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따르면 영남 지방이 간접적으로나마 천주교와 인연을 맺는 것은 조선 후기 유학자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1726-1785)을 통해서다. 홍유한이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뒤 그 교리를 실천하려고 소백산 아래의 구들미(영주시 단산면)라는 곳으로 이거하였다는 것이다. 홍유한은 성호 이익의 제자로 신서파인 복암 이기경, 녹암 권철신 등과 교류가 깊었던 점으로 미루어 천주교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의 수덕 생활이 유학자의 수행과 구별되는 천주교 신앙 행위로 볼 수 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천주교 신앙에 입각한 직접적인 전래 행위에 대한 기록은 1785년 ‘을사추조적발’ 이후에나 나타난다. 사건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김범우가 유배지인 경남 밀양 단장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포교에 나섰다는 기록, 천주교 신앙을 이유로 문중에서 박해를 받자 자신의 아들과 함께 상주군 상서면 배묵리(현재 경북 상주군 이안면 양범리)로 이주한 서광수(1715-1786)에 관한 기록이 그것이다.
베론에 숨어들었던 황사영은 정약현(鄭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하고 스승이자 처숙인 정약종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으며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계기로 일어난 신해박해의 와중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는데, 그런 그가 정조 17년(1793)에 상주의 향리가문 출신인 이복운(李復運, 1776-?)을 방문하여 천주교 서적 7권을 보여주면서 천주교를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천주교인이 상주까지 찾아가 전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신해박해 이후 전라도와 충청도의 신자들 중 일부가 박해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경상도로 거주를 옮겨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다. 아울러 황사영 자신이 배론으로 피신하기 전인 1801년 3월경에 ‘예천 고을에 머물렀다가 강원도 접경을 지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천 등 경상도 북부 산간 지방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을해·정해박해로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
1815년의 을해박해는 청송·진보·영양(봉화)·안동 등지에서 일어났고 1827년의 정해박해는 상주·순흥 등지에서 일어났는데, 이들 지역은 모두 경상도 북부지역이다. 신해박해 이후 충청북도 제천 산속의 배론에서 처음으로 교우촌이 출현하였고, 신유박해를 경과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태백산맥의 험골인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일월산의 봉화 우련정, 영양(봉화)의 곧은정, 울주 살티, 문경 한실 등지에서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다. 다만 신자 대부분이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전교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중 을해박해로 71명이 체포되었고, 중도에 사망한 사람 등을 제외하고 33명이 대구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을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경삼감영으로 압송된 신자들 중 행적이 비교적 뚜렷한 신자로는 일월산에서 체포된 김종한(김대건 신부 종조부,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을 비롯하여 16명이 있다. 정해박해는 1827년 음력 2월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당시 체포되어 대구감영에서 순교한 신자로는 봉화에서 체포된 이재행, 상주에서 체포된 신태보 등 8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