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흙이 되어 고국으로 간 꽃 처녀…….
며칠 전 호주에서 필자에게 한 통의 메일이 왔다. 필자가 호주 시드니에서 임상 활동을 할 당시 치료를 해 주었던 한 처녀의 오빠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안부를 묻는 그 메일을 받고 보니 몇 년 전 필자가 치료를 해주었던 그의 여동생의 안타까운 사연이 떠올라 한동안 우울한 마음 금할 길 없었는데…….
몇 년 전
시드니로 유학을 간 유능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호주식 영어이름은 ‘앨버트(가명)’ 수 많은 사람들이 호주로 유학을 가지만 무사히 학점을 따 졸업을 하는 유학생들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왠만하면 거의 다 졸업을 한다. 그러나 호주는 다르다. 들어가기는 다소 쉬울지 몰라도 졸업은 대단히 어렵다. 호주로 유학간 유학생들 중에 6년~7년을 계속 다녀도 결국 학점이 모자라 졸업을 못하고 중도에 좌절을 안고 귀국하는 유학생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앨버트’는 단번에 시드니에서도 명문대로 통하는 ‘시드니 대학’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시드니 대학에서는 그의 높은 성적을 아까워하여 ‘대학원 진학’을 통해 계속 호주에 남을 것을 청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
그러나 ‘앨버트’는 한국으로 귀국하여 유수의 대기업에 취업을 하였다.
그러다 호주에서 꿈을 펼쳐보고자 호주로 이민을 갔던 것이다.
호주로 이주한 그는 유통사업에 손을 대었고 그의 유창한 영어실력과 대학 다닐 때 맺은 인맥을 통해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주는 인건비가 비싼 나라…….결국 ‘앨버트’는 사업을 위해 동생들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여동생부부와 막내 여동생이 호주로 와서 오빠의 사업을 도왔다.
막내 여동생…….당시 20대 초반에 학생비자로 호주로 간 그는 호주식 이름으로 ‘케리(가명)…….학교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면서 오빠의 사업을 열심히 도왔다. 필자가 본 그녀는 연약해 보이는 몸매였지만 매우 진취적이고 몸을 사리지 않는 열정을 갖고 있는 여인이었다.
낮에는 오빠의 사업을 열심히 도우며,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니고, 기독교 활동을 매우 열심히 하면서 이른바 ‘허가 받지 않은 체류자(한국에서는 불법체류자라고 부르는 그룹)들을 위해 봉사활동도 틈틈히 하는 참으로 대견스런 처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덜컥 중병에 걸렸다. 당시는 아직 필자를 만나지 못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녀의 병명은 ‘류머티휘버’, 즉 류머티열병에 걸려 온 몸의 관절 마디마디를 면역체계가 적으로 오인하여 공격하는 무시무시한 병증…….
급성 열병에 걸린 그녀는 거의 사경을 해매던 중 다행히 상태가 약간 진전이 있자 한국의 그녀 부모들이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 한국으로 불러 들였다.
호주나 한국이나 사실 이런 병증에 치료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면역체계가 혼란을 일으켜 뼈 마디마디를 공격하여 일어나는 이 병증은 면역억제제 투약이 기본이다. 그리고 면역 억제제로 인한 부작용을 막고자 ‘프레드시솔론’ 등의 스테로이드를 다량으로 복용 시킨다.
따라서 환자 몸은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인해 거의 왕찐빵처럼 부풀어 오르게 된다.
이 병의 특징 중에 하나가 면역체계가 또 다른 혼란을 일으켜 심장을 적으로 오인하고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그녀 부모들은 사업에 바쁜 그녀의 오빠와 언니부부는 그녀를 잘 돌볼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여 데리고 간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몰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며 회복 단계에 있었으나, 잠복해 있던 열병이 또 재발 급기야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하였었단다.
거의 사경을 해멜지경에 이르렀던 그녀는 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고가 힘을 발휘하였던가? 아니면, 그의 진실한 신심(信心)이 작용하였는지 또 다시 극적인 고비를 넘기고 회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면역억제제와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약물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그녀의 고향으로 돌아가 이른바 대체요법과 기도 등으로 투병을 하기로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부모도 말릴 수 없었던 그녀는 고향(경북)으로 돌아가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투병생활을 하던 중 찐빵처럼 부풀었던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예전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오빠의 파경으로 인하여 오빠가 심적으로 몹시 고통 중에 있으며, 사업을 돌보지 않고 훌쩍 다른 나라로 방랑의 여행을 떠나버려 호주에 남은 그의 언니부부가 오빠의 어린 딸을 돌보며, 사업을 돌보느라 몹시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의 부모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호주로 다시 돌아왔다.
그녀가 호주로 돌아와 오빠의 사업을 언니 부부와 함께 다시 일으키고 있었던 중 체력이 너무 허약해져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는 언니부부의 부탁으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병력(病歷)을 모두 들은 후 그녀를 살펴보니 언제 찐빵처럼 부풀었느냐는 듯 매우 호리호리하게 말라 있었고, 피부는 검게 그을린 듯 몹시 초(焦)한 상태였었다.
필자는 우선 혈열(血熱)이 재발되는 것을 막고 허혈(虛血)을 보충해주고자 구감초탕(灸甘草湯)을 처방해 주었다. 구감초탕(灸甘草湯)에는 인삼(人蔘)이 들어가는데, 열(熱)이 두려워 무조건 뺀 것이 아니라 기허(氣虛)를 감안하여 인삼 대신 홍삼을 배합하여 처방해 주었고, 약 한 달여 복용 후 어느 정도 살이 붙기 시작하였고 혈기(血氣)가 보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한국 사람들만 한의원에서 약을 달여 먹는다. 중국사람들은 중의원에서 처방을 받아 중국 식품정에 마련된 한약방(중약방)에서 약을 지어다 스스로 달여 먹는다. 필자도 그렇게 했었다. 약 달이는 시설도 없었고 침구원을 개설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리고 나서 가미귀비탕으로 바꾸어 역시 인삼대신 홍삼을 배합하여 약 한 달여를 더 복용 시켜 왕성한 식욕과 혈기왕성한 체력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이 때 함께 구사한 오행침법은 ‘수태양소장경보법’을 써 주었는데, 필자가 매번 그녀를 찾을 수 없는 상황과 그녀 역시 복학한 학교생활, 오빠사업 써포트 등으로 바빠 경혈도와 자기력침세트’를 주어 스스로 자가치료케 해 주었었다.
치료 약 삼개월 째 확연히 몸이 좋아진 그녀에게 필자는 몸이 좋아지고 있다고 너무 무리해서 일을 하지 말 것을 충고 하였고, 뒤늦게 방황에서 돌아 온 오빠의 사업참여로 다소 여유가 있게 된 상황도 된 만큼 몸을 혹사시키는 일은 절대로 금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런 후 필자 역시 다니던 학교의 방학시즌 때 시드니서 버스로 16시간 거리인 ‘골드코스트’의 교민들이 청하여 그곳에서 한 달여 동안 진료활동을 하러 떠났었다. 시드니에는 교민들의 한의원이 수 십군데 되지만 골드코스트에는 교민들이 운영하는 한의원이 없던 시절이었다.
필자에게 종종 진료를 받으러 오던 그곳 교민들의 청으로 가게 되었지만 그곳에 가기 전 필자는 ‘케리’에게 ‘너의 열병은 체질적으로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르는 늘 잠복해 있는 병증이기에 절대로 몸을 혹사시키면 안 된다’는 충고를 단단히 하고는 소장보법을 매일 스스로 놓으라 일러 주고 시드니를 떠났다.
거의 한 달을 ‘골드코스트’에서 진료활동을 하던 중이었던가? 시드니로의 귀환을 앞 두고 있던 어느 날…….
그녀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케리가 열병은 아니지만 감기를 앓은 후 몸이 갑자기 쇠약해 졌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케리’와의 통화로 확인 하니 필자가 떠난 후 자가치료도 소홀히 하고 너무 몸을 혹사 시켰었던 것이다.
그녀의 오빠는 필자가 보기에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아들이 귀한 그의 집안 환경 탓이었는가? 너무 자신만 알고 두 동생과 처남을 그렇게 혹사시킬 수가 없었는데, 여동생의 투병을 조금도 살펴주지 않고 부려먹기만 한 것이다. 필자는 종종 그에게도 여동생은 언제든지 열병이 도질 수 있으니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살펴줄 것을 충고 했었는데, 겉보기에는 매우 사려 깊고 동생들을 아끼는 척 하지만 왜 그런 사람이 있잖은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기적인 사람들…….
암튼 그녀는 감기 걸린 후 잠복해 있던 열병(류머티휘버)의 발병인자가 다시 활동을 하려 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한 필자는 골드코스트에서 일정을 좀 더 연기하려 했던 것을 접고 급히 시드니로 돌아가 그녀를 만났다.
아직 열병 증세가 활발하게 도지지는 않았지만, 기력이 몹시 쇠약해져 있었고, 필자가 판단 하기로는 급성 열병(감기. 독감)이 곧바로 궐음경으로 들어가 상한병의 이른바 궐음병(厥陰病)이 된 것으로 판단 내렸다.
열궐(熱厥)이 속에 뭉쳐 겉은 냉(冷)한 상태가 된 그녀에게 소장보법을 계속 써 주면서 ‘사물안신탕(四物安神湯)’을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 몸이 너무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기에 거의 일주일 동안 매일 저녁 그녀에게 이른바 경락 마사지를 해 주었다.
겨우 병이 악화되려는 기전을 잡고, 좋아지려는 가속도를 붙였을 때 어느 날 그녀에게 오빠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케리, 너는 왠만큼 나았으면 회사에 나와야지 언제까지 집에서 쉴래?”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오빠의 행동에 오히려 필자가 참지 못하고 그녀 오빠를 크게 나무랬다.
그녀 오빠 역시 전처에게서 낳은 딸아이가 몹시 허약하고 식욕부진과 날로 신경질적이 되어가는(어린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살면서 재혼한 아빠와 새엄마가 또 다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자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상태를 치료해 주었었는데 이를 계기로 필자에게는 사못 살갑게 대하던 그였는데, 아니~! “그런 충고를 하려면 자기 집에 절대로 오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의 동생에게 ‘너, 그렇게 아프면 차라리 병원에 입원하자~!’며 다음 날 싫다는 동생을 어거지로 코쟁이 병원에 입원 시키는 것이 아닌가~!
입원한 환자를 병원까지 찾아가 돌볼 수는 없는 일…….
그로부터 약 보름?
한 밤중에 그녀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밤중에 걸려오는 전화는 늘 불길한 법…….
병원에 입원한 그녀가 갑자기 시선을 고정시키고 몸은 사시나무 떨 듯 한다며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 언니에게 ‘케리’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했다. 잠시 후 “항문이 활짝 열려 있어요. 손가락이 그냥 쑥쑥 들어가요~!” 상한론에 보면 극심한 병증에 있어 기력이 허탈해 졌을 때 양(陽)을 마지막으로 일으켜보려는 몸짓으로 몸을 스스로 떨어 전율(戰慄)케 하는데 요행이 이로 인해 양(陽)이 회복되면 낫고, 양(陽)을 일으키지 못하면 죽는다’는 기록이 있다.
‘케리’는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그 날 이른 아침 ‘케리’는 하늘로 훨훨 날아갔다.
그 날 필자는 미쳐 피지도 못한 꽃다운 고운 처녀가 수 만리 이국 땅에서 고통스럽게 명을 달리한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허탈하여 시드니에서 멀리 떨어진 ‘와이 영’이라는 곳으로 가 교민이 운영하는 횟집에서 종일토록 쐬주만 마셔대며 필자의 한계를 탓하고 있었다…….
다음 날 시드니로 귀환하여 케리의 빈소를 찾자 그녀 오빠가 조그만 수첩을 필자에게 내밀며 ‘케리는 내가 죽였어요…..”라며 오열을 하였다.
그 수첩에는 수 년 동안 그녀의 몸에 엄습해 오던 병증의 고통을 간간히 기록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녀는 한 줌 흙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어느 기독교 단체의 성지에 뿌려졌다.
그 오빠는 그 후 그녀의 사망을 계기로 남은 동생 부부에게 사려 깊게 대하는 등의 후회의 생활을 하면서 필자에게 종종 안부를 물으며 ‘그 때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라며 통회의 후회를 하곤 하였었는데.......
필자가 한국으로 온 후에도 종종 메일과 전화를 통해 안부를 전해오던 그가 메일로 전하는 독백…….
‘오늘이 케리가 떠난 날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