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 페르소나’를 가로지르는 작가의 태도 / 박 진 희
항간에서 사용되는 신조어는 ‘그들만의 언어’인지 도통 알아듣기 힘들다. 듣고 나도 돌아서면 다시 백지상태가 되기 일쑤다. 그러니 기성세대에까지 익숙해진 말이라면 그것은 사회 전반에 걸친 현상이나 그에 따른 정서를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말 가운데 하나가 ‘부캐’일 듯 싶다. 이 말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개그맨 유재석 씨가 ‘유산슬’이라는 트로트 가수로 활동했던 것을 떠올리면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부캐’는 본래 게임에서 주로 사용하던 말로 ‘부 캐릭터’, 즉 메인이 되는 캐릭터 외에 새롭게 생성하여 사용하는 캐릭터를 의미한다. 이렇게 게임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던 것이 현실세계로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부캐’는 선풍적이라 할 만하다. ‘유산슬’이나 ‘펭수’ 등과 같이 방송에서 본래 자신의 인격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보여주며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일반인도 SNS나 동호회 활동을 통해 직장에서 요구하는 모습의 자아와, 이와는 거리가 먼 또 다른 모습의 자아를 교차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향은 개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기업의 브랜딩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령 ‘밀가루’를 주력 상품으로 하는 회사가 의류, 화장품 등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카테고리로 제품이미지를 확장하여 소비자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사실 이런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여러 자아로 살아가고 있다. 직장인으로서의 자아, 가족으로서의 자아, 친구로서의 자아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상황에 따라 마치 가면을 바꿔 쓰듯 다른 자아를 내세워 삶을 영위해가는 것이다. 이렇듯 집단에 의해 요구되는 자아, 외부 객체에 대한 자아의 태도를 칼 구스타프 융은 ‘외적 인격(persona)’, ‘페르소나’라 하였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뜻하는 말이었다.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고, 상황에 맞게 꺼내 쓴다”고 하였다.
이것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삶의 모습일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타인에게 보이는 자아의 모습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그것과의 간극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는 페르소나와 ‘내적 인격’의 거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자아는 페르소나를 허위, 연기,거짓 등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것이 자기 부정의 정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느끼기도 하나, 특히 가공된 이미지로 대중과 만나게 되는 연예인들이나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강요된 감정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감정 노동자들이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감정일 터이다.
반대로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는 경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집단이 강요하는 가치관이나 행동규범 등을 자신의 진정한 개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현상이 심해지면 자아는 그의 내적 정신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내적 인격’이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본연의 자아를 포함하여 자아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자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융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 페르소나와 내적 인격과의 대립을 극복하여 하나의 통일된 전체적 존재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현대 사회는 가히 ‘부캐’의 시대,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라 할 만하다. 김난도 교수가 전망한 ‘트렌드코리아 2020’(미래의 창, 2019.)에서는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를 “이제 나 자신을 뜻하는 myself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 즉 myselves가 되어야 맞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회의 이러한 현상을 한두 가지의 단선적인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앞선 세대로부터 강요된 획일적 자아가 아닌, 지극히 개별적이고 다양한 모습의 자아를 인정하는 데에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한 개인적 층위에서는 개개인이 집단의 일부가 아닌, 개별적 주체로서의 자신의 욕망이랄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세계에도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시 장르의 경우 시적 화자를 ‘퍼소나(persona)’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소월 시의 여성 화자가 김소월 시인이 아니듯 ‘퍼소나’는 시인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퍼소나는 또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시인의 정신, 세계를 보는 관점, 정서 등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말이다. 시를 깊이 읽는 독자라면 퍼소나를 통해 말해지는 표층적 의미뿐만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시인조차 의식하지 못한 내적 의미– 시인의 무의식 -까지 읽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도가 시 장르에만 한정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소설의 인물들 또한 그 비중이 크든 작든 거기에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와 소설의 경우에는 내용이나 형식의 층위에서 자유로운 경우라 할 수 있다. 형식적 층위에서는 통사적 규율까지도 시적 허용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롭게 파기될 수 있고 내용적 층위에서는 허구가 가능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수필은 기본적으로 수필적 자아가 작가 자신이라는 것,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시나 소설과는 출발점이 다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필적 자아가 작가 자신일 리는 만무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수필적 자아가 작가 자신이라는 암묵적 약속이야말로 수필적 자아를 내적 자아와는 거리가 있는 ‘페르소나’로 자리매김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허구’라거나 ‘가면’(persona)이라는 장치가 전무한 까닭이다. 다시 말해 수필적 자아가 작가 자신이라는 인식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페르소나를 삭제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작가 자신에게는 더 견고한 페르소나를 상정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신과 독자의 사이에 아무런 차폐막도 없는 수필 작가의 입장에서는 독자의 시선을 더 강력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독자 혹은 타자의 시선보다 더 치열하게 의식하게 되고, 또 의식해야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시선이 아닌가 한다. 일기 쓸 때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선생님에게 검사받던 어린 시절의 일기는 그렇다 치고 타자의 시선을 철저하게 배제한 나만의 비밀스러운 일기에서조차도 어떠한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되곤 한다. 따로 읽을 사람도 없는데 끊임없이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미화하고 있는 자신과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 말이다. 물론 이 또한 자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페르소나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왜일까. 왜 굳이 자신까지 끝끝내 설득시키려 하는 것일까.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내면의 일인데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존중감에 관계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자아와의 적당한 타협, 자아에 대한 합리화와 미화 아래에는 수치심이 자리하게 된다. 자아의 검열을 그런대로 잘 넘긴 것 같지만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이 수치심은 자주 자아를 부정하게 하고 점점 더 타자의 시선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아와의 쨍쨍한 대결에서 물러서지 않고 그 밑바닥까지를 용기 있게 들여다본 자아는 스스로를 존중하게 되고 더는 타자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김수영 시인은 “나는 왜 작은 것에만 분개하는가”라고 탄식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시와 산문을 읽어보면 이러한 탄식을 단순하게 성찰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가령 이 시에서도 김수영은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 않고 암만 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나는 비겁하다’라는 추상적인 언어로 뭉뚱그리지 않고 치열하게 들여다본 자신의 위치를 적확하게 드러내고자 고투하고 있다.
‘절정 위에는’에서의 ‘는’이라는 보조사나 ‘조금쯤’이라는 부사에서 이러한 정서를 확인할 수 있다.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압도하는 실존에의 욕망, 시대에 기투하는 페르소나와 그것을 배반하는 왜소한 자아를 이토록 가볍고도 통렬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더욱이 그것이 “조금쯤 / 비겁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지 않는가. “알고 있다!”라고. 당대 지식인에게 ‘알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언표이다. 그것은 참여를 담보하는 윤리적 행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김수영의 이러한 태도를 ‘정직’이라 불렀다.(「이토록 뜨거운 태도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사, 2018.) 김수영은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요동하는 포즈들」, 『김수영 전집2』, 민음사, 2003.)이라 했고 신형철은 김수영을 두고 “포즈(pose)를 버리고 자신의 옹졸함과 폭력성을 시”로 쓴 시인이라 평가했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서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나 눈치를 보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자신의 바닥까지를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드러내는 시인의 고투가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 시적 소재의 범주에 한계가 없었던 까닭도 이러한 태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김일성’(「김일성만세」), ‘창녀’, 아내와의 섹스(「성(性)」) 등 민감한 소재도 개의치 않고 썼다.
작가의 태도로서의 ‘거짓말이 없다는 것’, ‘정직’이라는 의미의 무게를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된다. 이것이 작품을 쓸 때 있는 그대로를 곧이곧대로 써야 한다는 의미가 아님은 물론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 자신에게 ‘정직’하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김수영을 통해 알 수 있듯 작가의 이러한 태도는 수필 형식이나 내용적 측면에서의 범위의 확장에도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
전언한 바와 같이 수필 작가의 경우 더 견고한 페르소나를 상정하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더더욱 내적 자아와의 ‘정직한’ 대면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작가 자신으로 인식되는 작품 속 화자는 단단한 자아를 기반으로 다양한 모습의 페르소나,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당당한 페르소나로 자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때라야 그의 목소리는 비로소 거침이 없으면서도 아름답고 냉정하면서도 따듯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타자를, 세계를 인정하는 목소리이자 사랑하는 언어일 것임에 틀림없다.
첫댓글 "김수영의 시와 산문에서는 타자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나 눈치를 보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자신의 바닥까지를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드러내는 시인의 고투가 있을 뿐이다. " 흉내내기도 쉽지 않은 일이니 갈수록 글쓰기가 어려워질 듯 싶습니다.
박진희 선생님 오랜만에 이렇게라도 눈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는군요.
읽어내려가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잘 지내시는구나 확인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