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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낙동강시대] 지류를 찾아서…<13>위천(하)
안계평야 살찌운 물줄기 찬라난 역사·문화 꽃 피웠다
의성 단밀면 단밀교에서 바라본 위천
위천은 청송, 영천, 군위 경계인 군위군 고로면에서 발원해 의흥`우보면을 지나 효령에서는 팔공산에서 발원한 남천과 합류해 군위읍`소보면을 거쳐 의성 땅인 비안면 옥연리로 흘러든다. 이 물길은 다시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에서 발원해 가음`금성`봉양(도리원)을 거쳐온 쌍계천과 비안면 쌍계리에서 합류한 후 안계평야를 지나 상주시 중동면 새띠마을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삼산이수의 고장
의성은 위천과 낙동강이 접하는 이수(二水)와 보현지맥과 팔공지맥, 문수지맥과 접하는 삼산(三山)이 어우러진 고장이다. 청송, 영천의 경계지점인 석심산에서 시작되는 팔공지맥은 군위와 대구, 선산, 구미를 거쳐 청화산, 만경산으로 굽이쳐 돌아오고, 포항 죽장 가시령에서 시작하는 보현지맥은 구무산에서 의성으로 들어와 천재봉, 삼표당, 문암산, 비봉산을 거쳐 위천과 낙동강의 합수점으로 평온하게 자리 잡았다. 봉화 문수산에서 시작된 문수지맥은 영주, 안동을 거쳐 의성과 경계인 예천군 삼강 인근에서 멈춘다. 그래서 의성은 예부터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라 한다.
위천은 군위를 지나면서 비안면 옥연리에서 절경을 형성하면서 북으로 다시 흘러들면서 풍족한 물을 공급해 옛 선조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장소였다. 비안면 장춘리 남쪽 절벽에는 검암(儉岩)이라는 글자를 새겨져 ‘사치하면 이지러지기 쉽고 검소하면 기울어지지 않는다. 앉은 자, 가는 자, 이 암명을 볼지어다’라는 글귀가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신작로를 내면서 허물어졌다고 전해온다. 비안면 동`서부리를 휘돌아 지나면서 뒷산인 성황산과 맞물린 비안읍치(比安邑治)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위천은 또 용천리를 지나면서 언덕마다 수 많은 고인돌 및 성혈이 분포돼 있어 일찌기 농경과 수렵을 영위해 온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안계평야를 살찌우다
위천은 의성 비안면을 지나면서 유역에 기름진 평야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안계평야다. 위천은 경북의 3대 평야로 꼽히는 안계평야에 풍부한 농업용수를 공급해 최적의 기후조건 등으로 ‘의로운쌀’과 ‘황토쌀’ 등 의성의 대표적인 브랜드쌀을 생산하고 있다. 안계평야는 옛 삼한시대 때부터 곡창지대로 유명하다. 그 시대에 대표적인 수리시설인 ‘상주 공검지’,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의성 대제지’가 이 시기에 조성된 수리시설이었다.
지금 대제지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안계 용기리 앞에는 ‘대제지유허비’가 남아 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대제지의 면적은 30㏊로, 제방 길이만 1㎞가 넘었다고 한다. 옛날 사로국이 조문국(삼한시대 의성지역의 부족국가)을 범한 것은 금과 쌀의 확보를 위한 것으로, 안계평야의 넓은 들판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확보하고 조령과 이화령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훗날 신라가 조문국을 병합한 이후에도 아시촌(지금의 안계)에 소경을 둔 것은 안계평야의 전략적 특성과 아울러 넓은 들에서 생산되는 곡식 등의 중요성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위천은 삼한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안계평야와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의성의 역사와 문화를 담다
위천 주변은 옛 선조들의 찬란한 역사문화유산을 남기는 데 큰 몫을 했다. 비안 산제리의 화장산성은 만장사 석조여래좌상과 임진왜란 때 비안 관아의 주요 공부를 이 산성에 옮기고 피란민과 의병이 결사항전으로 지켜 낸 곳으로, 둘레는 약 4㎞이다. 지방유형문화제 제56호인 자락동석조여래좌상과 자락리 삼층석탑, 장춘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수 많은 폐사지가 문헌기록에 나타나 있다. 또 위천 주변에는 지방문화재이며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인 비안향교가 자리 잡고 있어 유교문화와 불교문화가 함께 융성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팔공산에서 발원한 위천이 연면히 흘러 안계 교촌에 이르러 선돌의 층암절벽을 형성한 부흥대는 사철 푸른 강물과 함께 절경을 이뤄 지역 향사들이 백일장을 열고, 강태공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명소였다. 부흥대는 거대한 바위가 남으로 뻗었는데 강 건너편 마을의 처녀들 바람을 재운다고 절반을 파괴했다고 하니, 지금으로 봐서는 경관을 파괴한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애석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