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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4] 성인의 탄생과 출가 / 정병조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은 현재의 네팔과 인도의 국경부근으로 카필라바스투라는 나라이다. 이 카필라바스투의 선조들은 아리안 족의 후예로서 그들이 인도의 중북부에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8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카필라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은 약 1백 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 전체의 규모가 소상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대략 부처님 당시의 여러 형태가 밝혀지고 있다. 당시 인구는 1백만 명 가량으로 추산되고, 그들의 주업은 농업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곡물 저장창고가 다수 발견되었고, 그 당시의 설화에서 농업, 특히 소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왕권이 발달해가는 고대사회의 부족연맹적 성격 에서 강력한 전제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인다. 카필라국은 그다지 큰 나라는 아니었다. 기원전 8-6세기 경의 인도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도시국가들이 많이 있 었다. 불교경전에 자주 언급되는 마가다, 코살라, 밤샤 등 이 대개 인구 1천만으로 추산되므로, 1백만 정도의 카필 라국은 중소국가였으리라. 카필라국은 정치. 군사적으로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평화를 사랑하고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매우 자존심 높은 민족이었다고 불교경전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 카필라라는 나라에서 국왕의 아들로 태어난 분이 바 로 부처님이다. 그 탄생 연대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불기 2538(서기 1994년 기준)이라 는 연대는 입멸한 해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여러 가지 자료로 비추어 볼 때, 세속적으로 80년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고 보여지므로, 80년을 2538년에 더해야 탄생한 해가 된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확한 생존 연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우선 학계에 통용되는 학설을 알아보자.
먼저 남전대장경에 근거하여 기원전 624년에 태어나 기원 전 544년에 입멸하였다는 설이 있다. 11세기경부터 남 방 불교국가들에서는 전설적인 자료에 의해 이 설이 타 당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라 1956년 실론(스리랑카)에 서는 부처님 입멸 2천 5년제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세계불교도의회(W.F.B)에서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남전계통의 전통에는 역사적인 사실로 믿기 어려운 몇 가지 전설적인 자료들도 있으나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또 하나는 그보다 80여 년 더 늦게 보는 설이다. 즉, 기원전 565-485년으로 추산하는 것이다. 이 설은 스리랑카에 전 해오는 <<대사헌, Mahavassa>>이라는 문헌에 근거해 서 주장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부터 여름철 한 번씩 지내는 안거마다 점을 찍기 시작해서 그 점이 97 5개가 되었을 때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연도는 <<역대삼보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력490년이라고 한다. 따라서 기원전 565-485년이 부처님의 생존 연대가 된다.
셋째로, 기원전 463년이 입멸설이라는 설이 있다. 부파불교의 논서인 <<십팔부론>>, <<이부종륜론>>에 근거해서 일본 불교학자, 우이 하꾸쥬가 제창한 설이다. 이 설의 근거는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입멸 후 116년 만에 등극했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그 즉위 연대가 기원전 268년이 되므로 그 기준으로 볼 때, 기원전 463년이 입멸년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각 설은 그 나름의 타당성을 갖지만, 기실 부처 님의 정확한 생멸 연대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것이 불 교적 전통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교조였던 고오타마 붓다는 모든 생명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부처님'이란 보통명사이며 특수명사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는 결코 '석가교'라고 불릴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중요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 생멸 연대 자체에 맹목적인 의미를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연대의 혼란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 된 후에 비롯되었다고 보여 지는데, 유. 불.선, 삼교의 경쟁에서 연장자를 중시하던 중국의 관습에 따라 각 교 조의 나이를 조작하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 러한 여러 설들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두 번째 기원전 565년설이 아닌가 한다. 안거 때마다 점을 찍는 것뿐 아니라 다른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기원전 6세 기 중엽 무렵이 그 탄생 연대가 되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카필라국의 왕은 슛도다나였고 왕비 는 마하 마야였다. 슛도다나라는 인도말은 '깨끗한 쌀'을 의미하므로 정반왕이라고 한역 한다. 마아마야는 '거대한, 위대한'이라는 뜻의 마하를 대(大)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마야 혹은 마하마야라고 그대로 부른다. 이 슛도다나 왕과 마하마야 왕비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바로 부처님, 고오타마 싯다르타였다. 이 위대한인격, 고오타마 붓다라고 불리는 이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인격적인 삶을 누렸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결코 인격적인 삶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출현은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는 데 가장 기본적인 첩경을 제시 해 주는 원천이었다.
부처님의 탄생 부처님은 어머니인 마하마야 왕비로부터 태어났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출가한 여자가 아이를 낳 기 위해서 친정으로 가는 풍습이 있었다. 부처님의 탄생 에 얽힌 설화는 다음과 같다. 마하마야의 친정은 이웃나라인 코올리국이었는데, 산달이 가까워져서 그쪽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라는 꽃동산에 이르렀다. 꽃이 피고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그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잠시 쉬어가기로 한 왕비 일행이 그 동산에 머물렸을 때, 왕비는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주변의 시종들이 황망하게 휘장을 치고, 마하마야 왕비가 무수가지를 잡는 순간, 오른쪽 옆구리로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이 탄생 설화에 관하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세 가지의 내용이다.
그 첫 번째가 우협탄생설이고, 두 번째는 태어난 아이가 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씩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며, 세 번째가 이 아이의 관상을 보기 위해 동쪽에서 유명한 선인들이 왔다는 설화이다.
이러한 설화들은 뭔가 암시해 주는 부분이 있다. 즉, 옛 위인들의 설화에는 반드시 상징과 긴장이 내포되어 있다 는 점이다. 이러한 것을 무시한 채 생물학적이고 논리적 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불교적이 지 않으며 종교적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멀치아 엘리 아데(Mircea Eliade)의 얘기를 빌릴 것도 없이, 종교란 신화요, 상징이다. 따라서 그러한 상징의 의미를 깊이 연 구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의 우협탄생설은 인도 신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카스트 제도의 사성계급에 따라 바라문은 범천의 정수리에서, 크샤트리아는 옆구리에서, 바이샤는 무릎에서, 수드라는 발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의 열등함과 고귀함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부처님이 옆구리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크샤트리아 출신임을 의미한다. 부처 님은 국왕의 아들이었으므로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 기 위해서 우협탄생설이 생겨났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흔히 부처님 오신 날이라 하여 절에서 아기 부처님을 관욕시키는데, 그 아기 불상의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 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의미하는데, 이 구절을 풀이 하면,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라는 뜻이다. 이 구절은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결코 인간 석가의 특 수성을 내세우고자 함이 아니며, 모든 생명들이 부처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을 실증해 보임으로써 모든 생명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이 그와 같은 불성의 가능성 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이를 부처님의 탄생 설 화에 접목시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세 번째 내용 또한 유명하다. 아기의 관상을 보기 위해 왔 던 선인이 아기를 보고 나서 갑자기 울었다. 그에 부왕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 까닭을 물으니, 선인은 이렇게 대 답하였다. 이 아이에게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 아기가 왕위를 계승한다면, 사대주 오대양을 통솔하는 전대미문의 위대한 군주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이 만약 출가를 한다면, 큰 깨달음을 이루어 이 세상의 뭇 중생들을 환희와 기쁨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중 어떤 길을 선택하 든지, 저는 너무 늙어서 이 아이의 밝은 미래를 보지 못합 니다. 그것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린 것이므로 너무 불 길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저는 이 아이가 부처님이 되 실 경우, 그 가르침을 듣지 못하게 됨을 한탄하는 것입니 다. 이러한 설화 등이 간직한 의미는 부처님의 인격을 무 한정으로 신격화시키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격적인 체취가 풍기면서도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 본다.
이 어린 왕자에게 부왕인 슛도다나는 고오타마 싯다르타 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오타마는 성이고 싯다르타는 이름인데,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통상 석가모
니, 즉 샤캬무니라는 명칭은 샤캬족이라는 뜻과, '침묵한 다'라는 원뜻에서 파생되어 성인을 지칭하는 '무니'라는 말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석가족에서 출현한 성인'이 라는 관용어구적 의미를 뜻한다. 부처님이라는 용어는 범어 'bud', 즉 '깨닫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사물과 자 연의 배후에 있는 깊은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붓다(Bud dha), 즉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싯다르타 태자 에게는 생모인 마하마야 왕비가 태자를 출산한 지 이레 만에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이 생겼다. 그 당시의 관습 에 따라서 마야 왕비의 여동생 마하프라자파티가 그 뒤 를 이어서 왕비가 되었다. 뒷날, 태자의 친이모인 이 마하 프라자파티는 불교교단에 귀의한 최초의 비구니가 된다.
이상에서 탄생에 관련된 설화를 서술하였는데, 이제 태 어난 장소 룸비니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탄생지인 룸비니는 정각을 이른 보드가야, 초전법률지인 사르나 트, 열반에 든 장소인 쿠시나가라와 함께 불교의 4대 성 지로 꼽힌다. 현재 네팔의 영토 안에 잘 보존되어 있는 룸 비니 동산은 인도 국경에서 버스로 불과 30분 정도의 거 리 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의 지명은 '룸빈데이'인데, 불 교 성지 중 가장 늦게 영국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 었다. 그 발굴 현장에는 마하마야 왕비가 허리를 약간 옆 으로 비튼 모습으로 어린 싯다르타 태자를 출산하는 굽 타시대의 석조상이 남아 있고, 왕비가 출산할 때 잡았다 는 무수(無憂樹)가 아주 큰 형태로 남아 있다.
*태어날 때는 무우수(無憂樹), 깨달음을 얻을 때는 보리수(菩提樹), 열반에 들 때는 사라수(沙羅樹) 나무가 사방에 있었다고 한다. 무우수는 인도 대륙에서 자생하는 열대성 나무이다. 인도에서는 옛부터 '아소카나무'라고 불렀다. 산스크리트어로 '아소카(asoka)'가 '근심이 없다'를 의미하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의역하여 '무우수(無憂樹)'라고 부른다. 상록수로서 잎이 무성하고 2~4월에 붉은색의 꽃이 피는데, 그 아름다운 잎과 향기로운 꽃으로 유명하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신성시 하는 나무다. https://naver.me/FBJsKvYr
그 곳에는 아쇼카 대왕의 석주도 있다. 거기에는 브라흐미 문자로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명문들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성지 룸비니가 지금은 너무나 초라하기만 하다. 지금 이곳에는 힌두교도들이 대부분이고 불교신도는 적은 수에 불과하다. 불교성지를 참배하는 관광객들 이외에는 신심 있는 수도자들이 이 땅을 지키고 있지 않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현재 일본에서 룸비니를 성역화 작업을 착수하고, 네팔 정부에서도 룸비니 성역 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출가 이전 싯타르타는 국왕의 외아들로 태어나서 세속적 향락을 누리고, 고귀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한 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는 경전 구절이 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술 회하셨다. "비구들아, 나의 태자시절에는 나를 위해 지어 진 계절마다 다른 별장 궁궐이 있었노라. 그 별장 궁궐의 바닥에는 카시미르산의 양탄자가 깔려 있었노라." 그러나 이렇게 호사스런 생활에도 불구하고, 싯다르타 태자의 가슴을 떠나지 않는 번민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모든 이들이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죽음의 문제에 위대한 철학적 성찰을 하였던 것 이다.
이러한 싯다르타 태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번민을 구상화시킨 것이 유명한 사문유관상이다. 즉 동서남북의 4대문을 싯다르타 태자가 다니면서 늙은 이, 병든 이, 죽은 이, 출가 수행하는 수도자 등을 만나고 나서 출가를 결심 한다는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남의 일들로 여기는 착 각 속에 빠져서 살아간다. 그러나 싯다르타 태자는 결연 히 삶과 죽음의 문제에 회의의 화살을 꼽았던 것이다. 또 하나, 출가의 동기에 관하여 <<대방광장엄경>>에 나오 는 구절이 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이러한 삶과 죽음의 번민 속에서 벗어 나기 위해 들로 나가 야유회를 즐겼다. 모처럼 자연의 심 취하여 머리는 식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태자의 눈 에 띤 것은 냉혹한 생명의 실상이었다.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그 농부의 쇠스랑에 찍혀서 숨이 끊기지 않 은 채 꿈틀대는 벌레를 보았다. 싯다르타 태자는 생각하 였다. '저 미물도 살기 위해서 저렇게 몸부림치고, 몸이 끊어지면서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 고통을 당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디서 날아왔는지 참새가 꿈틀 거리는 그 벌레를 입으로 물고 창공을 날아갔다. 다시, 매 같은 강한 날짐승이 그 참새를 덮쳐서 창공을 가로 지른 다 싯다르타 태자는 눈을 들어 지평선 쪽을 보았다. 저 끝 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서 농부는 밭을 갈고 있었다. 농 부의 채찍에 시달리는 소는 가죽과 뼈뿐이고, 등과 배는 거의 맞붙어 있어서 매우 고통스럽게 보였다. 소를 때리 는 농부의 두 손은 시꺼멓게 그을렇고 그 이마에는 고통 과 연륜의 주름살이 깊이 패여 있었다. 싯다르타는 허공 을 향해 한탄하였다.
'아, 어째서 살아있는 것들은 살이 있는 다른 것들은 괴롭 혀야만 하는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저 모든 것들이 평 화롭게 사는 길은 영영 없는 것일까?" 이러한 삶과 죽음 의 번민은 싯다르타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원천적인 삶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세상 생명들의 평화로운 공존 질서에 관한 부분은 이 우주와 세계의 평화, 조화를 이루 기 위한 논리와 실천을 수립하기 위한 모색이라고 보여 진다.
이상의 두 가지가 인간 싯다르타 태자를 출가의 길로 들 어서게 한 근본 원인이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인도인들 은 종교적인 민족으로 출가 자체를 경원시하지 않는 나 라이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지극한 도를 깨치고, 저 보이 지 않는 세계 속으로 자기의 전 존재를 침잠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슛 도다나 왕은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 태자를 세속적인 영화 속에 몰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벌이 단 꿀을 탐 하듯이 이 젊고 지성적인 싯다르타에게 세속의 영화를 보다 깊이 맛보게 함으로써 세속에 오래 머물러 있게 하 려는 부모로서의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싯다르타의 출 가는 결연히 세속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이였으며, 또 한 자신에게 귀중한 것을 포기할 때, 진실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보여준 삶의 궤적이었다 슛도다나 왕은 싯다르타의 출가를 막기 위해 이웃나라의 야소다 라라는 아리따운 공주와 결혼을 시킨다. 그리하여 그 이듬 해 '라훌라'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라훌라'라는 말은 '장애 '를 뜻한다. 어느 때 후원을 거닐고 있던 태자는 아들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그 때 태자는 허공을 보면서 탄식을 하였다. '오, 장애(라훌라)로구나!' 그리하여 라훌라라는 말이 아들의 이름이 되었다. 불전에 따르면 그때 싯다르타의 나이가 19세, 또는 29세 라고 기록하여 연대가 일정치 않으나, 29세가 통설이다 그러나 라훌라를 얻는 싯다르타 태자는 오히려 출가를 굳히게 된다. 왜냐하면 이제 자신의 뒤를 이를 후사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생은 알 수가 없어 더러 예상 밖의 결과 낳기도 한다. 태자의 출가를 막기 위해 시킨 결혼이 오히려 태자의 출가를 재촉하게 되었다. 드디어 모든 사람이 잠든 어느 날 밤, 출가를 결행한다. 사랑하는 아내,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한 점 혈육 라훌라를 바라보는 싯다르타의 눈은 눈물로 얼룩진다. 그러나 그는 결연히 가슴 속으로 외친다.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고향땅을 밟지 않으리라' 모든 사람들이 잠든 어느날 밤, 싯다르타는 험준한 카필라 성벽을 넘는다 그 성벽은 물리적인 성벽이라기보다는 넘어서야 할 번뇌의 장벽, 끊어야 할 무명의 장벽 등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마부 찬타카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고 다시 생각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찬타카를 뿌리친다. "찬타카여, 그대는 돌아가서 국왕과 백성들에게 전하라. 나는 위대한 깨달음을 얻는 날, 다시 고향땅을 밟으리라." 이렇게 하여 싯다르타는 험준한 카필라성을 넘어서 정처 없는 수도의 나그네 길로 접어 든다. 그때 싯다르타의 나이 2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