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3304
Bob Marley & The Wailers
Bob Marley & The Wailers의 'No Woman, No Cry' 입니다.
1974년 앨범 [Natty Dread]와 1975년 Live 앨범 [Live!]에 수록된 곡 입니다. 앨범 [Natty Dread]에 수록된 곡은 3분 46초의 곡으로(4번째 영상입니다) 앨범은 빌보드 팝 앨범챠트 92위, R&B 챠트 44위, 영국 앨범챠트 43위에 랭크되었고, 앨범 [Live!]에 수록된 곡은 7분 7초의 곡으로 이 곡이 싱글로 발매된 버젼입니다. 앨범은 빌보드 팝 앨범챠트 90위, R&B 챠트 47위, 영국 챠트 38위에 랭크되었죠...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싱글챠트 8위에 올랐습니다. Rolling Stone誌 선정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37위에 랭크되었습니다. 밥 말리가 자신의 아내를 위해 쓴 곡이라고 한 이 곡은, 사실 자메이카 국민들이 지난날의 슬픔을 딛고 행복해지기 바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Nina Simone, Londonbeat, Joe Dassin, Joan Baez, The Fugges, Boney M., Jimmy Cliff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커버한 Raggae의 진수 입니다. 아래에 Jimmy Cliff, Boney M., Joan Baez, The Fugges 버젼도 올렸습니다.
Album [Natty Dread] (1974.10)
Bob Marley - lead vocals, rhythm guitar Al Anderson - lead guitar
Live Album [Live!] (1975.12)
Bob Marley – lead vocals, rhythm guitar Carlton Barrett – drums Aston "Family Man" Barrett – bass Tyrone Downie – keyboards Al Anderson – lead guitar Alvin "Seeco" Patterson – percussion the "I Threes": (Rita Marley, Judy Mowatt, Marcia Griffiths) – backing vocal
Bob Marley(Robert Nesta Marley)는 자메이카의 세인트앤(St. Ann)에서 태어났다. 킹스턴의 빈민가에서 성장했으며 학교를 다닌 후 용접을 배웠다. 1960년대 초 Peter Tosh, Bunny Livingston(Bunny Wailer) 등의 친구와 함께 Wailers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연주하면서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메이카의 가수 겸 작곡가인 Joe Higgs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프로듀서였던 Coxsone Dodd와 함께 만든 싱글 'Simmer Down'이 수록된 앨범이 1964년 자메이카의 인기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후 1969∼1971년에는 프로듀서 Lee Perry와 함께 자메이카에서 성공을 거듭했으며, 1973년 Island Records와 계약하여 'Catch a Fire'로 유럽, 아프리카, 카리브해(海)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1974년에는 Eric Clapton이 그들의 노래 'I Shot the Sheriff'를 불렀고 순회공연을 하면서 영국과 미국에서 Reggae Music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발표한 앨범들로는 [Natty Dread](1975), [Rastaman Vibration](1976), [Exodus](1977), [Kaya](1978), [Survival](1979), [Uprising](1980) 등이 있다.
Soul, Doo-Wop, Ska(초기의 레게) 등 미국과 자메이카의 대중 음악 양식을 혼합시킨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 냈으며, 평화, 사랑, 평등, 희망, 그리고 흑인의 힘과 통일을 노래함 으로써 자메이카 흑인의 아프리카 복귀를 주장하던 Rastafarianism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환기시켰다.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밥 말리의 유년 시절은 부재와 결핍의 연속이었다. 그는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한없이 가난했다. 14살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용접공의 길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밥 말리는 역경 속에서도 자신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뮤지션이 되기를 꿈꿨다. 밥 말리는 틈만 나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1962년 2월. 17살의 밥 말리는 프로듀서 Leslie Kong의 도움으로 열악한 스튜디오에서 네 개의 곡 'Judge Not (Unless you Judge Yourself)', 'One Cup of Coffee', 'Do You Still Love Me?', 'Terror'를 녹음했다.
자메이카는 1962년 8월 6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자메이카 국민들에게도 조금씩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밥 말리도 본격적으로 음악의 여정에 오른다. 1963년 밥 말리는 Peter Tosh, Bunny Wailer와 함께 3인조 그룹 Wailing Wailers를 결성했다. 당시 프로듀서였던 Coxone Dodd가 이들의 이름을 웨일러스로 바꿀 것을 권유하자, 밥 말리와 친구들은 The Wailers라는 이름으로 곡 'Simmer Down'을 발표했다. 이 노래는 자메이카에서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더 웨일러스의 존재를 알렸다.
밑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들은 데뷔 앨범 [The Wailing Wailers](1965)을 시작으로 [Soul Rebels](1970), [Soul Revolution](1971)까지 Reggae Soul 3부작을 완성했다. 이 시기 활동들은 자메이카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세계 팝 음반 시장에서 레게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단초가 되었다. 1973년 밥 말리와 친구들은 세계적인 음반 회사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한다. 아일랜드 레코드와의 계약은 국제적인 음반 유통망을 통해 레게 음악을 좀 더 적극적으로 프로모션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1973년 4월, 앨범 [Catch A Fire](1973)를 발표한 더 웨일러스는 앨범 발매 이후 진행된 영국 투어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국제적 명성을 발화시켰다. 같은 해 10월 이들은 앨범 [Burnin'](1973)을 연달아 발매하는데, 이 앨범에 수록된 곡 'I Shot The Sheriff'를 Eric Clapton이 연주해 자신의 앨범 [461 Ocean Boulevard]에 실어, 1974년 9월 7일자 빌보드 HOT 100 정상에 올려놓게 된다. 밥 말리와 레게 음악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앨범 [Catch A Fire]와 [Burnin']의 성공 이후 밥 말리는 1974년에 앨범 [Natty Dread] (1974)를 발표하는데, 이 앨범을 기점으로 밥 말리는 더 웨일러스에서 밴드의 중심이 되고, 레게의 중심이 되었다. 밴드 이름도 Bob Marley & The Wailers로 바꾸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밥 말리의 오랜 친구였던 피터 토시와 버니 리빙스톤은 음악의 중심축이 밥 말리로 옮겨가는 데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각자의 길을 떠났다.
밥 말리는 기타에 Junior Marvin과 Al Anderson, 베이스와 드럼에 Carlton Barrett과 Aston Barrett 형제를 영입해 새로운 라인업을 구축했다. 앨범 [Natty Dread]는 레게로 일군 혁명이었다. 이 앨범에는 화제의 곡 'No Woman, No Cry'가 실려있다. 밥 말리가 자신의 아내를 위해 쓴 노래라고 한 이 곡은, 사실 자메이카 국민들이 지난날의 슬픔을 딛고 행복해지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Joan Baez 같은 포크 뮤지션들은 이 곡을 리메이크하여, 그 의미를 더했다. 밥 말리는 앨범에서 급진적이고 정치적 성격이 강한 곡 'Rebel Music', 'Natty Dread', 'Revolution'을 통해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기도 했다.
앨범 [Natty Dread] 이후에 발표된 [Rastman Vibration](1976), [Exodus](1977)에서 밥 말리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인도주의와 평화, 사랑의 가치를 레게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는 레게를 통해 사회, 문화, 종교적 의미와 이상을 표출하였고, 이는 전 세계 팝 음악계를 감동시켰다.
밥 말리는 1980년 마지막 정규 앨범 [Uprising]을 발매하고, 1981년 5월 11일 뇌종양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빈민가의 부랑자이자 용접공 출신의 남자는 삶의 결핍과 부재 그리고,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밥 말리의 생애를 조명한 영화 [Marley](2012년)에는 미국과 자메이카의 대중음악 양식을 혼합하여 레게 음악의 독창성을 완성한 뮤지션 밥 말리와 레게로 자유, 평화, 사랑을 노래한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 밥 말리가 선연히 살아있다.
"음악으로 혁명을 일으킬 순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칠 순 있다. 그렇기에 레게는 단순히 신나는 음악이 아니다." - Bob Marley
[Albums]
[Live albums]
Studio albums 13, Live albums 5, Compilation albums 38, Video albums 2
Reggae는 자메이카 영어로 "최근 유행하는"이란 뜻이다. 1960년대 초반 기타를 2/4, 4/4박자로 뜯어내듯 연주하는 Ska나 Rocksteady에서 발전된 레게 음악은 자메이카의 토속 음악과 블루스, 재즈, 리듬 앤 블루스 등과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 장르다. 레게 음악의 형성에서 자메이카 흑인들의 한과 라스타파리아니즘의 결합이 중요한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이는 레게 음악이 흥겨움과 우울함, 몽환과 각성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로 이끄는 데 일조하게 된다.
Jimmy Cliff, Bob Marley, Peter Tosh, Bunny Wailer, Prince Buster, Ken Boothe 등은 레게 음악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자메이카 민중의,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들의,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슬픔과 저항정신의 집합체였던 레게가 미국으로 흘러들어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60년 말-70년 초로 그 중심에 ‘밥 말리’가 있었다.
No Woman, No Cry
So, woman, no cry;
[Jimmy Cliff Ver.]
[Boney M. Ver.]
[Joan Baez Ver.]
[The Fugees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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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짱!!!!!
오래만에 듣네요 ^^
항상 새롭고 감동적인 선곡 고맙습니다ㅋ
밥 말리 스토리.. 마음을 울리는군요. 이게 어떤 노래인가를 알게되니 예전에 암것도 모르고 듣던 느낌과 달라지네요...
ㅜㅜ
멋있네요
밥말리가 국내에 제대로 안알려져서 아까워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