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의 음유시인, 미샤 마이스키 /신현복

[작가회]

첼로의 음유시인, 미샤 마이스키

글쓴이 : 신현복

날짜 : 04-02-09 07:30     조회 : 1456

음악회의 연주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매우 다양하다.

휴게실 구석자리에서 혼자 차를 마시며 기다리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 긴 의자에 앉아서 프로그램을 뒤적이며 조금 후에 연주할 곡에 대한 해설을 미리 읽고 있는 사람,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느라 출입문과 시계를 번갈아 보는 사람, 또는 다정한 사람과 함께 훈훈한 꽃바람을 마음껏 만끽하며 예술의전당의 뜨락을 거니는 사람….

오늘 그들은 조금 흥분한 듯하면서도 큰 기대감에 들떠서 술렁이고 있는 것 같다.

연주자의 수준이나 지명도나 그들이 연주할 곡에 따라 청중들의 분위기는 긴장되기도 하고 가볍고 밝은 분위기가 되기도 함을 볼 수 있다. 음악회에 와서 연주를 듣는 것이 목적이긴 하지만, 음악회 오는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의 분위기나 그들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의 다양함에 흥미를 갖게 된다.

첼로의 음유시인이라 할 만큼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려 주는 미샤 마이스키.

꽃향기 그윽한 이 봄날에 꿈결같은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음이 얼마나 행운인지, 오늘 나도 누구 못지 않게 조금은 흥분되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완벽한 테크닉과 심오한 서정이 어우러진 연주를 한다는 평을 듣는 유태계 혈통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그는 보랏빛 라일락만큼이나 향긋한 한 편의 시가 되어 무대에 나타났다.

연주를 하기 전이었음에도, 중세 유럽의 기사를 연상케 하는 헌칠하게 곧은 몸매와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수염으로 그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낭만과 멋을 풍기고 있었다.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그곳 시청 앞 광장에서 자고 나오는 히피들의 모습 …헌칠한 키에 걸쳐진 긴 외투와 긴 머리 긴 수염… 들이 퍽이나 낭만적이고 멋이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문득 그의 모습에서 그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사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외모에서는 젊음과 멋이 있었고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열정적이고 힘있는 연주가 어우러졌다. 그의 연주를 뒷받침하는 크렘린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마이스키를 돋보이게 할 만큼 충분히 기량 있는 열일곱 명의 현악 연주자들이다.

젊고 패기 있게 보이는 그들이지만 연주하는 현絃의 음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로시니의 ｢현을 위한 소나타｣.

첫 악장 알레그로 비바체에서 그들은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 냈다.

음악회에 갈 때마다 나도 모르는 징크스를 가지게 되었는데, 첫 곡 첫 악장 도입부에서 얼마나 완벽한 음이 나오느냐에 따라 그 날의 연주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내가 기대했던 첫음을 그 연주자가 들려주지 못 했고, 나의 징크스대로 그 날의 연주는 끝 악장까지 그 첫음처럼 실망으로 끝이 난 적이 있다.

로시니가 열두 살 때 작곡한 이 곡은 주제와 형식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이 컷음을 알 수 있고, 멜로디와 리듬이 밝고 경쾌해 청중과의 호흡을 연결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음악을 가까이 하게 된 젊었던 시절에 자주 접하였던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비해, 실내악은 이렇듯 오랜 세월을 지내온 연륜이 쌓이면서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는 것을 이즈음 알게 된다.

바이올린 연주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해서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이라면, 첼로 연주는 우리의 이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하나의 강이 되어서 가슴 깊은 골짜기까지 스며든다는 것을 그의 연주를 들으며 다시 실감하게 된다.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E장조｣.

마이스키는 이 곡의 연주에서 하이든 특유의 가볍고 신선한 음색을 잘 살려 주었다.

긴 머리와 긴 수염 탓인지 그는 잠깐잠깐 쉬는 동안에도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땀을 닦기도 하고, 첼로 옆으로 몸을 비껴 가며 협주단의 연주에 박자를 맞추며 흥을 돋구기도 했다.

3악장 알레그로 몰토의 높은 포지션에서는 마이스키의 기량이 마음껏 드러났는데, 솟구치는 듯한 또는 파고드는 듯한 강한 선율이 가슴에 절절히 스며들었다.

오페 바흐의 ｢쟈클린의 눈물｣은 19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유태인 작곡가의 곡이지만 한국적이고 멜랑콜리한 멜로디여서 청중들의 정서와 하나가 되기에 충분하다. 텔레비전의 어느 인기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도 나왔던 만큼, 마치 옛날의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은 조금은 신파적인 낭만 같은.

그 곡을 연주하는 미샤 마이스키의 옆모습에서 나는 잠깐 훔쳐보았다. 그의 큰 키 어딘가… 겨자색 헐렁한 블라우스 옷소매에 스며 있을 엷은 연민과 외로움을.

파가니니의 ｢로시니 모세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 마이스키의 연주는 절정에 이르고 청중들은 그의 마력에 사로잡혀 망연히 그의 활을 움직이는 몸짓만 주시할 뿐이다.

바이올린의 귀재라 할 만큼 초인적인 기교로 듣는 이들을 사로잡았던 파가니니의 첼로를 위한 곡인 만큼 열정적인 선율과 기교가 마이스키에 의해 더욱 돋보인다. 첼로에서도 저만큼 고음이 나올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가늘고 날카롭게 그러나 강하고 절절하게, 나른한 봄밤에 그것은 가슴에 내려꽂히는 비수가 되어 나를 전율케 한다.

첼로의 거장이라는 로스트로프비치나 다니엘 샤프란의 연주에서 볼 수 없는 그의 연주를 오늘 나는 보았다.

낭만과 멋, 열정과 젊음 그리고 겨자색 헐렁한 실크 블라우스 옷소매의 펄럭임에서 언뜻 내비치는 외로움의 그림자와, 그 어떤 연주가보다 더욱 청중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마력 같은 것을.

오래 떨어져 있던 연인을 만난 듯, 달콤한 꿈을 꾼 듯, 마이스키의 연주에 취한 채 예술의전당을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화사하고 사랑스럽다.

앞산의 아카시아 향기가 달빛 아래서 더욱 자욱한데, 향긋하고 풋풋한 풀내음이 봄밤의 뜨락에 그득하다. 서서히 오월의 봄이 무르익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