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관한 시모음 26)
겨울 바다 /권승주
여름 바다여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극성에
아직도 몸살이 풀리지 않은 듯
늦은 오후
졸고 있었다
겨울 바다는
뚝 끊긴 발걸음에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지난여름에 떠나간
그대 생각에
긴 머리 풀어헤치고
흐느끼고 있었다
그대는
겨울 바다가 좋아
겨울 바다가 좋아
겨울이면
겨울 바다를 자주 찾는
겨울 여자가 되었다
바다의 등 /차주일
바다가 돌연 해류를 바꿔 마음에 이을 때가 있다
굳은 맹세 끝에 조바꿈표 같은 숨 몰아쉬듯
바다도 조를 바꿔 파도를 모는 밤이 있다. 그런 날은
네 숨소린 바다를 닮았지, 라고 말하던 해녀가
바다에 그림자를 지우며 물질한 날이다
젊은 지아비를 파도의 쉼표로 떠나보내고
급살맞을 년이란 주홍글씨를 낙인한 채 살아온 그녀
어둡고 슬픈 A단조로 평생을 살아야한다
음자리표를 내리긋는 동작으로 무잠이질한다
그녀가 호흡을 끊고 견디는 시간은 생계를 잇는 일이어서
자맥질로 펼쳐진 빈 악보에는
자식들의 숟가락질이 음표처럼 걸린다
바닷물로 그림자를 다 지운 그녀가 뭍을 밟으면
내일의 생계는 늘 오늘에 남는다
찌그러진 부레처럼 잠든 그의 등을 쓰다듬는다
그녀의 등가죽이 파도 형상으로 출렁거린다
바다에 관한 백서白書 /신현정 (1948~2009)
그렇다고 바다를 보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파도 또한 정면으로 보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야 고래잡이 선장
갈매기 나르으으고
술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은 이곳에서
어찌하면 독주毒酒를 작살을 먼 바다를 이길까 하다가
그리하여 비틀거리는 내 걸음을
게의 옆걸음으로 슬쩍 바꿔보는 것이다
오 게가 간다
집게발을 높이 올리고
거품을 날리며
눈을 내놨다 감추었다 하면서
옆걸음으로
바다를 비껴서.
고향바다 /오정방
이역만리 타국에서
내고향 생각 할 때
비취빛 그 바다가
눈 감으니 보이시네
동해의
일출 광경은
그릴수록 신비롭다
수평선 넘나들며
갈매기 춤을 출 때
헤엄치고 조개 줍고
돌팔매 겨루었던
동무들
그 뒷 소식이
오늘따라 사무친다
창파에 돛 단 배가
그림처럼 지나 갈 때
딍굴고 씨름했던
새하얀 그 모랫벌
동심의
어린 시절을
하마 어찌 잊으리
동쪽 바다 /이영광
1
동쪽 바다로 가는 쇳덩이들,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붕붕거린다, 꽁무니에 불을 달고
이 지옥을 건너야 極樂(극락) 해변이 있다
왕숙천변 수양버드나무 긴 푸른 생머리를 휘감는
태풍의 예감
유리잔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간다
모든 길이 기로여서,
헤매다 들어온 찻집에서 보면
십 분 전의 갤로퍼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지구는 영원히 공사 중이야
2
뉴 밀레니엄은 어쩌면 벽화의 시대로 남지 않을까요
저 담벼락에 페인트칠된 고구려 여인들,
치마가 무슨 판때기 같아요
사슴과 범을 쫓는 사팔뜨기 사내들은
총 맞은 듯 말이 없군요
벽은 간판이고 간판은 벽이며,
요컨데 인간은 전쟁 중이죠
그날, 당신은 눈물이 날 만큼 선정적이었어요
내가 갑자기 돌아버리지 않는 이상
언젠가 고분이 된 이 찻집에 총성과 난동은 없을 것이며
너무 희귀해서 모두를 놀랠 공포가 벽 속에서
비참하게 발굴되겠지요
폭탄 세일과 재탕 우주 전쟁과 기본 삼만 원을
숙식 제공과 月下의 도우미들과
흡반 같은 골목길을 거느린 벽의 이면,
벽화는 벽을 은폐해요
모든 벽화는 春畵(춘화)예요
세상은 궁극적으로 형장이고
인간은 인간의 밥이고
에로가 어쩔 수 없이 애로이듯
이건 苦行(고행)이야,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게
아니야, 하고 내가 주정했을 때
당신은 암말 없었죠 블라인드 너머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어색의 길을
보고 있었죠 이 지구는 어쩌면
버려진 별이 아닐까, 신음하듯
3
휴식은 어지럽고 갤로퍼는 사라졌는데,
돈 내고 받아 드는 영수증처럼 허망한 당신의
오랜 병력과 어둠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체념을
가슴으로 한번 받아볼까요 나는 잘못
살아왔어요 살았으니까 살아 있지만
당신과 못 만나고 터덜터덜 가는 길에
동쪽 바다 물소리 푸르게 들리고,
내가 밤하늘 올려다보며 당신 생각을 할까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두루미처럼 울까요
당신은 좆도 몰라요
물고기 뱃속에는 바다가 없다 /권혁희
칼도마 위에서 민어가 눈깔을 굴리며
칠테면 쳐봐! 빳빳한 비늘로 감싼 꼬리를
휘영청 접어 올린다, 반달이 뜬다
나는 식칼로 물고기 등판을 힘껏 내리친다
토막 난 민어가 선홍색 아가미를 헐떡거리며
남은 숨을 고른다, 달의 둘레가 툭 끊어진다
잘못 건드린 물고기 뱃속에서 밀물이 터져 나오고
부엌은 파도가 뒤집히는 요나의 바다가 된다
그렇다, 남편의 희망은 내가 밥 잘 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 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밥 냄새가 나고
가스불 켜는 소리, 컵에 가득 물을 따르는 소리......
물고기 뱃속에 들어있는 바다처럼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남편의 밥이 가득 들어있다
밥이 소명이다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는 소리, 음식물을 씹어 삼키는 소리........
수돗물을 펑펑 틀어 먹은 그릇을 닦을 때
하복부에 세제 거품 같이 끓어오르는
거북한 팽만감을 느낀다, 어제도 그랬다
바닥부터 차오르는 바다로 가스레인지의 불이 꺼지고
실내등이 이내 점멸한다
캄캄한 고래 뱃속, 소리가 되지 않는 외마디 소리들이
부력을 못이긴 플라스틱 그릇들과 함께 천정 높이까지 떠오른다
복도의 맨 끝 집,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기 일쑤인
그 집의 고요를 누가 의심할까
그리하여 나는 칼집 많은 도마 위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던,
뱃속의 바다를 다 쏟아낸 민어처럼
36도 5부의 등판에서 비로소 남편의 밥을 내려놓는다
개수대에 씻어둔, 밥이 되기는 다 틀린 쌀톨들이
투항하듯 하얗게 흩어져 물속에 잠긴다
바다가 침묵할 때 /김종석
파도 없는 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슴 심장 소리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리 꽃이 되어 유리처럼 되었습니다
수 억년 만의 휴식 일까요
유리가 되어버린 파란 바다 위에
태양이 가깝게 내려 앉아 여기저기 살펴 봅니다
잠들어 있는 듯한 바다
태양 열이 너무 뜨겁습니다
태양이 바다에 너무 가까이 있는 탓 입니다
바다는 거대한 암흑 같은 구름을 불러 들입니다
거대한 바람과 폭우를 불러 들입니다
바다의 분노는 무서웠습니다
태양은 제자리에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
유심히 바다만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분노한 바다는 태양을 덮쳐 버릴 무서운
파도가 아닌 폭우와 함께 태풍이 몰아 칩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분노 입니다
태양은 나그네처럼 오가고 바다의 분노는
그칠 줄 모릅니다 폭우는 바다를 식히기 위하여
모든 구름의 힘을 빌려 차갑게 폭우를 쏟아 붓습니다
태양과 파도의 싸움은 여기서 그칠 것 갖지 않습니다
먼 훗날 태양이 사라지고 하는데
달이 크게 떠 있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다는 차갑게 빛나고.
바다 /조성심
어젯밤
시퍼렇게 다가와
하얀 포말 퍼부어대는
바다를 만났다.
그 먼 길 달려
꿈속까지 따라와선
내 잠자리를 차지하고
그곳에 남겨 둔
그리움의 씨앗 하나
물결에 쓸려가지 않고
어느덧 자라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더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밤이면 잠자리를 보챈다.
어쩔거나
너와 나는
꿈속에서만 서로 만날 수 있는 것을.
바다 변주곡 /이광석
바다는 제 혼자 다니는 길이 있다
고급 세단 같은 상어가 다니는 길을 비켜
토종 전어 고등어떼 마실 다니는 작은 골목길을 달빛으로 간다
세월의 파편이 된 낡은 기억들 하나 둘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낯선 길 앞에 바다는 지금 아프다
보아라 물 어디에도 내가 적실 그리움은 없다
각혈하듯 시의 꽃을 피우던 가포 겨울바다도
조개껍데기처럼 개펄에 엎드려 있다
바다가 마지막 종점인 사람들에겐 바다는 더 이상
내 줄 어깨가 없다 세상의 집들이 어둠에 업혀
잠들 때 밤새 뒤척이던 바다는 제가 숨겨놓은
옛길 하나 불러낸다 그 길섶에 문신처럼 박힌 묵은 통증,
등지느러미 날 세운 쪽빛 너울로 환급 받고 싶다
바다를 바라보며 /양채영
만원짜리 바다회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전망대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나는 술과 회가 있어 흡족하고
높은 곳에 올라 앉아
꿀릴 것이 없이 호기롭다.
내가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저 바다는 나의 것이다
바다는 잠시 잔 걸음으로
햇빛을 따라 내 해안으로 다가서다가
흡족한 나를 보고
가마득히 어둠 속으로 숨기도 한다.
바다가 온통 일어서서
맨살로 달려들다가
내가 딴 여자를 생각하는 동안
바다는 폭삭 주저앉아
질펀히 오줌을 싸면서
날카로운 부리의 흰 갈매기가 된다.
나는 왜 발을 구를까
나도 무섭다
술이 취한 것도 아닌데
바다는 놀라서 더욱 푸르다
저만큼 바다의 겁먹은 표정
나는 이 높은 곳에서
한량없이 용서해주고 싶다.
저녁바다 /김승동
하루종일 달려와
물에 닿는 기쁨이 넘치고
혼자서 떠났던 갈매기도
썰물을 따라 돌아오는 곳
여기저기 흩어진 어구와 폐선
녹슨 닻이 널려있어 더욱 너르고
아름다운 곳
그리움만 싣고 오고가는 빈배나
주체를 못해 흔들리는 바람이나
그 바람에 마음을 뺏긴 사람들이나
잠시 후
먼 수평선에 비단 폭을 풀고
황홀한 이별을 준비하는 곳
사랑이 슬픔처럼
날마다 키가 크는 곳
해지는 바다에서 /윤정강
진주로 빚은 하얀 순결
주름처럼 조여들며
노을빛에 휘둘리는 물결
그리움 견디는 파도여
봄 밤 달 빛의 몸 빌려
사랑을 잉태하였는가
영혼이 설레이는 꽃 빛 노을
황혼을 불태우는
봄의 바다여
너도 나 처럼
뜨거운 사랑으로
몸부림치며 떨고있는가
반지하 바다 /박신규
빗소리는 늘 비릿했고
축축한 햇빛은 짧지만 아늑했다
밤늦게까지 함께 일하고 함께 가난해도 좋았다
한밤 인쇄소 소음과 두통을 벗어놓고
'파주상회' 지나 '헌책'과 '철물점' 지나
비탈진 '물망초' 홍등 건너
숨차는 목련주택 반지하층
각시고둥 같은 여자와 살았다
맑은 가을날 소나기 듣는다고 쪽창을 닫을 때
까치발이 예뻤던 여자, 함박눈 내리는 밤엔
파도가 멀다고 썰물 때라고 했다
귀울음이 터질 때마다 라디오 백색소음을 높이고
사랑을 나누면 마른 가슴께에서
해조음이 흘렀다, 돌아가야 해 아무래도
바다를 버려서 고장난 거야, 쥐어뜯을 때마다
파리한 귓불에 맺히는 핏방울
목련에 닿는 달빛 주파수가 너무 높다는 밤
우는 소리를 밀쳐내고 잠들면
수평선에 베인 꽃잎들 피를 뿌렸고
썰물에 떠가는 귀를 줍다가 깼을 때는
이미 사라진 그 여자, 들리지 않았다
맥주 양주 소주처럼 오래된 골목을 지나
한없이 절망이던 잉크통 냄새를 지나
소음도 침묵도 다 파본 난 스물아홉
수색역 지나 경의선에서 조금 더 밀려난 곳
거기 반지하 바닷가 빈 방
그 여자가 남기고 간 것이 있었다
고막이 터질 만큼 커지는 적막,
검게 무른 목련꽃 귓바퀴에선
바다 냄새가 낭자했다
오팔지 바다 바깥 마을들 /조 율
이런 뢴트겐 사진은 어때요?
자꾸 까먹지 말고 기억하는 것은. 깜박이는 속눈썹, 그게 빗물이 다 새는 제각각의 슬레이트를 얹
고 사는 것이라고. 그 안으로 고였던 새파랗게 질린 수평선을 잠시 잊는 것은.
*어쩌지, 밑창이 접지력을 아는 듯 영영 이어지고 이어질 때. 잔물결 물빛이 물무늬를 덮어 펼쳐
진 *오팔지. 전조등과 순간 반짝 눈을 맞추고 사라지는 바리케이드 여럿과는 또 다른. 아주 살살
일렁이는 구김 없는 물살. 멀찌감치 뒷걸음질 치다 걷어 구겨서 바스락, 소리도 한번 내보고 싶은
바다 어때요? 오래전, 단내를 닮은 그 풍경.
확 뒤집어엎고 싶을 때 그런데도 전이 잘 부쳐질 때, 빨갛지도 않으면서 달궈진 프라이팬이 종일
따귀 맞은 우체통이라고 생각할 때. 흘러가 괜찮던 가요를 틀어막아 집어치우고, 가끔 남몰래 태업
중인 의자 굴리는 소리와 태엽소리가 들리는 때요.
그 물길, 나 없는 기억력이 돌아온대도
또 아무렇지 않은 듯 이 거리를 걸어요.
* 1978년에 발매된 윤수일 3집 수록곡
* 오팔이나, 빛의 간섭현상을 연상시키는 사탕 포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