 수도 있으나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비포는 모르지만 애프터는 성공인 그녀 눈이 점점 예뻐 보였다. 우물처럼 깊은 눈이 의뭉스럽기도 했지만 나의 욕심이려니 기우려니 했다. 그녀 역시 자수성가한 성실맨일 줄 몰랐다며 멀쩡한 내 허우대가 조금 불편했다는 복에 겨운 소리를 했으니 우리는 무리 없이 연애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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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서두르며 면도를 끝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검찰청에서 들이닥쳤다고 임 실장이 더듬거렸다. “부산지검에서 나왔습니다!”옆에서 전화기를 가로챈 남자가 말했다. 내 가슴은 벌써부터 방망이질이다. 정말이지 경찰이고 검찰이고 공무증을 내미는 놈들은 깔아뭉개고 싶다. 형광 조끼만 봐도 고개를 돌리고 경찰차만 봐도 핸들을 틀거늘. “주상철 씨, 도용 상품을 회수합니다. 나와서 사인하시고 검찰청으로 출두하십시오.”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해놓고 보니 괜한 말이다. 찔러주다간 외려 된통 당한다. 할 수 있는 건 저쪽에서 끊기 전에 먼저 수화기를 탁 놓는 것뿐인데 어째 그마저도 쉽지 않다.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주억거리는 내가 거울에 비친다.
매장에 도착하니 금쪽같은 내 물건들이 마대마다 불룩하게 쌓여 있었다. 진열장 안에 있는 시계까지 싹 쓸어 담았다. 내가 사인을 하자 패찰을 목에 건 놈들이 둘씩 붙어 마대를 끌고 유유히 사라졌다. 상인들이 매장 앞을 흘깃거리며 지나다녔다. 진심 한 조각 섞이지 않는 얼굴로 수군거렸다. 지들은 다 해 처먹으면서 서민들 푼돈에는 시뻘겋게 덤빈다니까.
단속반이 <컬러>로 바로 들이닥친 건 내 돈에 배 아픈 놈이나 제품에 불만이 생긴 짝퉁녀의 홧김 고발이라 추측할 수밖에 없다. 평소에는‘떴다’하면 매장 간의 비상망이 돌고 번영회에서는 지정된 음악을 흘려주기도 한다. 눈치껏 셔터를 내리거나 상품을 잽싸게 창고(비밀의 방)로 숨기기도 한다. 빛나는 것들은 한순간 사라지고 장터 물건만 널브러진 매장들은 자정을 넘긴 신데렐라처럼 추레해진다. 단속차가 자리를 뜨고 해제 음악이 나오면 반짝이는 것들을 다시 원위치 한다. M 상가를 위한 시스템이었다. 사이사이에 있는 이미테이션 매장은 M 상가의 꽃이니까. 짝퉁이 없다면 M상가는 죽은 상가니까.
임 실장이 담배에 불을 당겨주었다. 실장님, 저 물건은 어디로 가져가요? 도용이 그리 큰 죈가요? 팀장이 작은 소리로 실장에게 물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임 실장이 팀장을 노려보았다. 소각장으로 간단다, 이놈아, 나는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괜한 실소를 터뜨렸다. 태운다고 짜샤, 지들 마누라 줄 건 빼놓겠지 짜샤, 임 실장이 팀장을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이제 됐냐? 라고 말했다. 넝마로 변한 매장을 보며 나는 볼이 패도록 담배를 빨아 당겼다. 박살난 자존심을 일으킬 듯 소리쳤다. 팀장, 셔터 내려!
상표도용은 엄연한 범죄였다. 단속이 강화되고 있지만 나도 상인들도 길들여진 사업에 손을 뗄 수 없었다. 이미테이션은 현찰거래가 기본이며, 선호도에 따라 가격마저 얼렁뚱땅이라 분명 돈 되는 장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청년 성공’은 ‘중년 상처’ ‘노년 무전’과 함께 남자의 3대 불행 중 하나라는 말이 상가에 떠돌았다. 다시 집을 지어야 했다. 신께서는 잊을 만하면 좀비처럼 달려들거늘, 껑충 뛴 벌금이나 빼앗긴 물건만 생각하고 있을 순 없었다. 고난, 용기 따위의 희주의 뻔한 문자도 재충전의 거름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여자 보는 눈은 젬병이나 내게 힘을 보태는 4인방 때문인지도 모른다. 삼십 대에 사장님 소리 듣는 게 어디냐, 민수 말에 녀석들이 거든다. 상사 눈치 안 보는 것만 해도 꿀 직장이지, 주가도 오르기만 하진 않거늘 그깟 벌금이 대수냐, 꾼께서 왜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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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묻자 두부를 좋아한다고 희주는 말했다. 어릴 적에 목구멍을 넘긴 두부가 내장을 태울 듯했지만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었던 기억 때문에 나는 잘 먹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맛도 비주얼도 밋밋한 두부 같은 그녀를 아내감으로 정했을 때 내 촉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향수로 몸을 덥히며 속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는 여자들과는 달랐다. 오너였기 때문인지 나이 차 때문인지 희주는 계속 존댓말을 썼고 손잡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영도대교가 환히 보이는 호텔방은 접어버렸다. 나는 결혼을 당기기로 마음먹으며 4인방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녀석들은 나더러 장사꾼에 재주꾼, 술꾼, 춤꾼이라더니 이제 사랑꾼이라 한다. 꾼이 단어의 꼬리에 달싹 붙어 그 의미를 손상시켰지만 제2막이 시작된 내 삶에 나는 적잖이 충만해 있었다. 진우가‘트루 러브’라고 귀엣말을 했다. 얼굴을 안 보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우리의 평소 농담에 나는 껄껄 웃어재꼈다.
희주는 아버지의 사업으로 중국에서 살다가 결혼한 오빠를 따라 부산으로 오게 되었다. 그녀에게 친구가 없는 것이며 우울하고 어두운 표정이 좀 더 이해되었다. 한번은 매장으로 동창 두 명이 희주를 찾아온 적 있었는데, 지네 다리처럼 올려붙인 속눈썹이며 컬러풀한 손톱이 눈에 거슬렸다. 안 본 지 오래된 사이라고,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희주는 말했다.
약속대로 희주는 신혼여행에서 몸도 마음도 다 열었다. 나는 긴장한 탓인지 노련하지 못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잠든 그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앞날의 희망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면세점에서 두 번째 명품가방을 선물했다(첫 선물은 프러포즈 때의 프라다였다). 너무 비싸요, 진짜나 가짜나 거기서 거긴데…… 희주는 에르메스 가방을 어깨에 메며 멋쩍어했다. 짝퉁과 비교하며 천지차이라고 말하지 않는 그녀가 나는 마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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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상품을 들고 나온 임 실장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디오르 구두코에 얹힌 로고‘D’가 짝퉁 티가 너무 난다는 것이다. 주문 시 오류였다. 별난 고객을 생각하면 괜한 걱정이 아니다. ‘이 정도면’이라든지 ‘흡사하다’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진품도 이 재질입니다’ ‘안감마저 똑같아요’ 확신과 소신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그녀들은 똑같기를 원하니까.
“뭐야, 금장 아니네?”
“은장이 대세인 걸요! 금장식은 정말이지 눈에 쥐가 날 것 같아. 사모님, 일단 신어보세요.”
“흔하기는 하다만 오리지널이 금장이잖아.”
여자는 구두를 신고서 거울 앞을 오가며 이쪽저쪽 살폈다.
“역시! 은장식은 깔끔해, 쌈빡 그 자체입니다.”
“단아하긴 하네. 영해 보여?”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괜한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랬지? 성사가 코앞이다. 신던 구두를 가져올 리 없지만 간혹 디오르 명품관에는 은장식이 아예 없다는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짝퉁 마니아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히 그러시면 금장으로 수선 넣을까요? 끝까지 진지남으로 대응해야한다. 그냥 던지는 멘트일 뿐 연락 오는 경우 또한 드물다. 번거로운 것보다 명품의 십분의 일 가격으로 로고를 베끼려는 것 역시 쪽팔리는 일이니.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도 상술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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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린다. 창밖의 비를 응시하는 희주가 북경을 다녀온 후 더 울적해 보였다. M자 탈모가 시작됐다며 4인방이 카톡을 주고받는다. 불혹이 코앞이니 배 나오는 나이라 한다. 만사 귀찮기만 하다.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게 이런 건가. 임신은 옵션인 줄 알았다. 정관이 막혔다니! 꺼벙한 그 의사의 오진이기를 바라며 사이트를 뒤지다 상념에 빠져있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그 철학자는 신을 죽이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생각하기도 싫은 혜미를 만나봐야 하는 건가. 임신 8주라고 눈물을 찍어내던 그녀에게 갖다 바친 가방만도 한 마대는 될 터, 그렇거나 말거나 그 말이 진실이기를 바랐다. 불을 끄고 누웠을 때 뜸을 들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궁 기형이라나, 그렇대.”
“어?”
“임신도 어렵지만 의사 말이 착상이 돼도 유산 확률이 높다고…”
스탠드로 뻗친 손을 내려놓았다. 어둠이 더 편할 때가 있으니.
“미안해. 당신 나이도 있는데, 우리…….”
“……우리, 뭐?”
“입양하는 건 어떨까 해서…….”
성급했지? 희주는 내 팔을 당겨 팔베개하며 샤넬 스카프로 화제를 돌렸다. 좀 더 생각해보자는 말 밖에 할 게 없었다. 서로에게 미안한 구석이 있는 건 부부 사이를 돈독하게 한다는 진우 말이 맞는 것 같다. 불현듯 미루기만 한 일이 생각났다.
“우리, 금정산성에나 다녀올까?”
“금빛 우물이 있다는?”
“범어사에 안 간지도 좀 됐고……”
“그래요, 우리 백팔 배라도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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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은 왕이다! 간 빼놓고 출근해!”
노란 불빛 아래 상품마다 금장 은장 명품 로고들이 반짝거렸다. 단속이 강화되면서 가격은 오르고 물건은 귀해졌다. 그럴수록 쉬쉬 찾아오는 고객은 늘어났고 <컬러>는 신상으로 채워졌다. 고객의 비위를 건들지 말라, 부터 직원들에게 단속에 대비하는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컬러>를 아내 명의로 바꿔 놓았다. 재범을 대비해서였다.
진상 고객도 늘어났다. ‘오래 해 먹으려면’을 걸고 자신의 조건을 내세웠고 흠 같지도 않은 흠을 지적하며 반토막 가격을 제시하거나 몇 년 된 상품도 A급이 아니라며 불만을 토했다. 잦은 교환과 연이은 수선에 말끝은 왜 또 하나같이 짧은지 비위 맞추려다 간이 녹을 지경이라고 임 실장은 투덜댔다.
나는 외국 잡지를 뒤지며 유행하는 명품을 눈에 담았다. 완벽한 보급처를 위해 홍콩도 드나들었다. 김희애가 든 뤼비똥 가방은 일 년 내내 주문이 들어왔다. 주문만 따면 물건은 생산된다. 때로는 보세 옷의 라벨을 자르고 명품 로스로 판매하기도 했는데 그럴만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 또한 나만의 안목이었다.
“‘이미’는 기다리는 맛이죠!”
북경에서 온 보이차가 최고라며 짝퉁녀가 깔깔댔다. 그녀들은 잊을 만하면 싱크대 밑 바퀴벌레처럼 얼굴을 내밀었고 명품 정보를 흘리며 짝퉁을 스캔했다. 자신의 감각을 인정받기 원했다. 이를테면 한물간 제품도 제 눈에 안경이라 엎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같이 엎어지며 최고의 안목이라 추켜세웠다. 희소가치에 따라 가격은 올라가고 재고까지 정리하니 일거양득이다. 구라와 오버를 빼면 장사가 아니다. 영업이 아닌 것이다. 장사꾼 중에 제일 착한 놈이 선생 중에 제일 못된 놈보다 더 못됐다는 말이 그럴듯했다.
“사장님, 반품 들어왔어요. 까르띠에 시계요”
“또 그 여자야?”
“예, 습기 찬다나. 어쨌다나.”
“짝퉁인 거 모른대?”
“그러게요, 되레 난리부르스라니까, 환불해줘요?”
“환불이 누구 이름이냐? 수리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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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주의 조용한 추진력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빠른 결정을 할 줄 몰랐다. 통통 튀는 중국말로 광저우의 장모와 통화한 건 두 달 전이었고 그곳에서 세 살 된 딸아이를 데려온 건 한 달 전이었다. 갓난쟁이는 키우기 힘들고 네댓 살은 입양을 기억하니 이 아기가 딱 이라는 희주가 조금 들떠있었다. 주 서방, 애기 잘 키우게나. 목소리가 걸걸한 장모는 머리만 틀어 올리면 신윤복의 그림에 나올 법한 주모 상이나 딸의 말이라면 입속 혀처럼 알아서 척척이다. 씨 없는 놈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낯가림이 없는 아이는 희주를 잘 따랐다.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더니, 아이가 고집스레 울어도 희주는 혼내는 일이 없었다. 몇 번이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그녀에게 자비심마저 느껴졌다. 난 이제 2순위네, 아침에 부린 심통이 마음이 쓰였는지 저녁상에 내가 좋아하는 대구탕이 올라왔다. 희주가 하얀 생선살을 발라 아이 입에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받아먹던 아이가 손을 쭉 뻗으며 제 앞의 것을 내밀었다. 앙, 하며 내가 받아먹자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입을 크게 벌릴 때마다 아이가 웃었고 아이가 웃을 때마다 희주가 웃었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우울 모드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잘생긴 광수보다 말재주군 민수보다 마누라 따라 장보러 다니는 진우가 훨씬 보기 좋았다. 내 가슴에 착 감겨 잠든 은지는 누가 뭐래도 하나뿐인 내 딸이지만 학부모가 된 진우가 아들 자랑을 할 때면 슬며시 질투가 났다. 나 닮은 아들 하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은지에게 동생을 줄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우리의 신께서는 절대 다 주는 법이 없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흰 머리칼 두 개가 눈에 띄었다. 은장 로고의 외제차를 몰며 마흔을 넘겼을 때 돈 버는 재미가 최고라는 노땅들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희주는 이제 짝퉁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누구는 공부가 제일 쉬웠다지만 나는 돈 버는 게 제일 쉬웠다고 눈썹을 추켜세우며 전신거울 앞에서 폼을 잡았다. 슬슬 나올 때도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죽었다는 신 말이다. 며칠 전의 그 밤이 은근히 내 발목을 잡는 때문일 것이다.
해피버스데이 투유! 4인방이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조신한 마누라가 알고 보니 복덩이였다며 역시 꾼은 당해낼 수 없다며 은행에서나 볼 수 있는 돈 세는 기계를 내미는 녀석들에게 나는 영원한 우정을 외치며 풀코스를 쐈다.
룸에 들어서자 여자 셋이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반짝이는 파우치를 옆에 낀 한 여자를 대번 알아보았다. 동창이라는 희주의 친구였다. 달라붙은 검은 셔츠를 입은 그녀의 목에 샤넬 스카프가 낯익었다. 가을에 히트 친 물건중의 하나인 그것은 체인 문양이 흩어져 있는, 희주 역시 자주 목에 두르던 것이었다. 내가 앞장서서 마이크를 잡자 그들이 둘씩 짝을 맞췄다.
“함 죽어보자!”
진우가 몸을 흔들며 고함을 질러댈 때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온 여자가 말했다.
“사장님! 희주 잘 있죠? 이 스카프 잘하고 있어요.”
“하, 누구시더라?”
나는 흐린 눈을 껌벅이며 엄지를 높여주었다. 여자는 깔깔 웃으며 무덤까지 비밀이에요, 라고 말했다. 여자는 다시 탬버린을 잡으며 걘 우리랑 다르니까요, 라고 덧붙였다.
아름다-워 사랑스러-워 그래 너 헤이! 그래 바로 너 헤이!
지금부터 갈 데까지 가볼까-
찬바람을 들이마셨다. 분위기는 타오르는데 머릿속이든 뱃속이든 게워내야 할 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잘 놀다 똥 밟은 기분이다. 은지 선생님께 선물한다고 갖고 간 샤넬 스카프가 왜 여자 목에 매여 있는지, 그 빈정거림은 뭔지, 연거푸 마셔댄 탓에 기억마저 토막 나 버렸는데…… 그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이 떼구르르 발 밑으로 굴러온 건 은지의 유치원 졸업식 날이었다.
희주가 독감으로 꼼짝할 수 없었다. 졸업식엔 내가 갈 수밖에 없었다. 페라가모 단화에 페라가모 벨트만 했을 뿐인데 학모들은 모델 같다느니 연예인 같다느니 수런댔다. 울 아빠라고! 은지가 내 주변을 뱅뱅 돌며 친구들에게 으스댔다.
“주 은지! 이 사진도 가져가야지.”
졸업장과 함께 개인용품을 챙겨 주던 선생이 교실 뒤에서 손짓했다. <나는 누구를 닮았을까?> 라는 표제 아래 드문드문 사진들이 꽂혀 있었다. 선생은 압핀을 뽑고 두 장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한 장은 놀이공원에서 내가 찍은 은지였고 다른 한 장은 희주의 어릴 때 얼굴이었다. 귀퉁이가 낡은 사진 뒷면에는‘북경 학교’라는 한자가 삐뚜름히 적혀 있었다. 나는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는데 선생마저 해괴한 소리를 했다.
“으뜸상으로 뽑혔죠.”
“예?”
“붕어빵 대회 때요.”
“아하!”
나는 헛웃음을 날렸다. 쌍꺼풀 없는 희주의 작은 눈과 뾰족한 턱이 사진 속 은지랑 흡사했다. 빛의 각도 때문이겠지……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같아서겠지…… 폴짝폴짝 뛰는 은지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겨울 햇살이 긴 복도에 드리워져있었다.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각 프레임에 갇힌 먼지 알갱이가, 음지에선 보이지 않던 알갱이가 별인 양 반짝였다.
“아빠!”
신발장 앞에 선 은지가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내 손을 잡는다.
“어?”
내가 휘청거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