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유재영 편
석야 신웅순
종이배 등 떠미는 어린 바람 한나절
아직도 일곱 살 때 헤어진 물소리가……
삘기꽃 목마른 언덕 은빛 새가 와서 운다
덩굴손 머문 자리 연둣빛 자국 같은,
관절 긴 생각들이 그렇게 물이 들고
키 낮은 무덤 너머로 낮달 하나 떠 있다
-「어린 바람 한나절 -햇빛 시간 2」
삘기꽃은 5월쯤에 핀다. 물소리도 굵어지고, 바람도 굵어진다. 이 때쯤 삘기꽃이 피고 들장미도 한창이다. 종이배도 물소리도 놓친 지금 삘기꽃 목마른 언덕에서 은빛 새가 와서 운다.
초승달은 쉬이 지고 그믐달은 더디 뜬다. 초승달은 일찍 지는 것이 안타깝고 그믐달은 더디 뜨는 것이 안스럽다. 빨리 가고 더디 가는 것이 어찌 세월뿐이랴. 덩굴손 머문 자리가 그렇고 물이 드는 생각들이 그렇고 키 낮게 떠 있는 낮달이 그렇다.
‘아직도 일곱 살 때 헤어진 물소리……’에서 필자는 그만 연필을 놓치고 말았다. 놓친 소리까지 놓쳤다. 수묵화로 번져간 유년의 물기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필자의 어린 시절과 떠나온 고향을 여기에서 만나다니. 시란 얼마나 경이롭고 가슴을 치는 일인가.
소금쟁이
함께 찍힌
옛 사진
어느 여름
뒤꿈치가
참 예쁜
물총새
그 아이는
종종종
돌다리 건너
지금도 오고 있다
- 유재영의 「지금도」
뒷꿈치가 참 예쁜 물총새 그 아이는 지금쯤 60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기억은 늙지 않고 언제나 거기에 머물러있다. 이별이 없다면 무슨 수로 시를 쓰고 만남이 없다면 무슨 수로 세상을 건널 수 있는가. 헤어진 물총새 뒷꿈치 예쁜 그 아이는 지금도 아이로 남아 종종종 돌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노을빛 물총새의 금빛 울음, 그 울음 때문에 지워진 초저녁 달빛. 갈대밭 사이로 날아간 물총새가 어둠의 먼 먼 길을 돌아 여기로 왔다. 빛으로 물들고, 소리로 깊어진 물총새 울음이다. 그 울음 때문에 그 아이는 돌다리를 건널 수 있고 시인 때문에 돌아올 수 있다. 발꿈치가 참 예쁜 물총새 아이었다.
생각마저
갈색뿐인
햇빛 차암
좋은 날
등 마알간
바람이
길을 가다
멈춘 곳
마가목
고, 가지 끝에
초롱 닮은
알집
하
나
!
- 유재영의 「햇빛 좋은 날 - 가을시․1」
생각마저 갈색뿐인 적막한 겨울 오후이다. 시인은 길을 가다 초롱 닮은 알집을 보고 지나칠 수 없었나보다. 등이 마알간 바람이 길을 가다 멈춘 곳. 거기 마른 마가목 가지 끝에 사마귀 알집 하나 붙어있다.
사마귀는 가을에 알을 낳는다. 긴 겨울을 지내고 봄이 되면 알집에서 깨어나는 아기 사마귀. 아기 사마귀는 햇살을 보고 햇살을 따라 갈 길을 찾는다. 연두빛 바람 소리도 끊어진 어디쯤서 쉬었다 가는 그런 곳이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몇 개의 획만으로 생각을 그릴 수 있다. 많은 말은 명도가 낮다. 말간 바람과 햇빛 때문에 산과 들이 저만치 보이는 법이다. 먼 거리도 아니요 가까운 거리도 아닌, 보일 듯 말 듯 그쯤에 시인의 집이 있다.
덩굴손
긴 봄날이
흘림체로
쓰여지고
뻐꾸기
울음소리에
번져가는
푸른 적막
못 이룬
지상의
꿈이
메꽃으로
지고 있다
- 유재영의 「이순간」
낮은 길고 밤은 짧다. 덩굴손, 뻐꾸기 울음, 메꽃 때문이다. 봄날, 새 소리, 꽃으로 햇살을 섞어 그림 하나 완성했다. 잠언 같은 시이다. 두보와 이백에게 이 시를 부쳐야겠다. 필자는 사십여년 서예를 했으나 덩굴손만 못하고 육십성상 울었으나 뻐꾸기 소리만 못하다. 또한 꿈을 꾸었으나 메꽃 지는 것만 못하니 자연이란 이리도 위대한 것이다. 인생을 깨닫게 해주는 시조가 아닐까 싶다.
이 시조 「이 순간」은 ‘순간’이 아니라 ‘영원’이다. 이만한 들을 지녀본 적이 없고 이만한 강을 울어본 적이 없다. 꽃과 새가 없으면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을까. 이만한 산 바라본 적 없는 생애 한편이다.
신경림 시인의 말을 덧붙인다.
시조가 아니라면 이런 기법이 이만큼 효과적일 수 있을까.시의 뒤에 깔린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 간사의 덧없음이라는 배움도 흘려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지용이 가람 시조집에 발문을 붙이면서 감성의 섬세, 신경의 예리, 관조의 총혜를 갖춘 천상의 시인이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일이 생각 나는데 마지막 대목은 바로 이 관조의 총혜의 소산으로 일컬어 마땅할 것이다.
유재영은 1948년 충남 천안 출생이다. 1973년 시조문학에 추천되었으며 1983년 중앙일보 시조 대상을 수상했다. 시집 『한방울의 피 』외 다수가 있다. 도서 표지 디자이너이며 도서출판 동학사 대표이다.
필자는 시인을 본 적이 없다. 시로만 보았을 뿐 오래 전 필자의 시조창작론 원고 일편을 부탁했는데 쾌히 원고를 주신,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시인이다.
개오동
밑둥 적시는
여우비도
지났다
목이 긴
메아리가
자맥질을
하는 곳
마알긴
꽃대궁들이
물빛으로
흔들리고
빨강머리 물총새가
느낌표로
물고가는
피라미
은빛 비린내
문득 번진
둑방길
어머니
마른 손 같은
조팝꽃이
한창이다
- 유재영의 「둑방길」
중3 국어 교과서에 실린 현대 시조이다.
햇빛 비치는데 잠깐 비가 흩뿌리는 경우가 있다. 여우는 홀연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래서 여우비라 했나 보다. 어렸을 때 여우비가 내리면 호랑이 장가간다고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이 때 목이 긴 메아리가 자맥질을 한다. 거기 말간 꽃대궁들이 자맥질 때문에 흔들린다. 빨강 머리 물총새가 파닥대는 긴 물고기 하나 물고가고, 피라미 은빛 비린내가 문득 둑방길로 번지는 한창인 오전의 조팝꽃이다. 하필 왜 어머니의 마른 손이 떠올랐을까. 그냥 좋은 것이다. 내 고향 둑방길 모습이 그렇다.
6,70년 대의 추억들이다. 파스텔톤, 투명한 서정이며 따뜻한 절제, 섬세한 감성이다. 고향 풍경들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야, 이렇게 아늑할 수야. 이것이 시조의 격조이다.
지는 꽃을 보고 지고 지는 달을 보고만 있을 시인은 없다. 우는 새, 흐르는 물을 듣고만 있을 시인은 없다.
이만한 시 없으며 이만한 시조 없으리. 시조는 시조이고 시는 시이다. 시조는 격이 다르고 말씨가 다르고 리듬이 다르다. 시보다 못하다는 편견이 혹여 있을까, 오래되었으나 여기 기사 한편 싣는다.
일본은 공영방송인 NHK에서 단형시 하이쿠를 공모하는가 하면, 공원에 하이쿠 전용 우체통을 설치하는 등 ‘하이쿠의 생활화’를 위해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세계 50여개 대학에서 하 이쿠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좀 과장하면 일류(日流)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중략…. 현재 사용중인 제7차 중학교 국어교과서의 경우 자유시는 58편이 실려 있지만, 현대시조는 김상옥 의 ‘봉선화’와 유재영의 ‘둑방길’ 단 두편이 실렸을 뿐이다. 자유시는 종전(제6차 교육과정)의 42편 에서 크게 늘어난 반면, 현대시조는 6편에서 오히려 줄어들었다.
- 서울 신문,2007.2.3
책은 읽어야하고 술은 마셔야하고 명산은 올라야한다. 그리고 시조는 써야한다. 그래야 제맛이다. 읽지 않고 책을 말하지 말며 마시지 않고 술을 말하지 말며 오르지 않고 산을 말하지 말라. 시조를 쓰지 않고는 더더욱 말하지 말라. 시조는 더더욱 우리만의 고유한 문학 장르가 아닌가.
산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 늦가을은 천길 벼랑이다. 조금 있으면 가파른 절벽으로 곤두발질칠 것이다. 가을은 뒷모습 없이 간다. 잠깐 내게 웃어준 가을이다.
안개에 물든 아침 단풍이 햇살 때문에 그렇게도 고왔다. 참으로 평화로운 며칠이었다.
-서예문인화,2016.11,110-113쪽.
[출처] 유재영 편 -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첫댓글 시조의 멋스러움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