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 한편을 보았다. ‘남한산성’이라는 영화다.
조선시대 제16대 왕이었던 인조. 병자호란으로 청나라군이 쳐들어 오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데 이 곳에서 항전하다 결국 항복을 한다. 삼전도라는 곳으로 나가 적장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배구고두례의 굴욕을 당한다. 오천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을 영화화 한 것으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의 기록이다.
이 영화가 상영되자 국민적인 관심이 고조되고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나라의 현실이 381년 전의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상황과 흡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며칠 전 마누라와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몇 년 전 작은 영화관이 생겼다. 이름하여 ‘보물섬 시네마’다.
나는 종종 이 영화관을 이용하여 영화를 관람한다. 영화관이 생기기 이전에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진주에서 영화를 보아야만 했다.
극장이 생기고 나니 쉽게 영화를 볼 수 있어 다행스럽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남다른 흥미를 느끼며 자랐고 지금까지도 변치 아니하며 줄 곳 극장을 찾곤 한다. 훌륭한 영화는 내 인생관에 큰 울림으로 다가와 변화를 주기도 한다.
영화상영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극장에 도착하여 입장권 두 장을 샀다. 매표소 바로 옆에는 팝콘을 파는 가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극장가에는 팝콘을 파는 가게가 유행처럼 번져 이런 시골 극장에도 버젓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나는 팝콘에 길들어진 촌부로서 극장에 오게 되면 팝콘을 사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다.
팝콘은 영화를 보면서 먹어야 그 진미를 알게 된다. 이 날도 팝콘 가게에 들렀다. “조~~기 큰 컵에 한 가득 담아 주시오.” 팝콘을 즐기지 않는 마누라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이 아저씨야 저걸 어찌 다 먹으려고 그래?” 하면서 그냥 가잔다.
마누라는 나에게 태클을 걸때는 으레 ‘이 아저씨’라고 한다. 나를 ‘이 영감탕구야’하고 부르지 않는 것이 무척 고맙다.
“우리가 지금 보려고 하는 영화가 당신도 알다시피 얼마나 치욕적인 역사이야기 인가. 이런 쓰디쓴 영화를 러닝타임 2시간 반을 보려고 하면 내 성질에 어디 배겨 내겼어? 그러니 달콤한 팝콘이라도 입에 넣어야 할 것 아닌가?”
4,500원을 주고 한 컵을 샀다. 그래도 남편 체면을 세워준다고 마누라가 들고 가겠단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영화가 막 시작이다.
영화는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황동혁 감독이 영화화 했다는 소개이다. 매력적인 언어의 마술사 김훈의 작품이라니 기대가 된다.
1636년 12월의 남한산성 풍경이 펼쳐진다.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덥혀있고 땅에는 눈이 내려 세상은 온통 회색지대다. 영화는 산성의 풍경에서 당시의 나라 형편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려 한 듯 하다.
청나라 대군이 몰려오자 왕은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청군에 의해 산성은 포위되고 성안에 갇힌 왕과 신하들 그리고 청군과 대치하고 있는 조선 병사들의 긴장된 모습들이 리얼하게 다가온다.
시종 전운은 고조되고 극도의 긴장감이 화면을 압도한다. 산성안 행궁에선 인조를 앞에 두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부복한 신하들이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불꽃 튀기는 논쟁을 벌인다.
이 순간의 치욕을 견디며 후일을 도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주화파의 영수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군에 맞서 끝가지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주전파의 영수 예조판서 김상헌.
이 두 사람이 벌이는 논쟁의 명대사는 황동혁 감독이 김훈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차용했다고 한다. 역시나 김훈만이 그려낼 수 있는 독특한 언어예술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최명길과 김상헌 역을 맡은 이병헌과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첨예한 연기대결이 그 당시의 상황을 더욱 사실감 있게 보여 준다. 특히 김윤석이라는 배우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인물인데 아주 캐릭터가 출중하였다. 남성적인 강한 인상과 부드럽고 걸걸하면서도 힘 있는 그의 음성에 실려 나오는 대사는 관객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병자호란을 자초한 인조를 조선조 27대 왕 가운데 가 장 얼빵한 임금이라고 여겼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의 처지가 일견 이해가 되었다.
인조는 서자출신으로 자기가 임금이 될 것이란 꿈이라도 꾸어 보았겠는가. 그저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면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오다 어느 날 갑자기 임무교대로 졸지에 임금이 된 사람이 아닌가. 언제 제왕의 수업이라도 받아보았더란 말인가. 그런 임금이라 어찌 올바른 치세를 할 수 있었겠으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방책이 있었겠는가. 이것은 오직 조선이 겪어야 할 숙명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결국 인조는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고 죄인의 몸으로 곤룡포 대신 남색두루마기를 걸치고 남한산성의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라는 곳에서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청태종 홍타이지 역을 맡은 배우가 인조에게 일장 훈시(?)를 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이영화의 압권이었다.
백호를 친 민둥머리의 사나이가 생긴 모습도 아주 매력적인 오리지널 중국인이다. 더구나 중국어를 유창하게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모습에서 그만 내 마음이 매료되고 말았다. 어쩜 저렇게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럽게 청나라 말을 구사 한단 말인가! 이 배우는 뒤에 알고보니 순 한국산으로 뮤지컬을 하는 김법래라는 배우였다.
영화가 끝나자 한 개 남은 팝콘을 입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점은 힘없고 무능한 지도자를 둔 나라는 항시 이웃의 강자에게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비단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에 있어서도 만찬가지다.
그간 몰랐던 사실을 이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된 것은 삼배구고두례에 대한 것인데 이는 청나라에서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예법이라고 한다. 예를 올릴 때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고개를 숙이고 조아리는 것이다.
삼전도가 남한산성 안에 있는 지명인줄 알았는데, 조선 시대에 한양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보기 드문 훌륭한 영화였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강대국에 둘러쌓인 우리의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이 세상은 개인이든 국가든 선이든 악이든 강한 자 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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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더운 날씨속에서 목요일날을 잘 보내시고 계시는지요
컴앞에 앉자서 좋은글을 읽으면서 쉬었다 갑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몸 관리를
잘 하시고 오후시간도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즐거운 목요일날 오후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람니다..
이제는 병자호란 . 왕처럼 당하진 않겠지만? 설마가 사람잡는다?
하니 절대 조심해야 할듯? 좋은글 오늘고 감사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