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에 관한 시모음 21)
꽃과 사랑 /정연복
꽃이 피는가 했는데
어느새 지고 있다
피고 지는 일
한바탕의 꿈이다.
사람의 목숨도
꽃처럼 피고 지는 것
너도, 나도
언젠가 가고 없겠지.
어쩌면 세월은
이리도 바람같이 흘러갔을까
너와 나의 머리에
흰 서리 폴폴 내리네.
이제 얼마쯤 남았을
지상에서의 우리 생의 시간
알뜰히 사랑으로
물들여 가자.
부부 나무의 팔베개 /곽성숙
아내의 가는 팔로 남편의 머리 들어주는 일이
이토록 눈물 나는 일인가
부부 나무는 언제부터 계곡의 물소리
찻잎에 머물다 온 바람과
득음정* 가락에 열중했을까
산그늘에 잠긴 아랫마을 낮은 지붕들과
새들의 소풍 바라보는
지어미의 팔에 안긴 지아비는 평온하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눈길
남편의 목에 손 받치고 화석이 되어가는
지어미의 팔베개
내 깊은 곳에서
밤마다 한숨이 올라와도 억울하지 않겠다.
*득음정 : 보성, 행복학교에 있는 정자.
부부(夫婦) /김용두
애초에 나는
세상에 떨어진 행성이었다
나의 행로(行路)는 세상에 닿아 있었고
난 시간 여행자에 불과했다
내가 두고 온 우주를 그리워할 때
꿈에서 깨어났고
눈에서는 눈물이 났다
그때 당신은 내 머리맡에 있었고
우리는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내가 궤도를 향해 갈 때
당신은 보이지 않는 인력에 이끌려
내 주위를 도는 위성이 되었다
그때부터 인연의 끈으로 묶여
우리는 하나였다
비록 기억 속에서 멀어졌지만
당신과 나의 항로는 같다
부부 /박상현
나는 당신입니다
당신은 나입니다
함께 걸어가다 마주 보고
말없이 안아주는 당신과 나입니다
밤과 새벽 그 기나긴 터널 같은 시간 속을
눈물로 채워도
당신 내 가슴속에 눈물 되고
내 미소 당신 가슴에 꽃 한 송이 되길
일제히 한곳을 향해 바라보는
해바라기꽃입니다
저 높은 담장 말없이 오르는 담쟁이 넝쿨입니다
여린 손 내밀고 오르는 나팔꽃입니다
당신은 나의 손이 되고
나는 당신 발이 되고
당신은 나의 눈이 되고
나는 당신 귀 됩니다
당신과 나의 심장은 하나입니다
사랑한다는 건 당신 가슴속에 내가 자라고
사랑한다는 건 내 가슴속에 당신이 가득함입니다
나는 당신 그림자 모아 별빛 꽃잎에 한 점 한 점 새겨봅니다
당신 그림자에서도 당신 닮은 꽃향기 납니다
나는 당신 잠든 숨결 그 고요한 소리 모아 달빛에 실어 보냅니다
분꽃 닮은 당신 잠든 숨결 하얗게 하얗게 씻어
목련꽃 송이에 담아드릴게요
나는 당신의 꽃이 되고 나무 되어 당신 안에 있어요
당신은 내 안에 빛이 되고 숙명 되어 영원한 꿈이 됩니다
부부(2) /박외도
살아가면서
서로 동화되어 가는 거겠지
성격도 식성도 취미도
닮아 가는 게 부부런가
겨울 들어 벌써 세 번째
아내가 먼저 감기하고
남편이 뒤따라가길 세 번
병원과 약국을 돌며
감기약을 사다 바치다
남편마저 고뿔이다
함께 앓아
함께 먹는 알약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아니더라도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데
우리는 어찌
남필종부(男必從婦)인가
약을 먹다 피식 웃는다
부부는 서로 위하고
손잡아주고 끌어주며
가꾸고 다독이며
서로 보조를 맞추어 가는 거라는
통속적인 얘기 아니더라도
일평생 함께 걷는 반려자.
부부 /주명희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꼼꼼히 돌보는 사람
넓은 숲을 바라보는 사람
꽃씨를 가꾸는 사람
새로운 꽃씨를 흩뿌리는 사람
어두운 밤을 얘기하는 사람
밤하늘의 별을 노래하는 사람
혼자만의 고독을 즐기는 사람
끊임없이 조잘대는 사람
두 사람이 한 곳을 보고 걸어가네요.
너무나 다른 두 사람
사랑이란 우산아래
두 손 잡고 걸어 가네요.
부부 사랑 /허욱도
봄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에
어디 있나 찾으러 가는 길
누군가 저길 보라며 손짓한다.
땅 위에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야생화
울긋불긋 피어있는
진달래는 보고 탄성을 지르면서
나는 왜 몰랐을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너무 예뻐서 상큼해지는 마음
두고 가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눈에 가득 넣어오니
봄은
안 온 듯 그렇게 내 곁에 와 있다.
부 부 /김영애
흰 국화 같은 저녁이
둥글게 말린 어깨 위에 걸려 있다
얇은 손가락 사이를 비껴가는 성성한 머리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 比目처럼
평생을 함께했던 애틋한 마음이
서로 같은 고민을 안고
한 사람이 아프면
또 한 사람이 아파하며
세월을 익힌 시큼한 묵은지처럼
서로를 토닥이며 늙어가는
내 안에 또 다른 나
이제는 숨죽여 엿듣지 않아도
들리는 당신의 숨소리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면서도
한 곳을 바라보는
부부는 서로에게 특별한 선물이다.
부부학 개론 /조순자
남편이시여 아내시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피차 서로를 사랑하세요
꽃처럼 마주 보며
부드럽고 상냥하게 말할지언정
지배하려고 명령하지 마세요
시행착오를 겪을 때라도
노하여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말의 상처는 평생의 아픔이에요
한 몸이 된 부부는
하늘 연분으로 자녀를 받았나니
그들에게 빛이 되고 본이 되어주세요.
고마워요 /정연복
빛나던 청춘
우리 첫사랑 시절에는
장미 같던 당신이
이제 안개꽃을 많이 닮았네요
그분의 그림자로 살아온
나의 곁에서
당신이 남몰래 흘렸을
눈물은 또 얼마였을까.
세상의 한 모퉁이
잔잔한 배경으로 살아온
참 아름다운 당신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여보시게(부부) /정태중
여보시게
우리 한몸이 되어서
세상에 나왔으니
지금 이 만큼만
서로 마주보며 살아가세.
자네와 나
변하지않을 약속으로
거울을 보듯 닮은만큼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세.
언제인가 청춘이 가고
운명의 갈림길이 온다해도
서로 행복하였노라고
미소로 그 날을 맞이하세.
여보시게
우리가 보통의 인연인가
한 몸으로 태어나 세상을 함께 함이니
마주보는 원앙이라 불러보세.
부부 정의 (定義) /박광호
너와 나 합치면 하나
헤지면 반천상천하에
너 하나 나 하나
무슨 말 필요 할까
어떤 설명 필요 할까
눈빛만 보아도 마음을 알고
숨결만 들어도 아픔을 아는
너와 난 한 몸
주고 받는 마음의 길도 하나
삶의 길도 하나
먼저가고
나중 가는 시한은 달라도
가는 길은 언제나 함께 가던 길
인연6―부부 /김세영
수많은 불면의 그믐달을
식어버린 체액으로 담금질한 칼로
가슴살을 베는 싸움을 했다
삼십 년 간 몸을 섞어
샴쌍둥이처럼 붙은 부위들을 모두 자르고
피딱지가 엉겨 붙은 등짝을 맞대고
적의마저 지쳐서 잤다
아내가 소변을 보려고 일어나는 기척에 깼다
자르지 못한 인연의 끈을 당겨서
상처 난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잠든 척 했다
가슴살 뭉툭 잘려나간
상처의 출혈을
베개로 꾹꾹 눌려 지혈하고
아픔을 참았다
마주 댄 상처의 살이 돋아 다시 붙으면
오래전 운동회 때처럼 다시
이인삼각으로 걸어가야 할게다
백년전쟁의 종전 없는 휴전을 했다
살아온 세월만큼 깊은
늪에서는 진검승부도, 언제나
애꿎은 꽃대의 목만 자르고 말았다
꽃밭만 성글어 갔다.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