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3장 광검절심(狂劍絶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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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자수려한 대홍산(大洪山).
사방 수백 리에 걸쳐 험준한 지맥(地脈)을 이끌고 솟아 있는 대홍
산은 곳곳에 심곡(深谷)과 단애(斷涯)가 솟아 있다.
날씨는 무서울 정도로 싸늘했다.
정월(正月)의 기후는 사람의 살갗을 도려내듯 한랭하여 아무도 밖
으로 나가려 들지 않는다. 특히 대홍산 전체는 수 일 동안 퍼부은
눈보라로 온통 설천지를 이루고 있어 더더욱 사람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대홍산의 서남 쪽에 하나의 거칠고 깊은 곡(谷)이 있었다. 곡구
(谷口)에는 눈이 몇 자나 쌓여 있었고 곡 안의 상황은 기암괴석이
가로막혀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한 청년이 가득 쌓인 눈 위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곡의 입구에
나타났다.
백의를 입은 미청년은 바로 하후성이었다.
눈처럼 흰 백의에 칠흙같이 검고 윤이 나는 머리를 길게 뒤로 드
리운 그의 모습은 여전히 선풍옥골이었다.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러서 오히려 섬뜩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문득 하후성의 걸음이 멈춰졌다.
주위를 훑어보던 그의 현기어린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오상공자에게서 천화곡의 위치를 대강 듣기는 했지만 눈이 너무
쌓여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렵구나.'
걸음을 다시 옮기려던 하후성의 두 눈이 일순 반짝였다.
'저 사람은?'
계곡의 모퉁이를 돌아 한 인영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
다.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섞여 있는 초로의 노인이었다.
하후성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노인은 왼쪽 어깨에 커다란 약초주머니를 메고 오른손에는 조그마
한 호미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일신에 낡은 마의(麻衣)를 걸쳤으나
청수한 외모에 전체적으로 단정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이 놀란 것은 그 모습 때문이 아니라 그 노인의 얼
굴에서 풍기는 인상 때문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무심한 얼굴. 게다가 노인의 걸음
걸이는 규칙적이었다. 노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또한 노인이 걸어온 자리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
하후성의 눈빛이 한 차례 흔들렸다.
이미 노인과 하후성과의 거리는 이삼 장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하후성의 모습을 발견했을 텐데도 노인의 두 눈은 여전히 무심했
다.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는 하후성의 곁을 지나
치고 있었다.
"노인 어른."
하후성이 정중하게 불렀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은 그대로였으며 하후성 또
한 그런 것에 조금도 상관을 하지 않고 공손히 포권을 했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물어보시오."
노인의 어조에는 억양이 없었다.
하후성은 괴이한 생각이 들었으나 내색치 않고 정중히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천화곡(天火谷)이란 곳이 있음을 아십니까?"
"천화곡!"
노인의 신형이 순식간에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고 그의 두 눈에서
는 어느새 칼날같이 섬뜩한 한광(寒光)이 내뻗치고 있었다. 하후
성은 자신을 노려보는 노인의 안광에 내심 흠칫했다.
'무서운 눈빛이다. 필히 보통 내력의 노인이 아닐 것이다.'
노인은 하후성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하후성의 탈속한 풍모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노인의 눈 깊
은 곳에 기이한 빛이 흐르더니 태도가 약간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
다.
"천화곡은 왜 찾으시오?"
"그곳에 사시는 한 분을 뵙기 위해서 입니다."
노인의 눈이 번쩍였다.
"그가 누구요?"
하후성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광검절심 유무심이란 분입니다."
노인의 얼굴이 갑자기 돌처럼 굳어졌다.
"그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오?"
노인의 어조는 찬 바람이 돌 정도로 싸늘했다.
"그 분을 알고 계십니까?"
"안다면 안다고 할 수 있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할 수 있소."
기이하게도 노인의 어조는 갈수록 냉랭해지고 있었으며 하후성도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노인은 하후성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대가 그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그 분께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엇인가?"
하후성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노인장께선 제 말에는 대답도 해주시지 않고 계속 묻기만 하시는
군요."
노인의 입가에 냉소가 어렸고 하후성은 정중하게 말했다.
"소생은 광검절심 노선배님이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과 비검(比劍)을 해보고자 합니다."
노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한 조소가 어렸다.
"그와 비검을?"
"그렇습니다."
노인은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핫핫!"
하후성은 잠자코 있었다. 한동안 앙천광소를 터뜨리던 노인은 갑
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하늘을 벨 수 있나?"
하후성은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하늘을 벨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더 얘기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냥 돌아가게, 자네가 그와 비검하겠다는 것은 곧 하
늘을 베려는 것과 다름이 없는 말이네."
노인은 타이르듯이 말을 이었다.
"원래 그는 무림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써 자네가 어떻게
그의 소식을 알아냈는지 궁금하지만 더이상 묻지 않겠네. 만약 다
른 사람 같았으면 노부가 벌써 손을 썼을 것이네만 자네의 인상이
좋아 추궁하지 않는 것이니 이만 돌아가게."
하후성은 잠자코 듣고 있다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인장, 소생이 한 마디 하겠습니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비록 저는 하늘을 벨 수는 없지만 베고자 하는 욕망은 있습니
다."
노인의 안색이 변했다.
"광망스럽군!"
하후성은 빙긋 웃었다.
"그럼으로써 발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인의 눈에서 이채가 번쩍였다.
"으음. 어쩌면 노부가 자네를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겠군."
노인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 기이한 눈초리로 하후성을 주시하더니
돌연 오른손의 호미로 하후성의 가슴에 있는 옥당(玉堂), 현기(玄
氣), 거궐혈(巨闕穴)을 동시에 찍어갔다.
그 속도는 가히 벼락치듯 빨랐으며 호미 끝에서는 일 점의 경풍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가공할 살기(殺氣)가 무섭게 뻗고 있었다.
하후성은 흠칫했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왼손으로 호미
의 공세를 차단시켰다.
노인의 안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다시 그의 몸이 핑그르 회전하는 듯 하더니 호미 끝이 다섯 갈래
로 갈라지는 환영을 일으키며 하후성의 전신 오대혈(五大穴)을 노
렸다.
쉬쉭! 슉--- !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귀청을 찌르는 날카로운 음향이 일었으나
하후성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쭉 뻗더니 가볍게 손바닥을 저음으로써 공세를 모
두 차단시켰으며, 그가 발출한 공력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아
적절하게 호미를 빗나가게 했다.
"대단하다!"
노인은 호미를 내던지더니 오른손을 한 바퀴 뒤집으며 쫙 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장심에서 흰 빛이 쏟아져 나왔다.
위---잉!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희디흰 기류가 발출되었는데 그것은 실로
무서운 위력이었다.
하후성은 흠칫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근 백 년(百年)이 넘는 내공이다. 이곳 대홍산에 이런 고수가 있
었다니.'
그는 일면 생각하며 두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고 연달아 이 권(二
拳)의 주먹을 날렸다.
그것은 소림의 칠십이종절예의 하나인 금강복호신권(金剛伏虎神
拳)인 바, 그의 권세에 따라 눈부신 금광(金光)이 일었다.
꽈르르르... 릉....
우뢰소리와 함께 노인의 장력과 그의 장력은 격돌했다.
꽈꽝--!
"윽!"
노인은 신음을 뱉으며 연달아 뒤로 세 걸음 밀려났으나 하후성은
단지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노인의 안색은 홱 변했다.
"그... 그대는 소림의 제자인가? 금강복호신권을 쓰다니!"
하후성은 신비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인의 얼굴에는 의혹이 어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
다.
"자네의 내력이 신비하나 그것은 더 묻지 않겠네. 그러나 방금 펼
친 것은 금강복호신권이 틀림없는데 어찌하여 이제껏 볼 수 없는
금광(金光)이 장력에 포함되어 있는가?"
하후성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금강복호신권의 본래 위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흐음?"
"소림의 칠십이종 절예는 태반이 강호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흉내에 지나지 않을 뿐 진학(眞學)은 아닙니다."
노인의 눈이 놀람의 빛을 띄어갔다.
"금강복호신권에 포함된 금광(金光)은 양강(陽剛)의 화강결(火剛
訣)로써 강호의 와전된 허학(虛學)과는 그 위력이 판이한 것입니
다."
"오오!"
노인의 얼굴에는 감탄이 어렸다.
소림(少林).
중원무학의 총본산.
천년무림(千年武林)의 근원지(根原地).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그토록 소림이 자랑하는 칠십이종절예는
하찮은 무림의 삼류고수도 마음대로 시전한다. 소림무예는 단지
기초공부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러나 방금 본 금강복호신권의 위력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마
의노인은 새롭게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은 기이하고 신비롭기 짝이 없는 청년에 대
해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윽고 노인이 소매를 슬쩍 젓자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절기로 바
닥에 떨어져 있던 호미가 그의 손으로 말려들었다.
노인은 하후성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으음. 팔십 년 전 이 대홍산에 들어와서 그 미친 늙은이에게 단
한 번 패했었는데 이제는 월극패미공(月戟貝彌功)을 모두 연성했
음에도 또 내력도 모르는 그대에게 패하다니."
노인의 얼굴에 허무의 기색이 역력히 어리는 것을 보며 하후성은
공손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노인장께서는 패하신 것이 아닙니다. 노인장은 소생을 너무 얕보
고 본신의 진력(眞力)을 십 분 발휘하지 않은 탓에 일 장(一掌)의
대결에서 한 수 밀렸을 뿐입니다. 노인장이 전력을 다한다면 소생
은 필시 격퇴당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실로 온화하고 겸손하여 상대방을 지극히 존중하는 성
심이 깃들어 있었다.
잠시지간 마의노인은 감명을 받았다.
'이 젊은이의 심성은 실로... 온유하구나.'
마의노인은 한결 부드러워진 안색으로 하후성을 응시하며 물었다.
"소협, 그대가 광옹(狂翁)을 만나려는 이유를 솔직히 말해줄 수
없겠소?"
그의 말투는 정중하게 변해 있었고 하후성은 약간 머뭇거렸으나
결국 대답했다.
"그 분께 검(劍)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섭니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헛헛헛... 광옹의 광증(狂症)이 또 폭발하겠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협, 돌아가시오. 솔직히 노부의 무공은 광옹에 비해 약간 정도
뒤질 뿐 별 차이가 없소. 그런데 노부가 그대에게 간단히 패했으
니 광옹 또한 소협의 적수가 아니오. 그러니 어찌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검(劍)의 배움을 얻을 수 있겠소?"
하후성은 담담히 물었다.
"그 분의 검법(劍法) 경지는 어떻습니까?"
"검법? 그 늙은이의 광검오마식(狂劍五魔式)을 말하는 것이오?"
'광검오마식?'
하후성은 의아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의노인은 진중하게 말했다.
"음, 그것만은 대단한 검법이오. 그 늙은이의 광검오마식에 포함
되어 있는 발원심결(發元心訣)과 섬류심결(閃流心訣)은 검도의 이
치로 따지자면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소."
하후성의 얼굴에 엄숙한 빛이 떠올랐으나 마의노인은 다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두 가지 심결(心訣)을 발견만 했을 뿐 아직
깨우치지 못했소. 그러므로 역시 그대의 적수는 되지 못하오."
하후성은 그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그래도 소생은 그 분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마의노인은 잠시 망설이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이 늙은이가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일러 드리겠소. 천화
곡(天火谷)은 바로."
마의노인은 사방의 지형을 자세히 설명하고 천화곡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고맙습니다."
하후성은 사의를 표함과 아울러 정중히 물었다.
"그런데 노선배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마의노인은 겸연쩍은 듯 웃었다.
"허허허... 보잘 것 없는 약초캐는 늙은이의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하겠소? 단지 그저 월옹(月翁)이라고만 기억해 두시구려."
'월옹?'
그가 내심 중얼거리는 동안 월옹은 이미 몸을 돌려 걷고 있었고,
그는 걸어가며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곳에 가면 무엇보다도 소악마(小惡魔)를 조심하시오."
"소악마?"
"헛헛헛헛! 매우 골치 아플 것이오. 자, 그럼 훗날 또 볼 수 있기
를 바라겠소."
월옹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신형을 한 번 번뜩이더니 모퉁이를 돌
아 사라져갔다.
하후성은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악마라.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천화곡.
별유천지(別有天地)인가?
정월의 계절은 간 곳이 없었다. 따뜻한 훈풍이 곡 전체를 흐르고
있었다. 이곳만은 겨울이 아니라 봄이었다.
무릉도원(武陵桃園)이란 바로 이곳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대홍산 중에는 화산(火山)의 지맥(地脈)이 있었다. 화맥(火脈)이
란 본시 가장 지표가 얇은 곳에서 터지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곧 분화구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홍산에는 분화구는 없었다. 대신 화맥이 가장 가깝게 있
는 계곡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천화곡이었다.
이 천화곡은 마치 호리병과 같은 지세를 형성하여 입구는 좁고 안
으로 들어갈 수록 넓게 분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곡 안은 화
맥의 영향으로 사시사철 훈훈했으며 곡내에는 온갖 이름도 모를
꽃과 수목이 우거져 있었다.
이 천화곡에 한 가닥 백영이 소리 없이 날아 들었다.
그는 바로 하후성이었다. 월옹의 말을 듣고 마침내 천화곡을 찾아
낸 것이었다.
하후성은 별유천지인 천화곡 안에 내려서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
다.
'음, 정말 신비한 곳이구나. 밖은 온통 빙설(氷雪)인데 이곳은 봄
날씨이니. 아니 여름 날씨에 가까울 정도구나.'
하후성은 경이감을 느끼며 서서히 곡내로 걸어 들어갔다.
푸른 초목이 우거지고 꽃향기가 진동하는 초지(草地)를 지나자 온
통 붉고 노란 꽃이 만발해 있는 꽃밭에 이르렀다.
그는 무심 중에 중얼거렸다.
"이 꽃은 자연지경이 아니라 인공으로 가꾼 것이군."
이렇게 중얼거린 그의 안색이 변했다.
갑자기 주위환경이 돌변했던 것이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꽃밭은
간 데 없고, 삽시에 주위는 온통 처참무비한 지옥도(地獄圖)로 화
하는 것이 아닌가?
'음! 이것은?'
코 끝을 간지럽히던 꽃향기는 사라져버리고 온통 피냄새와 시체
썩는 악취가 코를 찌르는가 하면, 꽃밭은 온통 시산(屍山)으로 변
해 있었다.
목이 달아난 시체, 팔다리가 끊어지고 허리가 동강난 시체, 하복
부가 터져 내장이 흩어진 시체, 시체들.
뿐만이 아니었다. 역한 노린내마져 났는데 그것은 바닥에서 나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으로부터 시체들이 타들어가는 냄새였다.
하후성은 그만 안색이 굳어지고 말았다.
'진법(陣法)이구나.'
그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천하기재인 소림의 천기선사로부터 진
법에 대해 전수받은 하후성이었다.
그는 살벌한 지옥도 속에 우뚝 선 채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주위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현광이 일어났다.
'이제 보니 이것은 만화십방대진(萬花十方大陳)에 구궁미혼마진
(九宮迷魂魔陳)을 교묘히 배합한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하후성은 즉시 수리와 역순을 계산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
아 그의 눈에는 십방(十方)에서 다섯 군데의 생로(生路)와 세 곳
의 사로(死路), 그리고 두 곳의 휴문(休門)이 보였다.
'생(生)은 일단 들어서면 사(死)로 변(變)한다. 사(死)도 역시 허
(虛)일 뿐, 휴(休)를 경동시켜 생문(生門)을 찾노라.'
이윽고 하후성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보법을 펼치자 비참하기 그
지없는 지옥도는 흐릿하게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득 어디선가 한 가닥 날카롭고 거친 음성이 울렸다.
"어떤 작자가 감히 천화곡을 침입하느냐?"
그 음성을 듣는 순간 하후성의 뇌리에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는 곧 얼빠진 듯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것
이었다.
"이... 이거...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꽃밭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광경이 나타나다니? 내가 귀신(鬼神)에라도 홀렸단 말인가?"
그러자 즉시 비웃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이 놈아! 너는 진법(陳法)에 걸린 것이다. 네 놈이 이
곳에 침입한 이상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쉭... 쉭!
그를 향해 날아오는 몇 가닥 지풍(指風) 소리가 들렸다. 하후성은
움찔했다.
'이거, 너무 살기가 짙군.'
그러나 그는 지풍이 날아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이환결(移環訣).'
내심 중얼거리는 순간 그의 전신 오대혈에 지풍은 그대로 격중되
었다.
"으윽!"
하후성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그러자 곧 주위 환경이 원래대로 회복되며 꽃밭 사이로 한 명의
소년이 나타났다.
그는 약 십오륙 세 가량 된 무척이나 활달하고 귀엽게 생긴 청의
소년으로 갸름한 얼굴에 동그란 큰 눈, 그리고 만면에는 온통 짖
궂고 장난스런 기운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는 체구가 좀 작은 편이었는데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발로 하후
성의 허리를 툭툭 걷어찼다.
"흥! 네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재수가 없었다.
더구나 할아버지가 보면 너는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야."
소년은 제멋대로 중얼거리며 하후성의 몸을 마치 짚단이라도 되는
듯 가볍게 번쩍 들더니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휘파람을 불어대며 곡 안으로 걸어갔다.
매우 낙천적인 괴소년(怪少年), 그러나 문득 소년은 채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이상함을 느껴야 했다.
어깨에 멘 하후성이 점차 무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어?'
소년은 의혹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는 메고 있던 하후성을 내려
놓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억!"
그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하후성이 천 근(千斤) 이상으로 무겁
게 변한 것이었다.
괴소년은 엉거주춤한 채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내려놓을 수
도 없고 들어 던질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게가 그를 압살할
듯 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되고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너... 너... 나를 속였구나!"
그는 분노하여 버럭 외쳤으나 또다시 비명을 터뜨렸다.
"윽!"
갑자기 목덜미 뒤 옥침혈이 뜨끔함을 느끼고 그만 전신에 맥이 빠
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 엄청난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아이쿠!"
그는 그대로 고꾸라져 엎드려야 했다. 하후성의 몸에 깔린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는 누군가의 손에 부축되어 일으
켜졌다. 보니 자신이 들쳐 메고 있던 사나이가 아닌가?
임풍옥수이 준수하기 그지없는 하후성의 얼굴을 비로소 정면으로
보게 된 괴소년은 멍해진 채 자신도 모르게 내심 중얼거렸다.
'얼굴 하나는 정말 잘 생겼구나!'
하후성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소형제, 고맙네. 자네 덕분에 힘 하나 안 들이고 그 진
법을 벗어났으니 말일세."
괴소년은 울화가 치미는 듯 귀여운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씩
씩거렸다.
"이제 보니 네 놈이 나를 이용했구나!"
하후성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결과는 그런 셈이지."
"이 놈아! 빨리 혈도를 풀어라. 비겁하게 혈도를 제압하다니. 정
정당당하게 싸워 보자!"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은 걸? 이미 내가
자네를 잡았는데 무엇하러 다시 수고를 한단 말이냐?"
소년은 울화를 참지 못해 그만 폭발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후성이 소년을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메었다. 형세가 정반대로
뒤바뀐 것이었다.
"이 놈아, 내려 놔라! 내려 놔!"
소년은 길길이 고함치고 악을 썼으나 하후성은 손바닥으로 소년의
엉덩이를 찰싹 치며 웃었다.
"하하하... 소형제, 좀 조용히 하게. 자네의 조부를 만나면 풀어
주겠네."
소년은 얼굴이 시뻘게 가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 후레자식아! 어서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하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허어, 나이도 어린 친구가 말이 좀 거칠군."
그는 소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네의 조부를 만나기 전에 이 형님이 너의 버릇을 먼저 고쳐줘
야겠군."
소년은 눈을 부라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어림도 없는 헛소리하지 마라! 내 버릇을 고쳐... 앗!"
소년은 대경하여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하후성이 느닷없이 그
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이, 이놈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너의 옷을 홀랑 벗겨 하루 동안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겠다."
"네, 네가 감히!"
"하하하... 왜, 내가 못할 것 같으냐?"
진풍경이 따로 없었다. 하후성은 껄껄 웃으며 소년의 상의부터 옷
을 벗겨 나갔다.
"멈춰라! 이 악적!"
그러나 하후성의 손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는 소년의 앞가슴을 풀
어헤쳤고 속옷이 나타나자 그것마저 거침없이 열어제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랍게도 불쑥 튀어 나온 것은 바로 여인의 젖가
슴이었다.
"앗!"
하후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연홍빛 젖꼭지가 달린 조그마하면서도 소담스런 동구란 젖퉁이가
그의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소년은 그만 온 얼굴에 수치심이 가
득한 채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소년, 아니 소녀(少女)는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
는가 싶더니 대성통곡하는 것이 아닌가.
"어... 엉! 어엉!"
하후성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청의소년이 설마 여자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음성이나 태도, 용모까지도 완전히 개구장이 소
년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건."
하후성은 고개를 돌리며 당황성을 터뜨렸다. 이때 어디선가 음침
하고도 분노에 가득찬 늙은 음성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애송이 놈이 감히 천화곡에 와서 섬화(閃花)를 희롱하다니!"
하후성이 흠칫 놀라 몸을 돌리자 그의 앞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백발이 성성한 괴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거의 백 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발에는 짚신, 입고 있는 옷
은 다 헤어진 마의(麻衣)였다.
하얗게 센 머리칼과 수염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빳빳해 보였으며
얼굴은 깡말라 움푹 패여 보였다. 더우기 광기(狂氣)가 어린 듯이
보이는 두 눈에서는 섬뜩할 정도의 살광(殺光)이 뻗치고 있었다.
괴노인은 왼손에 한 자루의 검은 빛이 감도는 검집도 없는 목검
(木劍)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후성은 그를 보자 문득 느껴지는 것
이 있었다.
'혹시 이 노인이 광검절심 유무심이 아닐까?'
괴노인은 살기 띈 음성으로 말했다.
"노부는 천화곡에 들어온 놈은 누구를 막론하고 살려두지 않는다.
네 놈은 거기에다 섬화까지 희롱했으니 기필코 노부가 네 놈의 몸
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
하후성은 황급히 정중하게 포권하며 말했다.
"노선배님,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저는 결코 이 소녀
가."
"닥쳐라! 노부는 변명을 제일 싫어한다. 변명을 하려거든 염라대
왕 앞에나 가서 해라."
괴노인은 다짜고짜 수중의 목검으로 괴이하게 찍어왔다.
쉬--- 익!
귀를 찢는 듯한 엄청난 파공성이 울렸다.
'이크, 대단하구나.'
하후성은 본능적으로 뒤로 미끄러졌다.
"응?"
괴노인은 공격이 허탕치자 몹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으
스스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제법 한 수 하는 놈이었구나. 좋다, 어디 네 놈이 어디
까지 피할 수 있나 보자!"
이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 아니 소녀가 발딱 일어났다.
"할아버지, 이제야 겨우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개혈법(開血法)으로
혈도를 뚫었어요. 그 놈을 절대 살려두지 마세요!"
소녀의 말은 여전히 거칠었고 괴노인은 백발을 흔들며 외쳤다.
"오냐, 염려마라! 호랑이 굴로 들어온 양 새끼를 그냥 보낼 수가
있느냐?"
하후성은 멍청히 선 채 어이가 없는 느낌이었다.
'정말 그 조부에 그 손녀로구나. 둘 다 미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정중히 포권하며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혹시 광검절심(狂劍絶心) 유무심(有無心) 선배님
이 아니십니까?"
그러자 괴노인의 눈에서 더욱 극심한 광기가 쏟아져 나왔다.
"천하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감히 성검절심(聖劍絶心)을 보고 광
검절심이라니!"
쐐--- 액!
괴노인, 즉 광검절심 유무심은 다시 목검을 무시무시하게 뻗었다.
그러자 엄청난 위력의 검풍(劍風)이 회오리쳤다.
위--- 이--- 잉---!
파파팍!
검풍에 주위의 암석이며 초목이 날려 박살이 났다.
광검절심의 공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십팔검(十八劍)이나 퍼부어
졌는데 실로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였다.
하후성은 숨막히는 공세를 계속 피하기만 하며 음성을 높여 말했
다.
"유노선배님! 소생은 노선배께 볼 일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유무심이고 무무심이고 난 모른다! 볼 일이 있으면 먼저 대갈통
이나 떼어놓고 얘기해라."
위--- 잉---!
쉬이이이익! 쉭!
목검의 환영은 찰나지간에 수십 개에서 수백 개로, 수백 개에서
다시 수천 개로 불어났다.
하후성은 고소를 짓는 한편 천불현현보(千佛玄玄步)를 펼쳐 동에
번뜩, 서에 번뜩하며 공세를 피했다.
천불현현보는 바로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로 느릿한 듯 여유
있어 보이는 신법이나 한 번 전개하면 상대방은 아무리 연공(連
功)을 퍼부어도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이 놈! 꽁무니를 빼는구나!"
광검절심 유무심은 분노가 치밀대로 치밀어 올랐는지 움푹 꺼진
두 눈에서 시퍼런 광망을 뿜어냈다.
이때 곁에서 청의소녀가 발을 구르며 외쳐댔다.
"할아버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자칭 천하제일검이 그까짓 놈 하
나 처치하지 못해요? 늙어서 뼈다귀가 잘 움직이지 않는단 말인가
요?"
그 말에 유무심은 더욱 분노했다.
"닥쳐라! 계집애야, 더 이상 떠들면 네 혓바닥을 뽑아버리겠다!"
파파팟!
그는 목검을 떨쳐 검막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뒤로 일 장 가량 뛰
어 물러났다. 자연히 공격이 중지되었고 그는 무서운 눈으로 하후
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애송이 놈, 지금부터는 좀 달라질 거다!"
유무심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목검을 고쳐 잡았다. 그런데 기이하
게도 그는 목검의 손잡이를 거꾸로 움켜쥐고 있었다.
검신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땅을 가리키는 그 자세에서 하후성은
왠지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
"흐흐흐... 성검오마식(聖劍五魔式)이다, 애송이 놈! 극락전까지
조용히 안내해 주마."
'성검오마식?'
하후성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광검(狂劍)을 성검(聖劍)
으로 제멋대로 고쳐 부르는 상대방의 억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미소가 금새 사라졌다. 문득 유무심의 전신에
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된 것이었다.
마의(麻衣)가 펄럭이며 머리카락과 수염이 온통 곤두서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눈에서는 흉맹한 기운이 화광처럼 뻗쳐 나오고 있
었다.
"크... 아아... 아!"
드디어 유무심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사 장(四丈) 가량이나 솟
구쳤다. 머리를 아래로, 다리를 하늘로 향한 채 내리꽂히며 목검
을 무자비하게 날리자 가공할 살기가 하후성을 덮쳐왔다.
하후성은 마침내 가슴에서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솟아나오는 것
을 느끼며 안색을 굳혔다.
'어디, 성검오마식인가 광검오마식인가 얼마나 무서운지 부딪쳐
보자.'
"죽어랏!"
파파팟!
유무심은 미친 듯한 검광을 작렬시키며 머리, 어깨, 등, 가슴을
한꺼번에 노리며 떨어져 내렸다. 하후성은 침착한 표정으로 다리
를 정자(丁字)로 벌린 채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유무심이 펼친 검광의 범위 안에 들어간 순간 그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파파파... 팟!
귀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그의 신형이 삽시간에 무려 일흔 아홉
번이나 회전해야 했다.
"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황급히 뒤로 몸을 날리
는 하후성의 몸에서 수십 조각의 백의 옷자락이 분분이 날렸다.
다행히도 피부가 베어지지는 않았으나 옷자락이 조각조각 찢겨진
하후성의 놀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놀라운 검법이다. 이 검법은 미친 듯이 발광하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식(式)을 포함하고 있구나. 특히 섬(閃)과 살
(殺)이 깃든 가공할 살초(殺招)다.'
하후성은 유무심을 보는 인식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천기사숙님의 혜안이 놀랍구나.'
한편 땅에 내려선 유무심도 놀란 듯 안색이 일그러졌다.
"흐으, 뜻밖이구나! 네 놈이 성검오마식의 제 일 초(第一招)를 받
아내다니!"
하후성은 문득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노선배님, 우리 기왕 비무할 바에야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
니까?"
유무심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검을 하여 진 사람은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어떻
습니까?"
하후성의 말에 광검절심 유무심은 괴소를 흘리며 일축했다.
"크흐흐! 내가 이기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굳히 내기까지 할 필요
가 있겠느냐?"
"그러나 소생이 이긴다면?"
"흐흐! 네 놈이 이긴다면 네 놈 앞에 무릎을 꿇고 종이 되겠다."
하후성은 싱긋 웃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만약 소생이 이긴다면 한 가지 부탁
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유무심은 킬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하후성이 슬쩍 손을 흔들자 그의 옆에 있던 교목(橋木)의 가지가
탁 부러지며 그의 손으로 딸려 들어왔다.
허공섭물과 격공전지의 수법이 어우러진 절기였다.
"소생도 검으로 하겠소이다."
그는 나뭇가지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쥐고 왼손으로는 검결(劍訣)
을 노리는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나뭇가지 끝은 하늘을, 왼손의
검결은 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무심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건... 다, 달마삼검(達磨三劍)의 기수식 연불지천(蓮佛指天)!"
그의 안색은 거듭 변화를 일으켰다.
"달마삼검... 달마삼검이."
그는 갑자기 만면에 분노를 일으키며 버럭 외쳤다.
"이제 보니 네 놈은 소림 땡중 놈의 제자였구나. 뒈져라!"
그는 분성을 내지름과 동시에 다짜고짜로 목검으로 하후성을 짖뭉
갤듯 공격했다.
하후성은 움찔하며 나뭇가지로 연불지천의 초식을 전개했다.
파파파팟!
작열하는 불꽃과 함께 검화(劍花)가 무수히 난비했다.
실로 미쳐도 단단히 미친 광검오마식(狂劍五魔式)이었다. 그러나
광검(狂劍)과 불검(佛劍)의 대결은 막상막하의 접전을 이루었다.
"크아아아!"
유무심은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위---윙!
검광과 검풍이 무섭게 일어났으나 하후성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
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태산같이 우뚝 선 채 나뭇
가지를 날렸다.
"불광만공(佛狂萬空)."
달마삼검의 제 이 초식이 전개되자 광명정대하고 웅후무비한 검세
가 온통 주위를 뒤덮었다. 그와 정반대로 유무심의 광검오마식은
패도적이며 악랄하고 변화무쌍했다.
위--- 잉- 펑!
싸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초가 진행되었다. 하후성은 계속하
여 달마삼검 만을 펼쳐 공세보다는 수세를 취했으므로 실로 두 사
람의 싸움은 용호상박이었다.
유무심의 두 눈에서 무섭도록 시퍼런 광망이 폭사되더니 문득 광
성을 터뜨렸다.
"크으아아아! 광풍천하(狂風天下)---!"
엄청난 검풍이 주위 십 장(十丈)여를 뒤덮으니 그것은 불가사의한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하후성은 안색이 대변했다.
'달마삼검으로는 힘들다!'
하후성의 검세가 돌변했다.
"제천구도(諸天求道)!"
그의 입에서 맑은 외침이 터진 순간이었다.
우우--- 웅!
웅후한 파공성과 함께 나뭇가지의 검막이 하후성의 모습을 가렸
다. 그것은 불영구검(佛影九劍)의 제 팔 초로 검막이 하후성을 감
싸자 곧 검막 속에서 은은하게 불존(佛尊)의 환영(幻影)이 나타났
다.
광검절심 유무심은 자신을 향해 커다란 불존이 태산 같은 무게로
다가듦을 느꼈다.
파파파... 팍!
그의 목검이 무수한 검망을 폭사하며 불존을 찔렀으나 그것은 태
산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으... 으으윽!"
유무심은 수중의 목검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꼈으며 동시에 무서
운 강기에 의해 그의 몸은 삼 장(三丈) 가량이나 뒤로 튕겨 나갔
다.
쿵!
유무심은 곤두박질치듯 땅에 내려선 후 비틀거리며 두 눈을 찢어
져라 부릅떴다.
"미... 믿을 수 없다. 내... 내가... 패(敗)하다니, 말도 안 된
다."
그는 정말로 미쳐버린 듯 부르짖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말도 안 된다, 광풍천하가... 광풍천하가...
무너지다니. 으으... 으... 으."
유무심은 정말로 커다란 타격을 받은 듯 했고 하후성이 담담하게
물었다.
"노선배깨선 승복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유무심은 안색이 일그러진 채 물었다.
"네 놈이 조금 전 전개한 검법의 이름은 무엇이냐?"
하후성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불영구검의 제 팔 초식인 제천구도(諸天求道)입니다."
"불영구검."
다시 유무심의 안면 근육이 씰룩였다. 이때 청의소녀, 즉 섬화(閃
花)가 앞으로 나서며 참견했다.
"할아버지가 패한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분명 속임수야! 할아버
지, 다시 한 번 싸워 봐요."
유무심은 꽥 소리쳤다.
"입 닥쳐라! 이 계집애야!"
그는 하후성을 응시하며 이를 갈았다.
"좋다, 노부가 졌다. 네 놈은 노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후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광검오마식의 전수(傳授)를 부탁합니다."
"뭐... 뭐라고?"
유무심은 안색이 대변하여 다시 이를 부드득 갈더니 버럭 외쳤다.
"이... 이제 보니 애송이 놈이 노부를 희롱하려 드는구나. 노부를
이기고도 노부의 검법을 배우겠단 말이냐?"
하후성은 공손히 말했다.
"희롱이 아닙니다. 소생은 진정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소생은 노선배님의 발원심결(發元心訣)과 섬류심결(閃流心訣)을
얻고자 합니다."
유무심의 안색이 굳어졌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하후성은 마침내 품속에서 한 개의 고전(古錢)을 꺼냈다. 그것은
그것은 바로 천기선사가 준 것이었다.
"노선배님은 이것을 아십니까?"
유무심은 표정이 돌변해 멍해지더니 곧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으하하하."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목이 터져라 연이어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얼굴이 마구 씰룩거렸다. 또한 그의 짖무른 두 눈에서는 하
염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후성은 이 느닷없는 사태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 자는 정말 광인이란 말인가?'
이때 유무심은 웃음을 뚝 그치더니 이를 갈며 부르짖었다.
"소림(少林), 소림! 그 놈의 잘난 절(寺)은 노부를 끝까지 괴롭히
는구나."
그러한 유무심의 모습은 마치 실성한 사람같이 보였다. 심지어는
곁에 있던 청의소녀 섬화조차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 보
았다.
이윽고 유무심은 가슴 옷을 북 찢어내더니 손에 한 권의 낡은 책
자를 잡아냈다. 그는 책을 하후성에게 휙 던지며 외쳤다.
"자, 가져가라! 그것은 노부의 모든 것이다. 크흐흐흐... 이 광검
절심의 한 평생이다."
하후성은 엉겁결에 책자를 받았다.
"자, 이제 너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꺼져라! 어서."
유무심의 처절한 말에 하후성은 웬지 자신이 크게 잘못한 듯한 느
낌이 들었다. 그는 잠시 책자를 들고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정중
히 읍했다.
"감사합니다. 노선배님."
"필요 없다! 어서 꺼져라!"
유무심은 여전히 눈물을 쏟으며 홱 돌아서 허공을 노려보았다.
하후성은 쓴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유섬화에게로 돌렸으나 그녀
또한 야멸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당장 잡아먹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는 듯한 눈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와 눈빛이 정통으로 부딪치자 유섬화는 그만 움찔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후성이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기 때문
이었다. 그의 웃음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순간적으로 야성적(野性的)으로만 살아온 유섬화의 가슴에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야릇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신의 그런 느낌에 어리둥절했으나 곧 얼굴이
빨개지더니 그만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하후성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작은 아가씨, 그럼 훗날 봅시다."
그는 유무심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노선배님, 그럼."
휘---익!
한 줄기 백영(白影)이 흰 빛으로 화한 듯 천화곡 밖을 향해 일직
선으로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자 유섬화는 갑자기 무엇을 잃은 듯이 가슴이 텅 비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굳어진 채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지중지하던 장중보옥(掌中寶玉)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그것은 이제껏 그녀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문득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무심코 쓸어내리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가슴의 옷자락이 풀어 헤쳐져 있고 작지만 이미 여인의 모습을
갖춘 젖가슴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유섬화의 얼
굴은 금방 도화처럼 새빨개지고 말았다.
'나도... 이제 보니, 벌써.'
그녀의 목덜미까지 빨간 홍화(紅花)가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야
생마처럼 자란 소녀의 분홍빛 연정이 처음으로 개화하는 순간이기
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