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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로우드의 부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봄이 왔다.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도 견딜만 했다. 목요일
오후는 휴무였으므로 산책을 나가면 길바닥이나 담 밑에는 매우
사랑스럽고 예쁜 꽃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4월은 곧
아름다운 5월로 바뀌었다. 가득히 펼쳐진 초록색, 가득한 꽃들,
느릅나무와 떡갈나무는 해골 같은 모습에서 당당하고도 위엄에
찬 생명을 회복했다. 숲에서는 갖가지의 식물이 풍성하게
자라고, 야생의 앵초가 흐드러지게 피는 곳에서는 이상한 빛을
발했다. 나는 녹음이 우거진 숲속에서 말할 수 없이 황홀한 빛을
발하고 있음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거의 혼자서
마음껏 즐겼다. 이 이상한 자유와 열락에 빠진 하나의 원인을
지금 여기서 말하려고 한다.
로우드의 숲은 안개가 많았고, 이 안개는 전염병의
원인이었다. 봄이 되자 이 고아원에 티푸스가 유행한 것이다.
그리고 5월이 되기 전에 학원은 마치 병원으로 바뀌어 버린
듯했다. 80명의 소녀들 중 45명이 한꺼번에 걸렸다. 병에 걸리지
않은 학생에게는 거의 무제한으로 자유가 용납되었고 이러한
학생을 감시하거나 억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템플 교장은
병실에서 살았고, 또 교사들은 건강한 학생들을 맡아 줄
친척이나 친구들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들을
출발시키기 위해 선생들은 바빴다.
전염병이 이처럼 로우드에 깔려 있어 죽음의 그늘은 차츰 짙어
갔다. 참담과 공포가 지배했고, 모든 방과 복도마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이런 와중에서 7월의 햇살은 언덕을 비롯해 숲
위에 밝게 내리쪼이고 있었다. 학교 뜰에도 꽃으로 장식되었다.
이러한 향기로운 꽃들도 가끔 관 속에 넣어지는 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하지만 나나 병에 걸리지 않은 다른 아이들은 이 지방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겼다. 집시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헤맸다.
식사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줄고, 병자는 별로 먹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의 아침 식사는 다소 풍족했고, 흔히 점심을 지을 시간이
없을 때는 커다랗게 자른 파이나 두터운 빵과 치즈를 주었다.
우리들은 그걸 들고 숲으로 가서 각자 좋은 장소를 골라 멋진
식사를 했다.
그 동안 헬렌 번즈는 어디 있을까? 어째서 나는 이 자유롭고
행복한 나날을 그녀와 함께 보내지 않았던가? 헬렌은 앓고
있었다. 몇 주일 전부터 그녀는 2층의 어느 방으로 옮겨져서 내
눈에는 띄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티푸스가 아니라
폐병이었다. 나는 그때 무지했기 때문에 폐병이란 간호만 잘
하면 틀림없이 좋아질 수 있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6월의 어느 날, 나는 늦게까지 숲속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학교로 돌아온 것은 달이 뜬 후였다. 한 마리의 말이 교정
입구에 매여 있었다. 그 말은 의사의 것이었다. 나는 숲에서
캐어 온 몇 그루의 풀을 내 화단에 심으려다 문득 뜻밖의 일이
생각났다. "이렇게 좋은 철에 앉아서 죽어가는 사람은 얼마나
슬플까! 이 세상은 이처럼 즐거운데 - 여기서 불리워져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일 거야." 이 때
나는 처음으로 천국과 지옥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마침
현관이 열리고 의사 베이드 선생이 나왔다. 한 사람의 간호사가
따르고 있었다. 선생이 말을 타고 가 버리자 간호사가 문을
닫으려 했다. 나는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베이드 선생님은 헬렌을 보러 오셨어요?"
"음."
"그래,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이제 여기서 오래 있지는 못할 거라고 했어요."
이 말을 내가 어제 들었다면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느니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헬렌은 이제 이 세상에 얼마 있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공포에 가슴이 저리고 슬픔으로 몹시 떨렸다. 나는 꼭
헬렌을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어느 방에 누워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템플 선생님의 방이야."
하고, 간호사는 대답했다. 소등 뒤 두 시간이 되었을까? 아마
열한 시가 가까웠을 것이다.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몰래
일어나 잠옷 위에 웃옷을 걸치고 맨발로 침실을 기어 나갔다.
하나의 계단을 내려 아래층을 통과하고, 두 개의 문을 지나
간신히 또 하나의 계단에 도착했다. 그것을 오르자 정면에 템플
선생의 방이 있었다. 방문을 조금 열려 있었는데, 환기를 위해
그렇게 한 것 같았다. 나는 문을 밀치고 헬렌을 찾았다. 템플
선생의 침대 곁에 흰 커튼으로 반이 가려져 있는 곳에 조그만
침대가 놓여 있었다. 헬렌의 얼굴은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뜰에서 나와 얘기했던 간호사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 자고
있었다.
"헬렌!" 하고, 나는 커튼 밖에서 속삭였다. "안 자니?" 그녀는
스스로 커튼을 젖혔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불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머, 제인, 너였지?" 평상시의 상냥한 목소리였다. 나는
생각했다.
"헬렌은 죽지 않아. 모두가 착각을 하고 있어. 만일 죽는다면
이렇게 침착할 수도 없고, 얘기도 못할 거야."
나는 침대로 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녀의 이마는
차가웠고, 손도 목도 야위어 있었지만 그녀는 전과 마찬가지로
미소지었다.
"어떻게 여기에 왔니, 제인? 벌써 열한 시가 넘었어."
"너를 만나러 왔어. 네가 몹시 아프다길래 잠을 잘 수가
없었어."
"그럼 나한테 이별하러 왔구나. 마침 시간이 맞았어요."
"어디 가니, 헬렌? 집으로 가니?"
"응, 나의 영원한 집, 최후의 집으로."
"싫어, 싫어, 헬렌!"
나는 슬픔 때문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인, 너 맨발이구나. 이리 올라 와, 이불을 덮어요."
나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나를 안았고, 나도 그녀를 감싸
안았다. 오랜 침묵 뒤에 그녀는 다시 속삭였다.
"나는 참 행복해, 제인, 그러니까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아. 우리들은 언젠가 죽어야 하고, 내 병은
괴롭지가 않아. 내 마음은 평안해. 나를 아깝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아버지가 계시지만 재혼을 했으니까 그리 슬퍼하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넌 어디로 가려는 거지? 그걸 알고 있어?"
"믿고 있는 거야. 나에게는 신앙이 있어. 그래서 나는 하느님
곁으로 가는 거야."
"하느님은 어디 계셔? 하느님이란 어떤 분이야?"
"나를 만드신 분, 그리고 너도...... 하느님은 자기가 지으신
것을 멸하지는 않아요. 나는 뭐든지 하느님의 힘에 맡기고
있어요."
"헬렌, 너는 정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니?"
"반드시 있다고 생각해. 하느님은 신이야. 나는 하느님은
사랑하고, 하느님도 나를 사랑하셔."
"그럼, 내가 죽으면 너를 만날 수 있니?"
"너도 마찬가지로 행복한 나라로 올 거야. 역시 전능하신
하느님이 맞이해 주실 거야."
나는 헬렌에게 바짝 안겼다. 헬렌은 이제까지보다 더
사랑스러웠고, 그녀를 잃어버리기가 싫었다. 이윽고 그녀는
더없이 아름다운 어조로 말했다.
"아아, 나 참 기분이 좋아. 어째 잠이 올 것 같애. 하지만
제인, 어디 가면 안돼! 네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해."
"오래오래 같이 있을 게, 헬렌. 누가 와도 나를 데려가지
못해."
"너 따뜻하니?"
"음."
"잘 자, 제인."
"잘 자, 헬렌."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낮이었다. 간호사가 나를 안고 기숙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몰래 헬렌에게 간 것으로 꾸중듣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가 여러 가지로 물어도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 이틀 뒤에 나는 비로소 사정을 알았다. 템플
선생이 새벽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 보니 내가 헬렌과 같이 자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얼굴을 헬렌의 어깨에 얹고
그녀의 목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자고 있었고, 헬렌은 -
죽어 있었다. 헬렌의 무덤은 브로클브리지 교회의 묘지에 있다.
그녀가 죽은 지 15년, 거기에는 풀이 우거진 둥근 무덤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잿빛 대리석이 그 자리를 말해 주고,
묘석에는 그녀의 이름과 '나는 다시 살아난다' 라는 뜻의
라틴어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