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당나라로 12살의 어린 나이에 조기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 당시 아시아는 당이라는 선진 문명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최치원은 그 선진문화의 현장을 찾아가 급제한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857년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 호는 고운(孤雲). 그의 아버지는 견일(肩逸)이다. 최치원이 당으로 유학갈 때 아버지 견일은 "10년 동안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다잡았다. 고운은 당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 과거에 합격했다.
최고운이 급제한 빈공과는 외국인 유학생들에게만 실시하던 특수한 과거였다. 당시 빈공과에 합격한 신라 유학생은 820년부터 906년 사이에만 58명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봐서 당의 과거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다른 면모에서 당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점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가 빈공과에 합격한 후에도 생계는 가난의 연속이었고 그가 얻은 관직 또한 한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879년 화남절도사 고변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 고변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다가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을 황소가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상(床)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이 유명한 글을 쓴 보상으로 그는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된다.
그 뒤 고변이 직위에서 파면되고 885년 최고운은 신라로 귀국한다.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가 당서 열전에 최치원이 빠진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신라 유학생 최치원의 당나라 성공담은 당시로서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기록에 담지 않았거나, 그가 시중든 고변이란 자가 직위에서 파면됐기 때문이었건. 지금도 서구의 현지 유학을 해야 행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신라사회에서는 대제국을 이루고 로마에까지 교역한 당나라 유학파를 높이 쳐준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신라로 귀국한 뒤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귀국 후 10여년 동안 최치원은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친다. 그는 부성군(충남서산), 대산군(전북태인) 태수 등 손꼽히는 부자고을을 다스렸다. 894년 고운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리고 그 공으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위인 '아찬'에 임명된다. 그는 얼마 후 은거를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가야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이같은 결말은 최고운이 골품제도의 모순 속에 포부를 펼 수 없었고 시기와 비난 속에 소외와 좌절만 당했기 때문으로 사가들은 분석한다. 그러나 다른 견해로 당시 왕실과 민중을 움직이던 주류이념은 어디까지나 불교 사상이었으며 유학 지식층이 학습한 유교는 사회 개혁의 이념으로 실천될 만큼 대중적인 설득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최치원의 은둔을 유교 개혁 이념의 한계를 실감한 시대적 산물로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상소제도를 통해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많은 의견을 올렸다. 하지만 신라시대 또는 고려시대에는 이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신라시대에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렸던 것은 최치원이 대표적이며 고려시대에는 최승로의 시무28조가 유명하다. 상서장은 최치원이 894년 진성여왕에게 문란한 기강과 정치를 바로 잡고자 시무10조를 올렸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또는 고려 왕건이 장차 신라를 대신해 새로운 왕조를 열 것을 예견하고 왕건을 돕는 글을 올렸던 곳이라고도 한다.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물론 기록상으로는 삼국유사에 따라 취산진지촌(취산진지촌)의 최지백호(최지백호)이지만 이는 소급된 기록으로 보여져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27세에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 당 황제는 그를 사신 형식으로 신라에 보내게 된다. 귀국했을 때에는 신라의 하대로써 정치가 몹시 문란하여 그의 포부를 펼치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래서 그 문란한 정치를 바로 잡고자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려 받아들여지나 그 시행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중앙 정치무대를 떠나 지방관으로 돌아다니다 해인사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상서장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 처음으로 그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상서장은 조선후기인 1850년대에 최씨 문중에서 조상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최치원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이곳을 상서장으로 정한 것이다. 그 이유는 신라시대 왕궁인 반월성에서 가장 가깝다는 것 외에는 이곳이 최치원과 관련된 어떤 증거도 없을뿐더러 출토된 유물로 보아 이곳은 절터임이 밝혀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초석과 석등의 연화대석, 장대석 등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10조가 어떤 내용인지는 전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대체로 고려 초기의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28조와 비슷한 내용일 것으로 보는 경향이다. 즉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 사상을 모두 체득하고 있던 최치원이 후세 유학자들에게는 불교에 경도된 인물로 비치지만 신라하대의 혼란기에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과다한 불교행사로 인한 비용지출이나 백성들의 노역이나 세금 등에 관해서 비판하는 내용 등이 들어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태조 왕건에게 올린 글의 내용은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전에 전하고 있다.
태조가 흥기하였을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인물이므로 그가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임을 알았다. 이로 인해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문안 하였는데, 그 가운데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다.(鷄林黃葉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의 문인들 중에는 국초에 내조해 높은 관직에 이른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현종에 왕위에 있을 때 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연히 협찬하였으니 그의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교시를 내려 내사령을 추증했고, 14년 태평2년 임술에는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 최치원(崔致遠)전>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을 오늘날의 내남 일대인 사량부 사람으로 기록하였고 삼국유사에는 '최치원은 본피부(本皮部) 사람으로 적고 있다. 지금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족에 옛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로 보아서 낭산의 독서당이 고운의 고택지로 보인다. 그런데 경주 최씨의 근거지는 사량부에 해당하므로 그는 사량부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현재 내남면 일대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상서장에는 1970년에 지은 북향의 영정각에 고운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상서장 건물에는 상서장화수정기와 화수정 현판, 상서장 중건기, 상서장영적각중건기가 있으며 고려 현종 14년 최치원에게 내린 '문창후' 시호를 새긴 비가 서 있다.
<2014.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