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七章 祝融世家
하북의 어느 이름 없는 산.
산세가 그리 깊지는 않았으나 산은 이미 늦가을의 정취를 흠뻑 자아내고 있었고, 제법 쌀쌀한 날씨와 더불어 바람 또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하늘과 차가운 산바람은 왠지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었지만,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산중에도 사람의 온기를 느낄 만한 곳은 있었다.
모옥(茅屋).
사냥꾼이 겨울을 나기 위해 만들었을 법한 작은 모옥이 산기슭에 쓰러질 듯이 위치하고 있었다.
대충 얽어 만든 지붕과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외벽이 매우 황량해 보였지만, 모옥 주위엔 왠지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기세가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이맘때면 사냥을 하던 사냥꾼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 가끔 이곳에 찾아들곤 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사냥꾼이 아니었다.
모옥은 바깥에서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안은 의외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고 제법 훈기(薰氣)마저 감돌았다.
모옥 안에서는 세 사람이 탁자에 마주앉아 차(茶)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갈색 장포를 입고 있는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어디서나 접할 수 있을 만큼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을 간직한 듯한 눈매가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그 옆의 인물은 청삼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는데, 맑고 수려한 용모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유현한 눈매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바로 동천립과 제갈추였다.
그들의 맞은편.
앉은키만 해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커보이는 거구의 중년인이 차를 호호 불어 가며 마시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체구가 어찌나 커다란지 꼭 거대한 산을 보고 있는 것 같았고, 붉은 안색과 화등잔만한 고리눈은 간담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위맹해 보였다.
특히, 웬만한 사람 머리보다 더 커보이는 손은 온통 상처와 힘줄로 뒤덮여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바로 동천립,
제갈추와 함께 대정회의 실질적인 회주인 패왕권(覇王拳) 모비룡(毛飛龍)이었다.
권공(拳功)만 놓고 본다면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절대고수(絶代高手).
그리하여 당금 무림의 십대고수(十大高手)로 추앙받고 있는 권법(拳法)의 대가(大家)가 바로 그였다. 또한 제갈추, 동천립과 함께 죽은 철단소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인물.
한데 친구 사이인 그들이 이런 으슥한 산속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니, 언뜻 보기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광경이었다.
단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이런 인적이 드문 산속을 찾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그들 세 명은 할말이 끊겼는지 조금 전부터는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묵묵히 차를 마시고 있던 모비룡이 문득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갈추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우공(愚空), 삼성이 본격적으로 무림 정복에 나섰다는 말이 들리던데 그것이 정말인가?”
어리석고 공허하다는 뜻의 우공은 제갈추 자신이 지은 그의 아호로,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부를 때면 항상 제갈추라는 이름보다 우공이라는 호를 더욱 즐겨 사용했다.
제갈추는 모비룡의 시선을 받자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무슨 이유에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성이 본격적으로 표면에 나설 것 같네. 잘된 일이지.”
“잘 되다니?”
“우리로선 그들이 은밀히 움직이는 것보다는 겉으로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것이 상대하기에 훨씬 편하다는 말일세. 그들이 어둠 속에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깥으로 끌어내야 할 형편인데, 자신들이 알아서 마각(馬脚)을 드러낸다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던 모비룡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상대할 방법은 서 있는가?”
“글쎄, 우선은 그들의 동조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우리가 포섭하는 것과 그들이 노리고 있는 문파를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네.”
“하면 그것에 대한 대책은 있는가?”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네.”
제갈추의 담담한 대꾸에 모비룡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천하의 삼뇌천자가 이미 방도를 생각해 놓았다면 일은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말을 잇는 그의 표정에는 실로 확고한 신념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그저 상대를 칭송하기 위한 가식이나 자신이 위안을 삼으려는 거짓된 몸짓이 아니었다.
오랜 동안 같이 지내 온 상대에 대한 확고한 신념(信念), 아니 신앙(信仰)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절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상대와 함께 지내면서 만들어진 자연스런 믿음인 것이다.
하나, 그 같은 모비룡의 태도와는 달리 제갈추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만은 없네.”
모비룡이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힘으로 그들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여태껏 자네의 계략은 조금도 어긋남 없이 잘 들어맞지 않았나?”
제갈추가 빙긋 미소를 띠며 유현한 눈으로 모비룡을 쳐다보았다. 모비룡은 알 수 없는 신비함으로 가득 찬 제갈추의 눈을 마주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물론 그렇네. 하나, 내 말은 절대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네. 우리가 비록 그들과의 암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도 작은 것에 불과하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우리를 너무 쉽게 생각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단 말이지. 만약 그들이 힘을 기울여 우리를 말살하고자 한다면 현재 우리의 전력으로는 도저히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이 없네. 더군다나 성검문(聖劒門)의 모사(謀士)로 알려진 천기무영(天機無影)은 도저히 그 속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심기(心機)가 뛰어난 자니 앞으로 각별히 주의하지 않는다면 큰 낭패를 당할 걸세.”
그 말에 여태껏 잠자코 있던 동천립의 두 눈에 이채가 가득 떠올랐다.
“그 천기무영이란 자가 정말로 그렇게 뛰어나단 말인가?”
제갈추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동천립은 턱을 괴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욱 각별히 주의해야겠군. 자칫 잘못해 우리의 위치가 탄로 나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이 아닌가?”
“그렇네. 앞으로는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 하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대정회와 관계된 사람은 모두 마찬가지지.”
“음!”
동천립과 모비룡이 제갈추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만으로 따진다면 대정회는 아마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힘의 오분지 일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하나, 그 동안 대정회는 삼성을 상대로 정말 잘 싸워 왔다.
비록 눈에 띌 만큼 커다란 싸움은 없었지만 삼성의 이목을 피해 그들의 일을 수없이 방해해 온 것은 매우 값진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모두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그 동안 삼성을 상대로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순전히 제갈추의 지혜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물론 삼성이 그들에 대해 여태껏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점도 있었지만, 월등한 힘을 갖고 있는 삼성에 대항해 대정회가 별다른 타격 없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이 제갈추의 공이라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제갈추의 계략과 안목은 탁월했던 것이다.
한데, 그런 제갈추조차 짐작하기 힘들 정도의 심기를 지닌 자가 있다는 말은 동천립과 모비룡에게는 실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당부대로 앞으로의 행동에 더욱 만전을 기하는 방법 외엔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동천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겁게 입을 여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스런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뭐니뭐니 해도 무당(武當)과 축융문(祝融門)에 대한 사안일세. 특히 축융문은 강호가 삼성의 손아귀에 넘어가느냐 마느냐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네. 만약 삼성이 축융문을 접수(接收)한다면 누가 있어 그들의 강력한 화기(火器)를 막아 낼 수 있단 말인가?”
동천립이 매우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으나 제갈추는 별것 아니라는 듯 오히려 가벼운 미소까지 띠며 대꾸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까.”
동천립은 제갈추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도 심각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축융문의 도움을 누가 받느냐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동천립은 기대 섞인 표정으로 제갈추를 쳐다보았다.
“정말인가?”
“음……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네. 그쪽은 내게 맡기고 자네는 무당 일이나 잘 처리하게.”
그제서야 동천립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는 친구인 제갈추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수십 년을 친구로 지내 왔지만, 동천립은 그가 쓸데없이 장담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제갈추가 이미 대처 방법을 강구해 놨다면 그것은 이미 성사된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동천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군.”
“그럼 이제 회의는 끝난 건가?”
모비룡의 물음에 동천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달리 할 말이 있는가?”
“……”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미 급하기로 유명한 모비룡이 먼저 밖으로 나가자 제갈추가 싱긋 미소 지었다.
“저 친구는 여전히 성미가 급하군.”
“글쎄 말이야. 저 급한 성미를 언제나 고칠는지……”
동천립이 혀를 차고는 제갈추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밖으로 나갔다.
휘이이이잉……
이미 날은 저물어 온 천지에 땅거미가 짙게 깔렸고 차가운 밤바람이 살을 엘 듯 몰아치고 있었다.
산속의 낮과 밤은 전혀 딴판이다.
낮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정취를 느낄 수 있지만, 밤은 절대 그렇지 못했다.
어두컴컴한 하늘과 짐승의 처량한 울부짖음, 그리고 매섭게 몰아쳐대는 바람. 정녕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었다.
제갈추와 동천립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모비룡이 작별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나중에 보세.”
동천립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몸조심하게.”
“음……!”
모비룡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만 들고 흔들었다.
이내 그의 모습은 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덩치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빠른 신법(身法)이었다.
“우리도 가지.”
“그래.”
모비룡이 떠나자 제갈추와 동천립도 나란히 신형을 날렸다.
산속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내공이 극에 달한 그들의 시야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얘기를 나누었던 모옥만이 황량한 산속에 버려진 듯 서 있었다.
* * *
악양에서 바라보는 동정호(洞庭湖)의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수려하고 아취(雅趣)가 있었다.
철군악은 송난령과 함께 묵묵히 동정호의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산산이 조각나고 또 조각나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년 전과 마찬가지로 동정호는 변함없이 푸르른 빛을 토해 내며 철군악을 맞았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지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동정호의 수면을 바라보던 철군악의 눈빛이 문득 쓸쓸하게 변했다.
자연은 전혀 변함이 없건만 그것을 찾는 사람은 너무도 변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철없는 소년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듯한 모습의 청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철군악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송난령이 싱그러운 웃음을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것도 아니오.”
무뚝뚝한 철군악의 대꾸에 송난령이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꺼냈다.
“또 사형을 생각하고 있군요?”
그는 대답할 생각은 않고 계속해서 동정호만 쳐다보았다.
철군악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송난령은 어떠한 말로도 그의 쓸쓸함을 달래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철단소를 생각하면 철군악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사형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감이 항상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사형은 결코 그처럼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이 바로 사형이었다.
한데, 그런 사형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것이다. 오직 자신과 강호를 위해……
비록 사형이 바라던 대로 철군악은 강해졌지만 이제 와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가 강해졌다고 이제 와서 사형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사형! 이 못난 사제는 당신이 바라던 대로 강해졌지만 제게 축하를 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군요.’
철군악은 동정호를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후후후…… 사형을 대신해 삼성이란 자들에게 축하를 받아 내겠습니다. 그들의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해 낼 때, 과연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겠습니다.…… 꼭 지켜봐 주십시오.’
철군악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오랜 시간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송난령이 따라오며 말을 걸어 다.
“이제 어디로 가죠?”
한데, 그녀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난데없이 봉두난발의 괴인이 불쑥 나타나더니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채 철군악을 쏘아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잠시 동안 철군악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헤벌쭉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헤헤헤! 자네 혹시 이 근처에서 철군악인가 뭔가 하는 말라 비틀어진 놈을 보지 못했나?”
철군악은 고개를 들고 앞을 쳐다보았다.
오척이 될까말까 한 작달막한 체구에 머리는 온통 수세미처럼 푸석푸석한 노인이 그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한 외모에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비쩍 마른 것이 너무도 볼품없어 보였지만, 기이하게도 두 눈만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깨끗하고 맑았다.
철군악은 그의 눈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철군악이오.”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히히히…… 내가 제대로 찾았군. 역시 나의 이목은 탁월하단 말씀이야!”
노인은 한참 동안 주절주절 자신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며 행동이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송난령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엥……?”
노인의 표정이 짐짓 샐쭉하게 변했다.
“너는 도대체 누구기에 감히 이 어른신 앞에서 방정맞게 웃는 것이냐?”
송난령이 웃음을 겨우 참으며 말을 꺼냈다.
“저를 모르시겠어요?”
괴인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송난령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기는 한데?”
“아이 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만 보면 귀엽다고 업어 주지 못해 안달을 하셨잖아요?”
순간, 괴인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잉? 네가 냉좌기의 제자인 그 꼬마 계집이란 말이냐?”
송난령이 웃음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괴인이 자신의 머리를 쾅 하고 내리쳤다.
“이런 멍청한 놈, 이렇게 눈이 어두워서야!”
괴인은 자신의 머리를 내리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에게 뭐라고 막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을 튀기며 자신을 칭찬하더니 이제는 입에 거품을 물며 다시 자신에게 욕을 해대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하나, 송난령은 그를 잘 알고 있는지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저 생글생글 웃을 따름이었다.
한참 동안 자신에게 욕질을 해대던 노인은 송난령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자 이번에는 그녀를 트집잡기 시작했다.
“야, 이 계집애야! 어른이 오셨으면 얼른 인사 올리고 남자 친구도 소개시켜 줘야지, 뭐가 그리 좋다고 허파에 바람 든 계집처럼 웃고만 있는 것이냐?”
송난령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남자 친구가 아니라……”
“시끄럽다! 에잉, 요즘 젊은것들은 도대체 예의가 없다니까!”
괴인이 역정을 내자 철군악이 앞으로 와 인사를 했다.
“철군악이 노선배께 인사드리오.”
그러자 괴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음, 그래도 자네는 저 계집애보단 낫군. 어흠, 자네가 바로 요즘 잘 나간다는 철군악이 분명한가?”
“그렇소.”
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철군악을 아래위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균형 잡힌 체구에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눈빛.
괴인은 그제서야 ‘그’가 철군악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흠! 정말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군.”
노인은 정색을 하고는 그답지 않게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노부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
철군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송난령이 그에게 괴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철 공자, 이분이 바로 뛰어난 지혜와 협심(俠心)으로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풍치약성이세요.”
순간, 노인의 표정이 흐뭇하게 변했다. 송난령이 자신을 추켜세워 주자 기분이 매우 좋아진 듯했다.
하나, 비록 그녀가 괴인을 추켜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풍치약성(痴藥聖) 호불곡(胡不曲)!
그는 한마디로 미치광이다.
호가 말해 주듯이 그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을 지니고 있었다.
미치광이에다 어딘가 모르게 바보스런 데가 있다고나 할까?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때의 경우였다.
누군가 만약 그의 앞에서 옳지 못한 행동을 하거나 남을 괴롭힌다면 그자는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가 비록 평상시에는 반미치광이에다 바보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코 진면목이 아니었다.
실성한 듯한 행동과 바보스런 말투에 가려진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한 가지 대단한 특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술(醫術)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독(解毒)에 대한 조예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아무리 심하게 중독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들에서 자생하는 잡초 한 뿌리만 있다면 회생시킬 수 있다고 알려진 독의 대가가 그였다.
한데 그가 왜 갑자기 철군악 앞에 나타난 것일까?
호불곡은 잠시 헤헤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철군악이 맞다면 지금 당장 축융문(祝融門)에 가봐야 할 걸세.”
철군악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 앞에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나타난 것도 그렇거니와, 난데없이 자신더러 축융문으로 가보라니?
철군악은 머릿속으로 뭉게구름처럼 의혹이 솟아올랐지만, 무작정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움직일 생각을 않고 가만히 있자 호불곡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갈 텐가, 아니 갈 텐가?”
“이유를 알고 싶소.”
“급하니 우선 이곳을 떠나세.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해줄 테니.”
호불곡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휙 하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철군악은 무엇 때문인지 무척 궁금했으나,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를 따라 나섰다. 비록 행동이 너무 급작스럽고 비상식적이었으나, 철군악은 호불곡의 흐리멍덩한 눈빛에 가려진 맑은 정기(精氣)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절대 미친 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의 눈은 오히려 범인보다 더욱 깊고 예리한 빛을 감추고 있었다.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호불곡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얼마 뒤떨어지지도 않은 철군악과 송난령에게 계속 주절거리며 길을 재촉했다.
“빨리 오래두, 송가 계집애야! 너도 눈치만 보지 말고 빨리 따라오너라. 잘못하면 네 서방 도망갈라.”
호불곡의 방정맞은 말투에 송난령이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쫓아갔다.
“호 선배, 말조심하지 않으면 사부께 전부 일러바칠 거예요!”
“어이쿠……”
송난령이 잔뜩 화난 얼굴로 쫓아오자 호불곡은 머리를 싸쥐며 잽싸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신형은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철군악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이 비록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철군악은 그들을 보자 옛일이 떠올랐다.
그 또한 어렸을 때 사형과 저처럼 장난을 친 적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가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상대해 줄 사람이 없었다.
철군악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상념에 빠져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여산(廬山).
강서성(江西省) 북부, 구강(九江)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명산(名山).
옛적에는 남장산(南障山) 또는 광여산(匡廬山)이라고도 불렸는데, 오래 전 광씨칠형제(匡氏七兄弟)가 이 산에서 은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처럼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최고봉은 오로봉(五老峰)이며 절경으로는 고령(嶺)과 삼루천(三壘泉) 등이 있다.
오로봉의 기슭에 위치한 거대한 장원(莊園).
너비가 삼 장(丈) 정도 되어 보이는 대문은 고급 가구에나 쓰일 법한 오동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높이가 이 장은 넘어 보이는 담벽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만큼 견고하고 웅장해 보였다.
거기에다 대문 중앙에 높다랗게 걸려 있는 현판(懸板).
그곳에는 휘황찬란한 금빛 글씨로 축융세가(祝融世家)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축융세가(祝融世家)!
강호에 축융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비록 사대세가(四大世家)에는 들지 못했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축융문이 사대세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여타 문파처럼 무공이 대단하거나 지략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남들에게는 없는 무서운 힘이 있었다.
바로 화기(火器)였다.
그들은 화기 하나만 가지고도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되었고, 특히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 년 전에 한 명의 천재가 나타난 이후로는 날로 번창을 더해 가 현재는 강호에서의 위치가 실로 확고부동했다.
하나, 누가 알았으랴?
축융문에 아무도 모르게 우환이 다가오고 있음을.
무림의 풍운은 축융문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술시(戌時)가 조금 지난 시간이건만 밖에서 보이는 축융문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널따란 집안에는 횃불 몇 개만이 타오르고 있을 뿐, 쥐새끼 한 마리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세가(世家) 뒤쪽에 위치한 후원.
가주인 헌원벽이 글을 읽거나 산책을 하며 여가를 보내는 곳으로, 그가 오랜 동안 정성 들여 꾸며 놓아 그런지 매우 운치가 있어 보였지만 오늘밤은 평상시와 달리 날카로운 예기(銳氣)만이 어두컴컴한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서너 개의 횃불이 벽에 걸린 채 주위를 밝히고 있었고 희미한 불빛 사이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성거리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합쳐 육칠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횃불에 의지한 채 묵묵히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그들 중에 철군악과 송난령의 모습이 보였다.
철군악과 송난령 바로 옆에는 창백한 인상의 초로인(初老人)이 심각한 안색으로 그들에게 뭔가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 모습도 들어왔다.
초로인은 호리호리한 몸매와 더불어 병자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어 언뜻 보기에는 매우 유약해 보였지만, 자세히 본다면 두 눈과 전신 모발(毛髮)이 은은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어 상대로 하여금 매우 신비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가 바로 축융문 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천화공(天火公) 헌원벽(軒轅霹)이었다.
무림에 알려진 바로는 인간이 불을 발견한 이래 화기 제조로만 따져 여태껏 그보다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고 한다.
전설의 명장(名匠)인 만묘신수(萬妙神手)도, 유사 이래 최고의 암기 제조가로 불렸던 뇌천비(雷千臂)도 화기 제조에 있어선 그에 비하면 어린애 같은 솜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그가 자랑하는 삼대화기(三大火器)는 모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위력을 담고 있어 그 중 위력이 가장 약한 신화봉(神火棒)조차 두세 개만 가지고도 웬만한 군소방파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헌원벽은 화신(火神)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철군악과 송난령을 보며 한참 동안 얘기하고 있었는데,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니 무슨 중대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았다.
그와는 달리 철군악과 송난령은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호불곡을 따라 조금 전 축융문에 도착한 철군악과 송난령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자신들을 맞이하는 축융문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을 맞이하는 축융문도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축융문에 도착하자마자 호불곡은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어디론가 가버렸고 철군악과 송난령만 헌원벽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것도 방이 아닌 으슥한 후원에서 말이다.
어찌 됐든 철군악과 송난령은 지금 헌원벽의 얘기를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식구는 물론이요 제자(弟子)나 장인(匠人)들, 하물며 하인들까지 모두 독에 중독되고 만 것이오.”
헌원벽은 얘기를 끝내고는 가슴이 답답한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급작스레 일어난 변고에 대책이 없는 듯했다.
송난령은 한숨을 짓고 있는 헌원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결론은 그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면 축융문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이로군요.”
“그렇소. 하나 그들의 요구는 불가능한 것이오.”
송난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불가능하다니요?”
헌원벽은 잠시 어두운 하늘을 응시한 채 말없이 있다 이내 말문을 열었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해마다 삼대화기를 일백 개씩 만들라는 것이었소.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왜 불가능하냐고 반문하겠지만, 삼대화기는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일 년에 열 개 이상을 만들 수 없소.”
“그건 왜 그렇죠?”
“그건 삼대화기를 제조하는 방법이 매우 까다롭고 시일이 많이 걸리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재료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오.”
송난령이 알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화약(火藥)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황(硫黃)이나 초석(硝石) 따위가 필요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런 것들은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송 소저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오. 물론, 보통 화약은 그런 것들로 만들 수 있지만 삼대화기에 쓰이는 것은 조금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오. 일반 화약으로는 삼대화기가 필요로 하는 강력한 폭발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럼 도대체 뭐가 필요하죠?”
송난령의 질문에 헌원벽은 잠시 뜸을 들이며 숙고하더니 결심이 선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원래 이것은 본가의 비전(秘傳)이라 함부로 말해선 안 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군요. 송 소저는 혹시 화정(火精)이란 말을 들어 보았소?”
“글쎄요……”
송난령이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자 여태껏 가만히 있던 철군악이 거들었다.
“화정이라면 천화신정(天火神精)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철 공자는 알고 있군요.”
헌원벽은 강호의 노기인(老奇人)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을 철군악이 알고 있자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사실 철군악이 송난령과 함께 왔을 때만 해도 그리 달갑지 않았다. 비록 철군악이 비룡승천대회에서 우승했다고는 하나, 헌원벽이 보기에 그는 어디까지나 이제 겨우 강호에 출도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내심 철군악에게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안목이 대단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헌원벽은 어쩌면 오늘 뜻밖의 결과를 거둘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한층 밝아진 얼굴로 철군악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철 공자는 화정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소?”
헌원벽은 설마 그것까지야 알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물어 본 것이었지만, 철군악은 예상외로 전혀 머뭇거림이 없었다.
“본인이 알고 있기로 화정은 극한(極寒)의 음지(陰地)에서 극양(極陽)의 기운을 받아야만 생성된다고 하오. 그것은 채취하기가 매우 까다롭고 또 생성량이 극히 적을 뿐 아니라 보통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화약처럼 폭발력을 갖고 있는 물건과 특수한 방법으로 혼합하게 되면 그 본래 위력을 수십 배 증가시켜 준다고 알고 있소.”
조금도 막힘없는 철군악의 대꾸에 헌원벽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잘 알고 있군요…… 그렇소! 화정을 일반적인 화약과 혼합해 사용한다면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지닌 특수화약, 즉 천뢰폭(天雷爆)을 만들 수 있소. 물론 거기에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지만 천뢰폭은 극히 적은 양으로도 매우 강대한 위력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만들 수만 있다면 실로 그 효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요.”
송난령이 자못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도대체 위력이 어느 정도기에……?”
헌원벽이 지체 없이 대꾸했다.
“아마 천뢰폭 한 양(兩)이면 만 근 거석(巨石)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오.”
송난령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아! 그렇다면 그 천뢰폭이라는 것으로 화기를 만든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당해 내기 힘들겠군요?”
헌원벽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이오.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만약 삼대화기를 인간에게 사용한다면 실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오.”
송난령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끔찍한 위력의 삼대화기가 삼성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실로 생각하기조차 싫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난관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자들은 모두 몇 명이나 되죠?”
“글쎄…… 어제 온 자들은 모두 셋이었소만, 그들이 전부라고 보기엔 어렵겠지요.”
“하면, 가주께선 그들이 누군지 아세요?”
송난령의 질문에 헌원벽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그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이를 뿌드득 갈기 시작했다.
“셋 중 둘은 처음 보는 자들이었지만, 자신들 말로는 성검문(聖劒門)에서 나왔다고 했소. 그리고 한 사람은 내가 아는 놈이었소.”
“그가 누구죠?”
헌원벽이 두 눈에서 시퍼런 불길을 뿜어 내며 대답했다.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은 바로 당초웅(唐礎雄)이오.”
“당초웅이라면 당문의 쌍심독수(雙心毒手)가 아닌가요?”
헌원벽이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왜 아니겠소? 그 찢어 죽일 놈이 암수(暗手)를 써 본(本) 가(家)의 인물들을 중독시켜 놓고는 뻔뻔스런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뭔지 아시오? 뭐, 앞으로 지들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식솔들의 목숨은 장담하지 못한다고? 허!”
헌원벽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보기보다 열화(熱火)와 같은 성정(性情)을 갖고 있는 헌원벽으로선 그런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모양이었지만, 송난령은 내심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쌍심독수 당초웅이라면 잔인한 손속과 고강한 무공, 그리고 무엇보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를 중독시킬 수 있는 용독술(用毒術)로 인해 이미 무림에서는 경외의 대상이 된 지 오래된 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자는 그가 협객(俠客)이든 악인(惡人)이든 간에 가리지 않고 살해를 일삼는, 그야말로 마인(魔人) 중의 마인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미 축융문의 인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독에 중독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잘못하면 문파(門派) 하나가 씨도 남기지 못하고 몰락할 수 있는 것이다.
송난령이 조심스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축융문의 인물들이 모두 중독되었다면 가주께서는?”
헌원벽이 지체 없이 대꾸했다.
“물론 본인도 중독되었었소.”
송난령은 그의 어조가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란 말씀인가요?”
헌원벽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송난령은 그의 눈에서 번뜩이는 한 가닥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자부심이었다.
“본인은 이미 체내의 독을 몰아 낸지 오래요.”
“아!”
송난령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당문의 독은 시전하기도 까다롭지만, 해독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만약 누군가 당문의 비전지독(秘傳之毒)에 중독되었다면 그는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하나는 독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요, 또 하나는 시원하고 빠르게 생을 마감하는 방법, 즉 자결(自決)을 하는 것이다.
당문에서 스스로 해독해 주기 전에는 그 두 가지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데, 헌원벽이 독중지독(毒中之毒)이라는 당문의 독을 해독했다는 것이 아닌가?
송난령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다시 한 번 헌원벽을 살펴보았다.
병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눈동자와 전신 모발은 은은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송난령은 그제서야 그것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어떤 기공(奇功)을 연마해서 일어난 현상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일으켜 체내의 독을 태워 버렸으리라.
송난령이 내심 헌원벽에 대해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헌원 가주께서 체내의 독을 몰아 내셨다고 했는데, 하면 다른 사람들이 중독된 것도 해독할 수 있지 않나요?”
그녀의 기대 어린 표정과 달리 헌원벽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미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의술도 잘 모른 채 내공(內功)만으로 맹독을 몰아내려니 너무 위험 부담이 커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소.”
송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內功)이 극에 이른 사람이라면 스스로 삼매진화를 일으켜 독을 없앨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에 한해서였다. 만약 섣불리 다른 사람의 독을 해독하려 했다가 상대의 체내에 있던 독이 발작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치료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이 발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시술자의 강대한 내공을 이기지 못한다면 백이면 백, 심맥이 터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된다면 피시술자는 물론, 시술자 또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수 있으므로 내공을 이용한 치료는 연공과 마찬가지로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헌원벽으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송난령이 화제를 바꿨다.
“뭐, 어차피 그런 것은 의술을 잘 아는 호 선배한테 맡기고, 우리에겐 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 중요한 일이니 거기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군요. 그들이 언제 올 거라 그랬죠?”
헌원벽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피땀 흘려 이룩한 가문이 졸지에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그로서는 아무래도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헌원벽은 신중하게 야색(夜色)을 살피더니 대꾸했다.
“해시(亥時)라고 했으니 이제 반각도 남지 않았소.”
“현재 무공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죠?”
헌원벽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제자들과 수하들을 전부 합치면 일류고수가 이삼십 정도 되지만, 지금은 모두 독에 중독된 상태라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을 합쳐 봐야 채 다섯도 되지 않을 것이오.”
송난령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로 놀라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축융문은 원래 무(武)를 앞세우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불을 연구하는 것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뛰어난 화기를 발명하고 화약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연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강호의 여타 문파처럼 고수들이 있을 리 없었다.
하나, 아무리 짐작은 하고 있었다지만 송난령의 표정이 밝을 리 없었다.
“정말 문제군요. 저와 철 공자를 합쳐 봐야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고수는 모두 열 명을 넘지 못한다는 얘긴데 수적으로 너무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본인도 공감하는 바요. 하나 싸움은 머릿수로만 하는 것은 아니니 꼭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오.”
송난령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헌원벽을 쳐다보았다.
제자와 수하들 대부분이 독에 중독되어 움직이기조차 힘들었고 도와주기 위해 온 사람도 겨우 셋밖에 되지 않았다.
비록 송난령과 철군악이 대단한 고수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호의 소문일 뿐 그가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이 상대해야 할 자들은 강호 최고의 힘을 갖고 있다는 사대세력의 인물들이 아니던가?
강호에서 허명이나 날리며 거들먹거리던 자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고수인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아주 절망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헌원벽은 전혀 기가 죽은 얼굴이 아니었다.
상대의 무서움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있어 그러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송난령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헌원벽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 제 2권 끝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