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情
금치괴왕은 항상 아기를 데려오면 세가지 시험을 하곤 했다.
그 첫째는 지하광장 한 구석에 있는 커다란 물웅덩이 속에 아기를 빠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기의 생존본능과 유연성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철판위에 아기를 올려 놓는다.
그것은 인내력과 성품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마지막 셋째,
아기는 금치괴왕이 기르고 있는 거대한 구렁이 앞에 놓여진다.
이미 공포와 고통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아기들은 이 마지막 담력시험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극히 원시적인 이 세가지의 시험-
지금 금치괴왕은 그 첫 번째 시험을 하려 하고 있다.
"허허...내 집에 왔으면 우선 목욕부터 해야지."
금치괴왕은 품에 안고 있던 두 아기를 냅다 물속으로 쳐 넣었다.
풍덩..
풍덩!
소리금은 한 옆에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곧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저녀석 좀 봐..!'
물에 빠진 두 아기,
부마연은 빠지는 순간부터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태어나는 생존본능이었다.
헌데...
오송학은 어떤가?
그 아기는 아예 처음부터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대로 입을 꼭 다물고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데...
밑바닥에 당도하자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물밖의 두 사람을 응시하는 게 아닌가?
"엉...?"
금치괴왕의 추악한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일각...이각...
시간이 한참 지나 숨막힐 때가 되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금치괴왕은 우선 물을 실컷 마신 채 창백하게 질려있는 부마연을 꺼냈다.
부마연이 크게 울 기색을 보이자 그는 재빨리 수혈을 짚어버렸다.
소리금이 놀라 크게 소리쳤다.
"어서 저 아이도 건져줘요! 숨막혀 죽어버리겠어요!"
"빌어먹을...저놈 생긴 것과는 반대로 혹시 백치(白痴)가 아닐까?"
금치괴왕은 소리금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중얼거렸다.
보다 못한 소리금이 물 속의 오송학을 향해 다급히 손짓을 했다.
"어서 나와! 이 바보."
순간이다.
오송학이 눈가에 웃음을 짖더니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밖으로 기어 나오는게 아닌가?
이윽고 물속을 완전히 빠져나온 오송학은 소리금을 향해 빙긋 웃었다.
"까르르...까..."
"......!"
소리금은 기가 막힌 듯 망연히 그 모습을 응시했다.
갑자기 그녀는 오송학에게 불쑥 다가서더니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딱!
"나쁜녀석,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
오송학은 조그만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두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오송학이 울음을 터뜨린 것과,
금치괴왕이 괴상한 신색으로 몸을 돌린건 거의 동시였다.
"끌끌...바보는 아니었군그래..."
두 번째 시험,
인내력과 성품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시작되었다.
화르르...
화르르...
불(火),
시뻘건 불길이 이미 사각의 큰 융기를 시뻘겋게 달구어 놓고 있었다.
"허허...이곳은 따뜻한 곳이란다. 얼마나 따뜻한지 피부로 느끼게 해주마."
금치괴왕은 두 아기를 융기속에 집어넣으며 괴소를 흘렸다.
철컹...
집어넣음과 동시 그는 철망으로 된 뚜껑을 덮어 아예 빠져나오지도 못하도록 해버렸는데..
순간,
치지직...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시작으로 부마연은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으아앙-!"
순식간에 부마연은 온 몸에 화상을 입어 물집이 가득한 상태로 변했다.
아아...
끔찍한 모습,
세상에 어느 누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에게 이토록 잔인한 시험을 할 수 있겠는가?
헌데..
오송학을 보라!
그는 부마연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미동도 않고 있다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참기 어려운 고통 탓이었으리라.
이어 그는 두 발로 엉거주춤 일어서는게 아닌가?
오오..
태어난 지 열흘도 되지 않는 아기가 스스로 일어선 것이다.
"저, 저놈 보게?"
"아..!"
금치괴왕과 소리금이 탄성을 흘려내는 순간이었다.
오송학은 두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순간에도 미동조차 않은 채
소리금을 향해 슬픈 눈길을 보냈다.
소림금은 일순 전율같은 감동이 온몸에 스침을 느꼈다.
'저 녀석은 움직이면 온몸에 화상을 입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게다가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도움의 눈빛을 보내다니..!'
그것은 충격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어른조차도 참기 힘든 고통 속에서 뚜렷한 의사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볼것도 없어요!"
휙!
소리금은 갑자기 소리지르더니 철망 뚜껑을 열고 오송학을 안아들었다.
금치괴왕은 초죽음 상태가 되어있는 부마연을 꺼내들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녀석이 또 하나 있었지.. 냉무강(冷武强)이란 놈이었나?"
세 번째 시험은 취소되었다.
부마연이 아예 실신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금치괴왕은 더 이상 오송학을 시험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
부마연을 간단히 치료해서 우리속에 넣은 후,
금치괴왕은 다른 한 아기를 안아들고 몸을 돌렸다.
한살 반 가량의 아기,
놀라우리만큼 차분하고 서늘한 눈빛의 아기였다.
그 눈빛은 차라리 냉혹해보일 정도여서 도저히 아기의 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인데...
치렁치렁한 흑발의 이 아기는 또한 매우 준수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다.
아기의 목에 걸린 호패,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따.
<성명 : 냉무강(冷武强),
나이 : 일년 이개월(一年二個月),
내력 : 멸문한 동북무림(東北武林)의 혈마쌍궁(血魔雙宮)의 후예,
시험결과 : 유연성 특급(特級), 생존본능 특급(特級),담력 특급(特級),
심성(心性) : 초아적(超兒的)임.
기타 : 십전(十全)의 체질로 사료됨.>
"허허...소리, 어떠냐? 네가 안고 있는 그 녀석과 이놈은
사사초인단의 기둥으로 성장할게 틀림없다."
금치괴왕은 오송학을 품에서 떼어놓지 못하고 있는 소리금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소림금은 그를 매섭게 응시하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흥, 금치치의 그 허황된 꿈에 희생되는 이 아기들이 불쌍할 뿐이예요."
금치괴왕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잠시 기묘한 눈길로 소리금을 응시하더니 등을 돌렸다.
슥!
"그 녀석을 안고 따라오너라. 보여줄 게 있다."
소림금이 의아로운 기색을 띄는 순간이었다.
금치괴왕은 동굴 안쪽에 놓인 나무침상을 밀어내더니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뭘 하는 것이죠? 그곳에 보물이라도 감추어 놓..."
뒤따라오던 소림금의 음성이 갑자기 뚝 끊겼다
. 그런 그녀의 눈에는 당혹의 빛이 가득 떠오르고 있었다.
침상밑으로 모래가 뒤덮인 그곳,
금치괴왕이 모래를 파내자 뭔가 손잡이같은 것이 나타난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무슨 기관의 돌출구처럼 보였다.
금치괴왕의 신색은 평소와는 달리 엄숙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는 돌출구를 힘있게 잡더니 오른쪽으로 돌렸다.
쿠쿠쿠...
은은한 굉음이 사위에 진동했다.
동시 동굴벽이 좌우로 쫙 갈라지는게 아닌가?
'세상에...!'
소림금은 놀라움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십육년 동안이나 이 동굴속에서 살아왔지만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열려진 동굴의 안쪽은 원형의 석부였다.
석부의 입구에는 금강지력으로 새긴 듯한 네 글자가 보였다.
초황비부(超皇秘府),
그 글씨를 본 소림금은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네치 깊이로 동굴벽을 파고든 글씨,
어릴 때부터 금치괴왕으로부터 무공을 배워온 그녀는
이 세상에 이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금치치... 도대체 이곳은 뭐죠?"
"허허...이 아비는 십칠년 전에 이곳을 발견했다. 따라들어오너라.
너는 내 꿈이 조금도 허황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금치괴왕은 득의어린 어조와 함께 석부안으로 향했다.
소림금은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오송학을 안은 채 그 뒤를 따랐다.
석부의 천정에는 북두칠성의 형상으로 일곱 개의 야명주가 박혀있어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항아리 두 개와 돌침상 하나,
실내에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헌데...
놀랍게도 침상위에는 백염백발의 한 노인이 조용히 정좌해 있는게 아닌가?
"아.."
소림금은 첫눈에 이 노인이 초황비부의 주인임을 깨달았다.
금치괴왕이 긴장해 있는 그녀를 돌아다보며 괴소를 흘렸다.
"신경 쓸 것 없다. 이미 육백년 전에 죽은 유체이니까."
"육백년이라고요? 믿을 수 없어요!"
소리금은 만면가득 불신의 빛을 띄웠다.
그렇다.
죽은 지 육백년이 지난 시체가 어찌 방금 죽은 것 처럼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단 말인가?
금치괴왕의 두 눈에 번뜩 기광이 스쳤다.
"그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신의 경지를 추구하던 사람이다.
또한 사사초인단의 일원이기도 하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아아...
엄청난 말이 아닌가?
소림금은 그제야 뭔가 확연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이것을 보아라."
금치괴왕은 노인의 유체 무릎위에서 빛바랜 한 통의 서찰을 집어들었다.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조금만 세게 만지면 금세 먼지로 화해 바스라질 것 같은데...
소림금이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펼쳐들자,
단지(斷指)를 하여 이어쓴 혈필이 나타났다.
<인자(因者)에게 남기노라.
노부는 사사초인단의 일원인 철검백(鐵劍伯)이라 한다.
노부의 세수 어언 백 오십, 생(生)에 미련은 없으나 이루지 못한 야망이 한스러울 뿐이다.
중원은 우리 사사초인단의 발아래 완전히 굴복했다.
허나,
아아... 어찌 알았겠는가?
우리 스스로 무덤을 파는 우를 범하게 될 줄이야...>
<본래 우리 사사초인단은 천험의 땅 묘강무림(苗疆武林)의 출신들이다.
우리는 풍요의 땅 중원을 지배하기 위해 이백년대계(二百年大計)를 세웠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마신인(超魔神人)들의 탄생을 위한 죽음의 세월들...
그 죽음의 세월은 묘강의 검은 하늘 밑에 묵천오색궁(墨天五色宮)을 탄생시켰고,
무려 일만 오천여 목숨들이 악마의 수련 끝에 사라져간 후에서야
드디어 오십육인(五十六人)의 초마군단(超魔軍團)은 탄생되었다.>
<운명의 그날,
중원정벌대(中原征伐隊)로 공마사사초인(功魔四四超人)이 결성되고,
나머지 십이초인(十二超人)은 남아서 묵천오색궁을 지키는
십이수마초인(十二守魔超人)으로 결성되었다.
우리는 또한 약속을 했다.
중원을 완전히 정벌한 후,
서로 정당한 비무를 벌여 무림제황(武林帝皇)을 선출하기로...>
<노부를 위시한 사사초인단은 두달만에 중원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그렇다.
중원은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허망하게 느껴지리만큼 쉽게...
우리는 중원백대문파(中原百大門派)를 굴복시키고 꿈을 실현한 것이다.
허나 노부는 홀로 중상을 입고 무림제황을 선출하는 비무대회에 참가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헌데 치료를 위해 중원에 홀로 남은 노부가 사사초인단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될 줄이야..>
오오...
노부가 몸의 상세를 치유하고 묵천오색궁으로 돌아갔을 때,
거기에는 실로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십이수마초인이 배반을 한 채 사사초인단을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십이수마초인은 이미 광염학(曠閻謔)이라는 놈을 제황(帝皇)으로 뽑아
천하를 지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부의 분노와 슬픔은 극에 달했다.
허나, 단신으로 그들 앞에 나서면 개죽음을 당할 게 뻔한 일..
노부는 그들이 자행했던 것과 똑같은 함정으로 복수하기로 했다.>
'아...'
여기까지 읽은 소리금은 손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나직한 탄식성을 흘려내며 철검백의 유체를 응시했다.
'이분은 마인이었으면서도 정리(情理)를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구나..!'
그녀의 시선이 다시 서찰로 향했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노부는 묵천오색궁의 유일한 출구인 천리미로(千里迷路)를 파괴함과 동시,
가공할 만독(萬毒)의 흑옥지(黑獄池)에 고여있는 엄청난 양의 독액을
묵천오색궁으로 흘려 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배반자들은 가두어졌다.
천리미로는 묵천오색궁의 유일한 통로인 동시 공기 통풍구이다.
그들이 파괴된 천리미로를 뚫는데 필요한 시일은 최소한 삼년(三年),
허나,
흑옥지의 무서운 독기(毒氣)는 결코 그들을 육개월 이상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아...지독하구나!'
소림금은 육백년 전에 벌어진 그 상황이 영상처럼 뇌리에 그려지는 것을 느꼈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공기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어둠(暗)의 공간에서...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독기(毒氣)를 마시며 허우적거리다가
하나씩 죽어가는 십이수마초인(十二守魔超人)의 처절한 모습을...
허나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철검백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서찰...
한 거인(巨人)의 한(恨)과 야망이 뒤섞인 서찰의 글귀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허무하게 끝났다.
모든 형제들이 죽어간 지금...
그 거대한 꿈과 야망은 노부에게 있어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인자(因者)여...
묵천오색궁(墨天五色宮)에 침투한 독기(毒氣)는
금후 삼백년(三百年) 이상이 흘러 소멸될 것이다.
만약 삼백년 후에 이 서찰을 보는 자가 있다면,
묵천오색궁을 찾아가 못다 이룬 사사초인단(四四超人團)의 꿈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그곳에는 엄청난 무학절서(武學絶書)들과
초마인(超磨人) 단련을 위한 일만 오천가지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묵천오색궁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수록해 놓은 지도(地圖)는
노부의 애검(愛劍) 신마흔(神魔痕)의 검집에 숨겨놓았다.
강(强)함은 장부의 아름다움이고 생명(生命)인 것..
부디 후인(後人)은 우리의 어리석은 우(愚)를 점철하지 말기만을 바랄 뿐이다.
철검백(鐵劍伯) 단필(斷筆)->
긴 서찰의 내용은 그렇게 끝났다.
소리금은 망연한 신색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금치치가... 그토록 허황된 꿈을 꾼건 결코 무리가 아니었구나!'
그때 소리금의 품에 안겨있던 오송학이 답답한 듯 몸을 뒤틀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까르르..."
소리금은 일순 두 눈에 기이한 이채를 띠고 오송학을 내려다 보았다.
"송학...너는 커서 초마인(超魔人)이 되어 세상을 뒤흔들고 싶으냐?"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허나 태어난 지 보름도 안되는 오송학이 그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조그만 눈망울은 그저 반짝거리며 빛나는데...
그때다.
금치괴왕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허허..소리,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소림금이 시선을 돌려보니 금치괴왕은 막 돌침상 밑에서
오색수실이 달린 하나의 보검(寶劍)을 집어들고 있었다.
소리금은 두 눈에 우수어린 빛을 발하며 우울한 어조로 대답했다.
"묵천오색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바업이 감추어졌다는 검(劍)이로군요."
"그렇다. 이 아비는 이미 이 속에 들어있는 비도(秘圖)조차 샅샅이 외워 두었다."
금치괴왕은 말과 함께 느릿하게 몸을 돌리더니 밖으로 향했다.
"따라오너라. 오늘같이 뜻깊은 날 내 어찌 술(酒)을 마시지 않겠느냐?"
"......"
소림금은 잠시 철검백의 유체를 말없이 응시하더니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해지는걸까...'
* * *
"으핫핫핫..내 생애에 이토록 술맛이 훌륭해 보기는 처음이구나."
금치괴왕은 술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키며 광소를 터뜨렸다.
소리금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말이 없었다.
익어가는 사슴고기 냄새 때문이었을까?
우리 속의 아기들이 일제히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유독 두 아기,
오송학과 냉무강만이 모닥불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독한 홍엽주를 족히 세 항아리는 비웠을 게다.
금치괴왕의 얼굴에는 취기가 가득했다.
문득 소리금은 기이한 눈빛으로 금치괴왕을 응시하며 물었다.
"언제 묵천오색궁으로 떠나실 건가요?"
"내일 당장."
금치괴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더니 괴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아이들을 싣고 묘강의 밀림속을 헤쳐나갈 특수마차도 준비해 놓았다.
소리금은 순간 가볍게 교구를 떨었다.
'안돼.. 나는 떠날 수 없어.
저 아이들이 다 장성하여 금치치의 야망을 채우게 될 동안
그 삭막한 오지에 내 젊음을 버릴 수는 없어!'
그녀는 내심으로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것은 너무 긴 세월이었다.
비록 천성이 거칠고 냉정한 그녀였으나..
소리금 또한 소녀 특유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싱그러운 젊음과 인생을 아무 목적도 없이 내던질 여인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미친여인이거나 백치일 것이다.
소리금은 드디어 자신이 금치괴왕의 곁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금치치... 할 말이 있어요."
소리금이 엄숙한 신색으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금치괴왕이 취기로 충혈된 시선을 그녀의 얼굴에 꽂더니 불쑥 말했다.
"이 아비도 너에게 할말이 있다."
소리금은 흠칫했다.
금치괴왕의 핏발선 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때,
금치괴왕은 징그러운 웃음을 만면에 머금은 채 소리금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소리, 너 시집가고 싶지 않으냐?"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허허.. 네 풍만한 엉덩이와 앞가슴은 한 여인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리 오너라. 허허..."
금치괴왕은 마른 고목가지같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다.
소리금은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뱀에라도 물린 듯한 표정으로 움찔 뒤로 물러앉았다.
"금치치! 왜 이러는 거예요?"
순간,
금치괴왕은 더욱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금의 가슴부위를 노려보더니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소리, 너 내일부터 나를 아비라고 부르지 말고 낭군이라고 불러라."
"뭐, 뭐라고요? 금치치, 미쳤어요!"
소리금은 금치괴왕의 품에 안긴 채 허우적거리며 경악성을 발했다.
짝!
그녀의 손이 금치괴왕의 얼굴에 매섭게 작렬했다.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쳤... 읍!"
그녀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금치괴왕의 입술이 덮쳐든 때문인데..
이어 그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가죽옷을 찢어내렸다.
우유빛으로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그녀의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길러준 정을 생각해서 한 번만 봐다오."
"그, 금치치...!"
소리금은 거의 혼이 달아날 지경이어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반항했으나 금치괴왕은 거대한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치괴왕의 손길이 그녀의 전신 곳곳으로 파고 들었다.
소리금의 눈이 일순 공포의 빛으로 물들었다.
금치괴왕의 완력을 당해낸다는건 불가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아...
하늘이시여...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입니까?
소리금은 절망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주르르 흘러내렸다.
'모든 게 끝났어..'
소리금은 더 이상 반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아..."
타오르는 횃불아래,
그녀의 몸은 어느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裸身)으로 변해 있었다.
헌데...
어느 한순간이었을까?
금치괴왕이 돌연 동작을 딱 중지했다.
이어 그는 난데없이 벌떡 일어서더니 멍한 신색으로 허공을 응시하는게 아닌가?
소리금은 이 돌연한 상황에 크게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놀람과 의혹이 뒤섞인 눈으로 금치괴왕을 응시했다.
금치괴왕은 만면에 고뇌의 빛을 띄우며 깊게 탄식했다.
"허허...내 아무리 나쁜 짓을 골라했어도 이것만은 도저히 못하겠구나."
입으로는 웃고 있으되,
그의 주름 가득한 눈가에는 언뜻 이슬같은 것이 맺히고 있었다.
소리금은 횃불아래 드러난 나신을 가릴 생각조차 않은 채 그 모습을 응시했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쳐 날뛰던 금치괴왕이 느닷없이 손을 멈춘 것도 그렇거니와,
칼에 찔려도 피 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에게서 눈물이라니...
일순,
금치괴왕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며 긴 장탄식을 흘려냈다.
"소리, 떠나거라. 나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겁탈을 당해 기녀(妓女)로 전락한 홍등가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나다.
태어난 순간부터 어미에게 버려진 저주받은 목숨이 바로 나다.
허허...추악한 얼굴 때문에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원한의 세월을 보내온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돌아서는 금치괴왕의 늙은 어깨가 가느다랗게 경련을 일으켰다.
"너만큼은...내곁에 잡아두고 싶은 욕심에 추태를 보였구나.
허나 기실은 네가 필요했다. 아이들에겐 어머니가 필요한 거야."
"금치치..."
"허허... 헛된 꿈이었다. 가거라.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소리금의 눈가에 일순 이슬이 소리없이 맺혔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걸쳤다.
이어 그녀는 잠들어 있는 두 아기 오송학과 냉무강을 품속에 안아들었다.
"너희들은 불쌍하게 되었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을 아버지로 삼게 되었으니..!"
나직한 탄식성인데...
순간 금치괴왕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소리, 무슨 뜻이냐?"
소리금은 금치괴왕의 추악한 얼굴을 깊숙이 응시했다.
그녀의 입에서 곧 쌀쌀맞은 대꾸가 흘러나왔다.
"당신의 마누라가 생겼다는 뜻이예요."
"뭣?"
금치괴왕의 찢어진 눈이 일순 더욱 길게 찢어졌다.
소리금이 소리를 빽 질렀다.
"뭐하고 있어요? 내일 당장 떠나려면 준비할 게 많잖아요!"
* * *
그로부터 석달이 흘렀다.
이곳은 묘강(苗疆)의 어느 이름모를 원시림(原始林) 속,
때는 천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 무렵이다.
한 걸음 앞도 나아가기 힘든 수림(樹林) 속에서...
어느 한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공간이 생기며 한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소리금이었다.
그녀는 몰라보리만큼 얼굴이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입술은 메말라 터지고 안색은 병자처럼 창백한데...
이 석달의 기간이 그녀를 이토록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촤악!
그녀는 기계처럼 낫(鎌)을 휘둘러 밀림(密林) 속에 길을 뚫고 있었다.
그녀의 뒤,
검은 빛 마차가 괴물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마차(馬車)는 금치괴왕이 고안해 만든 특수마차였다.
사십 사 명의 아이와 식량을 실은 마차-
허나 마차를 끌던 여섯 마리의 말(馬)은 벌써 열흘 전에 독충(毒蟲)에 물려 모두 죽고 말았다.
지금 마차를 짐승처럼 끌고 있는 것은 바로 금치괴왕이었다.
금치괴왕도 소리금 못지 않게 지친 모습이었다.
비록 그가 일신에 고절한 무공(武功)을 지녔다고 하나,
여섯 마리의 말도 힘겹게 끄는 마차를 열흘 동안이나 움직였으니
어찌 인간인 이상 지치지 않겠는가.
"빌어먹을..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한단 말인가?"
금치괴왕은 두 눈에 광기(狂氣)를 번뜩이며 지친 독백을 흘려냈다.
그때였다.
앞서가던 소림금이 휘청하더니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아...이제 도저히 더 이상은 갈 수 없어요. 당신 혼자 가세요."
"일어서! 여기서 쓰러지면 끝장이다."
금치괴왕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소리금은 망연히 넋나간 듯한 시선을 허공에 던졌다.
벌써 몇번째 쓰러졌는지 모른다.
'허나...이젠 지쳤어. 이건...마치 지옥(地獄)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야.'
그때 금치괴왕이 성큼 다가오더니 거칠게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일으켜 세움과 동시 그는 그녀의 뺨을 호되게 갈겼는데..
그러나 소리금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초점 흐린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금치괴왕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릿하던 소리금의 두 눈에 반짝 광채같은 것이 스쳤다.
"저게...무엇이죠?"
희미한 음성과 함께 손을 들어 왼쪽 숲을 가리키는데..
'음?'
금치괴왕은 흠칫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순간 그의 만면에 엄청난 격동의 빛이 출렁거렸다.
"바.. 바로 저곳이다!"
오오...
울창한 수림의 틈새로 보이는 거대한 원형의 분지(盆地)!
그 둘레는 얼핏 보아도 십여리(十餘里)가 넘는 방대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광활한 벌판처럼 보이는데...
허나 이 광대한 분지는 마치 무덤처럼 원형으로 솟아있어
한 눈에도 특이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지니게 했다.
"오오.. 기어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 묵천오색마궁은 바로 저 밑에 있다!"
금치괴왕은 희열에 찬 신음성으로 부르짖었다.
그는 품안에서 빛바랜 지도(地圖) 한 장을 꺼내들더니 황급히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입구(入口)...입구를 찾아야 한다. 천리미로(千里迷路)를...!"
소리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니 주르르 흘러내렸다.
'결국...여기까지 왔구나...'
천리미로(千里迷路)의 입구를 찾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허나 천리미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금치괴왕은 완전히 당혹해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헤아릴 수 없는 지하통로(地下通路)가 얽혀 있었기 때문인데...
금치괴왕은 지도(地圖)를 보면서도 진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전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시진 가량이나 안으로 들어갔을까?
돌연 통로가 딱 막히며 둔탁한 석벽이 나타났다.
"으음...바로 이곳이군
. 철검백이 만로화약으로 폭파하여 오백 리 가량의 지하미로를 완전히 메꾸어 버렸다는 곳이.."
금치괴왕은 감개무량한 독백성을 흘려냈다.
소리금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들어가죠?"
"지도에 보면 여기서 오른쪽 밑바닥으로 지하수맥(地下水脈)이 흐르고 있다고 쓰여 있다.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간다."
"지하수맥이라면...물이 가득할 텐데 어떻게 아기들을?"
"물은 없다. 왜냐하면 육백년 전에 철검백이 수맥(水脈)을 막고
대신 흑옥지(黑獄地)의 독액이 흐르게 했으니까."
"아...!"
"그리고 지금은 흑옥지의 독액도 메말라 독기(毒氣)조차 사라진 지 오래일 것이다.
지하수맥은 말 그대로 텅빈 통로로 변해 있는 것이다."
금치괴왕은 두 눈에 광기를 번뜩이며 득의로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때 갑자기 소리금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잠깐! 저기를 보세요!"
금치괴왕은 흠칫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막힌 통로의 석벽 중앙부근,
뭔가 하얀 것이 박힌 것처럼 솟아나와 있었다.
"저건...손(手)?"
그렇다.
그것은 놀랍게도 뼈만 남은 사람의 손이었다.
어둠속에서 벽에 박혀 창백하게 빛나는 골수(骨手)...
그것은 실로 전율스러운 공포를 자아냈다.
금치괴왕의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놀라운 일이다. 철검백의 예상은 빗나갔다
. 십이수마초인(十二守魔超人)은 붕괴된 천리미로를 거의 다 뚫어 놓았다."
"굳이 지하수맥으로 갈 필요가 없어졌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금치괴왕은 석벽을 향해 노도같은 일장(一掌)을 쳐냈다.
우르르...
꽈과광!
굉음과 함께 석벽에 커다란 공간이 뻥 뚫렸다.
그 바람에 석벽에 박혀있던 골수(骨手)도 같이 떨어졌는데...
해골(骸骨)!
이미 부식할 대로 부식한 해골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금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해골은...십이수마초인 가운데 한 명이겠군요."
"그렇다. 아마 제황(帝皇)으로 선출했었다는 광염학(曠閻 )이라는 자의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거의 다 천리미로를 뚫어 놓고 마지막 순간에 쓰러져 버린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이예요."
"안으로 들어가자."
금치괴왕은 다시 마차를 이끌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가 밀림(密林)을 뚫기 위해 특수 고안한 이 마차는
폭이 매우 좁을 뿐 아니라 중간 부위가 굽혀지게도 되어 있었다.
때문에 마차는 구불구불한 지하미로를 조금도 거침없이 통과해 갔다.
덜컹...덜컹...
얼마나 안으로 더 들어갔을까?
서 너 개의 해골(骸骨)이 공간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그리고 금치괴왕과 소리금이 정확히 열 한 번째의 해골을 발견했을 때,
천리미로(千里迷路)는 드디어 거짓말처럼 끝이 났다.
"오오..."
"아.."
장관!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금치괴왕과 소리금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거의 넋을 잃었다.
아아...
까마득히 높은 허공은 무엇으로 막혔는지 온통 검은 빛이고..
그 아래로,
청(靑), 홍(紅), 백(白), 자(紫), 황(黃)의 오색(五色)으로 찬연히 빛나는
거대한 궁(宮)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
검은 하늘(墨天) 아래...
오색(五色)으로 찬연히 빛나는 궁(宮)!
묵천오색궁(墨天五色宮)-
드디어 그 전설같은 궁이 웅자를 드러낸 것이었다.
금치괴왕은 마치 광인(狂人)처럼 소리치며 궁(宮)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으핫핫핫...천하(天下)는 내 것이다! 으핫핫핫..."
슈우욱!
소리금은 그 뒷모습을 보며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기들이... 배고프겠구나."
그녀는 조용히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첫댓글 감사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