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의 역사2편(歷史二編)
개항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따라 포천현과 영평현을 병합하여 포천군으로 승격하였으나, 다음해 영평현을 다시 분리하였다. 1896년 10월 포천 내동 소학리(巢鶴里) 역답(驛畓)에서 소작인과 마름[舍音]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마름이 도지(賭地)[평균 수확량의 약 33%]로 소작료를 납부하도록 한 규정을 무시하고 병작반수(竝作半收)[수확량의 50%]를 실시하자, 소작인들이 반발하여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였다. 포천 지역은 개항기 위정척사 사상의 태두인 이항로(李恒老)가 살았던 양평군(楊平郡)과 인접해 김평묵(金平默)과 최익현(崔益鉉) 등 대유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이들의 사상적 영향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이러한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림적 전통은 개항기 포천 지역에서 의병 투쟁이 적극적으로 일어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이은찬(李殷瓚)·연기우(延基羽)·강기동(姜基東)·윤인순(尹仁淳) 의병 부대의 항쟁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가담하는 한편 또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일제 강점기
1910년 국권 피탈 후 1914년 영평군을 다시 포천군에 통합하였다. 포천은 개항기부터 의병 항쟁의 중심지로서 항일 의식이 높은 지역이었고, 1910년대 서당 교육을 통한 민족 교육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1917년 조선 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포천 지역의 서당 수는 82개에 달하였다. 실력 양성론 등 애국 계몽 운동의 연장선에서 야학 및 독서회 등이 결성되었다.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 영평 공립 보통 학교[1910년 9월 1일]와 포천 공립 보통 학교[1911년 9월 1일]가 세워졌다. 3·1 운동 역시 투철한 항일 의식을 바탕으로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나아가 폭력 시위로까지 발전하였다.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는 데 서당 훈장 등 유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여기에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함으로써 시위가 크게 발전하였다. 3·1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고진환(高鎭煥), 안응건(安應乾), 유중식(兪中植), 이영여(李榮汝), 이이만(李二萬), 정수환(鄭壽煥), 조계식(趙啓植), 조훈식(趙薰植), 최석휴(崔錫休), 최학돌(崔學乭), 함병현(咸炳鉉) 등이 있다. 1920년대 포천 청년회, 포천 산업 청년회, 송우 청년단(松隅靑年團) 등 청년 단체가 조직되어 포천 노동 야학·양문 노동 야학·유정 노동 야학(楡亭勞動夜學)·갈월리 동기 야학(冬期夜學)·갈기 노동 야학·용정 노동 야학(龍井勞動夜學) 등의 노동 야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0년대 농민 대중들에 의해 일제 식민지 농업 정책과 식민지 지주제에 저항하는 농민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 총독부 조사에 따르면 1934년에 6건, 1935년에는 50건, 1936년에는 35건의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고 일제 식민지 농정에 반대하는 수리 조합 반대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국민 총동원령이 실시되면서 인적·물적 수탈이 극심해졌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 신청에 2005년 3월 8일 현재 180건이 접수되었고, 유형별로 보면 노무자가 138명으로 가장 많았고 군인 29명, 군속 13명 등으로 나타났다.
현대
광복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로 포천 지역이 남북으로 갈리는 아픔을 겪었다. 창수면·관인면·영중면·영북면·일동면 등이 공산 치하에 들어갔고, 5년 동안 북한은 양민 수탈과 애국 인사들의 체포·고문·학살 등의 소름 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다. 미군정에서는 남북 교류장으로 포천이 주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이듬해 미군 철수 후 북한 도발이 빈번해 1949년 6월 12일 약 200명의 병력이 현 포천시 일동면 사직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포천 지역은 서울의 관문과도 같은 중요한 지역으로서 피아간에 주력이 대결하였던 지역이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의 포천 지역 공격 병력은 제3사단 1만 2000명, 제4사단 1만 2000명, 제105기갑여단 4,000명으로 합계 2만 8000명에 달하여 북한의 전체 화력의 1/3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반면 국군은 의정부에 지휘소를 둔 제7사단의 제1, 제9 양 연대가 사직리~초성리~적성 간 47㎞에 달하는 지역을 경비하고 있었다. 실제 포천 지역에 배치된 국군은 제9연대 제2대대만이 본부를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두고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전쟁 개시 7시간 만에 포천은 점령되었다. 북한군 점령하의 포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소리봉(蘇利峰) 부대, 독수리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의 정보를 차단하거나 교통을 혼란시키면서 적 후방을 교란시켜 적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포천군청은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9·28 수복으로 10월 14일 복귀하였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침공으로 다시 철수하였다가 6월 24일 복귀하였다. 그러나 청사가 전소되어 포천면 어룡리에 임시 청사를 두었다가, 11월 14일 현 군청 소재지인 포천읍 신읍리로 이전하였다. 당시 포천군의 행정 구역은 10개 면 67개리로 구획되었다. 이후 38선 이북 지역의 5개 면을 탈환 수복하여 행정권을 이양할 때까지 군정 하에 북포천이라 하여 북포천 군수를 두었다가, 1954년 11월 17일 수복 지구 행정권 이양으로 12개 면 88개 리로 구획되었다. 6·25 전쟁 이후 개성 지방의 기후와 토질이 거의 같은 포천과 연천 지방에는 남하한 개성 인삼 농사인들에 의해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현재 개성 인삼의 최대 생산지가 되었다. 포천 지역에서는 2005년부터 개성 인삼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963년 포천군 내촌면에 화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에는 포천면 탑동리가 양주군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에는 포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연천군 관인면 일원이 군에 편입되었고, 청산면의 삼정·갈월·금동·덕둔 등 4개 리가 신북면에, 초성·대전·장탄·궁평·백의 등 5개 리가 연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청산면이 연천군 관할로 되었다. 또 같은 해에 화현출장소가 화현면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포천시 관인면 부곡리가 연천군 연천읍에 편입되었고, 1996년에는 소흘읍으로 승격되었다. 2003년 대통령령 6928호에 따라 도농 복합 시로 승격되었고, 포천읍은 포천동과 선단동으로 분리되면서 행정 구역은 14개 읍, 면, 동[1읍, 11면, 2동]으로 구성되었다.
포천의 역사 문화적 특징
포천 지역은 한반도 중부 내륙에 위치하고, 남북 이동의 경유지로서 주변 지역의 문화 유입과 전파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새로운 문화와 사상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특징을 보이는 반면, 포천만의 독특한 생활 모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지역 내에서 산지가 많은 영중·관인 등 북부 지방이 상대적으로 산지가 적은 포천·소흘 등 남부 지방에 비해 땅에 대한 귀소성과 전통에 대한 계승 의식이 완고한 편이다. 또한 북부 지방은 광복 후 남북 분단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였던 역사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지정학적인 이점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기반이 열악하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지 못하였지만, 자연에 순응하는 소박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양반과 서민 문화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봉건 정부와 일제에 저항하였던 포천 지역민들의 저항 의식은 궁예의 미륵 신앙과 조선 시대 선비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륵 신앙은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고, 청렴과 절의를 벼슬보다 우선하였던 선비들의 영향으로 저항 의식이 확대되어 갔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