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관한 시모음 25)
바다 /오승한
태곳적부터
희로애락의 사연들을 담고
파랗게 멍들어 있다
아벨의 피
유대인 대학살의 피
십자가의 피가 너울거린다
꽃으로 피어난 공주의 눈물
줄리엣의 사랑의 눈물도
일렁이고 있다
하늘에 눈물까지
담은 무거운 침묵이여
몸부림치도록 힘겨울 때
모든 사연 숨겨두고
답답함 뒤틀며 파도친다
파도여! 파도여!
바다 /최이천
잔잔한 물결
모래 위에
오선지 그리고
누군가의 발자국
지우고 가요
아주 작은 저음으로
귓속말하고 뒷걸음
춤추듯 살포시 가네
포구를 돌아오니
눈 때리는 바람
절벽 때리는 파도
거품을 물고
성난 황소처럼
돌진한다.
구릉에 앉아
먼 곳 검푸른 파도
바라본 이
너울질 탈춤인 듯
사방치기로 오는구나!
덩덕궁덩덕궁 바람 장단
수없이 많은 너울 춤꾼
깨끼춤 추듯 서 있는가?
하면 굽실굽실
너울너울 몰려와
양반인 듯 서인은
절벽 바위 드잡이하고
깨지는 물보라
물러가며 싸 악 쉬이
노래하네
썰물로 멀어져가고
노란 모래밭 되네
파도에 얻어맞은
절벽에는 그날에
기록 상형 글로
색이여 있네!
천년 넘은 시와
천 줄로 기록된
악보랍니다
우는 바다. /황우목사 백낙은.
임 찾아와 품에 안길 때는
젓가락장단에 어깨춤 췄는데
서러움도 회한도 미련(未練)까지
한 아름씩 쏟아놓고 떠나버린
텅 빈 백사장엔 껍데기만 쌓여
바다는 구슬픈 포말 뿜어 대며
긴긴 밤 눈물로 지샌답니다.
갈매기도 잠이 들고
등댓불도 졸고 있는 밤.
고고한 달님마저 바다에 빠져
흐느적흐느적 몸부림치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애꿎은 뱃전 두드리며
훌쩍훌쩍 바다가 울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우당 김지향
그대
몸을 풀어
몸 열 군데의 열 손가락을 뽑았다
세상을 굴리는 바람 떼를 잡는다
한 구석 한 치도 놓치지 않는다
땅이 반란을 일으켜 와서
몸의 팔 할을 갉아먹고 엎어버려도
아침마다 새 살이 돋아나는
그대
손을 들어 땅의 분노를 다스리고
깊이 샘 속에 뿌리내려
천리 밖을 헤아린다
그대와 뒤섞여 뛰노는 동안
나는
잠시 세상의 싸움도 잊을 수 있다
꾸들꾸들한 바다 /한보경
첫 경험은 비릿했어요
잘 벌어진
과메기 살 속에는
비릿한 첫사랑이 출렁이고 있었어요
바다를 되새김 질 하던
가시 사이에서 발라낸 햇살은
노곤노곤
잘 말라 가고 있었어요
(싱겁고 아릿한,
다시 만난 첫사랑)
바다가 예리하게
명치 끝에서 부풀어 올랐어요
쓸쓸하게
허공을 헛발질하는 맛이
혀끝에 아프게 왔어요
팔천 구백 원 어치
꾸들꾸들 목마른 바다를 샀어요
그녀의 바다 /김두안
또 봄
섬에서 그녀가 왔다
바다를 한 보따리 이고 와 매듭을 푼다
비늘 벗겨 내고 토막을 낸다
칼날 뛰는 소리
장판에 벽지에 튀어 박힌다
우락부락한 이놈 대가리 좀 봐라
네 애비 닮아 사납게 생긴
눈빛 깊고 등도 푸른 것이
이놈은 필시
심보도 어지간히 넓을 것이여
이 구멍 저 구멍 잣대질하다 슬슬 도망칠 궁리나 하는
낙지
뼈도 자존심도 없는 잡놈들이여
나는 객지 생활이 어떤지 몰라도
굴 껍데기같이
어이든 꽉 붙어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파란 물 뚝뚝 떨어지는 보자기 물끄러미 바라보며
창가에 갯바위 앉아 있다
보자기 한 자락 참 깊고 넓다
바다 / 정영자
바다가 오르는
물결소리.
네 소리
내 소리,
뒤척이는
우리들
만남의 바다.
분노의 바다 /김내식
바다도 때로는 분노하여
불을 뿜는다
하늘이 비를 뿌리며
달래 보지만
거품을 내 뿜으며
주체 못한다
절벽도 작은 섬도 가로 막으나
아우성만 더 커질 뿐
그러나 모래는
침묵으로 포근히 안아
그 품에 소리 없이 스며들다
심해의 깊은 곳
되돌아간다
풍금을 타는 바다 /도지민
바람의 느낌만으로
악보도 없이 풍금을 타는 바다
하루종일 잠시도 쉼 없이
잔물결 미뉴에트로
폴카를 추거나
멋드러진 째즈곡에 맞추어
삼삼오오 돌아 가며 스포츠 댄스를
때로는 격렬하게 패달을 밟으며
건반을 타는 손 놀림은
종횡무진하는 돌풍보다 더 빠르다
풍금 속 무아의 세계
산촌의 어느 조그만 학교
한 소녀가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교실문을 스르륵 열고
아무도 몰래 까치발로 걸어 들어 가
빛 바랜 풍금 앞에 나비처럼 앉는다
뚜껑을 가만히 열고
자리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 앞으로
빈 교실 가득한 청중들에게
치마를 양손으로 펼치며
제법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박수갈채가 끝나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건반위로 솜털 보송보송한 손을 살포시 얹고
패달까지 겨우 두 발을 곧추 세워서
이윽고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연주가 시작 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지금 눈 앞의 바다는
그 소리에 풍금을 소녀에게 내어 주고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
기꺼이 합주를 해 주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시골 한 소녀는 오늘에야 비로소
올가니스트의 꿈이 실현 되는 이 순간
어디에서 몰려온 갈매기 떼들
좌우 정렬로 숨을 죽이고 앉아
배 고픔도 잊었는가
해변가 모래바닥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다.
바다의 꿈 /김형효
나무도 많다 산에 올라라
무덤도 많다 무덤에 올라라
빛 틈새 바람타고 올라라
빛살무리 날개뻗고 살아나리라
바람개비 휘휘대며 돌아가는
하루하루가 낭만의 적이다
적과 꿈을 꾸는 추억은
하루도 묵어가지 못하고
바다의 꿈 갈매기 노래 부른다
그 바다 /이소연
1.
그곳에 가면
멈추지 않는 노래가 있다
파도와 파도 사이
은하수 흐르는
해안선 따라
태고의 음악이 물거품으로 녹아드는 곳,
천년 기다린 사랑이 밀물져 온다
2.
하루를 살아버린 태양이 뒷걸음치는 저녁,
세상의 모든 출구가 거기 있는 듯
바닷길로 걸어 들어가면
영원과 순간이 만나는
수평선의 시공이 열린다
열린 문으로
섬이 떠가고
그 섬을 찾아 떠나는
내 속엔
출렁이는 바다가 살고
바다 2 /안갑선
추억이 머문 자리에 서보면
내 눈물이 흘러 바다가 된다
그 바다
부서지는 햇볕 밟으며
갯가를 따라 빼곡히 채워져 밀려온다
시퍼렇게 멍든 바위 때리며 대신 운다
밤이 깊어도 철썩이는 바다여
너를 안은 내 적셔진 품에서
그때처럼 그리운 이의 향기가 난다
가마우지 바다 /천수호
짧고 어두운 순간이 휙, 지나갔다
가마우지 그림자다
내 머리 위를 스쳐 그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동안,
새는 내 그림자 한쪽을 찢어다가
그의 머리 위에 툭 떨어뜨린다
쭈뼛 솟구치는 머리카락,
가마우지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금세 캄캄해진다
다시 새는 그의 몸 안쪽에서
그림자 한 조각을 꺼내 물고 난바다로 날아간다
모래 바닥에 끌리는 찢어진 그의 그림자,
그 자력(磁力)이 끈끈하다
(새와 그림자 사이,
자석을 들이댄 책받침처럼
빳빳한 수평선!)
수평선을 가운데 두고 사진을 찍는다
검은 바다 한 장이 호치키스처럼
가마우지를 찰깍, 깨문다
부리까지도 깜깜한 지독한 그늘이다
네가 없어도 바다는 /유정이
멀리서 오는 기차가 선로도 없는 마당에 와 멈추는 꿈을 꾸다 깨었다 왜 매번 기차인가 마당을 지나면 바다 바다를 건너면 창망한 저녁이 낮은 숨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그것이 꿈꾸는 나를 규명해 주지는 않았다 언제나 가볍게 목을 조여 오는 인후통은 느린 곡조로 흐르는 추억 때문인 것을 안다 목숨 걸 사랑을 만나고자 했다면 푸른 뱀처럼 슬픈 저 바퀴에 올랐어야 했다 마당 끝으로 절벽 같은 바다가 비명처럼 떨어지고 시간을 잘디잘게 부수어 깜깜한 그리움을 실어 날랐다 나를 온전히 엎지르고 싶은 날이 있었다 오늘 만난 시는 고개를 숙이며 우울한 듯 몇 차례 발끝만 차다 가 버린다 머뭇거리는 마른 입술 사이로 달빛 그렁한 밤은 오고 세상은 어제보다 긴 하루를 조용히 끌어당긴다
네가 없어도 바다는 넘실대고 기차는 정해진 시간대로 떠나 또다시 돌아올 것이다 물기 가득한 밤이 나를 재우러 올 것이다
바 다 /신성호
쉼없이 춤을추는 파도의 고향
지친 하루의 진액을 토하듯
떠 밀려 달려오는 하얀 물거품
태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부디치고 또 부디쳐서
깨어지는 파도를 안고
수줍은 듯 속살을 내미는 바다
때로는 노도같이
어느땐 백조의 호수처럼
변화가 있음이 너의 모습이여라
밀려 왔다
떠나가는 파도를 따라
오늘도 어제처럼 갔다가 다시와도
어제의 그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바다는 혼자서 /장미숙
비밀이다
잠잠한 수면 안에선
살기 위한 몸부림
사랑 이룬 생물
번식을 쉬지 않는다
풀어놓고 떠나간
희.노.애.락
철철이 품어야 하는
바다는 혼자서
웃다 울컥이다
땅 밑까지 파고 든 상처
속 쓰라리건만
태양도 지치면
바다에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