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702. 묵상글 (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 내 마음은 호수. 등 )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 마음은 호수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오늘은 내 마음은 호수라는 주제로 나눔을 할까 합니다.
내 마음은 호수여 라는 노래가 있잖습니까?
내 마음도 오늘 복음의 호수처럼 파도가 크게 일 수 있고,
그러던 내 마음이 아주 고요해질 수도 있지요.
어떤 때 우리는 한마디 말에 마음이 요동칠 때도 있고,
좋지 않은 일이 생겨 마음이 몹시 불안할 때도 있지요.
이것이 외인성 마음의 동요라면
내인성 마음의 동요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욕망이 들끓습니다.
어떤 때는 주장이 아우성칩니다.
어떤 때는 분노가 가득합니다.
어떤 때는 걱정이 가득합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 안에서 요동칠 때 적절한 프란치스코의 권고가 있습니다.
<악습을 몰아내는 덕>의 일부분입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걱정도 방황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하듯 동요를 잠재우는 데는 덕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덕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잠재웁니다.
인내와 겸손의 덕은 분노와 흥분을 몰아내고 잠재웁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덕을 얘기하다가 고요와 묵상도 얘기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동요는 잠재우고 고요는 얻는 것입니다.
이때의 묵상은 오늘 주님께서 파도를 잠재우는 것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기도는 ‘잠잠해지고 고요해져라!’라고 주님께서
내 마음의 파도들을 꾸짖으시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사람이 비가 내리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강으로 투신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방관했습니다.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또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냐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이 여인은 강으로 투신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이 사람은 큰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여인은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투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후회가 밀려옵니다. 만약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말렸다면 이런 기억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도덕성과 인간성이 결여된 자기의 무관심이 이제 자기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카뮈의 소설 내용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대형 참사를 겪은 당사자는 큰 트라우마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단순히 그때의 사건 그 자체 때문일 때도 있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기가 하지 않았던 행동에 대한 후회가 아픔으로 자리 잡게 되어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이렇듯 자기 기억을 만드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끔찍한 기억을 간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책임지는 것, 나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했습니다. 그 누구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나와 상관있으며 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런 관계 안에 살아갈 때, 지금 사는 이 세상에 이미 온 하느님 나라가 완성 되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완벽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계속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반대편에 서려고만 합니다. 그때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처럼 외면하신다면 어떨까요? 다행스러운 것은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외면하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약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보았던 많은 기적과 말씀에서 믿음을 굳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겁을 내고 울부짖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한 우리의 모습을 제자들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임에도 당신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면하지 않는 사랑을 우리도 실천해야 함을 당신이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무관심한 모습이 아닌,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보호 아래 영원히 머물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기회는 노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문을 밀어 넘어뜨릴 때 모습을 드러낸다(카일 챈들러).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앞 장면>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배에 오르시어 동행하십니다.
사실, 배는 항구에 메여 있을 때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항구에 가만히 정박해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항해하라고 만들어졌습니다. 항해하면 당연히 풍랑을 만나고 표류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공동체)라는 ‘배’, “가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런데 ‘배’ 안에 그분이 함께 계시는데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세시풍랑에 배가 휘청거릴 때도 있고, 방향을 잃고 헤맬 때도 있고, 위험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킬 수 있으시지만, 그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계십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가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마치 물고기들이 맘껏 물속을 헤험쳐 다니면서도 물 밖에 나와 숨을 깔딱거리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헤험칠 수 있었음은 물이 있는 까닭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새들이 맘껏 하늘을 날다가도 새장에 갇혀서야 하늘이 있어서 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되듯이, 그렇게 우리는 풍랑을 맞고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키잡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결이 들이치고 배가 흔들려도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그분이 아니라 나 자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야 할 이는 그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분이 함께 계심에도 두려워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키잡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결코 겁낼 일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수한 의탁과 신뢰입니다. 곧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을 의탁하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그분께서는 배가 하늘항구에 닿기까지 우리를 이끄시고 동반하십니다. 단지 동반하실 뿐만 아니라 배를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주무셔도, 깨어 계셔도 우리의 키잡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주님!
당신은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시지만,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고통과 수난을 몸소 겪으시지만,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죽임당하지만,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시는 분
잠들어 계서도 깨어 계서도 저의 키잡이이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안할수록 더 큰 믿음이 필요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고 깊게 만납니다.
풍랑이 이는 호수에서 같은 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섭지 않고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청했다는 것입니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25.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수많은 폭풍우 속, 시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주님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십시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당신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웠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으면서도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표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입니다. 우리를 악의 유혹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또한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자매님이 운전 중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때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너는 누구냐?” 그때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의 아내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누구의 아내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누구의 엄마인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그러자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성당에 다니는 신자입니다. 교무금과 헌금도 잘 내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합니다. 주일미사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나는 네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냐?” 문득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생물학적으로 ‘종속과목강문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포유류이고, 포유류 중에서도 영장류입니다. 지금의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한 대답은 못 됩니다. 사회학적으로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서울대교구의 사제입니다. 지금은 댈러스 교구로 파견되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사목하는 사제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한 대답은 못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은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입니까?’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당신의 넘치는 자애에 힘입어, 당신 집으로 들어가, 경외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 경배하나이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시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을까요? 하느님의 아드님인 것을 믿었을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는 데는 3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야 했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두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했고, 성령이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물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아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용서를 아는데, 용서하기란 쉽지 않고, 사랑을 아는데 사랑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안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실제로 안아 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길과 우리의 길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성체 조배실에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마음과 생활이 그분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호주머니에서 꺼내는 부적 같은 존재가 아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삶에 다가오는 고난을 예수님으로 건너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고난이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고난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냐고요? 만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그분을 만나면 내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만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찾아 나서십시오. 예수님을 만나야 만이 사랑도, 용서도, 이해도, 치유도 가능합니다. 만나면 내 마음속의 바람도, 호수같이 깊고 어두웠던 상처도 잠잠해지고 고요해질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말입니다.
---------
각오하세요.
친해지고 싶으세요? 각오하세요.
마음을 나누고 싶으세요? 각오하세요.
튼튼한 관계를 원하시나요? 각오하세요.
사랑하기를 바라시나요? 각오하세요.
무엇을 각오해야 할까요?
우리가 각오해야 하는 것은 바로 ‘상처’입니다.
친해지고 싶고,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상처받을 각오 먼저 하세요.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친해지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서로가 서로에게 맞춰야만 가능합니다.
내 모습이 깎여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각오하세요. 상처받을 각오요.
그럼, 그대는 이제 따뜻할 수 있고 누군가를 품어줄 준비가 된 것입니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신
“홀로와 더불어”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왜관수도원과 인연이 깊은, 이제는 고인인 된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시인이 구상입니다. 얼마나 많은 분들과 교류한 삶인지 시인 구상 추모문집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추모문집 제목이 “홀로와 더불어”입니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삶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교황님이 특히 강조하는바가 더불어의 삶입니다. 빨리가려면 홀로가고 멀리가려면 더불어 가야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마침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더불어의 인간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남의 장점을 키워주면 그 장점은 내것이 된다. 남의 단점을 조장하면 그것 역시 내것이 된다.”<다산>
“군자는 남의 장점을 키워주고 단점은 막아준다.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논어>
이래서 더불어의 공동생활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받는 상처보다는 공동체로부터 받는 은혜와 고마움이 백배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오늘 복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홀로와 더불어,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 중심의 더불어 제자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하루이틀 따름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을 따르는 여정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서 배는 공동체를, 배안에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는 제자들의 한몸의 운명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한폭의 살아 있는 그림같습니다.
배가 떠나자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는 위기상황을 맞습니다. 그대로 인생 항해 여정중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세상 바다를 인생항해여정중 거센 풍랑에 좌초되거나 파선 조난당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거센 풍랑중에도 아랑곳 없이 예수님은 숙면을 취하고 계시니 주님의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 때문에 겁에 질린 제자들의 이구동성의 기도입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게 되었으니 살려 달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에 계신 주님을 향한 간청입니다. 아주 예전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노신부님을 문병했을 때 신부님은 끊임없이 한 말마디를 되뇌이고 있길래 물었을 때 간병하던 자매의 말이 생각납니다. “날살려줘!”라는 말마디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노신부님은 끊임없이 “날살려줘, 날살려줘...”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은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말씀하시며,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아주 고요해졌다 합니다. 호수의 풍랑은 물론 제자들의 마음의 풍랑도 잠잠해졌을 것입니다. 결국은 제자들의 믿음 약함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새삼 우리 인생 항해 여정은 더불어의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주님의 질책과 더불어 꼭 기억해야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서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환대하는 예수성심상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I AM)’는 바로 탈출기에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 이름입니다. 여기에 보어를 붙이면 주님의 자비로운 정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바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우리를 위해 있는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놀라워하며 쏟아낸 말은 은연중 예수님이 하느님같은 존재임을 들어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로 우리 공동체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은 하느님같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성구도 예수님이 하느님같은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애당초 타고난 좋은 믿음은 없습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여정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면서 믿음도 날로 성장 성숙해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아마 이런 예수님의 풍랑을 가라앉히셨던 체험을 제자들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며 믿음의 성장에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중심의 더불어 믿음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와 같이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입니다. 회개란 삶의 중심인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자, 공동체의 중심 자리에 생명과 빛의 주님을, 자비와 지혜의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다음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은 더불어 믿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의 분발과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느냐?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 너희는 돌아오지 않았다....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삶의 중심에 맞이하고 살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삼 우리의 더불어의 믿음의 여정은 동시에 회개의 여정과 함께감을 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날로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공동전례가 시스템화된 우리 수도원의 일과표는 얼마나 고마운지요!
역시 기도도, 회개도, 믿음도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끊임없이 공동전례수행에 충실함으로 우리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은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더불어 믿음의 인생 항해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주님, 당신 정의로 저를 인도하소서.”(시편5,9ㄱ)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자연계 세력들의 주인
배를 몰려는 제자들의 노력은 보란 듯이 실패했습니다. 호수는 그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부으려고 했고, 파도는 금방이라도 그들을 삼킬 기세였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은 그들을 거슬러 공모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겁에 질려 우
주의 통치자요 자연계 세력들의 주인이신, 세상의 키잡이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그분께, 풍랑을 가라앉혀 위험을 사라지게 하시어 자신들을 절망에서 구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맨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고요 속에 계신 하느님 안에서 이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표상과 형상을 여의고 고요해져야 할 것입니다. 실로, 그러한 사람은 하느님께 성실을 다해야 할 것이고,그 무엇에도 기뻐하거나 놀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 하고 말씀하시고, 몸소 그 일을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한 덩이의 돌을 옮기라고 명명하고, 자기도 똑같은 한 덩이의 돌을 옮길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는 나에게 천 개의 돌을 옮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백 파운드를 옮기라고 말하고, 자기도 똑같은 무게를 옮길 마음을 먹고 있다면, 그는 천 파운드를 옮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일을 몸소 수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사람은 무슨 일에서든 그분을 따라야지,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안에서만 둥지를 틀게 하십시오. 그러면 만물이 곁에 있게 될 것입니다.(195)
----------------------------------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창조계에 대한 참된 사랑은 창조계 전체를 똑같이 사랑하는 하느님처럼,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하찮은 벼룩일지라도, 그것이 하느님 안에 있다면, 그것은 천사보다 더 고귀하다. 하느님 안에서 만물은 평등하며, 하느님 자신이기도 하다.”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이다. “천사와 정신, 심지어 각다귀조차도 하느님 안에서 평등하다." 우리와 만물이 평등하다는 의식만이 진정한 친절과 평화를 이루어 낸다. “하늘과 땅에서 가장 큰 복은 평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라고 엑카르트는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평등을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 예컨대, 엑카르트는 한 마리의 개에게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 조차도 서로 사랑하는 법을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 나는 어제 이 수도원에 도착하여 무덤가에 핀 샐비어와 다른 식물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이곳에는 누군가의 다정한 벗이 있다, 한 뙈기의 땅이 그를 다정하게 맞이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라고.
벗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은 벗에게 속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랑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벗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할 것입니다. 한 마리의 개를 예로 들어 봅시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동물이기는 해도, 그 개는 주인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그 개는 주인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미워하고, 주인의 벗에게는 빈부를 따지지 않고 호의를 보입니다. 앞을 보지 못한 한 가난뱅이가 자의 주인을 좋아한다면, 그 개는 자신의 주인을 싫어하는 왕이나 황제보다 그 가난뱅이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만일 그 개가 자신의 주인에게 자신의 절반밖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나머지 절반을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8,26)
어떤 여행지든 첫 번째 갔던 여행의 순간이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 관한 기억도 마찬가집니다. 1986년 다른 순례자들과 함께 티베리아 호수를 배를 타고 유람할 때입니다. 정말이지 호수 중간쯤 왔을 때 오늘 복음의 상황과 흡사하게 거센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했고, 함께 승선했던 일행 중에서 딱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거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자 저 역시 겁도 나고 두렵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저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정말 복음의 제자들처럼 똑같이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8,25)라고 기도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두려움을 온몸으로 저도 체험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이한 점은 그토록 거센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파선할 위기 상황 속에서도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겪을 수많은 역경의 순간에도 그렇게 태평스럽게 주무시고 계실지 모릅니다. 인생도 자연의 리듬처럼 끊임없이 오고 가기에, 선과도 평온하게 지내야 하듯이 악과도 평온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신 듯싶습니다. 역풍이 불어닥칠 때도 순풍이 불어오는 때에도 똑같이 의연하고 태연하게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려고 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평온하심에 반해서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구해달라고 당신께 소리 지르며 매달리자,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8,26)고 말씀하시며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8,26)하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한 믿음으로 갈팡질팡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따끔한 일침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합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을 탓할 게 아니라, 그 풍랑을 평온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우리의 믿음 약함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큰 풍랑이 일어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의 작은 배가 파도에 휩쓸릴 것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도중 늘 미풍만이 불어오는 게 아니라 거센 바람도 불어오기 마련입니다. 이런 인생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늘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꿋꿋이 노를 저어나가길 바라십니다.
대부분 사람은 어려운 시련의 시기에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이런 위기의 때가 바로 인생이나 신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시련의 때 오히려 하느님을 떠나서 혼자 세상을 방황하다가 나락으로 추락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위험이 몰아치는 내 인생의 위기에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점입니다. 시련의 풍랑 중심에 위로와 능력의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때마다 겸손되이 저희의 믿음이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도록 합시다. 그분이 우리 영혼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거친 풍랑을 헤쳐 나갈 때 우리는 분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두네.” (복음환호성/시130,5)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 진정한 믿음으로 다가만하면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098730&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7-01 ㅣNo.173838
‘그때 호수에 큰 풍랑으로 배가 뒤덮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무신다. 제자들이 그분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다 죽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왜 겁들을? 믿음이 약한 자들아!”하고 꾸짖으셨다.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모두 고요해졌다. 그들은 서로를 보면서 놀라워하였다.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이렇게 복종을?”’
그렇다. 제자들은 풍랑이 두려웠을 것이다. 비록 그 숱한 세월에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던 그들인데도. 그러기에 예사 풍랑이 아님도 직감한다. ‘저 정도라면 반드시 피해야 한다.’라며 공포와 초조에 쌓였을 게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곤히 주무신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예수님을 뒤흔든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라앉는다고 판단했다. 허나 그것은 그들만의 생각이다. 바람을 다스리는 분임을 잊은 거다.
모든 것의 주관자이심을 생각도 못했으리라. 모르기에 두려워했고, 모르기에 믿음을 갖지 못했다. 그저 호들갑만 떨면서 안절부절 한다. 그 정도 오랜 기간 함께 한 사이라며, 어느 안전이라고 큰마음으로 시치미를 뚝 가질만한데도 말이다. 풍랑 속에서 겁을 먹고 헤매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평화를 찾는다. 그렇다. 교회를 좌지우지 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가 그토록 믿는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주관하시는 분 또한 그분이심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당신 뜻으로 이루어 주십사고,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매달려야만 한다. 이렇게 배가 뒤집히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워 호들갑을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혼란스러운 모습이 가끔은 밖으로 드러내 비춰진다. 풍랑이나 지진은 위기를 뜻하지만, 가끔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으로도 등장할 게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다는 것은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권능을 지닌 불길한 소굴로 여겨진 바다의 풍랑 속에 우왕좌왕하는 우리지만, 예수님은 반대로 배 안에서 태평하게 주무신다.
이렇게 우리는 자주 그분께서 침묵 중에 계신다고 여길 때가 많다. 왜냐면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따라 주지 않으니까. 이런 우리에게 그분께서는 분명히 이르신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 다만 우리 뜻이 아닌 당신 뜻에 따라 나서시기에, 단지 그 방식이 세속적인 우리 마음에 쑥 들지 않을 따름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사회가 혼란스럽고 흔들려도 말씀과 행동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지도자가 있으면 안심일 게다. 또한 교리를 왜곡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늘어도 권위로 버텨주시는 교회의 어른들이 계시면 두렵지 않으리라. 어디를 가도 믿음을 지켜 나갈 참 지혜가 필요한 시대이다. 예수님이 다녀가신 후, 그간 교회는 많은 위기를 이겨내고 본연의 모습을 지금껏 지켜 오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몸소 ‘교회의 선장’으로 우리를 늘 보살피시기 때문일 게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분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의 그 모진 풍랑을 제자들 앞에서 한 마디 말로 잠재우셨다. 풍랑을 잠재우시는 그분 손길을 가만히 그려 보며, 좁은 안목으로 바장이면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그분만을 향해 진정한 믿음으로 다가가면, 자나 깨나 그 어떤 풍랑을 이는 바람도 당장 잠자리라. 넉넉한 마음으로 그분만을 바라보며 늘 감사드리자.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아!”로 옮긴 그리스 말은 “믿음이 거의 없는 자들아!” 또는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아!”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산상 설교와 그 뒤에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지금 눈앞에 들이닥친 풍랑 앞에서 그들의 믿음은 한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한 제자들의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죽음의 공포로 내몰던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일지라도, 설령 거의 믿음이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을 찾는 우리의 목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죄와 악의 유혹이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어둠의 공포로 끌고 가는 순간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라는 오늘 복음의 묘사처럼, 그분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는 하느님, 고통이나 아픔과는 아무 상관 없으신 하느님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께서 풍랑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가 겪는 풍랑 속에서도 분명히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선택’입니다.
믿음이 거의 없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도움을 청하였던 것처럼,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을 찾는 선택을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하여야 할 것은 우리의 약한 믿음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찾는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린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신앙인인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멘.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바람과 호수는 자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바람이 강하게 불고 파도가 치면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배에 탔을 때는
호수가 잔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호수의 상태입니다.
지금은 잔잔하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긴장하고 있어도 막상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 상황에서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에 놀라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을 깨웠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도 자신들과 똑같이 그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깨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즉 구해달라는 그들의 요청은
믿음의 표현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모든 상황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랬다면 겁을 내는 일도
당황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믿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움의 상황에서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의지한다는 것이며
믿음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믿음이 부족할지라도
하느님께 청한다는 것은
이미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상황을 극복할 여지가 생깁니다.
기도 안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왜 이리 더디 오십니까? 대체 어디 계시니까?
신앙 안에서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시계 바늘과 인간의 시계 바늘의 속도가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시편 작가의 말씀처럼 주님께는 천년도 하루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기에 인간은 너무 조급하고 성급한 반면 주님 측의 반응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고 더딥니다.
그러나 그분의 시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갈릴래아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만나 허둥지둥 대던 제자들의 모습과 뱃고물을 배게삼아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높은 파도에 배가 기우뚱거리고 배 안에 물이 가득 차게 되자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상 사태를 맞아 제자들은 업무를 분담했을 것입니다.
한 제자는 더 세게 노를 젓고, 다른 제자는 배 안에 고민 물을 바가지로 퍼내고, 또 다른 제자는 배의 방향을 잡아주고...
다들 한번 살아보려고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순간, 제자들은 기가 차지도 않은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야단을 피우는 와중에 스승님께서 쿨쿨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강도 높은 전도 여행에,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에, 예수님의 육체는 과부하가 걸렸을 것입니다.
어디 앉기만 앉으면 꾸벅꾸벅 조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체험을 해봤기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기가 차지도 않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볼맨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조급한 제자들에 비해 예수님은 한없이 느긋하십니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제자 교육을 단단히 시키십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하늘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많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의 신원, 당신의 정체성을 말과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분께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즉시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돌아보니 저도 참 믿음이 약했습니다.
주님의 시간이 되면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실텐데,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왜 이리 더디 오시냐고, 대체 어디 계시냐고, 투덜거리고, 갖은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떨치고 좀 더 너그럽고 큰마음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안에 언제나 현존하신다는 진리, 그분께서 내 인생 여정에 굳건히 동반하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배에 타신 것은 그들이 위험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군중을 보내신 다음 그들만 옆에 있게 하시고 풍랑에 휩쓸리게 하셨다. 그들이 시련을 인내심 있게 견디도록, 어떠한 어려움이나 박해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신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24절)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완전한 파멸의 위험 속에 있는데도 당신 혼자만 잠이 드셨을까? 폭풍을 이겨나가기 위해 고도의 기술의 키잡이가 필요한 때 말이다.
배를 모는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허사였다. 그들은 겁에 질려 예수님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께 풍랑에 죽게 되었다고 구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26절)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잠잠해졌다.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분을 찾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분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배가 물속으로 잠길 것 같은 어려움에 부닥치자,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25절) 했을 때,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 그들은 결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신다. 당신의 교회라는 배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으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안전한 항해로 하늘 본향에 도달하도록 이끄신다. 그리스도께 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거룩한 키잡이가 있어야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목적지 항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27절) 예수님께서는 명령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재우셨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바로 그분이야말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믿었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라야 한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불안과 두려움, 무서움의 차이점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죽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결국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하시며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하느님 아드님으로 대하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살기 위해 무서운 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불안이 가라앉아야 사라지지 무서운 것들이 사라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안은 오직 믿음만으로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먼저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의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두려움이란 ‘무언가를 잃을 걱정’ 입니다.
그 무언가는 궁극적으로 생존과 관계됩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잃을까 봐 이성이 만들어내는 감정입니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대상은 ‘무서운 것들’입니다. 무서움은 우리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무엇입니다.
오늘 제자들에게는 거센 파도와 바람입니다. 이것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그 무서운 것들로 생명을 잃게 될까 하는 걱정입니다.
두려움은 이성적인 측면이고 무서움은 육체적인 측면입니다.
이성이 육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을 고쳐야 아래 것도 고쳐지는데 우리는 자칫 아래 것을 고치며 윗것도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면 두려움이 사라질까요? 돈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교통사고나 강도를 만날까 두렵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세상 모든 것들은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두려운 데 바람과 물과 싸우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려면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이성적인 차원이기에 마음 차원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마음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만약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불안’입니다.
불안은 믿음의 차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불안합니다.
불안은 ‘환경’에 대한 믿음입니다.
내가 죽을 위협에 있는 환경에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놓으면 1미터 밑에 땅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불안한 것입니다.
불안하니까 생명을 잃을까 봐 두렵고 생명을 잃게 할 것들이 무섭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려면 무서운 것들을 치우는 일이 아니라 불안함을 없애면 됩니다.
아기들은 불안합니다.
그러나 어머니 품에 안겨있으면 평화롭습니다.
어머니가 모든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을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평화를 가지면 아이는 착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부모의 부모싸움과 같은 것으로 아이들이 불안해지면 아이들은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상 것들에 집착하여 악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우리 불안을 없애주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하느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를 지으면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해집니다.
그러면 내 힘으로 두려운 것들과 맞서 싸웁니다.
믿음이 있다면 나의 창조자에게 청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하십니다.
믿음이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직도 그들을 보호해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심을 믿게 되자 두려움을 이깁니다.
그리고 세상의 위협은 더는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처럼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합시다.
아이들이 이성이 생기면 부모의 뜻을 따를 때만 부모로부터 보호받게 된다고 여깁니다.
아이들이 부모 돈을 훔치면 부모와 멀어집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무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하느님 마음이 기쁘다는 것을 느끼고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느낍니다.
그렇게 온 평화는 모든 두려움을 없애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움츠러들지 맙시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무신다고 해서 모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3-2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자연계도 복종시키시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믿음이 많이 부족했다는 제자들의 솔직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는데, 예수님의 명령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믿게 되었다.”>
여기서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을,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라는 예수님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제자들이 몸으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아직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따르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면 제자들도 함께 자면 됩니다.
물론 전부 다 잠을 잘 수는 없고, 몇 명은 노를 저어야 하지만, 어떻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하루 종일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시느라고(마태 8,16) 피곤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믿으셨음을 나타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어부 출신들이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으셨기 때문에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력을 믿으셨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못 믿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함’에 속한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해서 제자들의 상황을 모르셨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큰 풍랑과 파도가 일어난다는 것과
그 바람과 파도가 제자들을 죽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렇게 주무셨던 것인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고, 자기들이 죽게 되었다고 겁에 질렸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큰 풍랑과 파도 때문에 배가 침몰하고 사람들이 죽는 상황을 많이 겪었거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에 걸림돌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만 보면, 믿음이 좀 부족하긴 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말은 27절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라는 말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즉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도 없으면서 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 기도를 하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간에, 자기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시라고 재촉하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4,38; 루카 8,24).
<믿음도 없이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으니까 주님께 기도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라면 아예 기도하지 않겠지만,
혹시 기도하더라도 그것은 기도를 흉내 내는 것이고, 기도를 흉내 내는 것은 ‘빈말’입니다.
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기도하고 있다면 주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노를 저어라.”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서 고요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로 해석됩니다.
<바람과 호수를 내버려 두어도, 고생은 좀 하겠지만,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면, 굳이 일부러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만드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권능을 계시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났을 때, 주님께서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만 하셨고, 폭풍우 자체를 막아주지는 않으셨습니다(사도 27장).
4) 누구든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시련과 고난을 겪기도 하고 ‘뜻밖의 불행’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을 ‘사람의 힘’으로 물리치거나 극복할 수 있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만, 많은 경우가, 사실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사람의 힘’으로는 극복하기가 어렵고 ‘하느님의 힘’과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 ‘내 곁에’ 계셔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믿음을 잃고 주님을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 또는 ‘내가 흔들림 없이 주님 곁에’ 고요하게 머무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하는 기도.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배는 항구에 단단히 묶여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묶어 두려고 만든 게 아니지요. 배는 항해하기 위해, 즉 거센 풍랑을 넘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해 만든 겁니다. 배가 바다 위를 항해하는 과정에서 폭풍우를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폭풍우가 닥쳐오느냐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걱정하는 것보다, 어떻게 해야 그 폭풍우에 잘 대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게 훨씬 더 현명한 일일 겁니다. 다행히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은 삶이라는 배를 혼자 타고가지 않습니다. 우리를 보살피시고 지켜주시며,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일등 항해사’이자 ‘최고의 선장’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한 배를 타고 계십니다. 물론 그분께서 배 안에 타고 계신다고 해서 거센 풍랑이나 비바람이 우리를 피해가지는 않습니다. 배가 뒤집힐 정도로 크게 흔들릴 때도 있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우리 마음은 근심 걱정에 휘둘리지 않고 든든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지켜주신다’는 믿음 덕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은 그런 믿음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자, 자기들이 주님과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권능의 주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립니다. 눈 앞에서 자기들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풍랑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고통과 시련이 눈앞에 닥치면 하느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거나, 그분을 원망하며 멀어집니다. 또한 그 고통과 시련을 피하게 해주겠다는 세상과 사람의 힘에 기대고 의지해버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도를 바치는 일에 소홀해집니다.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믿지 않으니 그분께 자신을 철저히 맡겨드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 짧은 한 문장에서 제자들의 부족하고 약한 믿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주님과 한 배를 타고 있으면서도 그분과 ‘운명공동체’가 되지 못했던 그들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그분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고통과 시련, 더 나아가 죽음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순명의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난 여기서 당신과 함께 죽고 싶지 않으니 나 좀 살려내라’며 주님을 닥달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님을 믿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분께서 반드시 구해 주실거라고 믿는 건 아직 어린 아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 모두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리고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분 뜻에 따라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을 지닌 이들의 모습이지요. 그런 이들은 설령 죽더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과 섭리 안에 머무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뜻 안에 항구히 머무르기만 한다면, 결국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답을 찾을 겁니다.
----------------------------------------------------
240702.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인생의 길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삶
<2024.7.2> 아침을 여는 묵상 (렘 26:16~24절)
❝인생의 길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삶❞
❚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맡기신 각각의 일들을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 인생을 잘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16,24절).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레미야의 변론을 들은 고관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였기 때문에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라는 결론(16절)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에 대한 장로들의 변증이 있은 후에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가 죽임을 당하지 못하도록 그를 보호하였습니다(24절).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 훗날 유다가 멸망한 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총독으로 삼은 그다랴의 아버지입니다. 아히감의 아버지 사반은 서기관으로서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에 대제사장 히길야로부터 율법책을 받아 왕에게 전한 사람이며, 아히감은 22절에서 언급한 엘라단의 아들 악볼과 함께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왕하 22:12). 엘라단은 선지자 우리야의 죽음을 막지 못하였으나, 아히감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살려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가감 없이 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절망적인 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이 청종하지 않을 때에라도 자기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비단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겸손하게 사용해야 합니다(17~19절).
이어서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거기 모인 모든 백성에게 히스기야 통치 시대에 활동했던 미가에 관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사역했던 미가의 심판에 관한 메시지를 들은 히스기야의 반응을 예로 들어 말합니다. 모레셋 사람 미가 선지자 역시 시온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멸망에 대해 선포했습니다(미 3:12). 히스기야는 미가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를 여호와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미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재앙에 대한 뜻을 돌이켜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도 생각을 바꾸시고 유다에 내리려 하셨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예레미야를 해치는 무서운 악을 행한다면 우리 스스로 무서운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 된다고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악에서 떠난 자이며(욥 1:1), 하나님의 길로 걷는 자(시 128:1)입니다. 또한 악한 자와 대조를 이루며(전 8:13), 하나님의 보호와 자비하심 아래 있는 사람(시 103:11;145:19)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능력을 적절히 활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내가 가진 능력이 작고 미약하더라도 작은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 성벽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작은 봉사와 헌신이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힘과 은혜와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우리 자신이지만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맡은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올바르게 감당해야 합니다(20~23절).
장로들은 미가의 예에 이어서 우리야의 사건을 예를 듭니다.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도 역시 옐미야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과 용사들과 고관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우리야는 두려워서 애굽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악볼의 아들 엘라단을 비롯해 몇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 우리야를 붙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야를 칼로 죽여 그 시체를 보통 사람들의 무덤에 내던졌습니다. 여호야김의 행동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완악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선지자의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져졌다는 것은 그를 추한 우상과 동일시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과 권력을 겸손하게 사용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마치 자신의 힘인 양 남용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무소불위를 권력을 가졌다 해도 모든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선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올바르게 감당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하나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26:16~2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