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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 페인과 조지 콘도의 첫 한국 전시를 위하여
리안갤러리 안혜령 대표 & 이홍원 실장
지금 통의동 골목길 한쪽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외장을 돌로 마감한 지하 1층, 지하 2층 규모의 갤러리. 건축가는 세계적 아티스트 서도호의 동생 서을호이고 건축주는 대구 리안갤러리다. 2007년 개관 후 앤디 워홀, 백남준, 미스터, 데미언 허스트, 짐다인 등 세계적 거장의 특별전과 개인전을 잇달아 선보이며 ‘대구의 리움’이라 불리는 이곳은 규모가 작아 제대로 된 전시를 보여주기에 한계가 있던 청담동 갤러리를 철수하고 통의동에 새 지점을 연다. 안혜령 대표는 “서울과 비교해 미술환경이 열악한 대구에 갤러리를 내면서 이왕 하는 거 최고의 작가를 보여주자는 의무감이 있었어요. 대구에서만 전시를 하면 작가한테도 미안하고요. 바빠서 대구까지 못 내려온다는 분들도 많은데 좋은 작품을 못 보여드리는 게 너무 아쉽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오는 10월경 오픈하는 통의동 갤러리는 안 대표의 큰딸 이홍원 실장이 운영을 맡는다.
이 실장은 많은 고민과 방황 끝에 ‘미술밭’으로 돌아왔다. 보스턴에 있는 월넛 힐 아트 스쿨을 졸업하고, 미국 최고 명문 미대 중 하나인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에 다니던 그녀는 돌연 뉴욕대학교 영화영상학과로 편입학을 해 교수진과 부모를 놀라게 했다. 담임 교수 추천으로 예술적으로 뛰어난 학생들의 발달 과정을 분석하는 ‘하버드 프로젝트 Zero’에도 참여했던 터라 더 충격이 컸다. “미국에서 정말 창의적인 애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아이들과 경쟁해 이길 자신이 없었어요. 아티스트는 대낮에 머리풀어 헤치고 거리를 돌아다녀도 당당할 만큼 광기도 있고 자의식도 강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을까 싶었던 거죠. 우리나라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건 잘하지만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전혀 새로운 방식과 화법으로 작품을 만드는 건 많이 약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고요. 영화는 여러 명이 함께하는 예술이잖아요. 혼자 모든것을 감당해야 하는 미술보다는 압박감이 덜할 것 같았어요.”
딸의 말을 듣고 있던 안혜령 대표는 “객관적으로 봐도 실력이정말 좋았는데 너무 아쉽고 속상했어요. 어느 날 미국에 가보니 그간 작업했던 미술 작품들을 다 버렸더라고요”라고 말한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아리랑 TV 연출 파트에서 일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연출부에서도 반년 동안 일했다. ‘외도’는 싱겁게 끝났다. “어느 순간, 그래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잘하고, 잘할 수 있는 부분은 미술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려서부터 이미 너무 많은 작품을 봐버린 거죠. 흘려들은 것 도 많고. 결국엔 그 길로 돌아오더라고요. 또 결국엔 그림 좋아하는 엄마를 닮아가고. 신기해요….”
모녀는 홍콩 아트 페어, 마이애미 바젤 아트 페어, 싱가포르 아트 페어 등 세계의 굵직한 아트 페어를 빠짐없이 둘러보며 새 갤러리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실장은 “대표님이 거의 조련사 수준이에요. 오늘은 피곤하니 그만 보자고 하면 하나라도 더 봐야 한다며 저를 일으켜 세우세요. 미술에 대한 열정을 이길 수가 없어요”라고 했다. 모녀는 최근 통의동점의 개관전 주인공도 결정했다. 데이비드 살레. 미국의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대중문화와 포르노그래피, 인류학 등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뒤섞어 초현실적인적인 느낌을 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실장은 “미국만 해도 정말 뛰어난 작가들이 셀 수 없이 많아요. 기가 질릴 만큼. 그런 작가들을 최대한 많이 소개하고 싶어요. 내부 직원들, 미술 애호가들과 최대한 많이 대화해 작가를 선정할 예정입니다. 더 글로벌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포부를 밝힌다.
꼭 소개하고 싶은 작가로는 미국의 스타 작가 록시 페인과 조지 콘도를 꼽았다. 록시 페인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작가. 스테인리스스틸로 나무를 만드는데 뿌리 부분까지 정교하게 작업해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조지 콘도는 지금 미국에서 피카소만큼 인기가 많은 작가다. 흑인 남성과 날개가 달린 백인 여성이 벌거벗고 있는, 카니에 웨스트의 2010년 앨범
1, 4 대구에 기반을 둔 리안갤러리는 <앤디 워홀>전, <백남준 특별전>, <데미언 허스트>전 등을 잇달아 선보이며 ‘대구의 리움’이란 애칭을 얻었다.
2 백남준의 ‘Reclining Bronze Buddha’. 안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백남준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컬렉터 중 한 명이기도 하다.
3 소장품인 앤디 워홀의 ‘Portrait of R.C. Gorman’.
거래 활성화보다 고미술품 가치 알리기가 먼저
공아트스페이스・마이아트옥션 공창호 회장 & 공상구 대표
“아버님 계신가?” “관장님 안에 계세요?”…. 인사동 골목 안쪽에 있는 고미술 전문 화랑 공아트스페이스에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인터뷰 중에도 계속 손님이 찾아와 부자父子 간의 대화가 몇 차례 중단됐다. 올해 34세로 2011년부터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공상구 대표가 웃으며 말한다. “제 또래 친구들 좀 보고 싶다는 거 아닙니까? 대화가 하고 싶어요. 너는 고민이 뭐니? 어떤 작가가 좋아? 이런 얘기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데 고객 중 어르신이 많으니까 또래가 그리워요. 어른들이 싫다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대화에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우리 고미술품이 제대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문화재보호법부터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과일 쟁반도 100년 이상 된 건 해외로 가지고 나갈 수가 없어요. 외국 컬렉터나 기관은 고미술품 경매 시장에도 참여할 수 없고요. 전 세계 모든 미술품이 장벽 없이 거래되는데 우리 문화재만 국내에 갇혀 있어요. ‘물고기’는 흐르는 물에 놔둬야 해요. 자율 거래가 이뤄져야 제대로 평가를 받고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실내 낚시터 수준을 못 벗어나요.”
공아트스페이스는 우리나라 고미술계를 대표하는 화랑으로 1983년 개관했다. 고서화, 도자기 전문. 고미술품 경매 회사인 ‘마이아트옥션’도 소유해 컬렉터와 판매자가 자주 발걸음을 하는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 지하 3층, 지상 4층 규모의 빌딩을 지으면서 사명社名을 공화랑에서 공아트스페이스로 바꿨다.
공아트스페이스는 공상구 대표가 합류하면서 위상을 더욱 굳건히 다지고 있다. 지난해 3월 처음으로 기획한 제1회 마이아트옥션 낙찰률은 78%. 53억5660만 원 상당의 작품이 거래됐다. 개중에는 낙찰가 18억 원으로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운 ‘백자청화운룡문호’도 포함돼 있다. 18세기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청화백자로 발톱이 5개 달린 용이 그려져 있다. 용의 발톱은 통상적으로 4개인데 하나가 더 있어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고려대학교대학원에서 도자를 전공한 공상구 대표는 열정과 패기가 넘쳤다. 마이아트옥션 재출범을 주도한 것도 그다. “마이아트옥션은 아버지께서 이미 2000~2002년까지 운영하신 곳이었어요.
제가 군대에 있을 당시라 정확히 기억하는데 입대할 때 생겼다가 제대하고 나니 없어졌더라고요(웃음). ‘언젠가 내 손으로 꼭 다시 부활시킨다’ 다짐을 했죠. 이전까지는 몇몇 유명 옥션에 감정까지 해서 판매를 위탁했는
데 안 되겠더라고요. 고미술품이다 보니 자꾸 경매 순번이 뒤로 밀리는 거예요.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 뉴스에 작품이 소개되는 거죠. 이래서는 고 미술품 시장 전체가 죽을 것 같아 결단을 내렸지요. 일단 고미술품 가치를끌어올리는 데 주력할 생각입니다.
김홍도 작품가가 근대 주요 작가 작품가의 10분의 1에 불과한데 역사적 작품이 이런 대접을 받는 건 너무 씁쓸한 일이지요. 경매를 할 때마다 회당 200점 정도 소개했는데 올해부터는수량을 반으로 줄이려고요. 그래야 설명도 더 자세하게 하고, 작품도 더 조명을 받고,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 모두 고미술품에 애정을 느낄 수 있지요. 일본에 갔더니 고미술품 경매 시장이 엄청나게 세분화되어 있더라구요. 백자, 다기, 목가구, 불상…. 이렇듯 선진화된 시장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물심양면으로 아들을 지원하는 공 회장은 “우리 때에 비하면 시절이 좋지. 나 때만 해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혼자 바빴는데 이제는 자료가 많잖아요. 어릴 때부터 미술품에 둘러싸여 지낸데다 들은 것도 많으니 유리하지요.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기특해요”라며 흐뭇해한다.
아들은 “본 건 많아가지고 눈만 높아졌다”고 말한다. “지인 집에 놀러갔는데 동양화 한 점이 사랑방에 걸려 있는 거예요. ‘심상치 않네’ 하고 봤더니 소당 이재관의 ‘전다도煎茶圖’였습니다. 소당 이재관은 궁궐에서 어진 제작을 했던 어엿한 화원인데 작품 수가 적어 무척 귀한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최근까지 리움에서 연 <조선시대 화원대전>에 출품되었어요. 밥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하하.”
젊은 CEO는 안목도, 아이디어도 좋지만 아버지의 감정 실력만큼은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감정은 한 번 실수하면 그대로 끝이에요. 차례차례 단계가 있어 100%까지 서서히 끌어올릴 수도 없어요. 많이 배우기도 해야 하지만 경험과 수련을 엄청나게 쌓아 딱 보면 알아야 해요. 불필요한 것 다 거둬내고 본질을 꿰뚫는 능력! 레이저, 지질 분석기 같은 첨단기기를 아무리 동원해도 해결이 안 나요.”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러니 더욱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어설프게 알아서는 권위가 안 생긴다”고 강조한다. 아버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들이 웃으며 말한다. “게으르다고 만날 혼나요. 아버지께서 새벽 기도를 다니시는데 아침 7시 30분쯤에 컬컬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화를 내시죠. 그거 하나 빼고는 혼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1 소장품인 김환기의 ‘2-V-73 #313’. 2011년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작품으로 100호 사이즈다.
2 임금을 상징하는 발톱 5개 달린용을 그려놓은 ‘백자청화운룡문대호’.
3 마이아트옥션을 통해 판매한 ‘성종대왕비공혜왕후어보’.
우리의 미션은 가고시안이 탐내는 작가를 키우는 것
아트사이드 이동재 대표 & 이혜미 실장
갤러리가 위치한 곳은 통의동 33번지. 통창 너머로 인왕산과 북한산, 서촌 한옥마을이 보인다. 1999년 인사동에서 시작한 갤러리는 지난 2010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트사이드는 중국 현대미술을 우리나라에 가장 빨리 소개해온 ‘중국통’! 위에민준, 왕광이, 쩡판즈 등 지금 세계적 거물이 된 작가들을 2001년과 2003년<중국 아방가르드 5인전>, <중국 3인 3색>을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알렸고, 2004년과 2006년에는 쩡판즈와 장샤오강의 개인전을 열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인턴 경험을 쌓다가 1년전, 아트사이드에 합류한 이혜미 실장은 “모두 대표님이 이룬 성과”라면서 작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면에서 도저히 아버지를 넘을 수 없을 것 같
다고 말한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자꾸 경제적인 부분을 먼저 생각하게돼요. ‘어떻게 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길까? 몇 작품을 팔아야 하지?’ 하고요. 그런데 대표님은 이런 계산 없이 작가가 원하는 걸 다 해줘요. 한 번은
장샤오강과 판화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갑자기 안면도에 있는 휴양 호텔로 작가를 데려가는 거예요. 운송업체를 통해 작품까지 다 옮겨주고. 장샤오강이 ‘홍콩에서는 창고에서 하루 종일 사인을 했다. 숨이 탁탁 막혔는
데 이 대표는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다’며 고마워하더라고요. 사실 그 많은 작품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면 운송 비용도 만만치 않잖아요. 투자도 좋지만 당장 유지도 잘해야 하는데… 아, 경영은 정말 어려워요.”
친형인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과 함께 갤러리를 꾸리다가 아트사이드를 차리며 독립한 이동재 대표는 ‘낭만파’에 ‘기분파’다. 초록색의 발정난 암캐로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대변하는 블루칩 작가 쩌춘야가 왔을 때 이대표는 작가와 함께 제주도로 날아갔다. 함께 동백꽃 보고, 바닷바람 쐬며 이곳저곳 여행하다 왔다. 작가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닌 휴식이라 생각해서다. 갤러리에 처음 당도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풍수 보시는 분들이 그러는데 그림 장사는 서쪽에서 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요. 해가 질 때 감성이 충만해지잖아요. 술도 한잔 생각나고. 실제로 비즈니스를 해보면 오후 4~6시에 소통이 가장 잘돼요. 노을이 은은하게 비추면 대화가 무르익지요. 왜 운전을 하다가도 노을이 질 때는 기분이 묘~하잖아요.”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이혜미 실장의 가장 큰 장점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친화력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어요. ‘지금 손님들하고 집으로 간다’ 하고 아빠가 우르르 사람들을 데리고 오면 엄마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사람을 좋아해요. 얼굴이 동글동글해서(웃음) 사람들도 편안하게 느끼고요. 작가 선생님들 기분 맞추기가 어렵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만 존중해드리면 돼요. 자주 만나 이야기하면서 아, 이분은 충분히 작업 시간을 드려야 하는구나, 이분은 작품을 아기 다루듯이 해야 하는구나를 알게 되죠.” 안목도 빼놓을 수 없다.
“저기 녹색 브론즈 조형물이 있잖아요? 조각가 양재건 선생님 작품인데 제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사온 거예요. 제가 저기 매달려서 노는 걸 그렇게 좋아했대요. 몸통 전체가묵직한 브론즈라 넘어지지도 않거든요. 아버지가 미술관에 저를 많이 데리고 다니신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루브르 같은 곳엘 갔는데 그땐 정말 싫었어요. 관심도 없고. 하지만 그때 보고 만진 것들이 결국 좋은 눈을 갖게 해준 것 같아요.” 그런 눈으로 선택한 작가가 최근 개인전을 연 1984년생 중국 작가 션팡정. 파도 모양의 꽃밭이나 브로콜리・오이・바나나・사과・토마토 등 파스텔 톤으로 채색한 각양각색의 채소가 대롱대롱 매달린 ‘움직이는 정물’ 같은 작품으로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저보다 일본의 한 갤러리가 점찍은 작가인데 다행히 양보를 해줘서 전속 계약을 맺게 됐어요. 작가랑 ‘친구’가 된 것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이 친구가 아플 때가 있었는데, 안된 마음에 새벽 2시에 약도 사서 가고, 음식도 해주고 그랬거든요.”
딸에게 아빠는 늘 “멀리 보라”고 당부한다. “경영이 정말 어렵다는데, 그 말이 맞아요. 돈 버는 게 가장 어렵지 뭐. 판매가 돼야 작가들 생활비도 대주는데 매달 수입이 일정한 것도 아니고…. 이게 장사가 되겠다 싶어 얄팍하게 접근해서는 오래 못 가요. 작가를 이용해서 미술관 몸집을 키우고 부자가 되겠다고 하면 안 되고 작가가 나를 만나 가고시안 같은 세계적 갤러리가 탐낼 만큼 성장하게 도와주면 돼요. 그게 가장 큰 보람 아니겠어요? 그런 마음이 있어야 작가와 관계도 탄탄해지고 좋은 작품도 계속 선보일 수 있어요. 돈만 벌고 보람을 못 느끼면 이 일을 오래 못해요.”
1 고 원석연 작가의 연필화 ‘굴비’. 원 작가는 이동재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2 아트사이드는 장샤오강, 위에민준, 쩡판즈 등의 중국 작가를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소개한 곳이으로 최고의 ‘중국통’이라 인정 받는다.
3 2010년 통의동으로 자리를 옮긴 아트사이드 외관.
4 전속 계약을 맺고 있는 중국의 신세대 화가 션팡정의 작품.
세계 최고 비구상 전문 화랑을 목표로!
표 갤러리 표미선 대표 & 하이디 장 디렉터
“저희 아버지께서 진짜 멋쟁이셨어요. 그 옛날에 롱부츠에 혼다 오토바이를 타셨다 아닙니까. 적산가옥에 살았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포함해 집 안 이곳저곳에 작품을 놓고 수시로 바꿔 거셨어요. 아버지가 작품을 사 오시는 날이면 또 어떤 그림이 왔나 하고 식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을 했어요. 제가 컬렉션을 스물네 살 때부터 시작했습니다. 장원물산이란 곳에서 일했는데 그때부터 최근 돌아가신 권옥연 선생님 작품이 그렇게 좋더라고. 월급 3개월 치를 꼬박 모아 명동화랑에 갖다 주면서 소품 하나씩을샀어요. 그렇게 모은 작품 28점으로 서른한 살에 갤러리를 시작했어요. 그게 1978년도, 동양화 6대가(의제 허백련, 이당 김은호,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심향 박승무, 청전 이상범) 작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릴 때였는데 저는 아무도 찾지 않는 비구상 전문 화랑으로 오픈을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 작가가 뭘 표현하려고 했을까, 작가의 의도나 철학은 무엇일까 항상 궁금하더라고요. 주변에선 미쳤다고 했어요. 10년간 겨우 4점 팔았으니까. 강산도 10년이면 바뀐다는데 ‘그래 한 번 버텨보자’ 했어요. 지금은 ‘참 잘했구나’ 싶죠. 추상 작품은 구상과 달라 세월이 지나도 세련된 맛이 있거든요.” 표 갤러리의 비구상 소장품은 김창열, 이우환, 아르망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포함해 약 3000점에 이른다. 서울대병원, 국립암센터, 국민은행 PB 센터 등에 걸린 작품 중 상당수가 표 갤러리에서 대여한 것들이다.
대구 신명여고 시절, 좋아하는 선생님께 김치단지까지 갖다 드릴 만큼 열정적이고, 청춘 때는 몸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와 롱부츠를 즐겨 신어 스스로 ‘모델보다 더 모델 같았다’는 표 대표는 함께 갤러리를 운영하는 장녀, 하이디 장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네트워킹이 정말 좋아요.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는데다 문화적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는 것 같아요. 근데 저랑은 많이 달라요. 얼마나 차분하고 또박또박한지 어디에 같이 나가면 ‘표 대표님 딸 맞습니까?’ 한다니까요.”(웃음) 15세 때 미국으로 유학, ‘크로스 로드 아트& 사이언스 스쿨Cross Lords Art and Science School’을 졸업한 후 UCLA에서 미술과 미술사를 복수 전공한 하이디 장은 표 갤러리베이징 지점과 LA 지점을 관리한다. 국내 많은 화랑이 베이징에서 철수한 것과 달리 표 갤러리 베이징 지점은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고 3년 전에 오픈한 LA 지점도 자리를 잡았다. “엄마는 추진력이 대단하신 분이에요. 뒤도 안돌아보고 밀고 나가죠. 그런데 저는 여건과 기회를 하나하나 꼼꼼히 따지는 편이에요. 베이징점을 열 때도 많은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했어요. 차분하단 얘기를 많이 듣는데 오래 지내다 보면 또 엄마를 닮은 모습이 나와요.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과감하게 밀어붙일 때도 있고요.”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말하는 하이디 장은 어릴 때부터 화랑만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단 다.
“워낙 힘든 일이란 걸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알았던 것 같아요. 엄마는 항상 강했지만 화랑 일이란 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이 정말 많잖아요. 막노동하듯 힘든 일도 많고,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크고…. 그래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인턴 사원으로 근무했어요. 그런데 막상 일을 해보니 학술적인 일보다는 뭔가 역동적인 사업을 하고 싶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사업가적 기질이 몸에 배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준 가장 큰 ‘무기’는 역시 안목.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친구가 그린 미술 작품을 엄마에게 보여 주면서 ‘엄마, 이 친구 그림 좋지? 이런이런 생각으로 그린 것 같아’라는 말을 했대요. 어릴 때부터 추상 미술 작품을 많이 봐 그 안에 담긴 생각을 읽는 버릇이 있었던 거죠. 그런 작품들을 두루 보면서 그림 보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통찰력과 분석력도 키울 수 있었고요.”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남다른 엄마와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룬 딸은 최근 ‘모바일 갤러리’에 관심이 많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을 통해 누구나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시대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아트 뱅크’를 선보인 노하우와 전략을 접목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판을 짤 수 있을 것 같다. 모녀의 목표는 명쾌하다. 한국을 넘어 세계 속 비구상 전문 화랑으로도약하는 것.
1 국내 최고의 비구상 전문 화랑답게 표 갤러리는 김창열, 이우환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추상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2 표 갤러리 LA 지점 역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3 표 갤러리는 아르망, 조너선 브롭스키 등 해외 작가들의 조각품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
![]() 기자/에디터 : 정성갑 / 사진 : 이의범, 안지섭, 김용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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