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검정고무신 !
우리에게 가장 편안한 신발이었고 한편으론
변화무쌍한 장난감이었던 고무신은 이제는
추억속에 우리의 마음을 덮여주고 있다.
고무신....! 우리의 유년 시절에서 가장 선명한 기억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아마도 이 고무신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신발을 기억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무신일 것이고 우리의 놀이에도 고무신의 비중이 만만치 않았고
국민학교 [초등학교]3학년이 되어 소위 학생화를 신기전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고무신을 신고 다녔을 것이다.
고무신은 문자 그대로 생고무를 눌러서 만든 신발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냥 발모양만 둥그렇게 만들어서 찍어놓은 것으로
생고무로 만든 만큼 질긴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통기가 되지
않아 발에 땀이라도 나면 발이 미끄덩 미끄덩할 정도로 땀이 찼다.
한참을 걸고 난뒤에 보면 흙먼지와 고무 닳은 것이 땀과 함께 섞여서
신발을 벗으면 발등으로 신발테두리를 따라 검은 자국이 선명하게 나곤 하였다.
고무신은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검정 고무신이고
하나는 백고무신이었다
검정고무신은 그렇다치더라도 백고무신은 왜 흰고무신이나
하얀 고무신이 아니고 백고무신이라고 불리웠는지 지금에서야
의문이 들지만 하여간 이 백고무신은 검정고무신보다 조금 비싸고
하얀 빛깔 때문에 한결 고급의 이미지가 있어 아이들에게는 귀하게
대접을 받았고 동네 어른들에게도 구두를 제외하고는 정장 한복에
가장 어울리는 신발로 여겨졌었다.
고무신은 발등 부분을 덮을 만큼 깊지가 않아 달리기를 할 때는
신발의 기능을 전혀하지 못했다. 조금만 속력을 내서 달리면
고무신은 어느새 훌러덩 벗겨져 뒤에서 나뒹굴기 마련이었고
고무신이나마 한 켤레가 신발의 전부인 친구들은 술레잡기나
달리기를 하다말고 뒤돌아서서 신발을 다시 신고 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숫제 고무신을 벗어들고
달리는 것이 속 편하고 잘 달리는 방법인 줄 터득하고 있었다.
가난한 시절 가난한 아이들이 그나마 마음 놓고 신을 수 있었던
유일한 신발이 고무신이었기에 고무신은 인기가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생활필수품이었다. 가끔씩 동네 아이들 중에서 한 두 명
정도가 고무신 아닌 구두나 운동화를 신고 다녔었는데 그런
아이들은 다른 모든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의례히 부자집
아이들로 통할 수 밖에 없었다. 고무신은 가난의 상징이었고
우리는 모두 가난한 시대에 살고 있었기에 고무신을 신고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고무신의 행복이 제대로 인정받는 일이 틀림없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모래장난을 할 때였다. 장난감이
귀하던 때라 자동차니 기차니 트럭은 우리의 유년기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고무신은 우리에게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자가용 승용차도 되어 주었고 트럭도 되어 주었고
기차도 되어 주었다.
새 고무신은 그나마 길이 들지 않아
그것도 어려웠지만 좀 낡은 고무신은 고무가 유연하게 변해서
고무신 앞코를 깊이 눌러서 찌그러뜨리면 다른 고무신의
한쪽을 끼워 넣을 수 있는 홈이 만들어져 여기에 다른
고무신짝을 끼우는 식으로 고무신끼리 연결을 시켜놓으면
그럴사한 기차가 되었다.
그리고 고무신 한 짝 속에 다른
한 짝을 구부러뜨러 끼워넣으면 트럭이 되기도 했고
고무신을 까뒤집어서 끼워넣으면 승용차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 모래사장에 자리를 튼 아이들은 입으로 부웅붕 소리를
내며 신나게 자동차 경주를 하느라 해가 지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또한 고무신은 젖어도 금방 마르고 찢어지거나 물이 셀 염려가
전혀 없는 신발이라 개울에서 멱을 감을 때 고무신을 가지고
배 경주놀이를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올챙이나 송사리라도 두어 마리 잡으면 고무신에 담아서
발은 맨발인 채로 집까지 와서는 양은 세수대야에 옮겨놓고는
좋아서 히히덕 거렸으니 훌륭한 살림망 구실까지 톡톡히 해낸 것이었다.
여름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좋았던 고무신은 그러나 겨울이
닥치면 역시 가난의 상징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방한이 제대로
될 턱이 없는 고무신 한 켤레와 어쭙잖은 나일론 양말이나 덧버선
정도로 겨울을 나야 했는데 결국 그 겨울을 제대로 넘기지 못해 발에
시꺼멓게 동상을 얹고 살기를 반복했고 동상이 심한 아이들은 한약방에서
죽은 피를 뽑느라 수십 개의 침을 맞아 발등이 벌건 침자국으로 덮히기도 했었다.
고무신이 아무리 질기고 튼튼한 신발이라고는 해도 그것만 줄창 신고
다니는 데는 어쩔 수 없었는지 고무신 발 앞꿈치께나 뒤꿈치 어름에는
마침내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었고 가끔씩은 고무신이 쭉 찢어져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갑자기 신발을 살 수가 없어 고무신 밑창이 뚫어졌건
말건 아무 일 없는 듯이 줄기차게 신고 다니기도 했고 그러다가 결국
더 이상 신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면 동네를 돌아다니는 엿장수
아저씨에게 고무신을 가져다 드리고는 엿 한 가락을 받아 신나게 먹어치웠다.
엿장수 아저씨의 고물 망태기에 하릴 없이 실려가는 고무신을
보고도 아무런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은 고무신 하나를 단물
쓴물 다빨아먹듯 해서였을까 아니면 달콤한 엿의 맛에 취해
고무신따위를 돌아볼 정신이 없어서였을까....그때는 지긋지긋했던
고무신이 이제는 애뜻한 추억이 되어 마음 한 쪽을 따스하게 덮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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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추억도 있지만, 지금도 여름되면 흰고무신을 즐겨 신는답니다.누가 보든 말든..울집엔 그 귀한 깜장고무신두 있지유.
아련한 촌놈 시절을 생각 하게 하는 글입니다. 왕자표 고무신 ..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
검정고무신을 보니 시골집에서 뒹굴고 뛰어놀던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네요~~ 감사 합니다^^
검정 고무신 하면 추억이 많습니다...............덕분에 옜날 생각 많이 하고감니다^*^
고무신.. 지금은 몰라도 전기쟁이들한텐 필수품이었지요.. 취업나갔을 때.. 작업복에 고무신차림이면 물어볼 것도 없이 변전실이나 하여튼 고압전기를 다루는 직업인~쟁이였지요.. 만약에 주변에 고압이 흐르는데 구두를 신으면? 아차차할 순간도 없이 찌르륵~ 뻥~~ 골로가는데야~~ 그래서 절연신발=고무신이 최고였죠..
고무신 추억에 시간 보냅니다. 산에가서 찢기면 꼬메신고
왕자표 고무신..기억납니다 강가나 바닷가 가면 최고지요 올해는 빵꾸^^*난 그물 고무신을 남녀노소가 신고 다녔지요 ㅋㅋ 울집엔 2005년표 고무신 두개(울딸과 내꼬) 있습니다~~~
기차표도 만만치 않아용.... 범표두 괴않은편..ㅋㅋㅋ...에고고 깝짱아니랄까봐서리...구닥다리..그때를 아십니꺼...ㅋㅋㅋ
ㅍㅎㅎㅎ 물가에 가면 배가되고 어항이되고, 모래밭이나 흙밭에 가면 탱크로 굴림하고, 여하튼 싸울땐 훌륭한 무기(?)로 돌변 하기도 하지만 남이 안 볼땐 들고 다니공...
지금도 여름날에 산(암벽)에 갈땐 검정 고무신 신고 전철타고 갑니다. 등반땐 암벽화/ 등반후 정상에서 하강할 땐 검정 고무신...^&^
고무신!암벽에 잘붙지유. 특히 검정고무신.
묵 내 뢰 님 고무신 암벽에 잘 붙어요?
암벽하강시 발에 땀나면 개략 낭패....땀나믄 훌러덩~하던뎅...ㅋㅋㅋ
마조요 훌러덩 합니다 ㅋㅋ
맨발에 고무신신고 땀이나면 미끌어 체육시간에 애먹던 생각이....ㅎㅎㅎ
고무신 벗어 벌 잡는다고 낚아채서 빙빙돌리던 엣날일이 생각나네요
뱅뱅돌려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기절한 벌날개잡고.....고무신 뭉뚝한 코에 침 칵~ 뱉은후 꽁지를 실실 문지르면 벌침이 꿀과 함께 쏘옥...빨아묵으믄 달콤했지유...ㅋㅋ..
여자아이가 신던 이쁜 꽃그림이 그려진 코고무신도 있었지요. 꽃신....덕택에 어린시절 설날에 한복입고 꽃신 신고 좋아라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
옛날 홍천강에서 피라미잡아서 조기다 담아두곤 햇는디...
정말힘든 시절 그때 학생화가 있었남......그고무신두 장날이면때워신었는데...어연 흰머리 성상...
어려서 신던 깜장고무신은 왜!!엄지발가락 부분이 젤 먼저달아서 발가락이 나오곤했는데 그시절이 그립슴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