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녀봉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연천 군남댐 군남댐 임진강의 남한 최전방에 위치한 댐이다. 북한 황강댐이 무단방류나 수공을 시도하면 최전선에서 방어할 수 있는 댐이지만, 남한 군남댐은 상류에 있는 북한 황강댐에 비해 5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아 북한이 만수위에서 통보 없이 무단 방류하면 임진강 하류의 어구가 손실되는 등 피해가 불가피하다. 군남댐의 규모를 높이면 북한 지역이 수몰되므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자 노무현정권에서 현재의 규모로 제한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북한 황강댐의 위협을 막을 수준으로 댐 규모를 높이면 북한 뿐 아니라 남한 지역도 댐 주변 많은 지역이 침수된다. 대한민국은 북한 측에 방류시 통보를 요청했지만 실제 통보는 잘 되지 않아 임진강 하류 어민들은 장마철엔 항상 공포에 떤다. 2009년엔 무단방류 때문에 6명이 사망하는 인명피해도 일어났다. 황강댐 방류시 물이 군남댐까지 도착하려면 6~9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전통보만 하면 대비하는 데 문제가 없으나, 사전통보를 하지 않을 경우 군사분계선 지점에 설치된 횡성수위국(필승교)에서 확인하여야 한다. 이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30여 분밖에 없으므로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20년 8월 3일, 중부지방 폭우에 따라 황강댐 수문을 개방해 무단방류를 한 것으로 추정되나 이를 대한민국에 알리지 않았다. 2022년 6월 말, 폭우로 인해 북한이 합의를 어기고 황강댐 무단 방류를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군남댐도 수문을 개방해 방류를 시작했다. 2022년 8월 8일에도 폭우로 인해 수문을 전부 개방해 방류를 시작했다. 그리팅맨에 관한 안내문 그리팅맨이 있는 옥녀봉에 관한 안내문 [그리팅맨~개안마루]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임진강 개안마루 전망대에 있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로 이름을 떨친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화첩인 연강임술첩(1742년)의 작품 중 하나인 웅연계람(熊淵繫纜) 그림 개안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의 곰소(熊淵) 개안마루 전망대에 있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로 이름을 떨친 화가 겸재의 웅연 뱃놀이에 관한 안내문 [[겸재 그림 길 (80) 연강임술첩 ④] 임진강변에서 듣는 ‘겨레를 가르지는 못하리라’ CNB저널 제703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7.13 13:37:56 글 : 이한성 교수 개안마루에는 겸재의 웅연계람(熊淵繫纜)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아래 연강에는 웅연(熊淵: 곰소)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겸재의 그림처럼 웅연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날 밤 배를 타고 내려온 뱃길이 선연히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횡산(橫山: 비끼산)으로 보이는 산에서 산줄기들이 이어져 나오고 물길에는 장군교의 교각도 보인다. 강 우측 강가에는 백제 때 석실무덤도 보이고 들판 안쪽으로는 중면 삼곶리도 자리잡고 있다. 그래도 가장 주목할 곳은 웅연의 중심이 되는 강가 우뚝한 바위 모습이다. 옛사람들은 이 바위를 중심으로 아래위 강을 곰소(熊淵)라 불렀다. 이곳에 배를 띄운 사람은 연강임술첩(1742년)의 주인공들만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있었겠는데 연강임술첩이 나오기 70년 전인 1672년(현종 13년) 미수 허목 일행 6인은 웅연에서 즐거운 뱃놀이를 하였다. 이 기록이 ‘미수기언’에 웅연범주도기(熊淵泛舟圖記)로 실려 있다. 미수 선생이 연천 석록(石鹿)에 은거하고 있을 때 미수를 따르던 권공산(권대재: 공산현감을 지냄), 이우당문집을 남긴 권저작(권환), 청빈한 선비 권조대가 찾아와 며칠을 즐겁게 보내는 중, 정극가(정창기: 병조판서를 지냄), 김현서가 합류하여 웅연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그 후 권대재는 이때의 뱃놀이를 그림으로 남겨 미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그 글이 ‘웅연범주도기’로 남았다.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를 기록한다. 임자년(1672, 현종13) 금상 13년 4월에 권 공산(權公山)이 권 저작(權著作), 권 조대(權措大) 두 사람과 함께 석록(石鹿)의 산속 집으로 늙은이를 찾아왔기에 적적하던 중에 마음을 툭 터놓고 며칠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함께 웅연을 구경하기로 하였는데, 정극가(鄭克家)가 뒤를 이어 이르렀고, 김현서(金玄瑞)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전날 밤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마침 내리던 비가 개어 모래톱과 물가의 맑은 경치가 볼만하였다. 주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추었기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튿날 웅연으로 나가서 신비로운 석문(石文) 글씨를 보았다. 기괴한 글씨가 혹은 세로로 혹은 가로로 뻗고, 혹은 합해지고 혹은 흩어지는 등 변화가 놀라웠으니, 이는 기화(氣化)가 이루어 낸 귀신의 자취라 하겠다. 이어 앞 강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강 양쪽은 모두 무성한 숲과 깎아지른 듯한 벼랑인데, 간혹 향기로운 풀과 긴 모래톱이 눈에 띄었다. 물길을 거슬러서 장군탄(將軍灘)으로 올라가니 남쪽 기슭의 맑게 갠 봉우리가 가장 수려하였다. 이를 부용봉(芙蓉峯)이라고 이름 지었다(권 공산이 명명한 것이다). 그 위의 망저탄(望諸灘)은 산이 깊고 물길이 먼데, 나루터에는 사람이 없고 물새들만 공중을 빙빙 날다가 내려앉았다. 배를 돌려 내려와서 노자암(鸕鶿巖)에 이르러 객들이 각자 흩어져 돌아가면서 서로 손을 잡고 이별하였다. 뒤에 공산(公山)이 충주(忠州)로 부임한 다음 뒤미처 웅연범주도를 만들고는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지난 10월에 현서가 임단(臨湍)에서 객사하였다. 지금 그 이름이 종이에 적혀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 소탈한 성격에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이렇게 죽은 것이 애석하여 실로 슬픔이 북받친다. 금상 15년(1674) 2월 상순에 허목 미수는 기록한다. (기존 번역 전재) 熊淵泛舟圖記 壬子 十三年四月。權公山與權著作權措大兩人。訪老人於石鹿碞居。寂中得良晤數日。敍心開暢。仍相從觀於熊淵。鄭克家踵至。金玄瑞亦與之相期。前夕已至矣。適雨新晴。洲渚霽色。可喜。主人公爲之設酒食爲禮。甚懽。明日。出淵上觀石文神書。書怪怪奇奇。或豎或衡或合或散。變動可駭。蓋氣化成之鬼神之跡也。仍泛舟前江。挾江皆茂林峭岸。往往有芳草。長洲遡流。上將軍灘。南岸晴峯最秀。曰芙蓉峯。權公山命名。 其上望諸山深水遠。渡口無人。水鳥翔集。廻船下流。至鸕鶿碞。客各散歸。相與摻手爲別。後公山出忠州。追作熊淵泛舟圖。屬老人記之。 前十月。玄瑞客死臨湍。今其名在紙。其人已亡。惜其疏散好遊。良爲於悒。十五年仲春上浣。許穆眉叟。記。 개안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웅연 주변 그리운 지명들이 나온다. 석문(石文), 장군탄(將軍灘), 망저탄(望諸灘), 노자암. 저 산봉우리 중 하나는 권대재(공산)가 이름 붙인 부용봉(芙蓉峰)이겠지. 그런데 이때 그려진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는 어디에 있을까? 아쉽게도 그 행방은 묘연하다. 어서 나와라. 보고 싶다. 아마도 이 그림을 보았을 남원의 학자 방두천(房斗天)은 미수 선생 시에서 차운(次韻: 운을 빌려 옴)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熊淵泛舟圖。敬次眉叟先生韻呈權參判 瑍). 그의 문집 희암집(希菴集)에 전한다. 이를 보아 웅연범주도는 멋진 그림이었을 것이다. 仙舟自在在中流。 신선이 탄 배 유유자적 강 가운데 있는데 芳草生洲白鳥浮。 향그런 풀 물가에 흰 새는 두둥실 回首澄淵留活水。 고개 돌려 바라보니 맑은 소엔 물길 머물고 躍魚今古見源頭。 뛰어오른 물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始源을 바라보네 그런데 위 미수 선생 글을 읽으면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主人公爲之設酒食爲禮(주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추었기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주인이라니…? 웅연가 지금의 삼곶리에 주인처럼 붙박이로 살고 있었던 이가 있었다. 이름은 이진무(李晉茂, 1608~1677), 본관은 전주, 자는 무경(茂卿), 호는 취우(醉愚)이다. 미수의 둘째 아들의 장인이니 미수와는 사돈 관계였으며 미수의 종형 허후(許厚)의 제자였다. 평생토록 연천의 웅연 가에서 낚시질하고 두 마리 학을 기르며 처사(處士)로 살았다고 한다. 이 사돈 덕에 미수는 자주 웅연에 나가 즐기며 고기도 낚았다. 안개 낀 강 낚싯배를 탄 이야기 내가 연천(漣川)에서 일없이 지내고 있을 때 웅연주인(熊淵主人)이 나를 강가로 초대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보니 주인이 조각배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주변은 온통 무성한 숲과 바위 벼랑이었고, 녹색 빛깔을 띤 강물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만 같았다. 배를 끌고 여울로 거슬러 올라가자 산은 깊고 모래는 희며 물은 세차게 콸콸 흐르고 있었다. 물가에 사람은 없고 흰 새만 물고기를 엿보고 있었는데,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에 주인과 객이 서로 즐거워하며 낚싯대를 드리우고서 즐기기도 하고, 노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기도 하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기도 하였다. 나루에 이르러서 소나기를 만났는데, 천지가 캄캄해지고 물결이 거세게 일어 마치 교룡이 출몰할 것만 같았다. 간간이 무지개가 보이다가 이윽고 비가 개니 낙조가 산을 머금어 산 그림자가 은은하고, 물가에는 연무가 자욱한데 멀리 포구에서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이 나에게, “참으로 즐겁습니다. 나를 위해 이를 기록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내가 “그러지요” 하고 답하였다. 마침내 그 일을 적어 안개 낀 강에 배를 띄우고 낚시하며 즐긴 일에 대한 기문으로 삼는다. 정미년(1667, 현종8) 7월에 미수는 기록한다. (기존 번역 전재) 煙江釣舟記 余無事在漣上。熊淵主人邀我於江干。至則主人乘葉子相待。江岸皆茂林巖崖。江水綠淨如染。挐舟上灘。山深沙白。水急水聲礚礚渚涯無人。有白鳥窺魚。舟行漸近。而不飛去也。於是主客相樂。或投竿而戲。或鼓枻而謳。或擧觴相屬。渡口逢急雨。天地黲黤。波浪爭回。若蛟螭出沒。虹霓間發。俄而雨霽。落照銜山。山影隱隱。煙渚迷茫。遠聞浦漵漁歌互答。主人曰。樂哉。盍爲我識之。余曰。諾。遂書其事。以爲煙江釣舟記勝。強圉協洽孟秋。眉叟。記。 강 이름으로 불린 남자가 있었으니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 잠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이들은 연강(漣江)이란 말이 겸재의 연강임술첩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한다. 그러나 미수기언에는 이미 연강(漣江)이 기록되었으니 오래전부터 쓴 지명이다. 을사년(1665, 현종 6) 선생 71세 3월에 연강(漣江)에 배를 띄웠다. (乙巳。先生七十一歲。 三月。泛舟漣江)。그때 지은 시 한 편. 산 밑 봄강 깊어 물 흐르지 않는 듯 山下春江深不流 녹색 부들 바람에 물결 일어 꽃은 뜨고 綠蘋風動浪花浮 풀은 푸르고 모래는 흰 물가의 저녁 草靑沙白汀洲晩 낚시 걷고 배를 돌려 나루로 돌아오네 捲釣移舟上渡頭 심지어 후세의 문집 향산집(響山集)에서는 강 이름을 빌려 미수 허목을 연강(漣江)으로 부르고 있다. 요즈음 연속극에서 예를 들어 가회동 사는 어느 분을 칭할 때 ‘가회동에서…’ 이렇게 부르는 식(式)이다. ‘연강께서 남긴 법도 있어 스승의 뜻이었으며(漣江遺法承師旨)’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제 옛 글 여행에서 돌아와 개안마루에서 다시 웅연을 내려다본다. 겸재의 그림 속에는 웅연에 도착한 배들이 웅연나루에 활기를 돋우고 있고 이쪽 삼곶리 쪽으로는 제법 큰 나룻배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오른쪽 배는 좌측으로 내려가고 있어 발란스가 맞춰져 있다. 방금 도착한 선유(船遊, 仙遊) 배들은 우람한 바위 아래 정박했는데 큰 주선(主船) 주위로 시중들던 배들이 여럿 보인다.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제목처럼 삿대는 내려지고 선단은 서 있다. 그림의 우측은 상류 삭녕 방향이고 좌측은 하류 군남댐 방향이다. 하류 쪽 삼곶리 방향 언덕은 대략 지금 필자가 서 있는 개안마루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은 선단이 서 있는 바위 넘어 집들이나 반대편 삼곶리 쪽 집들은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다. 웅연은 침묵의 강일 뿐이다. 어쩌면 자연으로 돌아간 평안(平安)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겸재를 따라 간 임진강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임진강 가에서 태어난 월북작가 박세영은 임진강을 노래하였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담담히 부른 이 노래를 듣는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 벌 이삭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20년쯤 전 남쪽 백두대간을 걷고 버켓 리스트(bucket list)에 넣은 항목이 북쪽 백두대간 길 걷기였다. 이제 연강임술첩을 마무리하며 하나 더 추가한다. “달밤 삭녕에서 웅연까지 배타고 내려오기.” 혹시 이 글을 읽으신 분 중 함께 하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함께 하시지요! 개안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위를 날고 있는 두루미 떼 [개안마루는 여울 위에 펼쳐진 등성이인데 이름처럼 ‘눈(眼)이 열리는(開) 풍광’을 볼 수 있다. 군남댐에서 약 3km 지점에 있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미끈하게 흐르는 강줄기에 눈이 호강한다. “강줄기가 용의 몸짓 같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숱한 묵객들은 이 풍경을 보고 애가 탔다. 이 중에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로 이름을 떨친 화가 겸재 정선(1676~1759)도 있다. 그는 배를 타고 연강을 유람한 후 ‘연강임술첩’을 그려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전문가들은 그가 개안마루 일대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북녘의 산줄기도 아득하게 보인다. 전망대가 잘 만들어져 있다. 나무로 넓게 데크를 만들었다. 캠퍼에게 명당이다. 이 멋진 풍경을 이불 삼아 하룻밤 묵어가는 이들도 있다.] 개안마루 전망대 개안마루 전망대 윗쪽에 새로 짓고 있는 대형 전망대 [개안마루 전망대~임진강 댑싸리 공원]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그리팅맨 2024년02월09일(금요일) 연천군 [연천 그리팅맨&개안마루&임진강 댑싸리공원&재인폭포&전곡 선사박물관&전곡리유적&은대리성] 탐방기 탐방지 : 연천군 [연천 그리팅맨&개안마루&임진강 댑싸리공원] 탐방코스 : [옥계상회 버스 정류장~(3.5km)~연천 그리팅맨~(1.2km)~개안마루~(4.5km)~임진강 댑싸리공원~(1.8km)~태풍전망대 입구 민통선 검문소~(4.0km)~옥계3리 버스 정류장] (15km) 탐방일 : 2024년02월09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연천군 중면 최저기온 영하 6도C, 최고기온 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34분 소요) 05:50~08:20 연신내역에서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연천역으로 이동한 후 연천역 3번 출구로 나옴 [2시간30분 소요] 08:20~08:22 연천역 3번 출구에서 연천로 건너편에 있는 연천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08:22~08:50 연천역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빵집에서 빵으로 간식 [4천원] 08:50~09:10 연천역 버스 정류장에서 옥계상회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82-2번 버스 승차 대기 09:10~09:21 82-2번 버스를 타고 연천역 버스 정류장에서 옥계상회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1분, 17개 정류장 이동] 09:21~10:03 경기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에 있는 옥계상회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 832 번지에 있는 그리팅맨으로 이동 10:03~10:12 2016년 임진강변 해발 205m 옥녀봉에 세워진 그리팅맨(연천 7경)을 사진촬영 [연천7경 : 옥녀봉의 인사하는 거인 그리팅맨 그리팅맨 : 북한과 소통과 화합을 위해 만든 조형물 소재지 : 경기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 832 연천 그리팅맨은 임진강 연강 나룻길이 조성되며 북한과 4km 떨어진 해발 200m의 옥녀봉에 설치된 인공 조형물이다. 연천 그리팅맨은 10m 높이로 북녘을 바라보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거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향후 임진강 건너편인 북녘땅, 황해북도 장풍 마량산에 그리팅맨이 건립되면 남북에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하는 조형물로 한반도 평화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그리팅맨이 15도 각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주변에 연천삼곶리돌무지무덤과 임진강 댑싸리공원, 군남홍수조절지 두루미테마파크 등이 있다. 그리팅맨은 임진강 연강 나룻길이 조성되며 북한과 4km 떨어진 해발 200m의 옥녀봉에 설치된 인공 조형물이다. 연천 그리팅맨은 10m 높이로 북녘을 바라보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거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향후 임진강 건너편인 북녘땅, 황해북도 장풍 마량산에 그리팅맨이 건립되면 남북에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하는 조형물로 한반도 평화를 상징하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그리팅맨이 15도 각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주변에 연천삼곶리돌무지무덤과 임진강 댑싸리공원, 군남홍수조절지 두루미테마파크 등이 있다.] ["인사는 모든 관계의 시작입니다" 브라보마이라이프 기사입력 2020-08-12 08:00 기사수정 2020-08-12 08:00 정미경 시니어기자 [시니어기자가 만난 新YEAR] 작품을 통해 평화를 꿈꾸는 유영호 작가 파주시 광탄면 야트막한 산 앞, 3305㎡(약 1000평) 규모의 야외 스튜디오에 푸른색의 인사하는 조각품들이 서 있다. ‘그리팅맨’(Greeting Man, 인사하는 사람)과 ‘월드미러’(World Mirror, 세계의 거울)의 조각가 유영호(55) 씨가 작업 중인 작품들이다. 유 작가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자신의 작품을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한 유영호 작가는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년에는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에 선정되는 등 다수의 수상 경력도 있다. 코로나19로 모든 행사와 교류가 중단된 초여름 날 만난 유영호 작가는 여전히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가 제일 바빠야 하는 해였어요. 연초부터 해외에 작품 설치가 계획돼 있었는데 다 연기됐죠. 베트남에도 3월에 보내려고 포장까지 해놨는데 미뤄졌어요. 멕시코 메리다에서는 아직 코로나19가 심각한 상황인데도 8월 말까지 작품을 보내달라고 해서 다음 주 중 컨테이너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6월에 프랑스 노르망디 쿠탕스에 설치할 예정이었던 작품은 1월 말에 자리만 잡아놓은 상태다. 자비로 해외에 ‘그리팅맨’ 설치 유영호 작가가 그리팅맨 해외 설치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뭘까. “미술계에서 작가가 성장해가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어요. 일반적으로는 뮤지엄에서 작품 발표를 해서 이름을 알리고 경력을 쌓는 것이죠. 선진국들은 그런 루트가 확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작가, 갤러리, 컬렉터가 어우러져 작품의 가치가 책정되는 케이스죠.” 그런데 한국은 대부분 국공립 뮤지엄이어서 작가들이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은 다음 국내에서 전시하는 방법을 선호한단다. “국내의 조각작품 시장은 협소해요. 해외 극소수 작가의 작품만 거래되는 정도죠. 한국에서 조각가로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제 작품을 해외로 보내는 방식을 선택한 거죠.” 그가 자비를 들여 해외에 작품을 설치하는 이유는 기증 프로젝트가 아니면 힘들어서다. 어느 한 장소에 영구적으로 외국 작가의 작품을 설치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 작가가 그리팅맨을 제작하게 된 동기도 궁금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할 당시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깊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큰절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시하자 그것을 본 네덜란드의 유명 작가 헨크 비스가 “그 행위가 인사가 맞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유럽 사람들은 인사를 잘하잖아요. 그러고 나서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관계가 시작되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죠.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도 관계의 출발은 인사로부터 시작된다고 봤어요. 우리의 큰절 문화가 유럽인들에게는 낯설었겠지만 인사에는 어떤 보편성이 있다고 확신했어요.” 그는 헨크 비스의 질문에서 영감을 받았고 인사에 대해 재인식을 하게 됐다. 그리팅맨이 탄생한 배경이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상대방도 존중하는 자세는 고개를 15° 숙인 각도예요. 너무 낮추는 건 가식적으로 느껴지거나 비굴해 보일 수 있거든요. 정치적 행위로도 인식되죠. 그리팅맨의 15° 각도 인사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나온 결과예요.” 이 작품의 푸른색은 인종을 초월한 중립적인 색으로 전 인류를 의미하며, 고려청자의 빛깔을 띤 색은 작품 배경인 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해외의 폭발적 반응 2012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그리팅맨을 처음 세운 후, 지금까지 국내외 10여 곳에 작품을 설치했다. 당시 우루과이에서는 라디오 생방송에서 찬반토론을 할 정도로 반대가 극심했다. “어느 곳이든 이질적인 것들에는 반감이 있기 마련이죠. 그러나 그리팅맨이 설치된 후에는 시민들 반응이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다음 해에 우루과이 관광청에서 만든 책자 앞 페이지에 그리팅맨이 소개될 정도였어요.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된 거죠. 작품이 설치된 자리는 우루과이에 입국하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인데 현재 ‘대한민국 광장’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어요. 해외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면 힘이 나요. 모두 자비로 설치하지만 문화 전파를 통해 더 큰 가치를 얻고 있죠.” 설치비보다 문화적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일 게다. 해외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됐고, 유 작가는 그리팅맨이 전 세계 소통의 상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설치되는 도시들은 나름의 기준으로 선정합니다. 천재지변을 당한 지역, 분쟁으로 고통을 겪었던 곳, 그리고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들입니다.” 조만간 작품이 들어설 멕시코 메리다는 한국과도 관계가 있는 도시다. 1905년 ‘지상낙원’이라는 말만 믿고 멕시코 이민선을 탔던 조선인들이 애니깽(선인장의 일종)이라는 농장에서 노예처럼 지낸 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5~6세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요. 수만 명이 그곳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했고요. ‘대한민국로’로 이름이 바뀐 거리의 원형 광장에 그리팅맨을 세울 겁니다.” 연천 옥녀봉의 화해 메시지 국내에서는 2007년 파주 헤이리에 처음 그리팅맨을 세운 후 분단의 현장에도 작품을 설치했다. 유 작가에게 제일 의미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2016년에 10m짜리 그리팅맨을 세운 연천 옥녀봉이에요. 북한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곳이죠. 남북 화해의 메시지를 담았어요.” 북녘을 향한 그리팅맨은 현재 연천의 랜드마크로 불리고 있다. 그는 언젠가는 북한에도 그리팅맨이 설치되어 남과 북이 서로 마주 보고 인사하기를 바란다. “옥녀봉은 민간인이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역으로, 남북 간 DMZ에서 6km 정도 거리에 있어요. 그리팅맨을 남과 북에 설치한다는 것은, 70년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예술이 작은 힘을 보탠다는 걸 의미하죠.”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평화의 작가’라고 부르는데 그는 아니라며 겸손해한다. 단지 분단 시대를 사는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2014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 광장에 세운 월드미러는 영화 ‘어벤져스2’에서 소개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명 ‘미러맨’(Mirror Man)으로 불리는 이 작품은, 두 사람이 붉은 사각 틀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거울이 없지만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우리는 결국 타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만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재작년에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 월드미러를 설치했어요. ‘세상의 거울’이자,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도 있죠. 에콰도르는 적도에 위치한 나라여서 남반부와 북반부가 만난다는 의미도 됩니다.” 현재 터키 북서부의 항구도시 차낙칼레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최장 길이의 다리를 만들고 있다. 내년에 다리가 완공되면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만남을 상징하기 위해 그의 작품을 세울 예정이다. 그리팅맨은 형태가 둥글둥글한 반면 월드미러는 각과 면으로 이루어졌다. 누드를 부담스러워하는 나라에서는 각이나 면으로 그런 느낌을 순화한단다. 그래서인지 월드미러를 원하는 나라들이 꽤 있다. 현재 추진 중인 이슬람 국가들을 위해 옷을 입힌 작품도 만들고 있다. 5년 안에 20개국에 그리팅맨 세우겠다 그는 서울, 경기도, 강원도 등 여러 지역에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공공미술은 보기에 편안하고, 내용도 쉽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젊은 시절 실험적이고 난해한 작품들도 많이 만들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만족스러워요.” 공공미술로 선정된 작품들의 수익금은 해외 프로젝트에 사용한다. 이러한 뜻에 공감하는 지인들이나 친목 단체가 후원도 한단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역시 그리팅맨에 관한 이야기다. “5년 안에 20개 나라에 그리팅맨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업이에요. 지금의 시공간에서 선택한 특별한 일이기도 하죠.” 그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다. 몇 년 전까지 대학에서 강의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 말년에는 은둔자로 살고 싶어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소통, 공감 등을 추구하는 그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니 아이러니하다. 젊은 시절에는 늘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요즘엔 글을 쓴다. 최근에는 그리팅맨 프로젝트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리팅맨 친구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 중 한 명이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서 그가 직접 낭송한 자작시 ‘프란체스코’, ‘형과 누나’ 등은 미세한 울림을 준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기자가 출발할 때까지 배웅하며 그는 그리팅맨처럼 15° 인사를 했다.] [전 세계에 보내는 한국의 인사…'그리팅맨' 작가 유영호 연합뉴스 기사 송고일 : 2021-03-18 "논란 속에 설치된 우루과이 1호 그리팅맨, 지역 명물 됐죠" (메리다[멕시코 유카탄주]=연합뉴스) 고미혜 특파원 = 남미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 지난 2012년 지구 반대편 이름 모를 작가의 거대 조각상이 세워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지에선 적잖은 논란이 벌어졌다. 왜 쓸데없이 돈을 들여 남의 나라 작가의 작품을 그것도 눈에 매우 잘 띄는 해변 공원에 세우느냐는 반발이 나왔고, 돈 주고 산 것이 아니라 기증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엔 작품이 나체라는 것에 대한 지적까지 나왔다. 그렇게 논란 속에 세워진 한국의 조각 '그리팅맨'(인사하는 사람)은 이제 몬테비데오 여행 책자에 등장하는 지역 명물이 됐다. 17일(현지시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대한민국로'에 해외 7번째 그리팅맨을 설치한 유영호(56) 작가는 몬테비데오 1호 그리팅맨 설치 과정을 떠올리며 "처음엔 낯선 것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상당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우루과이 일간 엘파이스에서 조각상 설치를 놓고 여론조사까지 했는데 부정적 반응이 80%였다고 했다. 그러나 여론이 반전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논란 속에 등장한 6m 높이 조각상은 그 낯섦과 독특함으로 금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의도치 않게 노이즈 마케팅이 톡톡히 효과를 본 셈이었다. "몬테비데오엔 중국 정부가 선물한 공자상도 있는데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리팅맨은 사회적으로 시끄럽다 보니 설치 때부터 유명해졌고, 논란이 지나간 후엔 많은 이들이 좋아하게 됐습니다. 정중한 인사 모습을 보면서 한국인의 따뜻함을 알게 됐다는 반응도 많이 전해 들었죠." 서울대 조소과를 나와 독일서 유학한 유 작가는 전시회에서 만난 한 유명 네덜란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인사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을 듣고 지구촌 그리팅맨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됐다. "인사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 인종, 종교 간 모든 관계의 시작이면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존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한국식 인사의 의미를 곳곳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확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루과이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는 중남미를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이어졌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만나는 파나마의 파나마시티, 적도가 지나는 에콰도르 카얌베 등 주로 인류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에 설치됐다. 이번에 그리팅맨이 설치된 메리다는 1905년 멕시코 한인 1세대 이민자 1천여 명이 온 곳으로, 116년 전 한국과 멕시코의 조우가 이뤄진 곳이다. 국내에도 양구, 연천, 제주 등에서 그리팅맨을 볼 수 있으며, 연내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가봉에도 설치될 예정이다. 영화 '어벤저스2'에도 나온 유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미러맨'도 에콰도르 키토와 터키 부르사에 설치됐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작품 제작과 운송 등에 드는 비용을 자비로 충당했다. "그리팅맨 프로젝트를 보면서 사람들이 많이 하는 오해가 '돈 많이 벌었겠다'는 것입니다. 돈 받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느냐'고 하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했다면 지금까지 지속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을 수도 있어요. 지금의 오해들이 나중엔 충분한 이해로 바뀔 것으로 기대합니다." 유 작가는 아르헨티나의 땅끝 우수아이아,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스페인 타리파와 튀니지 탕헤르 등에도 그리팅맨 설치를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곳보다 가장 그리팅맨을 세우고 싶은 곳은 가까운 북한이다. 그는 "연천에 있는 그리팅맨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마주 볼 작품을 세우고 싶어 다양한 경로로 여러 제안을 했다"며 "이것이 성사된다는 건 곧 남북관계가 진전했다는 의미일 테니 매우 뜻깊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아크의 그리팅맨, 세상을 연결하다 -작가 유영호 K-water 공식 블로그 '맛있는 수다(水多)' (2014. 4. 14. 14:00) 강 문화관 디아크(The ARC)에 설치한 500백 개의 인사하는 사람, 그리팅맨을 본 적 있으신가요? 그들은 인간과 자연에 끊임없이 인사하고 경외감을 표시하는데요. 그리팅맨은 유영호 작가의 설치미술이기 전에 그가 사유하고 통찰하는 방식입니다. 인사라는 아주 단순한 내용과 제스처로 세계를 연결하고 인간을 끌어 모으며 자연을 돌아보게 하는 유영호 작가를 만나보았습니다. 만남은 인사로 시작됐고, 연결됐어요. 대한민국과 우루과이, 지구 반대편에 선 두 나라는 어떤 공통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인종, 언어, 문화, 하물며 밤낮이 찾아오는 시간도 다르죠. 그러나 유일하게 닮은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인사하는 커다란 조각상입니다.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허리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는 사람은 지구 축을 중심으로 데칼코마니처럼 겹치는데, 그 나뉨과 겹침이 신기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자신에게 하는 인사처럼 보일 수도, 지구 대척점 안의 모든 것에 건네는 인사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강원도 양구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는 인사하는 사람, 그리팅맨으로 그렇게 연결되었습니다. 이는 작가 유영호의 작업 결과입니다. “인사는 모든 관계의 시작입니다. 또 인사는 만남과 존중, 경의와 경외, 화해와 평화를 상징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인사에서 자연과 지구 그리고 우주에 보내는 것까지 인사는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지구 반대편, 가장 먼 곳에서부터 평화와 사랑, 화해, 만남 등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 사람과 자연에 보내는 인사, 경외감, 존중 양구와 몬테비데오의 6m가 넘는 그리팅맨도 특별하지만 바로 앞에서 눈 맞추며 인사하는 그링팅맨은 더욱 특별한데요. 그것도 한꺼번에 500명의 그리팅맨과 만난다면 500배의 특별함이 더해질 수 있겠죠. 대구 강정보의 랜드마크, 강 문화관 디아크의 내부 중앙에는 500개의 그리팅맨이 서 있습니다. 디아크의 콘셉트 컬러인 파란색은 500개의 그리팅맨에서 최정점을 이루지요. 물이 흐르는 듯 투명한 질감의 바닥과 공간을 에워싼 파란색 그리팅맨은 극대화된 대비로 강렬하고 모던한 인상을 남깁니다. “디아크 전시는 의미가 깊죠. 늘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변함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누는 그리팅맨은 작가의 예술혼과 철학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유영호 작가는 디아크와 그리팅맨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며 수용할 수 있다고 피력합니다. 디아크가 사람과 자연을 조합하고 서로를 연결해주는 동기가 된다면, 그리팅맨은 사람과 자연에 보내는 인사·경외감·존중이 함축된 의미가 됩니다. 그 단순하고 간결한 깊이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들의 자세를 이끌기도 하지요. 이러한 이끌림과 웅변은 작가가 사람들을 만나는 꼭짓점인 것입니다. 여기에 비판과 비평은 공허할 뿐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에서 '한국 인사'를 하다 유영호 작가는 독일 유학 당시 이 인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고개를 까닥이며 스치듯 악수하는 서양식 인사가 아니라, 자세를 바로잡고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동양식 인사를 그들에게 선보였다고 합니다. 작가가 직접 등장하는 영상에는 마치 108배를 하는 듯한 인사가 무한 반복됩니다. 그들 눈에 인사 프로젝트는 충분히 신기하고 놀랍고 아름다웠습니다. 작가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인사하는 방식과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사 프로젝트는 작가의 정신이 된 것이죠. 귀국 후 지인이 갤러리 건축과 조각 작품을 의뢰했는데, 그때 처음 그리팅맨을 선보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작가의 촉수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링팅맨 앞에 선 이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작품과 인간이 편안하고 자연스레 소통하고 있음을 깨달았어요. 단순한 조각이 아니었던 거죠. 무생물이지만 살아 있는 존재 같은 의미가 될 수 있구나 싶었고, 그게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그리팅맨 프로젝트에 돌입했습니다.” 프로젝트의 첫 시도는 지구 맞은편에 있는 우루과이에 대형 그리팅맨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작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소형 그리팅맨 1000여 개를 제작하고 전시·판매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자의 사인을 전부 받았지요. 그리팅맨 프로젝트는 작가 혼자만의 역량이 아닌, 그들과 함께 일구고 공유한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000개의 사인은 그리팅맨과 함께 2012년 우루과이로 이동했어요. 그리팅맨을 세운 후 우루과이 국민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그 인기에 힘입어 작품 주변에 무궁화를 심었고 지금은 경비 인력이 24시간 상주한다고 합니다. 또 그들에게 한국식 인사를 전파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등 문화 전도사 역할도 해내고 있습니다. ▮ 작가의 화두, 인사와 반성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듯 똑같은 모습. 반대편에 서 있는 모습은 곧 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인데, 유영호 작가는 이를 ‘반성’이라고 불렀어요. 바닥에 그은 선 하나로 남자와 화려한 빛깔의 추상 조각들이 대칭되어 있습니다. 두 세계가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형상이지요. ‘인사하는 사람’과 더불어 ‛반성’은 유영호 작가의 또 다른 사유 방식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5월까지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유영호-반성展>을 연다고 하는데요. 조각 속에 작가의 반성과 더 나아가 현대의 미술사관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평의 의미도 담았습니다. 작가는 초창기에 복잡하고 심오하며 철학적 작품을 많이 구상하고 선보였지만 그의 작품은 갈수록 간결하고 단순해집니다. 그 계기이자 전환점이 바로 ‘인사하는 사람’이고 ‘반성’인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대중에게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미술사에서는 담론의 여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인사와 반성을 선보인 작가다운 담백함과 솔직함은 역시 진짜배기인가 봅니다. ▮ 다양한 사람을 연결하는 지구적 커뮤니케이션 그리팅맨 2호는 2013년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이던 강원도 양구 해안 마을에 설치됐습니다. 양구는 유영호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데요. 그리팅맨은 설치 장소에 따라 ‘안녕하세요’,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등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이곳 양구에서는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가 강하다고 작가는 밝힌 바 있어요. 그러나 원래 계획한 장소인 비무장지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4km 떨어진 곳에 설치되어 작가는 미완의 프로젝트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는 완결할 것입니다. 또한 올해는 베트남에 그리팅맨 3호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해요. 그리팅맨은 팔레스타인·베를린·갈라파고스·아프리카 희망봉 등에서 종교와 문화, 인종, 정치적 차이를 극복하고 교감하는 평화 메신저가 되지 않을까요? “나에게 미술은 세상을 발견하고 새롭게 바라보며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따라서 작업 과정에서 결과까지, 작품을 설치한 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유·무형의 관계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작품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소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연천 9경 연천1경 : 줄타는 광대의 슬픈 전설이 전해지는 재인폭포 연천2경 : 임진강변에 쌓은 고구려군의 요새 호로고루 연천3경 : 임진강변을 따라 위풍당당하게 선 임진강주상절리 연천4경 : 선사인의 숨결이 들려오는 연천 전곡리유적 연천5경 : 가장 가까이 북한을 느낄 수 있는 곳인 태풍전망대 연천6경 : 선사시대의 시간을 담은 전곡선사박물관 연천7경 : 옥녀봉의 인사하는 거인 그리팅맨 연천8경 : 고려의 종묘라 불리는 숭의전 연천9경 : 웅장한 현무암 절리를 벗삼아 걷는 차탄천주상절리] 10:12~10:30 개안마루로 이동 [개안마루는 여울 위에 펼쳐진 등성이인데 이름처럼 ‘눈(眼)이 열리는(開) 풍광’을 볼 수 있다. 군남댐에서 약 3km 지점에 있다.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미끈하게 흐르는 강줄기에 눈이 호강한다. “강줄기가 용의 몸짓 같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숱한 묵객들은 이 풍경을 보고 애가 탔다. 이 중에는 조선후기 진경산수화로 이름을 떨친 화가 겸재 정선(1676~1759)도 있다. 그는 배를 타고 연강을 유람한 후 ‘연강임술첩’을 그려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전문가들은 그가 개안마루 일대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북녘의 산줄기도 아득하게 보인다. 전망대가 잘 만들어져 있다. 나무로 넓게 데크를 만들었다. 캠퍼에게 명당이다. 이 멋진 풍경을 이불 삼아 하룻밤 묵어가는 이들도 있다.] 10:30~10:35 개안마루에서 주위 풍경을 사진촬영 [[겸재 그림 길 (80) 연강임술첩 ④] 임진강변에서 듣는 ‘겨레를 가르지는 못하리라’ CNB저널 제703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1.07.13 13:37:56 글 : 이한성 교수 개안마루에는 겸재의 웅연계람(熊淵繫纜)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아래 연강에는 웅연(熊淵: 곰소)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겸재의 그림처럼 웅연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날 밤 배를 타고 내려온 뱃길이 선연히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횡산(橫山: 비끼산)으로 보이는 산에서 산줄기들이 이어져 나오고 물길에는 장군교의 교각도 보인다. 강 우측 강가에는 백제 때 석실무덤도 보이고 들판 안쪽으로는 중면 삼곶리도 자리잡고 있다. 그래도 가장 주목할 곳은 웅연의 중심이 되는 강가 우뚝한 바위 모습이다. 옛사람들은 이 바위를 중심으로 아래위 강을 곰소(熊淵)라 불렀다. 이곳에 배를 띄운 사람은 연강임술첩(1742년)의 주인공들만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있었겠는데 연강임술첩이 나오기 70년 전인 1672년(현종 13년) 미수 허목 일행 6인은 웅연에서 즐거운 뱃놀이를 하였다. 이 기록이 ‘미수기언’에 웅연범주도기(熊淵泛舟圖記)로 실려 있다. 미수 선생이 연천 석록(石鹿)에 은거하고 있을 때 미수를 따르던 권공산(권대재: 공산현감을 지냄), 이우당문집을 남긴 권저작(권환), 청빈한 선비 권조대가 찾아와 며칠을 즐겁게 보내는 중, 정극가(정창기: 병조판서를 지냄), 김현서가 합류하여 웅연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그 후 권대재는 이때의 뱃놀이를 그림으로 남겨 미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그 글이 ‘웅연범주도기’로 남았다.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를 기록한다. 임자년(1672, 현종13) 금상 13년 4월에 권 공산(權公山)이 권 저작(權著作), 권 조대(權措大) 두 사람과 함께 석록(石鹿)의 산속 집으로 늙은이를 찾아왔기에 적적하던 중에 마음을 툭 터놓고 며칠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함께 웅연을 구경하기로 하였는데, 정극가(鄭克家)가 뒤를 이어 이르렀고, 김현서(金玄瑞)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전날 밤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마침 내리던 비가 개어 모래톱과 물가의 맑은 경치가 볼만하였다. 주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추었기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튿날 웅연으로 나가서 신비로운 석문(石文) 글씨를 보았다. 기괴한 글씨가 혹은 세로로 혹은 가로로 뻗고, 혹은 합해지고 혹은 흩어지는 등 변화가 놀라웠으니, 이는 기화(氣化)가 이루어 낸 귀신의 자취라 하겠다. 이어 앞 강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강 양쪽은 모두 무성한 숲과 깎아지른 듯한 벼랑인데, 간혹 향기로운 풀과 긴 모래톱이 눈에 띄었다. 물길을 거슬러서 장군탄(將軍灘)으로 올라가니 남쪽 기슭의 맑게 갠 봉우리가 가장 수려하였다. 이를 부용봉(芙蓉峯)이라고 이름 지었다(권 공산이 명명한 것이다). 그 위의 망저탄(望諸灘)은 산이 깊고 물길이 먼데, 나루터에는 사람이 없고 물새들만 공중을 빙빙 날다가 내려앉았다. 배를 돌려 내려와서 노자암(鸕鶿巖)에 이르러 객들이 각자 흩어져 돌아가면서 서로 손을 잡고 이별하였다. 뒤에 공산(公山)이 충주(忠州)로 부임한 다음 뒤미처 웅연범주도를 만들고는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지난 10월에 현서가 임단(臨湍)에서 객사하였다. 지금 그 이름이 종이에 적혀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 소탈한 성격에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이렇게 죽은 것이 애석하여 실로 슬픔이 북받친다. 금상 15년(1674) 2월 상순에 허목 미수는 기록한다. (기존 번역 전재) 熊淵泛舟圖記 壬子 十三年四月。權公山與權著作權措大兩人。訪老人於石鹿碞居。寂中得良晤數日。敍心開暢。仍相從觀於熊淵。鄭克家踵至。金玄瑞亦與之相期。前夕已至矣。適雨新晴。洲渚霽色。可喜。主人公爲之設酒食爲禮。甚懽。明日。出淵上觀石文神書。書怪怪奇奇。或豎或衡或合或散。變動可駭。蓋氣化成之鬼神之跡也。仍泛舟前江。挾江皆茂林峭岸。往往有芳草。長洲遡流。上將軍灘。南岸晴峯最秀。曰芙蓉峯。權公山命名。 其上望諸山深水遠。渡口無人。水鳥翔集。廻船下流。至鸕鶿碞。客各散歸。相與摻手爲別。後公山出忠州。追作熊淵泛舟圖。屬老人記之。 前十月。玄瑞客死臨湍。今其名在紙。其人已亡。惜其疏散好遊。良爲於悒。十五年仲春上浣。許穆眉叟。記。 개안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웅연 주변 그리운 지명들이 나온다. 석문(石文), 장군탄(將軍灘), 망저탄(望諸灘), 노자암. 저 산봉우리 중 하나는 권대재(공산)가 이름 붙인 부용봉(芙蓉峰)이겠지. 그런데 이때 그려진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는 어디에 있을까? 아쉽게도 그 행방은 묘연하다. 어서 나와라. 보고 싶다. 아마도 이 그림을 보았을 남원의 학자 방두천(房斗天)은 미수 선생 시에서 차운(次韻: 운을 빌려 옴)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熊淵泛舟圖。敬次眉叟先生韻呈權參判 瑍). 그의 문집 희암집(希菴集)에 전한다. 이를 보아 웅연범주도는 멋진 그림이었을 것이다. 仙舟自在在中流。 신선이 탄 배 유유자적 강 가운데 있는데 芳草生洲白鳥浮。 향그런 풀 물가에 흰 새는 두둥실 回首澄淵留活水。 고개 돌려 바라보니 맑은 소엔 물길 머물고 躍魚今古見源頭。 뛰어오른 물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始源을 바라보네 그런데 위 미수 선생 글을 읽으면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主人公爲之設酒食爲禮(주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추었기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주인이라니…? 웅연가 지금의 삼곶리에 주인처럼 붙박이로 살고 있었던 이가 있었다. 이름은 이진무(李晉茂, 1608~1677), 본관은 전주, 자는 무경(茂卿), 호는 취우(醉愚)이다. 미수의 둘째 아들의 장인이니 미수와는 사돈 관계였으며 미수의 종형 허후(許厚)의 제자였다. 평생토록 연천의 웅연 가에서 낚시질하고 두 마리 학을 기르며 처사(處士)로 살았다고 한다. 이 사돈 덕에 미수는 자주 웅연에 나가 즐기며 고기도 낚았다. 안개 낀 강 낚싯배를 탄 이야기 내가 연천(漣川)에서 일없이 지내고 있을 때 웅연주인(熊淵主人)이 나를 강가로 초대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보니 주인이 조각배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주변은 온통 무성한 숲과 바위 벼랑이었고, 녹색 빛깔을 띤 강물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만 같았다. 배를 끌고 여울로 거슬러 올라가자 산은 깊고 모래는 희며 물은 세차게 콸콸 흐르고 있었다. 물가에 사람은 없고 흰 새만 물고기를 엿보고 있었는데,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에 주인과 객이 서로 즐거워하며 낚싯대를 드리우고서 즐기기도 하고, 노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기도 하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기도 하였다. 나루에 이르러서 소나기를 만났는데, 천지가 캄캄해지고 물결이 거세게 일어 마치 교룡이 출몰할 것만 같았다. 간간이 무지개가 보이다가 이윽고 비가 개니 낙조가 산을 머금어 산 그림자가 은은하고, 물가에는 연무가 자욱한데 멀리 포구에서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이 나에게, “참으로 즐겁습니다. 나를 위해 이를 기록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내가 “그러지요” 하고 답하였다. 마침내 그 일을 적어 안개 낀 강에 배를 띄우고 낚시하며 즐긴 일에 대한 기문으로 삼는다. 정미년(1667, 현종8) 7월에 미수는 기록한다. (기존 번역 전재) 煙江釣舟記 余無事在漣上。熊淵主人邀我於江干。至則主人乘葉子相待。江岸皆茂林巖崖。江水綠淨如染。挐舟上灘。山深沙白。水急水聲礚礚渚涯無人。有白鳥窺魚。舟行漸近。而不飛去也。於是主客相樂。或投竿而戲。或鼓枻而謳。或擧觴相屬。渡口逢急雨。天地黲黤。波浪爭回。若蛟螭出沒。虹霓間發。俄而雨霽。落照銜山。山影隱隱。煙渚迷茫。遠聞浦漵漁歌互答。主人曰。樂哉。盍爲我識之。余曰。諾。遂書其事。以爲煙江釣舟記勝。強圉協洽孟秋。眉叟。記。 강 이름으로 불린 남자가 있었으니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 잠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이들은 연강(漣江)이란 말이 겸재의 연강임술첩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한다. 그러나 미수기언에는 이미 연강(漣江)이 기록되었으니 오래전부터 쓴 지명이다. 을사년(1665, 현종 6) 선생 71세 3월에 연강(漣江)에 배를 띄웠다. (乙巳。先生七十一歲。 三月。泛舟漣江)。그때 지은 시 한 편. 산 밑 봄강 깊어 물 흐르지 않는 듯 山下春江深不流 녹색 부들 바람에 물결 일어 꽃은 뜨고 綠蘋風動浪花浮 풀은 푸르고 모래는 흰 물가의 저녁 草靑沙白汀洲晩 낚시 걷고 배를 돌려 나루로 돌아오네 捲釣移舟上渡頭 심지어 후세의 문집 향산집(響山集)에서는 강 이름을 빌려 미수 허목을 연강(漣江)으로 부르고 있다. 요즈음 연속극에서 예를 들어 가회동 사는 어느 분을 칭할 때 ‘가회동에서…’ 이렇게 부르는 식(式)이다. ‘연강께서 남긴 법도 있어 스승의 뜻이었으며(漣江遺法承師旨)’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제 옛 글 여행에서 돌아와 개안마루에서 다시 웅연을 내려다본다. 겸재의 그림 속에는 웅연에 도착한 배들이 웅연나루에 활기를 돋우고 있고 이쪽 삼곶리 쪽으로는 제법 큰 나룻배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오른쪽 배는 좌측으로 내려가고 있어 발란스가 맞춰져 있다. 방금 도착한 선유(船遊, 仙遊) 배들은 우람한 바위 아래 정박했는데 큰 주선(主船) 주위로 시중들던 배들이 여럿 보인다.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제목처럼 삿대는 내려지고 선단은 서 있다. 그림의 우측은 상류 삭녕 방향이고 좌측은 하류 군남댐 방향이다. 하류 쪽 삼곶리 방향 언덕은 대략 지금 필자가 서 있는 개안마루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은 선단이 서 있는 바위 넘어 집들이나 반대편 삼곶리 쪽 집들은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다. 웅연은 침묵의 강일 뿐이다. 어쩌면 자연으로 돌아간 평안(平安)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겸재를 따라 간 임진강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임진강 가에서 태어난 월북작가 박세영은 임진강을 노래하였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담담히 부른 이 노래를 듣는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 벌 이삭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20년쯤 전 남쪽 백두대간을 걷고 버켓 리스트(bucket list)에 넣은 항목이 북쪽 백두대간 길 걷기였다. 이제 연강임술첩을 마무리하며 하나 더 추가한다. “달밤 삭녕에서 웅연까지 배타고 내려오기.” 혹시 이 글을 읽으신 분 중 함께 하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함께 하시지요! ] 10:35~11:38 경기 연천군 중면 군중로 397-132 번지에 있는 임진강 댑싸리공원으로 이동 11:38~11:45 임진강 댑싸리공원을 탐방 [임진강댑싸리공원 - 2만그루의 댑싸리와 꽃들로 조성된 공원 임진강 댑싸리 공원은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 앞 약 3만㎡ 규모로 댑싸리 2만여 그루를 심어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댑싸리 외에 황화 코스모스, 국화, 백일홍, 천일홍, 마리골드, 일일초, 칸나 등 다양한 꽃들도 볼 수 있다. ‘겸허, 청초한 미인’의 꽃말을 가진 댑싸리는 8월 말부터 불긋불긋해지고 9월 초 분홍색과 빨간색, 주황색으로 물들어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임진강 댑싸리 공원은 가족, 연인과 조용히 자연을 즐기면서 인생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곳으로 서울 근교에 자리해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하다. 주변에 태풍전망대와 군남홍수조절지 두루미테마파크 등도 함께 관광할 수 있다. ※반려동물 동반 가능 (단, 개목줄 착용, 배설물 처리를 위한 비닐봉지 등을 구비한 이용객에 한하여 허용) 문의 및 안내 : 031-839-2609 주소 : 경기 연천군 중면 군중로 397-132 이용시간 : 상시 개장 휴일 : 년중 무휴 주차 : 있음 주차요금 : 없음 입장료 : 무료] 11:45~12:03 태풍전망대 입구에 있는 민통선 검문소로 이동 [자차로 온 방문객만 통과할 수 있고, 도보 여행객은 안보상의 이유로 통과할 수 없다는 군부대 규정 때문에 태풍전망대 방문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12:03~12:55 경기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에 있는 옥계3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2:55~13:00 옥계3리 버스 정류장에서 연천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100번 버스 승차 대기 13:00~13:11 100번 버스를 타고 옥계3리 버스 정류장에서 연천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1분 소요] 13:11~13:48 연천역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중식당 ‘다래향’에서 짬뽕으로 점심식사 [8천원] 13:48~14:00 연천역 옆에 있는 연천 씨티투어 버스 탑승권 매표소에서 연천 씨티투어 탑승권을 구입 후 씨티투어 버스 승차 대기 [씨티투어 탑승권 : 경노 우대요금 3천원] 14:00~14:18 연천 씨티투어 버스를 타고 연천역에서 재인폭포 탐방로 입구로 이동 [18분 소요] 탐방지 : 연천군 [재인폭포&전곡 선사박물관&전곡리유적&은대리성] 탐방코스 : [재인폭포 탐방로 입구~(1.2km)~재인폭포~(1.2km)~재인폭포 탐방로 입구~(씨티투어 버스로 이동)~전곡 선사박물관 입구~(0.3km)~전곡 선사박물관~(0.2km)~전곡리유적~(2.1km)~은대리성~(1.5km)~전곡역] (도보 이동거리 : 6.5km) 탐방일 : 2024년02월09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연천군 중면 최저기온 영하 6도C, 최고기온 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25분 소요) 14:18~14:38 경기 연천군 연천읍 부곡리 216 번지에 있는 재인폭포 탐방로 입구에서 탐방출발하여 재인폭포(才人瀑布)로 이동 14:38~14:48 재인폭포(才人瀑布)를 사진촬영 후 휴식 [재인폭포(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부곡리 192 재인폭포는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오래 전부터 명승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재인폭포는 북쪽에 있는 지장봉에서 흘러 내려온 작은 하천이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현무암 주상절리 절벽으로 쏟아지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또한, 재인폭포 주변에는 천연기념물 어름치와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 등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폭포의 이름과 관련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재인폭포에서는 다양한 현무암의 특징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주상절리를 비롯하여 하식동굴과 포트홀, 가스튜브 등을 볼 수 있다. 높이 약 18m에 달하는 폭포는 계속해서 폭포 아래를 침식시켜서 수심 5m에 달하는 포트홀을 만들었다. 포트홀이란 하천에서 암석의 오목한 곳이나 깨진 곳에 와류(물이 회오리 치는 현상)가 발생하여 깊은 구멍이 생겨난 것을 말한다.] [재인폭포에 관한 전설. 줄거리 옛날에 새로 부임한 원님이 우연히 이 고을에 사는 재인의 아내를 발견하였다. 원님은 재인 아내의 미모에 반하여 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재인의 아내는 “쇤네는 주인이 있는 아낙입니다.” 하고 강력히 거절하였다. 색욕에 사로잡힌 원님이 “네 서방이 뭐하는 놈이냐?” 하고 물으니, 여인은 대답하기를 “이 고장에서는 제일 소문난 외줄타기 재인입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답하였다. 이에 원님은 재인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려는 생각으로 줄타기 대회를 열기로 하고, 재인을 죽이기 위해 밧줄에 칼집을 내서 폭포 위의 절벽에 매어 놓고는 줄을 타게 하였다. 재인이 떨어져서 죽으니 원님은 여인에게 “이제는 네 남편이 없으니, 나와 같이 살아도 되지 않겠느냐?” 하고는 강제로 수청을 들게 하였다. 재인의 아내는 원님의 강압을 이기지 못해 수청을 들지 않을 수 없었지만, 원님이 밤에 범하려고 접근하자 원님의 코를 물어뜯고 자결하여 절개를 지켰다. 이 일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재인과 아내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폭포를 ‘재인폭포’라 하였고, 그들이 살던 마을은 ‘코문이’라고 하였다. 코문이는 다시 고문리(古文里)로 정착되었다. 변이 재인폭포란 이름은 줄타기 재인이 폭포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유래에서 비롯한 것이다. 여기에다 폭포의 소재지 고문리가 ‘코문이’로 구전되면서 두 개의 화소(話素)가 하나의 이야기로 정착되어 지금의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분석 <재인폭포전설>은 <춘향전>, <도미전>과 같은 전형적인 관탈민녀형의 이야기이다. 권력으로 여성을 빼앗으려는 권세가의 탐욕을 비판하는 내용이 <재인폭포전설>의 요점이다. 지체가 낮은 재인의 부인은 권력에 굴하지 않고 탐욕스런 관리의 코를 물어뜯어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폭포의 이름을 ‘재인’이라 명명하는 한편, 관리의 코를 물어 저항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코문이’라는 지명이 하나의 전설로 구전되면서 이 설화의 주제의식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 의의 폭포에 관한 전설은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재인폭포전설>에서는 부패한 관리의 폭정과 천대받는 광대의 한이 당대의 실상을 풍자하는 듯이 생성되고 구전된다. 여기에다 재인 아내의 절개까지 부연하고 있어 교훈적인 기대치를 내포하고 있다. 위정자의 실정에 대해서는 질책을 하는 한편, 천민층의 도적적 관념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는 심리가 <재인폭포전설>의 전승을 더욱 굳건히 하고 있다.] 14:48~15:08 재인폭포 탐방로 입구로 회귀 15:08~15:21 휴식 15:21~15:53 씨티투어 버스를 타고 재인폭포 탐방로 입구에서 전곡 선사박물관 입구로 이동 15:53~15:58 경기 연천군 전곡읍 평화로443번길 2 번지에 있는 전곡 선사박물관으로 이동 15:58~16:21 전곡 선사박물관을 관람 [전곡선사박물관은 동아시아 최초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발견으로 세계 구석기 연구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던 역사적 현장인 전곡리 구석기유적지에 건립된 유적박물관이다. 경기도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26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전곡리 유적의 영구적인 보존과 활용을 위해 오랜 기간 전곡선사박물관의 건립을 추진해 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보아 2011년 4월 25일 마침내 전곡선사박물관의 개관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곡선사박물관은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인 전곡리 선사유적의 이해와 체험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관람객이 더욱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방문객에 대한 충실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경기도민을 비롯한 모든 방문객의 문화향유의 기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전곡선사박물관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 전곡선사박물관은 전곡리 구석기유적지에서 출토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등의 구석기 유물들을 중심으로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시대 문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주제의 유물들로 전시공간을 구성하였다.] 16:21~16:25 경기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1510 번지에 있는 연천 전곡리유적으로 이동 16:25~16:53 연천 전곡리유적을 탐방 [연천 전곡리유적(漣川 全谷里遺蹟) 문화재 지정 사적 제268호 건립시기 구석기시대(전기) 성격 생활유적 면적 77만 8,296㎢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양연로 1510 외 요약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석기시대 구석기의 주먹도끼·긁개·석핵 등이 출토된 생활유적. 사적. 목차 개설 내용 의의와 평가 개설 사적 제268호. 지정면적 778,296㎢. 1978년에 당시 동두천 주둔 미군인 보웬(Bowen, G.)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1978년에서 1983년까지 6차례, 1986년에 한 차례의 발굴 조사가 있었다. 중부 충적세 후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은 현재 전곡읍 남쪽 한탄강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전곡읍에서 한탄강 유원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양편으로 북서쪽에 제1지구, 남쪽으로 서편이 제2지구, 동편이 제3지구이다. 제4지구는 제1지구의 강 건너편 대지 위에 분포해 있다.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03′, 북위 38°01′에 해당된다. 현재까지의 발굴은 모두 제2지구에서 실시되었다. 내용 1) 지질 및 연대 전곡리 일대는 추가령지구대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경기변성암류인 편마암과 화강암이 선캠브리아기에 형성되어 지질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전곡리의 동북편으로 연천과 철원 사이의 지역에는 중생대동안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응회암·현무암·역암 등이 형성되어 있다. 동남편으로는 대보거정화강암류가 중생대 쥐라기에 분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곡리 일원을 포함한 한탄강 연안지역에는 신생대 제4기에 분출된 현무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현무암은 철원·평강지역에 산재하는 소분화구로부터 급격하지 않은 분류(噴流)의 양상으로 흘러 고기(古期) 한탄강·임진강을 따라 하류인 문산까지 진출해 있다. 용암류층은 상류에서 6매, 하류인 문산에서 1매가 보이며, 유적이 있는 전곡리에서는 2매가 관찰되고 있다. 전곡리의 2매는 포타슘·아르곤 연대측정결과, 하부의 것은 대략 60만년 전후, 상부의 것은 30만년 전후에 분류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 현무암층들을 전곡 현무암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브루네스 정지자기기(正地磁氣期)에 해당되고 있다. 전곡 현무암 분출 전의 고기 한탄강의 퇴적은 현재의 한탄강을 따라서 현무암 아래에 미고결의 사력층으로 나타나 백의리층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의 한탄강은 원래 현무암 분출 후 넓게 형성된 하상 위를 한동안 흐르면서 하상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현무암을 침식해 결국 오늘날의 한탄강으로 안정하게 되었다. 전곡 현무암은 냉각시 수축의 차이로 인해 발달하게 된 주상절리 등의 구조로 균열이 있어서, 서리작용과 집중호우의 기후현상이 특징인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짧은 기간동안 침식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현무암대지 위에 존재하는 구석기 포함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대지 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기간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빠른 속도의 현무암침식과 현무암이 30만년 전경에 분출된 것으로 본다면, 대지 위의 구석기 포함층의 형성연대는 적어도 20만년 전후 이하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전곡리 유적의 적색점토가 18∼21만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국 뤄촨(洛川) 뢰스층의 적색토대와 연결될 수 있는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연대관과는 별도로 퇴적층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es-cence dating method)에 의해 얻어진 약 4만 5000B.P.를 유적의 연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2) 퇴적층 퇴적층은 지점에 따라 1m 미만의 깊이에서 6∼8m 내외의 깊이까지 드러나고 있다. 제2지구의 발굴에서는, 동편 언덕에서 점토층으로만 이루어진 퇴적층이 있고, 서편의 강쪽 능선에서는 두터운 굵은 모래층이 점토층 아래에 드러나고 있다. 이 모래층은 다시 미세사층을 덮고 있다. 이 회색 또는 황색의 미세사층은 제2지구 서편에 버려진 유로(流路)에 형성된 우각형호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모래퇴적은 당시 이 지역의 유로가 활동적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일부 사질층에서는 유물집중층이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유수에 의해 재퇴적된 것으로 판단된다. 점토퇴적물은 유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범람원 퇴적으로 보이는데 유물의 집중이 산발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한탄강이 현무암대지 위에서 퇴적층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단속적으로 고인류가 출현해 사냥과 채집을 하는 구석기 유적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퇴적층 속의 유물은 일부 지질학적인 변동으로 재퇴적되었거나 퇴적시에 지표수 그리고 지중에서 벌레와 식물뿌리 등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형되어 현재 고인류의 직접적인 행위파악이 가능한 생활면은 보이지 않고 있다. 3) 유물 7차에 걸친 발굴에서 3,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되었고 이보다 많은 수가 지표에서 채집되었다. 석기는 주로 석영맥암과 규암을 이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며 이 외에 현무암·편마암·운모편암도 소량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재료들은 거의 모두 당시의 하상에 존재하던 강자갈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1m 정도 크기의 냇돌도 있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hand-axe)들로 양면가공된 것과 외면가공된 것이 있다. 평면이 타원형인 것과 첨두형인 것이 모두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몸통이 두텁고 큼직한 박편흔으로 덮여 있어서 아프리카의 상고안(Sangoan) 석기공작과 지형적 유사성이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주먹도끼 외에도 가로날도끼와 뾰족끝찍개(pick) 등의 대형 석기가 존재하고 있다. 찍개(chopper)는 양면가공과 외면가공의 것들이 있는데 대부분 냇돌 또는 냇돌조각으로 만들었다. 다각면원구는 상당히 구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불규칙다면체까지 여러 가지 모양이 있는데 대부분 한쪽 면에서 삼면까지 자연면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소형 석기로는 긁개가 주류를 이루고 소량의 첨두기와 홈날석기 등이 채집되었다. 긁개는 직선날·볼록날·오목날 등의 형식이 보인다. 몸통이 두툼하고 급경사인 볼록날의 긁개가 보다 정형화한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소형 석기들은 집중가공된 것이 적어서 제작상의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석핵은 2, 3매의 박편을 떼어낸 변형된 냇돌 또는 즉시석핵(casual core)에서부터 보다 정형화한 반원추형 석핵에까지 다양하다. 즉시석핵류가 정형화한 형태의 것들보다도 훨씬 많다. 다량의 박편을 떼어낸 경우라 하더라도 일정 타격면을 반복 또는 규칙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불규칙하게 박편제작한 경우가 훨씬 많다. 박편제작이나 가공에는 직접타격법(돌망치를 사용한)이 주로 사용되었다. 주먹도끼 또는 가로날도끼 등의 대형 석기제작을 위한 대형 박편의 제작에는 대석법도 사용되었다. 박편은 대부분 천석의 자연면 평면이나 박리흔 평면을 이용해 떼어냈으며 소수의 다각모서리 타격면(facetted striking platform)이 보이나 조정타격법으로 볼 수는 없다. 많은 수의 박편이 배면(dorsal face)에 자연면이 남아 있고, 박리각이 100∼105°와 110∼115° 두 범위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일한 타격면을 2차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 중 다듬은 석기는 대체로 5∼15% 내외이다. 약간의 석핵과 박편이 존재하고 대형 또는 소형의 석편과 부스러기가 많은 수(80% 내외)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량의 자연천석도 존재한다. 주먹도끼 등 양식적으로 발달한 석기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기법으로는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양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석재의 제약성과 함께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온대환경의 적응과정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들은 1970년대 말까지 이러한 석기의 존재유무로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으로 구석기문화를 2분하던 모비우스의 학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이다. 이로써 세계 구석기학계의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도 구석기공작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한반도 내에서는 빈약한 전기 구석기공작 이해에 풍부하고도 획기적인 자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부 홍적세동안 고인류의 서식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전곡리 유적조사를 계기로 한탄강·임진강 유역에 대한 4기 지질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유적의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이 제고됨으로써 구석기연구의 방법론 발달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16:53~17:07 경기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번지에 있는 연천 은대리성으로 이동 17:07~17:20 연천 은대리성(漣川 隱垈里城)을 탐방 [연천 은대리성(漣川 隱垈里城)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에 있는 삼국시대의 성곽. 2006년 1월 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은대리 577 등 시대 : 삼국시대 크기 : 면적 33,750㎥ 한탄강 북쪽 기슭, 장진천의 합류 지점에 형성된 삼각형의 하안단구 위에 축조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이다. 평면의 형태는 삼각형으로,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1,005m이고 동서 400m, 남북 130m이다. 성 내부의 면적은 약 7,000평 정도인데 일부는 경작지로 이용되고 나머지 부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성벽은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양쪽 기단부만 돌로 쌓았고 안쪽과 기단 윗부분은 흙을 다져 쌓았다. 현재 동쪽과 북쪽 성벽의 상당 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나 성 내부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성의 남쪽과 북쪽은 한탄강에 접하여 낭떠러지가 형성되어 있어 동쪽 부분을 제외한 다른 방면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성 안에는 문지 3개소, 건물지 1개소, 치성 2개소가 확인되었고 경작지에서 철기 조각과 백제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조각, 그리고 회식 연질(軟質)의 고구려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2006년 1월 2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연천군이 관리한다.] 17:20~17:43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333-10 번지에 있는 전곡역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7:43~17:44 전곡역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17:44~19:39 1호선 전철을 타고 전곡역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시간55분 소요] 연천군 [태풍전망대&임진강평화습지원&댑싸리공원&그리팅맨] 위치도 개안마루 전망대 위치도 재인폭포 위치도 [전곡 선사박물관&전곡리유적] 위치도 연천 은대리성 위치도 연천 관광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