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계묘년 첫 사찰순례지는 경주 기림사, 분황사, 황룡사역사문화관입니다. 기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대사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대사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신라 신문왕은 대왕암(大王巖)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스님은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스님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다.
그 뒤 1878년(고종 15)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慧訓)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 31본산시대에는 월성군 일대를 관장하는 교구본사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오백나한전과 정광여래사리각(正光如來舍利閣)인 삼층전(三層殿)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應眞殿),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 삼성각· 관음전· 산신각· 주지실· 종무소· 요사채, 산문(山門)· 창고 등이 있으며, 특히 대방(大房)은 2동이 모두 중후하다. 그 밖에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들 당우 중에서 대적광전은 절의 본당으로 내부에는 전단토상(栴檀土像)의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중원(中原)의 장인이 조성하였다 하며, 불상 조성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은 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만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되었다.
또, 약사전에는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탱화는 기림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보여 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하여 다시 그렸다. 이 밖에도 응진전 안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1965년 보물로 지정된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과 목탑지(木塔址)·석조치미(石造치尾)·문적(文籍)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석조치미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화문(花紋) 장식이 있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문적 중에는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부호장생생가(府戶長生生家)』 등이 있다.
이들은 경상도와 경주의 행정에 관한 것과 행정관에 대한 인적사항, 신라 이후의 지방제도의 변혁 등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들이다. 또, 이 절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필도 보관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석비 모양의 나무에 사적을 기록한 목비가 전한다.
이 절에는 원래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중 장군수(將軍水)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큰 방 옆과 아랫마을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절에는 또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한방서에도 그 기록이 있다.
분황사는 경북 경주시에 있으며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이 서기634년(선덕여왕 3)에 경주에 세운 사찰이다. 이 사찰의 석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하다. 자장율사과 원효대사가 이 절에 머물렀다.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원효대사의 화쟁국사비가 세워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화를 당하고 광해군 때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신라에는 예로 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었던 7곳의 가람터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용궁 남쪽의 분황사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한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향기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나는 황제란 절이란 뜻이다. 인평으로 연호로 바꾼 그 해 창건된 분황사는 신라 최초로 여왕에 올라선 것을 내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중국에서 대장경 1부를 가지고 돌아 온 자장율사는 분황사에 주석하였다. 분황의 진나(陳那, 480~540년경)로 알려진 원효대사도 일찍이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소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자 붓을 놓기도 하였다. 분황사에는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를 부수어 만든 소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설총이 예배를 드리자 돌아섰다고 하는데 고려 당시에도 돌아선 채로 있었다 한다. 문무왕 때 분황사 옆 마을에 살고 있던 엄장스님이 아미타신앙을 닦았다. 광덕은 처와 동거를 하였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는데 처는 분황사의 여종으로 관음보살의 19응신의 하나로 광덕과 살았다. 755년(경덕왕 14)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였는데, 무게는 30만 6700근이요, 장인은 강고(强古) 내말(乃末)이다. 같은 왕 때 한기리의 여인 희명(希明)의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눈이 멀어 이 절의 천수대비(千手大悲) 에게 기도하였더니 눈이 떠졌다. 원성왕 때 분황사 우물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있었는데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을 시켜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데리고 가려고 했던 적도 있다. 진성여왕 때 분황사 옆에 살던 가난한 여인이 품을 팔아 어머니를 부양하였다. 고려 숙종 때 원효대사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 때 화쟁국사비를 분황사에 건립하였다. 현재 비신은 멸실되고 비부만 잔존한다. 일제강점기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 내부에서 발견된 사리함 속의 출토유물 가운데 상평오수(常平五銖), 숭녕중보(崇寧重寶) 등 발행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중국 주화가 나왔다. 숭녕 연간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분황사 석탑을 수리했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보광전 수리공사시 해체한 종도리에서 확인된 보광전 중창과 중수 내용을 기록한 상량문(上梁文)에 의하면, 분황사가 지금처럼 사역이 축소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약사여래도 화를 당했다. 1608년(광해군 원년) 보광전(普光殿) 등의 전각을 중창하고, 5,360근의 청동으로 약사여래를 주조·봉안하였다. 1680년(숙종 6)에는 허물어져 가던 보광전을 중수하였으며, 상량문은 이때 작성하였던 것이다. 분황사는 창건 이후 최소 3차례 이상 가람배치 변천과정을 거쳐 지금은 3차 중건 금당인 보광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건 가람은 석탑을 남쪽 중앙에 배치하고 그 북쪽에 남향의 삼금당을 ‘ 품(品)’자형으로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다. 분황사 탑은 현재 한국에서 창건 연대가 알려진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탑의 사방에는 물개 또는 사자로 추정되는 동물석상이 세워져 있다. 1차 중건 가람은 창건 삼금당을 모두 폐기하고 창건 중금당지의 규모를 확장하여 1동의 대형 금당으로 통합한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로 바뀌었다. 더불어 석탑 남쪽에는 중문을 건립하고 중문 좌우로는 남회랑을 건립하였다. 금당, 석탑, 중문은 모두 남북 중심선을 공유하고 있으며, 중문과 남회랑은 동서 중심선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2차 중건 금당은 1차 중건 금당에 비하여 그 면적이 1/5로 축소되고 건물의 방향도 이전까지의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바뀌었다. 3차 중건 금당에 해당하는 현존 보광전은 2차 중건 금당처럼 서향으로 중건되었으며, 그 면적은 2차 중건 금당 대비 1/3로 다시 축소되었다. 이처럼 같은 위치에서 반복된 여러 번의 중복으로 인하여 유구의 결실이 매우 심한 편이며, 대부분 개축되는 후대 금당에 의하여 직전 금당의 선행 유구가 파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 중금당 유구는 동일 위치에서 면적이 확장된 일차중건 금당에 의하여 하층 기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결실되었으며, 2차 중건 금당이 세워졌던 1차 중건 금당지 동반부는 다시 대부분의 유구가 결실되었다. 그리고 현존 보광전이 위치하고 있는 2차 중건 금당지 중심부에 대한 유구조사는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안에는 실재 목탑의 1/10크기로 축소해서 만들어 둔 모형이 있다. 줄였다 하더라도 거의 2층 정도되는 높이에 그 위엄이 느껴진다. 아래쪽에는 귀여운 모평도 넣어둬서 황룡사 9층 목탑의 크기가 더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황룡사지터에 자리잡은 이 모형은 연구부터 제작까지 무려 8년의 시간이 걸였다고 하니 작은 부분까지 하나하나 그때의 모습으로 고증하려고 노력했다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안에서도 밖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서 사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황룡사 9층목탑은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에 서 있던 목탑이다. 삼국 중에서 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이지만 결국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열세를 극복하고 대역전극의 서사를 지닌 신라인데도 사람들은 신라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아쉬움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시 그 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고구려 때 갖고 있던 그 광활한 영토를 잃어버린 건 왠지 신라 탓인 것만 같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에 대한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이룬 신라, 그 꿈을 이뤄낸 선덕여왕의 집념. 그 위대한 여정이 황룡사 9층 목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려시대 몽골 침입 때 불에 타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황룡사지 터의 ‘심초석’들은 엄청났던 황룡사 9층 목탑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가운데 심초석을 중심으로 해서 64개의 거대한 받침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 저 받침석돌 하나하나에 거대한 기둥이 올라갔다
심초석은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돌이다. 가로 4미터, 세로 3미터. 무게는 30톤에 달한다. 이 위로 황룡사 9층 목탑이 우뚝 솟았던 것이니 얼마나 컸을까. 높이는 80미터이고 지금의 아파트 30층 높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이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세우는데 사용한 못의 숫자가 0이라는 사실이다. 나무와 나무를 일일이 다 끼워 맞춰 올렸다.
(정기총회 개최공고: 1. 8일, 회향법회 이후 차량에서)
- 순례일시 : 2023. 1. 8(일) 07:00 대전세무서 출발
- 순례장소 : 기림사, 분황사, 황룡사역사문화관
- 순례코스 : 대전(07:00) - 기림사 사시예불(10:30~11:30) - 점심공양(11:30~12:30) - 분황사(13:00~14:00) - 황룡사역사문화관
(14:30~15:30) - 대전(18:30) - 저녁공양(산애들)
* 점심공양 : 기림사
- 순 례 비 : 40,000원
- 입금계좌 : 농협 302-0925-3251-11(이옥자)
자비행사찰순례단 회장 김선기 합장
기림사 : 경주시 문무대왕면 호암리 417(기림로 437-17). 054-744-2292
/ (팩스) 054-744-2269
분황사 : 경주시 구황동 312(분황로 94-11) 054-742-9922
/ (팩스) 054-771-9850
황룡사역사문화관 : 경주시 구황동 786-1(임해로 64-19) 054-777-6862
/ 입장료 3,000원