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 때 그 옛날
-본 원고는 학창시절과 사회 1년생으로 출발하여 생활하는 가운데서 철부지 文靑시절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졸저<回想의 문턱에서>에서 발취한 몇 가지임을 밝힌다.- 글쓴이-
0. 1958년. 1월 4일 토. 흐림
-학생문학의 밤 준비-
대섭이 집으로 갔다. 마침 그가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강여고 학생은 통해 놓앗으나 강릉농고 학생들은 만나지 못하여 큰 일 이라 했다. 할 수 없이 먼저 학교에 와서 기다렸다. 얼마 후 이대섭, 정근화 군과 여자부 명자, 연수 충희 영자가 왔다.남은 것은 여고 뿐이다. 1시가 넘어도 오지 않으므로 대섭군이 전화<37번>를 걸었으나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1시간여를 싸우다우리 끼리 할 것을 정하고 회의에 들어갔다. 임시 사회를 복길(복수)가 담당했다. 회의 진행 중 강여고 학생 2명이 왔다. 이날 토의 내용.
-시내 고등학생 문학의 밤 개최에 관한 건-
#본 모임의 명칭---고등학교 문학의 밤 개최에 관한 건
#.취지및 목적
#. 장소 및 때.......학교(미정, 혹은 공군 홀). 1958. 1.10.금요일. 18시
#범위......문학. 음악.
문학.....시....강여고 1명. 강상고 3명. 강릉사범 4명(여3,남1)
소설...상고 1명(10분). 강사1명(10분)
수필...강사1명(남1)
희곡...1명(미정)
음악(찬조출연)...기악....피아노 독주 (강여고 1명)
바이올린(찬조 1명)
성악...강여고(2명) 강사(1명) 피아노반주..강사1
#지도 교사....서근배 선생님(소설). 윤명 선생님(시)
#자세한 내용은 1월8일 12시에 다시 본 장소에 모여 논의 한다
#남학생은 네일 10시 강원여객 대합실로 모인다. 해가 진 후 폐회가 되어 학생 대표들과 헤어지고 <보리밭> 원고가 다 정리 되었는가 알아 보았으나 아직 원고가 다 들어오지 않아 다음으로 미루다.
집으로 오는 길에 바이올린 독주예정인 임창일 군을 만나 다시 부탁.
0. 1958년 1월 5일 일. 맑음(바람)
어제 기록한 사실을 윤명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수정을 받았다. 수정게힉을 들고 대섭 병덕이와 같이 강여고 이도건 선생님을 만나려 했으나 출장 중. 할 수없이 강여고 교장 선생님을 만나러 관사를 찾았으나 별 반가운 소식 못 듣고 철수. 경비 문제는 처음에는 민의원 박용익 의원과 최용근 의원에게 도와 줄 것을 희망했으나 포기. 일인당 300환으로 출연자가 부담.
-윤명 선생님의 지도 말씀-
0.장소는 학교를 선택. 피아노. 난로가 설치된 교실.
0. 경비는 최소로 2000환 이내로 할 것(프로제작, 접대비)
0. 좌담회 형식(공고치 말고 안내장으로)
0. 희곡 낭독은 강농고에 줄 것
기타; <총알에 맞은 상처는 고칠 수 있으되 사람의 입으로 인해서 생긴 상처 는 고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논쟁을 들었을 때 참견하지 말라. 아무리 사소한 말이 라도 격정과 흥분을 경계하라>
<착한 행동을 하였다는 소식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뻐하라. 사람이 악한 일을 하였을 때는 잔등에 꽃인 바늘과 같이 아프고 쓰라린 느낌을 가지라>
0. 1958년 1월 10일 금. 맑음.
-강릉시내 고등학교 학생 문학의 밤 열리다-
오후 3시경 모여 교실 정리, 전축과 녹음기를 준비하는 사이 해가 넘고...교실에 120왓트 전기 가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장소 준비. 벌써 손님들 하나 둘 모여들었다. 충희 연수 명자 영자는 숙직실에서 우유를 만드느라 야단 법석. 강상 이대섭군의 사회로 문학의 밤이 시작되었다. 청중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학생들이었으나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신문사에 근무하는 분들도 많이 오셨다. 최연집, 이영섭 선생님도 참석. 습작품 소설을 낭독.
한 시간 반의 <문학의 밤>을 무사히 마치고 여러 선배님들과 선생님(윤명,신봉승, 서근배, 심구섭님)들과 출연자 일동이 기념 촬영을 마치고 소감 발표회를 열었다.
몹시 피곤했다. 무사히 많은 출연자와 청중들이 있어 보람을 느꼈다.
0. 1958년 1월 26일 일. 맑음 (눈 잠시동안)
-詩와 音樂을 위한 午後-
오후에 동생이 선생님께서 주시더라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왔다. 아마 내가 냇가에서 일하고 있는 사이 윤명 선생님께서 집에 오셨던 모양이다.
<詩와 音樂을 위한 午後>라는 프로그램이었다. 詩人 황금찬 씨를 환영하는 모임이었다. 오후 3시 교복으로 갈아입고 급히 윤명 선생님 집에 갔으나 아무도 계시지 않아 다시 공군뮤직홀로 갔다. 갑자기 왠 바람과 검은 구름이 모여 들더니 진눈께비가 내리기 시작 했다. 공군뮤직홀에 도착했을 때 트럭 한 대가 걸상을 싣고 왔다. 윤명 선생님도 오셨다. 싣고 온 걸상으로 실내 정돈을 마치자 관중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상고 음악 선생님 윤석정 씨의 사회로 감상회가 시작되었다. 사회자로부터 본 모임의 뜻과 詩人 황금찬 선생님의 약력 소개가 있은 후 프로에 의해 행사가 시작되었다.
황금찬 시인의 <한국에 있어서 現代 詩의 두 방향>이란 주제로 강연이 있은 후 모든 행사는 의미 있게 끝났다.
0. 1958년 3월 12일 화. 맑음
낮에 校誌 <師道>가 어떻게 되었나 하고 성남동 김병렬 선생님 사무실로 갔다. 이미 演秀와 明子가 벌써 와 있었다. 김병렬 선생님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김 선생님께서는 나의 소설 작품 <生活記錄溥>에 관해 ‘매우 좋은 착안이며 앞으로 계속 수정해 볼만한 작품이며 경찰서 비난 문제는 내가 수정하였으며 아직 문장이 세련되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아직 아무 촌평도 듣지 못했던 그 습작품에 처음 지도를 받게돼 무척 기뻤다. 저녁엔 <문장강화> 책을 읽었다.
0. 1958년 11월 8일
오후 금강운수로 집으로 출발하다. 집으로 가는 길이 새삼 즐겁다.
강릉 <삼문사> 서점에서 정동국교 김병덕 을 만나 <돌채> 다방에서 <유성문학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辛 奉承 선생님을 만나다. 다방을 나서 <모감보>에 들려 토스트를 먹으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3-
밖으로 나왔을 때 우중충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0. 1958년 11월 17일
<파스테르나크>를 소재로한 소설 습작을 시작 했다.
중앙일보 광고란을 통해 은사 尹 明 선생님께서 <자유문학> 12월호에 마지막 추천시가 발표된 <밤 바다에서>라는 詩를 보다.
마지막 추천을 마치신 선생님께 박수를 보내드리다. 나도 더욱 분발해야 하겠다.
0. 1959년 1월 2일
목욕 하려고 했으나 이발만 하다. 홍 덕희 선생이 편지를 전해 주어 고마웠다. 양양교 홍 영자, 이 충희, 주문진 김 완순. 江師 윤 명 선생님 및 삼척 심 복수 그리고 군에 있는 형으로부터 신년 연하장이 왔다.
오후에 <師道> 편집하는 江師 숙직실에 가서 윤 명 선생님과 여러 남녀 후배들을 만나다.
저녁때 사과 한 바구니 들고 尹 明 선생님 댁을 방문.
0. 1959년 1월 11일 일. 맑음
-<관동문학회> 創立 총회
오전 11시 시 교육위원 회의실에서 지금까지 수차 예비 회합이 있었던 <관동문학회> 창립총회가 20여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임시 辛 奉承씨 사회로 열렸다.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평론가 金 雲學씨의 개회사로 시작되어 강릉시 교육구 장학사의 격려사. 尹 明 시인의 경과보고. 그리고 회측통과, 그외 기타 토의 및 임원 선출로 1시가 넘어서 폐회 되었다. 기념 촬영을 마치고 간단한 회식이 있었으나 나와 심 복수 최명길은 입회원서만 내고 회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소설을 쓰는 경포 난곡동의 김 학섭을 만났다. 김 병덕을 만나지 못해 퍽 섭섭했다. 우리 셋은 가까운 빵집에 들어가 빵을 먹으며 지난 얘기를 나누다 오후 4시 25분경 헤어지다.
0. 1959년 2월 13일 금. 눈 오다
아침에 바가 촉촉히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꽃송이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앙상스럽던 나뭇가지에 흰 꽃들이 만발했다. 집에서 편지가 왔고, 尹明 선생님으로부터 <관동문학회> 창립총회 기념사진이 왔다.함박눈을 맞으며 걷는 마음 즐겁다. 저녁을 먹고 거리 산책. 수개월간에 걸쳐 습작한 소설 <死의 讚美>를 탈고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파스테르나크>를 소재로한 105매 단편이다. 이것이 햇볕을 봤으면 좋겠다
0. 1959년 6월 20일
-關東文學會 제2회 작품 합평회-
학교 사환에게 양양 이충희 선생에게 합평회 참석 여부를 알기 위해 연락. 오후에 가능한 막차로 나간다는 전갈이 왔다. 강릉 다녀온지 두 주일만에 다시 강릉행 버스에 올랐다.
합평회 모임 장소인 다방 <돌채>에 모인 것은 오후 7시가 넘은 8시 30분경. 오랜만에 만나 뵈는 평론가 金雲學님. 시인 尹明 선생님, 그리고 역시 시인이신 辛奉承 선배님. 그외 <자유문학> 1회 詩 추천이 있는 元永東 선생님. 李英燮 선배외 金炳德군, 김완기 형, 그 외 많은 회원들은 회비를 걷고 <열빈장>으로 갔다. 이층 넓은 방에서 자장면과 배갈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김병덕 군의 詩 <彼岸에게>와 이영섭 형의 <꽃그늘에서> 의 두편의 詩가 李仁洙 회장님이 없는 가운데 신봉승 시인의 사회로 합평회가 시작되었다.
박명자. 공계열 두 사람도 보였다. 묵호에서 새로 참석한 김익기 씨를 처음 만났다. 반가웠다.
합평회가 끝난 것은 밤 12시 30분전. 김병덕 군의 詩는 아직 독자가 경험치 못한 것을 언어의 想念으로 표현되어 독자가 공감하기 힘들다는 것. 이와 대조적으로 이영섭 선배의 <꽃그늘에서>는 독자가 퍽 쉽게 공감 할 수 있다는 것. 윤명 선생님은 <꽃그늘에서>의 작품이 무척 잘 표현되었다고 감탄 하셨다.
제3회 합평회는 오는 7월 11일 토요일로 결정. 합평회를 마치고 윤명 선생님과 김병덕 군 셋이 달빛도 밝은 거리를 산책하며 집으로 향했다,
윤명 선생님과 헤어지고 김병덕 군과 <友味堂>에 들려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다. 通禁 예비 싸이렌이 울리고 거리엔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병덕군은 아직도 자신만의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이하 략-
*오랜 추억을 담은 일기장은 모두 연기로 사라지고 내 삶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길 없고 여기 기록된 人名의 주인공들은 모두 하늘나라 여행을 떠난후 아무도 소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