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의 나를 인터뷰하다.
문: 안녕,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줄래?
답: 중원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성일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김주관입니다.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에 살고 있어요.
문: 그렇구나. 우선 졸업을 축하해줘야겠네. 졸업하고 이제 1학년인거니?
답: 졸업한지 2년이나 되었는걸요. 전 올해 중학교 3학년입니다. 어려보이는 거 싫은데..
문: 아이고, 미안하다. 얼굴이 작고 잘생겨서 어리게 본 거야. 국민학교 졸업식은 어땠니?
답: 평범한 하루였어요. 여느 때와 똑같은. 혼자 학교에 갔죠. 대부분 가족들이 졸업을 축하하러 왔더라고요. 전 혼자였는데.. 가족이 오지 않았죠. 아니 올 수가 없었죠.
남들이 부럽기도 하고, 내 모습이 초라해서 부끄럽기도 했어요.
오전에는 날씨가 나쁘지 않았는데, 졸업식을 하는 중 비가 오기 시작했어요. 빗줄기는 굵어지고,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 집을 나설 때는 날씨가 좋아서 우산을 챙기지 못했는데, 졸업식을 마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 많은 비를 온 몸으로 다 맞아야했어요. 울적한 내 마음을 하늘이 알았던건지, 왜 그리 비가 많이 내렸는지 몰라요.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가파른 내리막 길이 있는데, 하필 빗길에 미끄러져 넘어진 거 있죠. 넘어진 상태로 하염없이 주저앉아 있었네요. 앉은 내 다리 옆으로는 댐 수문이 열린 것처럼 정말 많은 양의 빗물이 흘러내려가고 있었어요. 그냥 바로 털고 일어나 집에 왔어야했는데, 몸과 마음, 가방과 졸업장까지 온통 젖은 채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어요. 바로 털고 일어나 집에 왔으면 조금 나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문: 어린 마음에 많이 섭섭했겠구나. 왜 졸업식에 아무도 오지 못했니? 물어봐도 될까?
답: 다들 일하러 가서요. 아빠는 사업에 크게 실패해서 오랫동안 집에 계시지 않았어요. 엄마는 매일 공장에 나가 일하셔야 했고, 그런 엄마를 도와 작은 누나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엄마가 일하는 공장에 같이 가 일을 했어요. 큰 누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입을 포기하고 학원에 취직해서 일을 했어요.
문: 그랬구나. 졸업을 제대로 축하받지도 못했다니 마음이 안 좋구나. 늦었지만, 국민학교 졸업을 축하한다. 진심으로 졸업을 축하한다. 졸업 하기 전 집안 사정이 안 좋아져서 힘들었을텐데, 그래도 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니 장하구나.
답: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엄마랑 누나들이 고생을 많이 하고 계셔서 졸업식 얘기는 꺼내지도 못해요. 저는 집 안의 막내이고, 어리다고(작은 누나랑 4살 차이가 나거든요), 다른 일은 안 하고 편하게 학교만 다니고 있거든요. 그전에는 아무런 감정 없이 학교만 다녔는데, 요새는 조금씩 엄마랑 누나들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문: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에 많은 변화가 있었겠구나.
답: 네, 우선 바로 집을 이사해야 했어요. 집이 경매를 당한다고 하더랑고요. 하루는 점잖게 차려입은 아저씨들이 와서 집 안에 있는 티비, 냉장고, 가구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가기도 했어요. 우리는 볕이 잘 드는 넓은 집에서, 어둡고 습한 지하실 방으로 이사했어요. 화장실을 가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했고, 씻는 것도 불편한 집이었어요. 자다가 기어다니는 쥐를 잡은 적도 있고, 날아다니는 바퀴벌래도 자주 봤어요. 엄마는 집 안 곰팡이와 늘 사투를 벌이셨던 것 같아요.
문: 한창 먹을 때인데, 먹고 싶은 것도 많을텐데..
답: 그래도 밥은 잘 챙겨먹었어요. 엄마가 아침 일찍 공장에 가시기 전 아침밥은 챙겨주셨고, 도시락도 싸주셨어요. 저녁은 보통 제가 와서 혼자 챙겨먹거나, 엄마랑 누나들이 늦게 들어와서 같이 먹기도 했고요. 물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밥은 잘 챙겨먹었던 것 같아요. 먹는 얘기를 하니, 요새 냄새때문에 미칠 것 같은 근처 시장에 있는 양념갈비 식당이 생각나네요.
문: 중학교 생활은 어떠니?
답: 네, 뭐 특별한 건 없어요. 학교를 오가는 게 국민학교 때보다 많이 멀어져서 등하교 시간이 길어졌어요. 버스를 탈 때도 있고, 버스비를 아끼려 걸어다닐 때도 있고요. 최근 같은 교회에 다니는 형이 오래 타던 자전거를 하나 줘서 이제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하교 후에는 집에 혼자 있다 엄마랑 누나들이 오면, 다 같이 자정 무렵까지 함께 모여 양말을 뒤집어 다듬고, 가죽을 일정 모양으로 썰어서 정리하는 일을 해요.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함께 모여 낄낄댈 수 있어서 좋아요.
문: 중학교 공부는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니?
답: 네 사실, 1학년 때까지는 어렵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2학년이 되면서 달라졌어요. 1학년까지는 전혀 공부를 안 했거든요. 그래도 수업 시간에 집중은 잘 하는 편이어서 시험을 보면 반에서 10등 정도는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2학년이 되면서 달라졌어요. 한 번은 엄마랑 연세가 비슷해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걸어가시는 뒷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일을 하러 가는 길이신지, 일을 마치고 오시는 길인지 정확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순간 엄마 뒷 모습이 생각나는거예요. 저렇게 매일, 쉬지 않고 일하시는 엄마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더라고요. 2학년이 되어서 방과 후에 홀로 남아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선생님께 장학제도에 대해 여쭤봤어요. 제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학제도가 있는가 해서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난처해하시며 현재로서는 딱히 네게 도움을 줄 만한 제도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시면서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 법인에서 매 분기 시험 성적으로 전교 10등 내에 있는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준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집에 와서 바로 방 안에 앉아 교회에서 받은 교자상을 책상삼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무작정 교과서부터 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문: 공부는 할 만 했니? 전교 10등 내에 들 정도로 공부하는 건 힘들었을텐데..
답: 네 맞아요. 그치만, 학비를 면제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장학생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정말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랬더니 성적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어요. 2학년 내내 성적이 꾸준히 오르더니, 3학년 올라갈 때에는 전교 10등 이내에 들게 되었어요.
문: 참으로 열심히 했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집 안에서 홀로 그렇게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너무 장하다. 참으로 대견하구나. 그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드디어 장학 혜택을 받은거니?
답: 네 맞아요. 근데, 중학교 2학년 때에도 등록금을 내지 않았어요.
문: 아까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성적이 바로 전교 10등 내에 들지 못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었니?
답: 정확히 말하면 등록금을 면제받은 게 아니라 누군가 제 대신 등록금을 내주셨어요. 제가 반에 홀로 남아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장학제도를 여쭤봤는데, 그날 선생님과 여러 얘기를 했거든요. 왜 장학제도를 물어보는지, 제 생활이 궁금하셨나봐요. 그날 저녁 담임선생님께서는 다른 선생님들과 성경공부 모임이 있으셨대요. 선생님께서 제 얘기를 듣고 성경공부 모임에서 말씀하셨나봐요. 그 모임에 계셨던 한 다른 선생님께서 중학교 2학년 때 제 1년 등록금을 다 납부해주셨어요.
문: 어머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 선생님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해주지 않으렴?
답: 음악을 가르치시는 김정희 선생님이에요. 그 때까지 저는 그 선생님을 알지 못했어요.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다른 분이셨거든요. 선생님은 너무 자상하시고, 배려심이 많으셨어요. 분기별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선생님께서 제 고지서를 가져가신 후 등록금을 내시고, 영수증만 끊어서 몰래 제게 주곤 하셨어요. 선생님 월급이 그리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홀로 제 1년치 등록금을 다 내주셨구요. 제가 선생님이라면, 저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제게 이래라 저래라 얘기도 하고 할 법 한데, 선생님은 전혀 제게 그러지 않으셨어요. 제가 혹이라도 주눅들거나 마음이 안 좋을까봐 그러셨는지, 영수증만 몰래 건네시면서 제 어깨를 다독여주실 뿐이었어요.
문: 선생님께서 네 성적이 오르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겠다.
답: 네, 제 성적이 많이 오르자, 선생님께서 놀라시기도 하고, 매우 기뻐하기도 하셨어요. 저는 집에 보탬이 되고자 열심히 한 것도 있지만, 선생님 은혜에 보답하고자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문: 그래, 이제 중학교 3학년 1학기인데, 공부는 할 만 하니?
답: 네, 이제는 공부에 자신이 있어요. 어떤 시험이든 전교 5등 이내에 들 자신이 있거든요. 이제 선생님 도움 없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문: 아이고,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이제 마무리해야겠다. 올해 특별한 계획이나 각오가 있다면 말해볼래?
답: 네, 우선 여름방학 전까지 열심히 공부할 계획이에요. 원하는 성적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공부해둔 후 여름방학 기간에는 엄마랑 누나가 일하고 있는 공장에 저도 나가 일해보려고요. 저도 잠시나마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문: 생각은 장하지만, 고등학교 입학을 앞 둔 중요한 시기인데, 걱정이 되는구나. 가족, 선생님과 충분히 상의해서 결정했으면 좋겠다. 시간이 없어 이제 마쳐야겠다. 짧은 시간 인터뷰하면서, 오히려 내가 많이 도전을 받고 힘을 얻어 가는 기분이구나. 네 삶을 응원하고 싶구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역경을 디딤돌 삼아 최선을 다하는 네 모습이 장하고 대견하다. 앞으로 펼쳐질 네 앞날을 축복하마.
답: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