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지금도 그 형은 소매로 코밑을 훔치며 동네 아이들에게 “바둑 한판 두자”고 사팔뜨기 눈동자로 먼 산 보듯 말하고 다닐까. 어쩌면 반백의 머리를 긁적이며 기원에서 방내기꾼들에게 구박을 받고 있지나 않을까. 변성기가 오지 않아 맑은 억양에 수수한 옷차림, 양쪽 주머니에는 흑돌과 백돌을 넣고서 접이식 바둑판을 옆구리에 낀 채 아직도 공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동안 나는 그를 언제부터 알았는지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부침이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저 소소한 옛 추억의 한 장면, 스케치북에 4B연필로 흐릿하게 스케치한 것처럼 그의 외모며 함께했던 장소 등이 떠오를 뿐이다. 2 그와의 첫 장면은 1980년대 어느 여름날이던가, 내가 초등학교 교내줄넘기대회에서 1등을 했을 때였다. 나는 기분이 좋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날아갈 듯한 발걸음이었다. 그때 멀리서 한 덩치가 큰 어른이 아이들에게 돌팔매와 놀림을 당하며 쫓기듯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지나쳐 학교 옆에 있던 충현영아원을 향해 내달렸다. 잠깐사이 그의 오른쪽 눈과 마주쳤는데 왼쪽 쪽 눈은 앞을 향해 있어서 나를 보았는지 어땠는지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는 도움을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잠깐 멈춰서 그를 쫓아오는 아이들을 멈춰 세웠다. 천만다행으로 나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이었다. “돌 던지면 안 돼.” “저 형이 먼저 우리 노는데 와서 훼방 놨어.” “그래도 던지면 안 돼” 그러자 영아원 문 앞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선 내 앞에 멈추더니 양쪽주머니에서 바둑돌을 꺼내 내게 주며 “너 나랑 바둑 두지 않을래?”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나 바둑 둘 줄 몰라.”, 그가 “내가 가르쳐줄게”, 내가 “괜찮아. 그럼, 잘 가.” 라는 몇 마디 대화로 그의 몸을 영아원 쪽으로 돌려세웠다. 3 그와의 두 번째 장면은 동네 공원에서였다. 중학생이던 나는 합기도도복을 어깨에 맨 채 도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새 몇 년 동안 길에서든, 오락실에서든, 슈퍼에서든 나와 마주치면 언제나 반가워하던 그였다. 그가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무엇인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호기심에 슬쩍 “뭐해, 형?” 묻자, 그가 반색을 하며 “바둑!”, 내가 “아직도 바둑 해?”, 그가 “응, 바둑 한판 둘래?”, 나는 “도장 가야해.”로 그의 반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4 그리고 그와의 마지막 장면은 나의 고교시절 그의 집에서였다. 토요일에 하릴없이 공원에 나와 있던 차에 그의 “바둑 한판”에 “그럼, 오목이랑 장기도 해야 해”라고 응수한 까닭이었다. 그의 집은 공원 바로 옆의 빌라였다. 집에 들어서니 화사한 향수냄새와 난초향이 내 코끝을 반겨주었다. 그의 방은 깔끔하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어쩐지 지저분하고 너저분하고 어지럽혀 있으리라는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그의 책장에는 ‘월간바둑’이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빠짐없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는 “아빠하고 두는 바둑판이야”라며 두꺼운 바둑판을 내 무릎 앞에 놓았다. 그리곤 신이 난 듯 바둑돌을 놓아가며 “단수, 날일자, 눈목자” 등등을 외쳐대며 내 흑돌을 모조리 잡아버렸다. 몇 판을 두었을까 어느새 창밖이 어둑해질 무렵 대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방에 한 여고생 하나가 과일접시를 들고 불쑥 들어왔다. 교복을 보니 인근 XX여고였다. 그는 “내 동생이야”, 나는 “응”이라며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둑판만 응시했다. 어느새 내가 잡은 돌이 훨씬 많아졌다. 그 후로 나는 그 형의 집에 바둑을 두러 수시로 드나들었다. 승률은 반반정도 였다. 그렇게 나는 바둑을, 동네에서 바보취급 받던 그 형에게서 배웠다. 덤은 6집반이 아니라 그 여고생의 선한 눈빛과 보름달처럼 환한 얼굴, 박하사탕 같은 미소였다. - 끝 - |
|
첫댓글 실화야?
라고 물을 뻔~
'펌'자를 나중에 봤네
반의 반은 실화
초딩때 오목하고 알까기로
시작했으니~
ㅎㅎ
^^
그때는 덤이 5집 반 아니었남..ㅋㅋㅋ
오래되서 가물가물..
선한 눈빛과 보름달처럼 환한 그 여고생은 지금쯤!!!!!!
맞어 십여년 전까지 5호반..
마음 속에 있겠지
소나기의 그 소녀처럼..^^
오늘도 홧팅 하시게 친구..
@우진(관악) 친구도 그시절의 소녀를 간직하고 있겠지..
그져 바라만봐도 설레이고 아름다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지
지금 인생 익어가는 중이라
그런 소중한 모습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며
미소를 지어본다네...ㅋㅋ
그 소년은 뭐할꼬~~
우리 모두 아닐까..
@우진(관악) ㅎㅎㅎ
그래~~~
진이 말이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