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전체에서 반복되어 설하여지고 있는 사념처수행법이 고행과 어떻게 다른가를 설하여 준 경이 바로 이 자기학대 경입니다. 경전내용은 파란색, 저의 숙고는 검정색으로 구분하여 표시하였습니다.
자기학대 경(A4:198)
1.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남을 학대하여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고 또 남도 학대하여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지 않아서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고 또 남도 학대하지 않아서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도 학대하지 않고 남도 학대하지 않으며 지금 바로 여기서 갈증이 풀리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안으로 고행의 오염원들이 없어 시원해지면 선정과 도와 과와 열반의 행복을 체득하고 스스로 고결하게 되어 머문다.“
2.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인간은 자신을 학대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나체수행자이다. 그는 세상살이에서 행하는 일반적인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음식을 먹은 뒤 손을 핥아서 치우고, 오십시오 하고 불러서 준 음식은 받지 않고, 서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준 음식은 받지 않으며, 가져온 음식을 받지 않고 내몫으로 지칭된 것을 받지 않으며, 초청하여 주는 음식을 받지 않는다. 그는 그릇에서 떠 주는 음식, 항아리에서 떠주는 음식. 문지방을 넘어서 주는 것, 막대기를 넘어서 주는 것, 절구공이를 넘어서 주는 것, 두 사람이 먹고 있을 때 주는 것, 임신부가 주는 것,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가 주는 것, 성교를 하는 여자가 주는 것, 공동체에서 주는 것, 개가 옆에서 보는 것, 나방이 모여드는 것, 생선과 고기,술, 과즙주, 발효주를 받지 않는다. 그는 한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한 덩이의 음식만 먹는 자이다. 두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두 덩이의 음식만 먹는 자이다. 한 닷띠의 음식만 구걸하고, 두 닷띠의 음식만 구걸하고,....일곱닷띠의 음식만 구걸하며, 하루에 한 번만, 이틀에 한 번만...이런 식으로 보름에 한 번만 방편으로 음식을 먹으며 산다.
그는 채소를 먹고, 수수, 니바라 쌀, 가죽 부스러기, 수초, 왕겨, 뜨물, 깻가루, 풀, 소똥을 먹으며,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살고 떨어진 열매를 먹는다.
그는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마포로 된 거친 옷을 입고, 시체를 싸맨 헝겊으로 만든 옷을 입고, 넝마로 만든 옷을 입고, 나무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영양가죽을 입고, 영양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입고, 꾸사풀로 만든 옷을 입고, 나무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판자로 만든 옷을 입고, 인간의 머리털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동물의 꼬리털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올빼미털로 만든 옷을 입는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수행에 몰두하고, 자리에 앉지 않고 서있으며, 쪼그리고 앉고 쪼그리고 앉는 수행에 몰입하고 가시로 된 침상에 머물고, 가시로 된 침상에서 잠자며, 하루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데 몰두하며 지낸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몸을 괴롭히고 자학하는데 몰두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인간은 자신을 학대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한다.“
자기자신에 대한 통찰과는 상관이 없는 어떠한 의례나 행위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여러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시던 시대의 여러가지 수행법들을 예로 들고 있는데 하나같이 자신의 내면과는 상관없는 문제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고행을 한다고 자신의 내면의 번뇌와 탐진치의 뿌리가 뽑혀지지 않는 것임을 고타마 싯다르타 자신이 직접 죽음직전에 이를 정도의 고행을 통하여 절감하였기에 이러한 가르침이 설해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3.“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남을 학대하여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양을 도살하고 , 돼지를 도살하고, 새를 잡고, 사슴을 죽이고,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죽이고, 도둑이고, 도둑을 죽이는 집행관이고, 감옥지기이거나 혹은 다른 잔인한 직업을 가진 자들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남을 학대하여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한다."
이렇게 남을 학대하는 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살생의 계에 비추어 사고한다면 자신을 학대하는 것도 남을 학대하는 것에 포함된다 하겠습니다.
자신을 살려나가는 행과 거리가 먼 행위에 탐닉하는 모든 것이 자신을 학대하고 남을 학대하는 행위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감각의 만족을 추구하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인듯이 그것에 몰두하는 현대인들의 내적인 공허감은 바로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인줄도 모르고 중독되어 있는 데에서 발생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자신을 학대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고 남도 학대하여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이거나 큰 재력을 가진 바라문이다. 그는 도시의 동쪽에 새로운 사당을 짓게 하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거친 사슴 가죽을 입고 버터와 기름을 몸에 바르고 사슴뿔로 등을 긁고 그의 큰 왕비와 왕실의 바라문 제관과 함께 사당으로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맨땅에 짚을 깔고서 앉는다. 같은 색깔의 송아지를 가진 한 마리의 암소의 첫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을 왕이 먹는다. 두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을 왕비가 먹는다. 세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을 왕실의 바라문 제관이 먹는다. 네 번째 젖꼭지에서 생긴 젖은 불에 헌식한다. 나머지는 송아지가 먹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사지내기 위해서 이만큼의 황소들을 잡아라. 제사지내기 위해서 이만큼의 소들을 잡아라. 제사지내기 위해서 이만큼의 새끼 낳지 않은 암소들을 잡아라. 제사지내기 위해서 이만큼의 새끼 낳지 않은 암소들을 잡아라. 제사지내기 위해서 이만큼의 염소들을 잡아라. 제사지내기 위해서 이만큼의 양들을 잡아라. 제사기둥을 위해서 이만큼의 나무를 베어라. 제사풀로 쓰기 위해서 이만큼의 다르바 풀을 베어라.’라고 그러면 그의 하인들이나 전령들이나 일꾼들은 형벌에 떨고 두려움에 떨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이러한 여러 준비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여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고 남도 학대하여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한다.“
자신을 살려나가는 것과는 상관없는 행위에 인간을 몰아넣고 사용한다면 그것은 학대라는 말외에 그무엇도 아닌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대규모화하여 인간을 노예화하고 어떤 목적에 로보트처럼 이용되게 만든다면 그것은 남을 학대하는 것의 확대된 모습이 되겠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정치나 종교의 대규모의례에 인간이 부속품처럼 사용된 것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권력이라는 것의 속성이 탐진치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니 자신의 탐진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없는 다른 인간들을 이용하는 탐진치의 확대재생산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되풀이되고 있음은 인간들의 갈망심이 그대로인 까닭입니다.
5.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자신을 학대하지 않아서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고 남도 학대하지 않아서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남을 학대하지 않으며 바로 지금여기에서 갈증이 풀리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안으로 고행의 오염원들이 없어 시원해지며 선정과 도와 과와 열반의 행복을 체득하고 스스로 고결하게 되어 머무는가?”
6. “비구들이여, 여기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아라한(應供)이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이며, 영지와 실천이 구족한 분(明行足)이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분(世間解)이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며, 깨달은 분(佛)이며, 세존(世尊)이다.
그는 ....이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다. 그는 법을 설한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을 구족한 법을 설하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드러낸다.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는다. 그는 이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믿음을 가진다.“
이세상에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눈먼거북이의 일화로 설명해주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태어남속에 더하여 바른 법을 설해주는 선지식과의 만남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법을 듣고서 그 법에 믿음을 가진다함은 진실로 스스로를 학대하고 살지 않게 하는 기본 바탕임을 생각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7. “그는 이런 믿음을 구족하여 이렇게 숙고한다. ‘재가의 삶이란 갇혀 있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소라고동처럼 빛나는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라고. 그는 나중에 재산이 적건 많건 간에 모두 다 버리고, 일가친척도 적건 많건 간에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
머리와 수염을 깎는 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세상의 것을 버린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출가는 나의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나는 나의 세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어떤 것을 버리고 있는 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재가나 출가나 별 구분이 없는 오늘날의 세태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정한 출가의 의미를 새겨보고 내안의 세상을 떠나 출가하는 나의 모습을 경전에 비추어 매일매일 돌아보고 사고하게 됩니다.
8.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비구들의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 그것과 더불어 생활한다. 그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읜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는다. 양심이 있고 동정심이 있으며 일체 생명의 이익을 위하고 연민하며 머문다. 그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읜다. 준 것만을 받고 준 것만을 받으려고 하며 스스로 훔치지 않아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머문다. 그는 금욕적이지 못한 삶을 버리고 청정범행을 닦는다. 독신자가 되어 성행위의 저속함을 멀리 여읜다.
그는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멀리 여읜다. 그는 진실을 말하며 진실에 부합하고 굳건하고 믿음직하여 세상을 속이지 않는다. 그는 중상모략하는 말을 버리고 중상모략하는 말을 멀리 여읜다. 여기서 듣고서 이들을 이간하려고 저기서 말하지 않는다. 저기서 듣고서 저들을 이간하려고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와 같이 이간된 자들을 합치고 우정을 장려하며 화합을 좋아하고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즐기며 화합하게 하는 말을 한다. 그는 욕하는 말을 버리고 욕하는 말을 멀리 여읜다. 그는 유순하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가슴에 와 닿고 예의바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그런 말을 한다. 그는 잡담을 버리고 잡담을 멀리 여읜다. 그는 시기에 맞는 말을 하고 사실을 말하고 이익이 있는 것을 말하고 법을 말하고 율을 말하며, 가슴에 담아둘만한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하고 비유와 함께 하고 구분하여 정의를 내리고 이익을 줄 수 있는 말을 시의적절하게 말한다.“
9. “그는 씨앗류와 초목류을 손상시키는 것을 멀리 여읜다. 하루 한끼만 먹는다. 그는 밤에 먹은 것을 여의고 때아닌때에 먹는 것을 멀리 여읜다. 춤, 노래, 음악, 연극을 관람하는 것을 멀리 여읜다. 화환을 두르고 향과 화장품을 바르고 장신구로 꾸미는 것을 멀리 여읜다. 높고 큰 침상을 멀리 여읜다. 금과 은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요리하지 않은 날곡식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생고기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여자나 동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하인과 하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염소와 양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닭과 돼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코끼리, 소, 말 암말을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농토나 토지를 받는 것을 멀리 여읜다. 심부름꾼이나 전령으로 가는 것을 멀리 여읜다. 사고파는 것을 멀리 여읜다. 저울을 속이고 금속을 속이고 치수를 속이는 것을 멀리 여읜다. 악용하고 속이고 횡령하고 사기하는 것을 멀리 여읜다. 상해, 살해, 포박, 약탈, 노략질, 폭력을 멀리 여읜다.”
10. “그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위장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한다. 그는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필수품을 몸에 지니고 간다. 예를 들면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자기 양 날개를 짐으로 하여 날아가는 것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는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위장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으로 만족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필수품을 몸에 지니고 간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구족하여 안으로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복을 경험한다.”
필수품의 수용과 만족은 소욕지족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몸을 보호할 정도의 옷과 위장을 지탱할 정도의 음식에 만족한다 함은 소유물에 대한 취착을 갖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확대해석하여 필요한 것조차 모두 버리고 지니지 않는 거지생활을 하는 무소유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몸뚱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 그리고 자신의 현재 있는 상황에서 꼭 필요한 것만을 가지는 것으로 스스로 정리를 하게 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건을 소유하는데 꼭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취착으로 자아를 더 돈독히 하는데 빠지지 말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물건이라는 것이 넘치고 넘쳐나는 오늘날을 살면서 물건을 지니고 살지 않음을 의미함보다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에 대하여 중독되지 않는 마음의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도처에 소유를 부추기고 감각적욕망을 충족시키라 권유하는 광고가 넘쳐흐릅니다.
많은것, 비싼 것, 화려한 것, 남이 갖지 않은 것을 내것으로 지니면 그것이 마치 나의 가치를 올려주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광고와 문구가 감각기관들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그러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기 위해서는 무조건 물건을 갖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무소유보다 스스로 선택하여 취하고 버림에 매이지 않는 내면의 자유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속이 정리되고 가라앉으면 외부의 물건이나 물질을 취하고자 하는 욕망도 자동적으로 정리되는 것이기에 이것은 내면의 수행에 더 의미를 두고 숙고해야할 문제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11. “그는 눈으로 형상을 봄에 그 표상(全體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 그 세세한 부분상(細相)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눈의 기능(眼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 올 것이다. 따라서 그는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눈의 감각기능을 잘 방호하고,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한다.
귀로 소리를 들음에,,.. 코로 냄새를 맡음에...혀로 맛을 봄에...몸으로 감촉을 느낌에....마노(意)로 법을 지각함에 그 표상을 취하지 않으며, 그 세세한 부분상을 취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의 마노의 기능(意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 올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방호하고 마노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한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구족하여 안으로 더럽혀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한다. “
형상을 봄에 전체상을 취하지도 않고 세세함을 취하지도 않는다 함은 대상을 보고 그 전체모습에 대하여서도, 자세히보고 느낀 어떤 이미지에 대하여서도 이끌려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면 사념처수행법에서 개념지어 덩어리진 모습에 대하여도, 해체하여 나누어진 모습에 대하여도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보는 것이다. 대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취할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소(牛)라는 대상에 대하여도 , 부분으로 나누어져서 고기라는 인식이 일어난 대상에 대하여도 나라고 취할 것이 없음을 알고 본다는 것-즉 무상고무아의 인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각기능의 단속에 있어서도 무상고무아의 인식이 있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감각기능을 단속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숙고하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12. “그는 나아갈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앞을 볼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걸으면서 서면서 앉으면서 잠들면서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사념처수행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봄이 있기 위하여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의식을 항상 챙기고 있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수관법에서 생각하면 나아가고 물러날때 여기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이 누구인가?
앞을 보는 것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어서 하고 있는 것인가 ?
먹고 있는 것, 씹고 있는 것이 나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몸수관법에서 설명한 32가지 부위의 해체를 통하거나 공동묘지 수관을 통한 몸의 해체를 통하여 몸이라는 것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확인한 상태에서-무상고무아의 상태에서 자신의 모든 행위 , 일상의 행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무상고무아의 전제없이 자신의 행위만을 보게 되면 그저 행위하는 나를 보게 될 뿐 거기서 무상고무아의 확인은 할 수가 없기에 무의미한 행위에 대한 집중에 머무르고 말게 됩니다.
위의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라는 말입니다. 이미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추어 숲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는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문다.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악의의 오점을 제거하여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여 악의의 오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해태와 혼짐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이 없이 머문다. 광명상을 가져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문다.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문다.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 유익한 법들에 아무런 의문이 없어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느낌, 마음, 법의 관찰까지 넘어가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수관법에서 이미 자아없음을 또렷이 확인했다면 느낌은 몸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모든 느낌을 몸수관을 하면서 동시에 무상고무아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이 또렷해진 상태가 되면 느낌, 마음, 법은 저절로 확연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몸수관이 몸만 보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몸에서 느낌 마음 이 생겨남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도와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라고 몸수관법을 가르쳐 주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몸수관을 철저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느낌이나 마음 법수관으로 들어가면 명상주제를 잃게 된다고 청정도론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몸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확인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식이 있음을 상정하는 오류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14. “그는 마음의 오염원이고 통찰지를 무력하게 만드는 이들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여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제2선을 구족하여 머문다....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15.“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
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 ’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꿰뚫어 안다.“
이러한 사성제법이 수행의 실천도 없이 그저 머리만 굴려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처님법을 너무나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성제법이 말해지기까지 처음에 계목의 단속 , 감각기능의 방호,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이러한 과정 모두를 무상고무아를 전제로 하여 사념처법으로 하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의 결과에서 고집멸도의 사성제법이 설하여진 것인데 몸을 무시하고 생각만으로 고집멸도를 이룬다 함은 바로 외도의 수행으로 빠져드는 것이고 그 결과는 수천억겁 내세생생을 돌아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16. “비구들이여,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지 않아서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고 남도 학대하지 않아서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남을 학대하지 않으며 바로 지금여기에서 갈증이 풀리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안으로 고행의 오염원들이 없어 시원해지며 선정과 도와 과와 열반의 행복을 체득하고 스스로 고결하게 되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네 부류의 사람이 있다. “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다 함은 자신을 법다움에 바로 세워나간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것은 자아없음을 또렷이 확인하여 행으로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갈증이 풀리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선정과 도와 과와 열반의 행복을 체득한다 함이 자신을 그냥 놓아두어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바른 법에 귀기울이고 출가하는 행위에서부터 계의구족, 감각기능의 단속, 필수품의 만족,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등의 모든 수행을 무상고무아를 전제하여 사념처수행을 철저히 함으로서 자신안에서 자아없음을 또렷이 확인하는 것, 이러한 수행을 끊임없이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고행으로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고 그냥 놓아둔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탐진치의 족쇄에 뿌리깊이 묶여 있으니까요.
그 뿌리를 캐내 족쇄에서 해방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학대하지 않는 진정한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르게 알고 수행하는 것이 바로 '내법은 현실에서 확인되는 법'이요, '누구든지 와서 보라'고 가르치신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