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水原市)와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에 당항성(唐項城)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치고, 쌍부(雙阜)·정송(貞松)·안양(安陽) 등을 관할하였다. 822년(헌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 水原)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군이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수주(水州: 水原)의 관할에 들었고, 후에 인주(仁州: 仁川)의 영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 독립하여 감무를 두었고 재양현(載陽縣: 安陽縣)을 관할하였다. 1290년(충렬왕 16)에 익주(益州)로, 후에 강령도호부(江寧都護府)로, 다시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으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남양도호부가 되었다가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792년(정조 16)에 수원진을 남양으로 옮겨 설치하였고 별호는 영제(寧堤)·과포(戈浦)라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인천부 남양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남양군이 되었다가 1906년 월경지 정리에 따라 수원의 두입지(斗入地)인 팔탄·분향·장안·초장·압정·오정 등 6개면이 남양군에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남양군이 폐지되어 수원군에 병합되었다. 이때 일부 면이 은덕·쌍수·마도·송산·서신·비봉면으로 통합되고 수원군에서 편입했던 6개면은 팔탄면·장안면·우정면으로 통합되어 다시 수원군에 편입되었다. 1931년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되고,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 주변의 20개 리를 편입하였으며, 1967년 6월 서울시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시로 이전되었다. 1983년 전국행정구역 조정으로 용인시 수지면(水枝面) 하리(下里)·이의리(二儀里)의 2개 리가 편입되었다. 1987년 화성군 매송면(梅松面) 금곡리(金谷里)·호매실리(好梅實里)가 편입되었다. 1988년 7월 장안구·권선구 2개 구가 신설되었고, 1993년 팔달구가 신설되었다. 1994년 권선구에 입북동·당수동을, 팔달구에 영통동이 각각 신설되었다. 1995년 권선구 곡선동이 권선동과 곡선동으로 나뉘고, 화성군 태안읍 신리와 망포리 일원이 팔달구 매탄3동에 편입되었다. 2003년 11월 영통구가 신설되었다. 2004년 현재 4구 4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씨의 역사
《가승(家乘)》에는 전래시조(傳來始祖)로 전풍(田豊)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송과 원의 제왕쟁탈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원 황제의 미움을 받아 고려에 내려와서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시조 전주(田柱)는 고려 왕족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의 아들로 본래 이름은 왕강(王康)이었다. 조선 개국과 동시에 시작된 왕씨(王氏) 탄압에 따라 그는 공주목(公州牧)의 관노로 일신역(馹新驛)에 유배되었다가 1394년(태조 3)에 참사를 당하였다.
이 당시 왕씨는 종모성(從母姓)하라는 왕명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른 이가 많았고, 옥(玉), 전(全), 전(田) 등으로 성으로 변성되었다.
전주의 손자 전흥(田興)은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하인이었으나,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심복으로 삼았고, 1,2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공을 인정받아 태종은 그에게 전흥이라는 사성명(賜姓名)과 정사좌명원종공신(定社佐命原從功臣)에 책록하였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라 남양전씨의 기틀이 되었다. 그 후 조부인 전주가 외직인 강령부승(江寧府丞)을 지낸 연유로 지명을 따서 남양을 본관으로 하고 전흥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주요 세거지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시음리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인양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남양전씨는 1,456가구 총 4,66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