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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자료실 스크랩 박문수전 - 작자 미상
스머패트 추천 0 조회 110 18.07.01 11: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박문수전 - 작자 미상

 ▣ 본문 학습 ▣

[앞부분의 줄거리] 군수 석진이 불의의 변을 당해 세상을 떠나자 딸 석계향과 춘매는 노비로 팔린다. 석진에 의해 억울한 옥살이에서 벗어난 진도는 석진의 은혜를 갚고자 계향과 춘매의 몸값을 치르고 집으로 데려와 극진히 대우한다.


일변 석 소저1)를 불쌍히 여기고 일변으로 진파를 악한 계집으로 생각하나, 풀을 치매 뱀이 놀랠까 두려워하여 비밀히 진파를 대하여 사리에 당연한 말로 개유2)하니, [진파는 남편 진도의 말을 두려워하여 외면으로는 석 소저를 처음과 같이 대우하나 어찌 진가(眞假)의 형적이 드러나지 아니하리오.3)]4) [이때 진도가 생각하기를 석 소저의 나이 이미 십오 세나 되었음을 반기어 어진 배필을 택하여 성혼시키고자 하였다. 첫째로 석 소저의 백년을 부탁함이요 또는 자기의 처음 먹었던 뜻을 시종여일(始終如一)하게 성취하려 함이요 그 다음은 제 집안의 풍파가 자연히 휴식되리라 생각함이었다.5) 그리하여 혼처를 열심히 구하여 보았으나 합당한 곳이 없어 반년 동안이나 미루어 오는데 한갓 진파의 마음이 처음과 같이 화평함을 기꺼워하던 차에 가을바람이 높으매 상업에 종사하는 바가 되어6) 다시 외방으로 향하게 되었다.]7) 그는 진파를 대하여

“석 소저를 잘 보호하여 달라.”

하고 신신당부하고 그 날로 떠나가더라. 

진파는 진도가 멀리 떠남을 보고 가슴 속에 잠복했던 화염8)이 천만 길이나 다시 일어나나9) 백령백리(百怜百俐)10)한 석 소저에게 직접 대하여서는 별로 약점을 들어 말할 것이 없으매 애매한 춘매에게 대하여 매일 같이 잘못을 불이불문11)하고 함부로 꾸짖는 말이 별의 별 말이 다 많았더라.

하루는 아침에 춘매가 세숫물을 너무 일찍 떠놓았으므로 진파가 세수할 시간엔 물이 이미 다 식어서 차갑게 되었다. 이에 진파는 춘매를 불러 세우고 한나절이나 어지러이 두들기었다. 석 소저가 춘매의 매 맞는 광경을 바라보매 살을 에는 듯한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진파 앞에 나아가 공손한 말로 만류하였다. 그럴수록 진파의 노기는 더욱 충천하여 춘매와 소저를 떠밀어 물리치고 제집 하인배를 호령하는 것이었다.

저 석가 여자 두 년이 집에 들어와 스스로 교만하거니와 원인은 내 집에 팔려온 계집아인 것을 주인이 높인 데서 온 것이니 어찌 저희들을 상전 대우하리오.12) 다음부터는 석 소저라 이르지 말로 계향이라 부르라. 만일 거행을 잘못하면 저 춘매 모양 단단히 매맞으리라.”

하며 종일 꾸짖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날 진도가 보낸 사람이 있어 봉물13) 한 짐과 편지 두 장을 전하였다. 한 장은 진파에게 온 것이었다. 진파의 편지에 사연에는 ‘보내는 봉물은 곧 석 소저의 혼숫감이니 석 소저 거처하는 방으로 받아들여 잘 간수하라. 남은 말은 내가 십여 일 후에 도착하겠기로 글로 적지 아니하노라.’

이를 읽은 진파의 마음은 불에 섶을 던진 것 모양 더욱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계향에게로 온 봉물을 제 방으로 끌어들이고 다시 계향의 방으로 쫓아 들어가더니 계향의 상자를 낱낱이 열어놓고 기왕에 진도로부터 온 봉물을 낱낱이 꺼내어 제 방으로 들여오며 석 소저와 춘매를 지탄하여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너의 두 식구가 내 집에 들어와 오륙 년간을 호의호식에 의한 것도 과만하거든 이와 같은 능라금수(綾羅錦繡)14) 너를 위하여 내어주리오.”

그리하여 방 안에 놓아두었던 이부자리며 베개까지 거두어 가지

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날 석 소저는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진파가 이날 밤에 조용히 생각해보니 ‘진도가 돌아올 날이 머지 않았도다. 만일 진도가 돌아와 계향의 일을 안다면 결코 나를 용서치 아니하리라. 진도가 돌아오기 전에 저 두 사람의 형적15)을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하고 계교를 생각하다가 한밤 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16) 

이튿날 이웃의 장파라는 늙은 할미를 청하여 오니 그의 나이 칠십여 세였다. 전부터 그 여인은 인물 매매하는 거간꾼으로 이 지방에서 유명하더니 진파가 장파를 대하여

“계향과 춘매가 오륙 년 동안이나 내 집에서 꼬박 얻어먹고 호의호식하였소. 그 아이들을 당초에 속량하여 올 때에 몸값을 도로 찾으면 하루바삐 내 문정17)에서 내어보내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소이다. 지금 어디든지 멀리 팔 곳이 있거든 처리해 주시오. 내 신세는 후히 갚으리이다.”

하니 장파가 크게 기뻐하면서,

“그것 참 묘하게 되었소이다. 지금 이 고을 남궁 사또께서 무남독녀 외딸을 진해 부윤 자제와 혼인시키게 되어 이미 혼구가 다 준비되었으나 교전비18)가 없어 곤란을 겪고 있는 판국이니 만일 계향 같은 아씨를 진짜로 팔기만 한다면야 사또께서 천금을 아끼지 않으시리로다. 속량대전보다 몇 배 더 받아드리리다.”

하고 말하니 진파의 안색에 희색이 만면하였다.

<중략>

[하루는 석 소저가 뜰 앞에서 먼지를 쓸기 위하여 나가더니 홀연히 빗자루를 멈추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서 있었다. 이때 마침 남궁 사또가 내아19)에 들어와 있다가 영창20) 틈으로 석소저의 우는 양을 보고 괴이히 여기어 석 소저를 불러 우는 사유를 물으니 더욱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즐겨 말하지 아니하더라. 군수가 이상히 여겨 재삼 질문하니 그제서야 소저가 꿇어 앉아 말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에 춘매라고 하는 시비와 더불어 저 뜰 앞에서 공을 치다가 공이 굴러서 뜰 앞 구멍 속으로 들어갔었지요. 저의 선친께서 소비를 보고 어찌하면 저 공이 스스로 땅 위로 나오게 할 수 있느냐 하시기로 소비는 춘매로 하여금 물 두 통을 길어다 구멍에 부어 넣게 하였삽더니, 공이 물에 떠서 나왔기로 선친께서 비로소 소비의 영리함을 기꺼워하시더니 지금 뜰을 쓸다 보오니 그때 보던 구멍은 그대로 있으나 소비의 집은 몰락하여져서 현재 소비의 가련한 신세를 생각하고 자연히 눈물이 나옴을 금치 못하겠나이다. 저의 행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21)


 ▣ 본문 학습 ▣


◉ 영조와 박문수에 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일화


현명한 임금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신하(臣下)가 있게 마련입니다. 암행어사로 널리 알려진 박문수가 곧 영조 시대의 명신(名臣)입니다. 영조는 박문수를 무척 아꼈습니다. 경종 3년인 172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33살 때 벼슬길에 나선 박문수는, 한때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영조 3년 1727년에 왕이 소론을 다시 등용할 때 조정에 불려 들어왔습니다. 박문수는 세자 시강원(侍講院) 사서가 되었다가 이인좌의 난을 진압(鎭壓)한 공로로 문무 공신 2등으로 영성군에 봉해졌습니다. 영조 6년에는 참판이 되어 왕을 가까이 모신 박문수는, 아는 게 많고 또 성격이 곧아서 바른말을 잘했습니다. 하루는 좌의정과 우의정이 박문수를 꾸짖었습니다.

"상감마마 앞에서 무엄(無嚴)하게도 어떻게 고개를 들고 말하시오?"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리만 구부리는 불손함이 어디 또 있겠소?"

그러자 박문수는 영조에게 또 다시 허리만 굽히고 고개를 쳐든 채, "전하, 임금과 신하가 마주보고 이야기하면 한결 부드럽고 거리감 없이 진심(眞心)을 주고받을 수 있사옵니다. 간신이나 고개를 숙이는 법이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영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뒤부터 신하들은 고개를 쳐들고 말하라는 분부를 내렸습니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지방 곳곳을 두루 살피며 임금을 대신하여 백성(百姓)들을 보살펴 주어 우러름을 받았습니다.


◉ 박 어사가 구천동 인민을 신도(神道)로 다스린 일


조선 영조 시대에 박문수 어사는 유명한 남도 어사였다. 재능과 덕망이 조야(朝野)에 떨쳤다. 이 때 호서의 도둑 이인좌와 영남의 정희량 등이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일으켰다. 그들은 상여 속에 병기를 싣고 청주에 들어와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평을 죽이고 안성의 청룡산 위에 진을 치는 것이었다. 봉조하 최규서가 변을 고하였다. 영묘조는 크게 놀라 박문수로 하여금 날뛰는 도둑을 토벌케 한 후 백성의 근심을 보찰하사 박문수에게 팔도 암행어사를 제수(除授)하셨다.

이리하여 박문수가 인정을 살피며 덕유산으로 들어가니, 이산은 골짜기가 깊어 맹수(猛獸)가 들끓는 만큼 거기 사는 백성 이외는 함부로 출입을 못 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박 어사는 어쩌다 잘못으로 밤에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 끝에 심한 기갈(飢渴)을 느끼며 지쳐서 낙엽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문득 보니 그의 앞쪽에 등잔불이 은은히 비쳐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일어나 등불을 찾아갔다.

그러자 천만 뜻밖에도 인가가 즐비한 큰 마을이 나서는 것이었다. 밤은 이미 깊어 집집이 문을 닫고 만리가 고적한데 한 골짝에 당도하니 창밖으로 등불이 비쳐 나오고 방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괴이하게 들려왔다. 그는 크게 놀라 한 옆으로 피해 창틈으로 엿보았다. 늙은 사람 하나가 단도를 빼어 들고 누운 사람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칼로 찌르려고 하며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이 놈 죽어라!"

"이 놈 죽어라!"

"죽어라!"

그런데 누운 사람은 다만 죽겠습니다. 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어사는 기침을 크게 하고 창문을 두드렸다. 주인이 나와 영접(迎接)하였다. 어사가 주인을 따라 방안에 들어서니 누웠던 사람은 없어지고 단도를 가지고 흉행하려던 사람뿐이었다. 어사가 좌정(坐定)한 후에 자기의 성명과 거주를 댄 다음 길을 잃고 들어온 시말을 말하자 늙은 사람은 만면(滿面)에 수심(愁心)을 띠고,

"내 성은 유씨요, 이름은 안거입니다."

하고 깊이 탄식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밥과 과자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어사는 치사하고 밥상을 받은 후에 주인의 내력을 자세히 물어 보았다. 그러나 유안거라고 성명을 밝힌 주인은 진상을 밝히기를 꺼렸다.

어사가 간곡히 반문하자 그제서야 주인은 자기의 전후(前後) 시말(始末)을 차례로 말하였다. 본적은 경성이고 아내 최씨와 더불어 세 살 난 아들 득주 하나를 데리고 덕유산 아래로 내려온 지 열두 해에 득주를 무주 김정언의 질녀와 성취시켰으나 가계는 점점 어려워가기만 하였다. 마침 이 동네 구화선이라는 사람의 소개로 이곳으로 이사하여 학구로 종사한 지 십여 년이 되었다.

 이곳의 환경은 사방 육십 리가 무인지경이다. 토인이 개척한 것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나 다만 구가와 천가 두 성바지가 대대로 거주하므로 이 동네의 이름을 구천동이라 하였다. 구천동 백여 호에 내 집 하나 섞여 살고 있는데 양성의 학채 수입으로 처음 들어올 때보다는 생활 정도가 풍족하다.

이야기를 들은 박 어사는 다시 물었다.

"내 주인께 오늘 저녁의 일을 묻고자 하니 주인께서는 숨기지 마시오. 아까 창 밖에서 보았을 때 주인이 소년을 흉행(兇行)하려 했소. 그 어찌된 일이오?"

유안거가 놀라며 말이 없더니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그 소년은 내 아들 득주입니다. 이웃에 천운거라는 자가 있어 제 재종질녀를 취하여 그 며느리를 삼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동수입니다. 천운거의 집이 본래 난잡하여 동수의 처가 부정한 행실이 있는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 득주와 이번에 간통(姦通)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우리집 부녀를 탈취하려 합니다. 내 아내 최가는 천운거가 탈취하고, 내 며느리는 천동수가 탈취하여 혼례를 올린다는 것인데 그 혼례일은 내일입니다. 오늘밤이 지나면 천가 부자가 와서 신부를 내놓으라고 할 것이니 강약이 부동으로 저희 하자는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욕을 앉아서 당하느니 차라리 한 칼로 내 자식을 죽이고 아내를 죽인 후에 나도 죽으려 하니 공은 어서 떠나시오."

"내일 혼례(婚禮)하는 시간이 어느 때쯤이나 되겠소?"

"신시 초가 될 것입니다."

"주인은 염려 마시오. 내 이 길로 나갈 것이며 내일 신시가 되기 전에 좋은 소식을 전하리다."

박 어사는 구천동을 떠나서 무주읍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군수를 시켜 광대들을 대령케 하고 그 중에서 땅재주 잘 하고 용감한 자 네 명을 골라 각각 색깔이 다른 군복을 지어 입히고 자기도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덕유산으로 향하였다.

오정이 다가오자 천가 부자가 유안거의 집으로 들어와 늙은 최씨 부인과 그 며느리 김씨 부인을 붙잡아 앉히고 혼례를 올리려 하니 구천동 사람들이 일시에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이 때 신장(神將)22) 하나가 교배청23)으로 들어가 좌정하더니 교배상을 벼락같이 치며 도방 청제 대장군을 부르자 공중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며 한 신장이 마당 가운데로 떨어져 동쪽에 비켜서는 것이었다.

"서방 백제 대장군!"

중앙 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또 한 신장이 마당으로 떨어져 서쪽으로 서는 것이었다.

"남방 적제 대장군!"

다시 대답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며 한 신장이 떨어져 남쪽으로 비켜섰다.

"북방 흑혜 대장군!"

이번 신장은 북쪽으로 비켜섰다.

"나는 중앙 황제 대장군으로서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다. 상제께서 무주 구천동에 괴악(怪惡)한24) 두 사람이 있으니 잡아 바치라 하셨기에 내 여러 신장을 불렀으니 사방 신장은 합력하여 이 중에 사모관대25)한 두 사람을 잡아가라."

사방 신장이 일제히 달려들어 천운거와 천동수를 문 밖으로 잡아내어 독수리같이 몰아가는 것이었다.

이 때 천운거 부자를 잡아간 사람은 박문수 어사였다. 본읍에서 데리고 온 광대 네 명으로 하여금 유안거의 집을 사방으로 뛰어넘어 들어가서 천운거 부자를 압령(押領)해 가지고 나오다가 구천동 삼십 리밖에 이르자 광대를 시켜 그 후 그들을 때려 죽여 깊은 산 속에 파묻은 다음 박문수는 여러 지방을 두루 살피고 경성으로 돌아와 성상께 아뢰어 엎드려 절하였다. 이에 성상은 박문수의 직품을 높여 정이품을 하사하시고 내직(內職)26)으로 선용(善用)하셨다27).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자 남방이 병화(兵禍)28) 이후에 인심이 어지러운 바 있어 다시 박문수를 삼남 수의(壽衣) 어사29)파송(派送)30)하셨다.

박 어사는 영남 삼도를 시찰하게 되었다. 그의 발길은 자연히 덕유산 밑에 이르게 되었다. 생각하니 십 년 만이었다. 박 어사는 유안거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유리(遊離) 걸객(乞客)31)의 행색으로 다시 구천동에 들어가니 이왕(已往)에 보지 못하였던 기와집 한 채가 반공에 솟아 있었다. 박 어사가 의아(疑訝)하여 그 기와집으로 찾아와 알아보니 주인의 성명이 곧 유안거였다. 박 어사는 속으로 반가워하였다. 그러나 유안거야 어찌 박 어사를 알아 볼 것인가. 밤이 저문 후에32) 박 어사는 유안거에게 그 후의 일을 물었다. 다음은 그가 대답한 내용이다.

"내 이 곳에 들어온 지 십 칠 년입니다. 들어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네 청년을 가르쳤으나 처음엔 살림이 넉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십 년 전에 이 곳 구천 양성이 재물을 합자하여 이 집을 지어 나를 주었고 그 후부터 주민 백여 호가 매년 수확의 일부를 내 집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 수입에서 해마다 남은 것을 저축하여 토지를 사들인 것이 수백 석이 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주민의 진공(進貢)33)은 해마다 증가되어 가기만 하니 가세가 자연히 풍족해졌습니다.

"어째서 십년 이래로 주민이 당신에게 진공하게 됐소?"

"내 일찍이 신도(神道)34)라는 것을 믿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그것을 안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곳 토착민과 더불어 그 일을 목도했으니까요. 십 년 전에 내 집과 이 곳 천가집 사이에 불미한 관계가 있어서 내 집이 곤욕을 당하고35) 집이 장차 멸망하게 되었었지요.

그 때 우연히 하늘에서 옥황상제께서 다섯 분의 신장을 내려 보내시어 내 집과 문제가 있던 천가 두 사람을 잡아 올려 가신 후로 오늘날까지 시체도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일로 본토민들이 놀라 서로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저 집은 하늘이 아는 집이니 감히 존경치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다투어 내 집에 진공을 융숭히 하게 되었습니다. 나로선 내가 무슨 덕이 있어 하늘의 이와 같은 은혜를 입는가 하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이 생겨 이 곳 토민의 자제들을 정성껏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이 곳 신진 청년은 십 년 전 이 곳 사람들에 비하면 많이 깨었습니다."

"상제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오."

박 어사는 이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그 이튿날 구천동을 떠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남방을 다스린 지 수년에 수의사또를 하직하고 내직으로 다시 올라가니 그 후부터 사방이 태평하여 인민이 마음을 놓았고 자연히 조정에는 일이 없게끔 되었다. 영조께서 한가하실 때에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각기 평생의 경력을 말해 보라 하시니, 박문수는 덕유산에 들어가 구천동 인민을 다스린 일과 유안거에 대한 사실을 말씀드렸다.

영조께서 물으셨다.

"그 후에 유안거를 다시 만났을 때 어째서 상제의 은혜를 말하고 경의 일은 말하지 않았소?"

"신이 그 때 신의 일을 말했더라면 구천동구를 나서지 못하고 죽는 것도 죽는 것이지만, 유안거의 일문이 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다음 구천동 인민이 다시 화와 액운을 만나 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평생에 어찌 입을 열겠습니까?"

상감 이하 여러 신하가 모두 박문수의 도량(度量)을 절찬(絶讚)하여 마지않았다.


◉ 남궁로 군수가 시비로 딸을 삼아 시집보낸 일


삼한 시대 변한국에 진주국 창원 군수 석진은 본래 금주 사람으로 나이 사십이 넘어 상처(喪妻)하였다. 그 죽은 부인의 소생은 팔 세 된 딸 하나뿐이었는데 이름을 계향이라 하였다. 부인 생전에 부리던 계집종 춘매를 수양딸로 삼았는데 춘매의 나이는 계향보다 다섯이 많았다. 둘은 서로 떠나지 못하고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내아에 들어가 석진이 그 딸 계향과 춘매에게 장난을 시키는데, 계향이가 치는 공을 춘매가 받아서 한 번 차자 공이 굴러 뜰 앞 깊은 굴로 들어갔다. 춘매는 그 굴속에 팔을 디밀어 공을 꺼내려고 하였으나 굴이 깊어 꺼내지 못하였다.

곁에서 보고 있던 군수가 계향에게 공이 스스로 굴 밖으로 나오게 할 도리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한참 생각하던 계향이가 춘매로 하여금 물을 길어다 붓게 하자 공이 물 위에 떠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후로 석진 군수는 불의(不意)의 변(變)으로 환곡 쌓은 창고에 불이 나서 천여 석의 환미(還米)가 다 없어져 버렸다. 그로 말미암아 석진은 관직에서 쫓겨나고 일천 오백 냥을 배상(賠償)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진은 청백한 관원으로 평소에 저축이 없었으므로 그 배상 능력이 없었다. 석진 군수는 이 일로 인하여 심화병을 얻고 십여 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의 나라 풍속은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고 부족(不足)되는 것은 가족을 관비나 사비로 공매하여 징수하는 것이었다. 계향과 춘매는 공매에 붙여졌다. 그 때 마침 그 지방에 진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죄에 관련되어 삼 년 동안이나 미결수로 옥에 갇혀 있었는데 석진 군수가 도임하여 그의 억울함을 알고 상부에 고하여 그를 무죄 석방하였던 것이다.

진도는 계향과 춘매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깍듯이 예우하였다. 상인인 진도는 멀리 나가 있는 날이 많은데 멀리 있을 때도 계향의 의복감과 식료품은 특별히 좋은 것으로 가려 부치고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계향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이에 진도의 아내는 불쾌감을 가지고 계향을 미워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진도가 다시 멀리 외지로 떠난 어느 날 아침, 춘매가 떠놓은 세숫물이 너무 일찍 떠놓았으므로 진도의 아내 진파가 세수할 시간엔 다 식어 있었다. 진파는 춘매를 한나절이나 두고 두들겨 팼다. 그것을 보다못해 계향은 진파 앞에 나가 공손한 말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진파는 춘매와 계향을 떠밀어 물리치고 계집 하인배에게 호령하는 것이었다.

"저 석가 여자 두 년이 집에 들어와 스스로 교만하다. 원인은 내 집에 팔려온 계집애를 주인이 높인 데서 온 것이니 어찌 그들을 상전 대우하겠느냐. 다음부터는 석 소저라 부르지 말고 계향이라 불러라."

이 날  진동에게서 사람이 와 봉물과 편지를 진파에게 전하였다.

"봉물은 석 소저의 혼숫감이니 석 소저 거처하는 방에 잘 간수하오. 남은 말은 내가 십여 일 후에 도착하겠기로 적지 않소."

편지를 읽은 진파는 계항에게 온 봉물을 제 방으로 들이고 계향의 방으로 쫓아 들어가더니 기왕의 진도로부터 온 봉물까지 빼앗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진도가 돌아올 날이 멀지 않다 . 그가 돌아오면 나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두 사람을 없애 버리는 게 상책이다."

이튿날 이웃의 장파라는 노파를 불러들이니, 노파는 인신 매매하는 거간꾼36)이었다. 계향과 춘매를 팔기 위해서였다. 노파는 크게 기뻐하였다.

"지금 이 고을 사또께서 무남독녀를 진해 부윤의 자제에게 시집보내는데 계집종을 구하는 중이오. 계향은 거기 팔면 되겠거니와 춘매는 내 생질에게 시집보내 주겠소?"

"그러시오."

이 고을 군수의 성명은 남궁로로 지금의 진해 부윤 고달이란 사람과 동문 수학한 벗이었다. 고달 부윤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고만민이요, 둘째는 고억민이었다. 형이 나이가 차매 매파를 남궁 군수에게 보내어 청혼하였다. 남궁 군수는 허혼(許婚)하고 혼례일을 시월 중순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딸 서경이에게 딸려보낼 계집종이 없어 장파를 불렀다.

"우리 애와 비슷하며 총명한 아이만 구해 오면 천금을 아끼지 않으리라."

"몸값은 백 오십 냥만 내시오."

장파는 계향의 몸값을 받아 진파에게 전하고 계항을 데리고 나섰다. 남궁 군수의 가족들은 계향의 아름다움을 보고 경탄하였다.

장파는 내아에서 나와 진파의 집으로 가서 춘매를 데려다가 제 생질 정갑룡과 성례시켰다.

계향은 서경 소저의 시비로 들어간 후로 시중에 열중하였으나, 지난날의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하루는 뜰에서 빗자루를 멈추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때 마침 남궁 군수가 보고 우는 이유를 물었다. 그리하여 계향의 본래 신분을 알게 된 남궁 군수는 계향을 서경과 자매의 의를 맺게 하였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고달 부윤에게 부쳤다.

"근일 딸자식의 시비를 구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비는 전 군수 석진의 딸이었습니다. 동관의 자식은 곧 내 자식이니 어찌 내 딸의 시비를 삼겠습니까. 또 내 딸을 이 아이보다 먼저 시집보내는 것은 동관 사이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먼저 이 아이를 위하여 사람을 구한 후에 내 딸의 혼사를 마치고자 하니 혼인을 후일로 미루어 주십시오."

고달 부윤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뜻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계향을 내 며느리로 허락해 주십시오."

이제 남궁 군수가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의탁이 없는 규수에게 장가드는 것은 비록 높은 의리라 하겠으나 이미 정한 연분을 고치는 것은 대의에 어그러집니다. 반드시 기왕 정한 언약을 지켜 주십시오."

부윤은 편지를 받고 부끄럽게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딸로서 딸을 바꾸려 하였음은 내 집에서 의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요, 이왕의 연분(緣分)을 끊고 다른 연분을 취하려 하였음은 당신께서 예법(禮法)을 지키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게 둘째 아이가 있으니 바라건대 영애는 내 장남과 혼인을 그대로 이루게 하고 계향은 내 차남 억민에게 허락하십시오. 그리고 혼인(婚姻)도 같은 날에 함이 좋겠습니다."

드디어 혼수를 나누어 차등이 없게 하고 길일을 기다려 부윤집의 신랑을 쌍으로 맞아들이니, 그 밤 새벽에 사모 관대한 한 관원이 남궁 군수의 문에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이 고울 전 군수 석진입니다. 이 고을에서 죽은 후 천계에서 상제를 모시고 있던 중 의탁 없는 내 딸을 건져 주시기에 그 사실을 상제께 말씀드렸더니 상제께서 특별히 공의 유덕을 생각하시고 공에게 아들 하나를 지시하여 공의 문호를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 후 과연 남궁 군수 부인이 오십 이후에 아들을 얻으니, 아들이 자라서 제 부모 생전에 마한으로 들어가 벼슬이 영상에 이르고, 고달 부윤의 두 아들도 본국에서 부귀가 혁혁하였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진도가 집에 돌아와 아내의 행악을 알고는 고달 부윤의 집에 찾아가 진파의 죄를 대신 사과하고 춘매의 일을 알리니 고달 부윤은 춘매와 정갑룡을 불러들여 집사람을 삼았다. 진도는 진파의 불량함을 한하여 진파를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젊은 계집을 얻어 아들 형제를 낳으니, 이것이 모두 선을 쌓은 결과임을 말할 것도 없겠다.


◉ 배진국공이 평생에 인정승천한 일


중국 한문제 때 세도로 한창 유명하던 둥퉁이라는 신하가 있는데 임금의 은총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이 때 관상 잘 보는 허부라는 사람이 둥통의 상을 보고 말했다.

"한때 부귀(富貴)가 비할 데 없으나 종리문이라는 주름살이 입으로 들어갔으니 필경은 굶어 죽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문제가 말하였다.

"둥통의 부귀(富貴)는 내게 달렸는데 누가 둥통을 곤궁케 하겠는가?"

그러고는 서촉 동광을 둥통에게 내주어 돈을 벌어 쓰게 하니 둥통의 부함이 나라와 견줄 만하였다. 한번은 문제가 우연히 부스럼이 생겨 고름이 터져나오게 되었는데, 둥통이 입을 대고 빨았다. 이 때 마침 황태자가 들어오므로 문제는 황태자에게 말하였다.

"부스럼을 빨아 보아라."

"지금 막 생선회를 먹었기 때문에 옥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나간 후 문제는 말하였다.

"지정(至情)37)이 부자(父子)간보다 두텁다."

황태자는 그 말을 전해 듣고 은근히 둥통을 미워하였다. 그 후에 문제가 죽고 황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곧 한경제였다. 한경제가 둥통을 국화 위조범으로 몰아 둥통의 재산(財産)을 국고(國庫)에 넣고 둥통은 빈방에 가두어 음식을 끊게 하니, 둥통은 과연 굶어 죽었다. 이 때 기세가 일세를 휘두르던 주아부도 종리문이 입으로 들어가 있었다. 경제가 아부의 위엄이 너무 굉장함을 꺼려 황실범으로 죄를 얽어서 옥에 가두니 아부는 분함을 못 이기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 이 두 사람은 부귀가 굉장하였으나 얼굴에 나타난 흠으로 인하여 상가의 술법 속에서 죽었다.

그러나 상서에 그렇지 않은 구절이 있으니, 가령 부귀의 상을 타고 난 사람일지라도 남에게 악을 행하면 자기의 복을 감하는 수가 있으며 흉악한 상을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심지가 곧고 남에게 선을 많이 행하면 복을 얻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으로 당나라 때 배도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 역시 입으로 종리문이 들어간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향산사라는 절에 들어가 우연히 그 우물 곁에서 보물 하나를 주웠다.

배도가 보물을 제자리에 놓고 그 곁에 앉아서 잃어버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얼마 후에 젊은 부인이 울면서 와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다. 배도는 그것을 부인에게 내주었다.

그 후 관상하는 사람이 이 배도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상모가 변해 버렸소. 지금은 굶어 죽을 상이 아니니 무슨 은덕을 베푼 일이 있습니까?"

배도가 보물 찾아준 이야기를 하자 관상쟁이는 배도가 후일 부귀(富貴)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배도는 그 후 영달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 핵심 정리 ♣

▣ 작자 미상

▣ 연대 : 조선 영조

▣ 작자 : 미상

▣ 형식 : 고소설

▣ 성격 : 교훈적, 일화적

▣ 주제 : 박문수어사의 일화기와 권선징악(勸善懲惡)

▣ 인물 분석

▸박문수 : 임금의 명을 받고 팔도를 순행하는 암행어사. 지혜를 발휘하여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 준다. 암행어사는 불의한 사회 현실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빛과 같은 인물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안거 : 구씨와 천씨로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외지 출신 인물.

▸천운거, 천동수 : 음탕한 인물로 설정되어 박문수가 ‘살해’라는 극단적인 처분을 내리는 인물


▒ 줄거리

조선 영조 때 박문수라는 사람이 팔도암행어사의 대명을 받고 충청도를 거쳐 무주 땅에 들어가 덕유산에 이르렀다. 험한 길을 헤매다가 등불을 찾아 한 집에 이르자, 노인이 젊은이에게 소리를 지르며 죽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문수가 그 사연을 알아보니, 구씨와 천씨가 살아 구천동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 노인 혼자만이 유씨인데, 본래 음탕한 천씨 집안에서 자기의 아들이 천씨의 며느리와 간통하였다고 거짓으로 모함하며, 내일 신시(申時: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까지)까지 며느리를 탈취하여 가겠다고 하였으므로, 가족이 모두 죽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사는 주인을 안정시킨 뒤 무주 고을에 출도하여 이 일을 무사히 처리하고 호남일대를 돌아 조정에 올라왔다. 1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구천동을 찾았을 때, 유씨의 집자리에는 커다란 기와집이 서 있었다.

박문수가 안부를 물으니, 천씨 부자가 옥황상제에게 잡혀간 뒤로 동민들이 돈과 곡식을 가져다주어 유씨는 수백석의 부자가 되어 청년들을 훈도하며 동민들의 숭배자가 되었다고 하였으나, 지난날 박어사의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정에서 제신들의 평생 경력을 왕에게 아뢰는 일이 있었을 때, 왕은 박문수의 구천동 다스린 일과 유씨의 뒷일을 듣고 크게 감탄한다.

감상의 길잡이


박문수전(朴文秀傳)은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 1책. ‘ 어사 박문슈 ’ 또는 ‘ 어사박문수전 ’ 이라는 제목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1915년 유일서관(唯一書館)에서, 1926년 경성서적업조합(京城書籍業組合), 1952년 세창서관 등에서 출판하였다. 필사본이나 목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세 개의 삽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제1회만 박문수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실존인물 박문수를 주인공으로 하여 허구적인 사건을 결부시킴으로써,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는 천도(天道)의 정당성을 내보이고 있다.

박문수전은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제작 연대가 조선 영조 시대라는 것이 작품에도 밝혀져 있고 문헌상으로도 고증될 뿐이다. 위의 작품은 실제 인물이었던 암행어사 박문수의 행장기에서 소재를 취하여 소설한 것으로 다분히 개인전기와도 같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이 다른 고대소설에서 흔히 보는 바와 같은 황당무계하다거나 기괴한 데가 없고 상당히 사실 묘사에 입각한 경향을 띠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박어사가 구천동 인민을 신도로 다스린 일'에서는 어사의 행장기와 당시의 인심, 민속, 궁성에서의 이야기 등이 충실한 사실에 입각하여 담담히 그려지고 있다.

그 내용 묘사에서 이같이 고대 소설의 일반적인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재면에서도 전기체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는 점 등이 이질적인 요소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박문수가 덕유산 밑 구천동에서 유씨부부와 천씨 부자간의 갈등을 다스리는 대목 같은 데서는 상당한 극적 요소를 보여주지만, 황당무계하거나, 과장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수한 극적 재미를 준다.

 

▒ 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숙종 17)∼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장원(長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마(洗馬) 선(銑)이고, 아버지는 영은군(靈恩君) 항한(恒漢)이며, 어머니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활동상황]

1723년(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뽑혔다. 이듬 해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병조정랑에 올랐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 노론이 집권할 때 삭직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다시 사서(司書)에 등용되었으며, 영남 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였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이어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도당록(都堂錄)에 들었다.

1730년 대사성·대사간·도승지를 역임했으며,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1732년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이 되었고, 1734년 예조참판으로 재직 중에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참판을 거쳐, 1737년 도승지를 역임한 뒤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병조 자체 내에 인신(印信)이 없어 군무의 신속한 입송(入送)에 불편을 주고, 간리(奸吏)가 중간에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있었다.

이는 군기의 중요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을 야기할 수도 있어, 왕에게 주청해 병조판서와 이군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었다.

1738년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되었다. 173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41년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다.

이어 함경도에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다음 해 병조판서로 재직시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 지방에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서 변통할 것을 주청해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43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5년 어영대장에 재임되었고, 1749년 호조판서로 재직시 궐 안의 당우(堂宇)를 3년에 한번씩 수리할 때 책임관으로서 역대 어느 관료보다도 일을 잘 처리했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기도 하였다.

1750년 수어사(守禦使)를 역임한 뒤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세손사부(世孫師傅) 등을 지냈고, 1751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752년 왕세손이 죽자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로 책임을 추궁당하여 제주로 귀양갔다. 이듬해 풀려나와 우참찬에 올랐다.

[치적]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다.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할 때 명문 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 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으며,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 논의에 중요한 몫을 다하였다.

1749년 영조에게 주청해 다른 신하들과 함께 ≪각전각궁공상정례 各殿各宮供上定例≫ 6권, ≪국혼정례 國婚定例≫ 2권, ≪각사정례 各司定例≫ 12권, ≪상방정례 尙方定例≫ 3권을 합해 ≪탁지정례 度支定例≫를 출판하였다.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 吳命恒討賊頌功碑≫가 전한다.

한편, 설화로서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행적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보충 학습 ♠


 

첨부파일 박문수전 - 작자 미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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