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와 진보의 서사를 가지고 다른 삶의 형식을 향한 갈망을 품었던 근대와 달리, 후기 근대는 새로운 것 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해당하는 혁명적 파토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후기 근대에는 출발 직전의 분위기가 없다. ‘계속 그렇게 하기’와 대안 상실로 힘이 빠져 있다. 이야기할 용기, 세상을 바꾸는 서사를 향한 용기를 상실했다.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탈진한 후기 근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강조된 ‘초심자의 기분’이 낯설다. 후기 근대인은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편히 쉴 곳만 찾는다. 어떠한 서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된다. 후기 근대에는 어떠한 갈망도, 비전도, 먼 것도 빠져 있다. 따라서 후기 근대는 아우라가 없는 상태, 즉 미래가 없는 상태다.
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
디지털화는 시간적 위축증을 악화시킨다. 실제성은 좁은 현실 폭을 가진 정보로 부서진다. 정보는 놀라움의 자극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정보는 시간을 파편화한다. 주의도 파편화한다. 정보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화된 정보 교류 속에서 정보는 또 다른 정보를 사냥한다.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체험한 것의 빠짐없는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서나 프로토콜에 불과하다.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사회는 이야기와 기억의 종말을 의미한다. 어떤 이야기도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것은 정보와 데이터뿐이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되어 있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한 ‘나’는 스스로를 영구히 생산해 낸다. 셀카는 텅 빈 자기의 복제다.
정보사회와 투명사회에서 벌거벗음은 외설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된 것, 금지된 것 또는 은폐된 것의 뜨거운 외설이 아닌 투명성, 정보, 소통의 차가운 외설을 논해야 한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 완전히 정보와 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의 외설을 말하는 것이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이다. 사물을 감싸는 껍질, 베일만이 설득적이고 서사적이다.
스마트폰은 타자가 자기 자신을 알리는 시선을 완전히 앗아감으로써 실제와 우리 사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차단한다. 터치스크린은 대면하는 상대인 현실을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만든다. 타자성을 박탈하고, 타자는 소비 가능해진다. 라캉에 따르면 이미지는 나를 바라보는, 사로잡는, 마법을 거는, 현혹시키는 시선을, 나를 자신의 궤도에 끌어들이고 내 눈을 사로잡는 시선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미지 안에는 항상 시선을 가진 것들이 존재한다.” 라캉은 시선과 눈을 구분한다. 눈은 허구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그 이미지는 시선을 방해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지각을 가능케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모든 가치에 대한 가치전도는 세계를 향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세계는 이를테면 다시 이야기되는 것이다. 세계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모든 가치에 대한 가치전도는 모험과 향연으로서의 이야기, 즉 탐험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래를 열어준다.
오늘날은 스토리텔링이 넘침에도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효율의 논리는 이야기의 정신과 조화될 수 없다. 심리치료와 정신분석만이 여전히 이야기의 치유력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경청만으로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이야말로 모모에게 많은 유일한 것”이다. 모모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게 쓰인다. “어린 모모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는데, 그건 바로 ‘듣기’였다. 모모의 경우 어떻게 그렇게 경청을 잘하는지, 그 방법마저 특별하다.” 모모의 우호적이고도 사려 깊은 침묵은 상대를 자기 혼자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었을 생각으로 데려간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 어루만짐 또한 치유력이 있다. 접촉은 이야기하기처럼 친밀함과 근원적 신뢰를 형성한다. 촉각적 이야기로서 접촉은 고통과 질병으로 이끄는 긴장과 막힘을 풀어낸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성과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람들을 따로 떼어놓는다. 그 결과로 우리에겐 공동체를 구축하고 의미를 형성하는 이야기가 매우 부족하다. 과도하게 급증하는 개인 서사가 공동체를 잠식한다. 자기표현의 형식으로 개인적인 것을 게시하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정치적 공론장으로서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 이야기의 형성을 어렵게 한다.
강력한 의미의 정치적 행위에는 서사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한 행위는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서사 없는 행위는 임의의 행동이나 반응 정도로 전락한다. 정치적 행동은 서사적 응집성을 전제한다.
스토리텔링의 시대에 사람들은 사물 자체보다 서사를 더 많이 소비한다. 서사의 내용이 실제 사용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장소의 특별한 이야기마저 상업화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그 장소에서 생산되는 상품에 서사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최대한 사용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이야기는 공동체에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반면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상품으로 만들 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희망을 만드는 미래 서사가 부족하다. 우리는 줄타기를 하며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넘어간다. 정치의 역할은 문제 해결사로 축소된다. 이야기만이 미래를 연다.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서사의 위기> 한병철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하나요〉
싱어게인2- 39호가수
https://youtu.be/tn_6-NEhUuc?si=MuspxUB6t3wIhKB6
첫댓글 차갑고 끈덕진 배신처럼 봄비가 오래 내린다.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의 신간이다. 서사의 위기는 황무한 노년과 패역한 정치의 위기도 아우르고 있는 듯 하다.
지난 번 호모데우스는 그만 소개하기로 하고.. 서평이나 코멘트도 생략하기로 했다. 주제넘은 것 같아서다.
아무튼 책 소개는 즐겁지만, 책의 내용은 이 시대가 직면한 서사의 미천함을 인문학적인 안목으로 비판한다.
요즘 지루한 봄장마의 눅눅함에 시달리다 보니 조금 무엔가 시들해져버리고 귀찮아졌다.
다시 분발할 모멘트가 필요할테지만.. 일단 40일 도전을 마무리 하고 쉬어야겠다.
이야기 시를 쓰는 저로서는 모든 행위에 품어진 이야기를 잘 들어야겠습니다
아침 운동 나왔다가 노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